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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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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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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 (El Greco, 스페인어 발음: [el ˈɡɾeko], "그리스인" 이라는 뜻; 1541년 10월 1일  1614년 4월 7일), 본명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그리스어: Δομήνικ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 IPA: [ðoˈminikos θeotoˈkopulos])[1]스페인 르네상스 시대의 그리스 출신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엘 그레코는 별명[a]이었고, 그는 보통 자신의 그림에 본명을 그리스어 문자로 서명했으며, 종종 "크레타인"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단어인 Κρής (Krḗs)를 덧붙였다.

엘 그레코는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이자 후기 비잔틴 미술의 중심지였던 칸디아 왕국 (현대 크레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른 그리스 예술가들처럼 26세에 베네치아로 가기 전까지 크레타 전통 안에서 훈련을 받았다.[4] 1570년, 그는 로마로 이주하여 작업실을 열고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엘 그레코는 틴토레토티치아노 베첼리오를 비롯한 당시의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로부터 매너리즘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요소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스타일을 풍부하게 했다. 1577년, 그는 톨레도로 이주하여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며 작업했다.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는 여러 주요 의뢰를 받아 톨레도 풍경다섯째 봉인의 개봉과 같이 널리 잘 알려진 그림들을 제작했다.

엘 그레코의 극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은 동시대인들에게 의아함을 불러일으켰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엘 그레코는 표현주의입체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그의 인물과 작품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니코스 카잔차키스와 같은 시인과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엘 그레코를 어떤 전통적인 학파에도 속하지 않는 매우 개성적인 예술가로 평가한다.[2] 그는 비잔틴 전통과 서양화의 전통을 결합한 비정상적으로 길고 늘어진 인물들과 종종 환상적인 안료를 사용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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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초기 생애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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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안식 (1567년 이전, 템페라와 금박 패널, 61.4 × 45 cm, 시로스섬 헤르무폴리스의 성모 안식 대성당)은 예술가의 크레타 시대 말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그림은 후기 비잔틴 양식과 이탈리아 매너리즘 양식 및 도상학 요소를 결합하고 있다.

1541년에 크레타포델레 마을 또는 칸디아(칸닥스의 베네치아식 이름. 현재의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난 엘 그레코는[b] 부유한 도시 가문 출신으로, 1526년에서 1528년 사이에 가톨릭 베네치아인에 대한 봉기 이후 하니아에서 칸디아로 쫓겨났을 가능성이 높다.[9] 엘 그레코의 아버지 게오르기오스 테오토코풀로스(Γεώργι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 d. 1556)는 상인이자 세금 징수원이었다. 그의 어머니나 첫 아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리스인이었다는 점만 알려져 있다.[10] 그의 두 번째 아내는 스페인인이었다.[11] 엘 그레코의 형 마누소스 테오토코풀로스(1531~1604)는 부유한 상인으로, 생애의 마지막 몇 년(1603~1604)에는 엘 그레코의 톨레도 집에서 보냈다.[11]

엘 그레코는 이콘 화가로서 크레타 화파(후기 비잔틴 미술의 선도적인 중심지)에서 초기 훈련을 받았다. 그림 외에도 그는 아마 고대 그리스서양고전학과 라틴 고전도 공부했을 것이다. 그는 죽을 때 주석이 달린 조르조 바사리 책과 그리스어 성경을 포함한 130권의 "작업 도서관"을 남겼다.[12] 칸디아는 동양과 서양 문화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예술 활동의 중심지였으며, 16세기에는 약 200명의 화가들이 활동했고, 이탈리아 모델을 기반으로 화가 길드을 조직했다.[9] 1563년, 22세의 엘 그레코는 한 문서에서 "마스터"("maestro Domenigo")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가 이 길드의 마스터였고 자신의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13] 3년 후, 1566년 6월, 그는 한 계약의 증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그리스어μαΐστρος Μένεγ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 σγουράφος (maḯstros Ménegos Theotokópoulos sgouráfos; "마스터 메네고스 테오토코풀로스, 화가")라고 서명했다.[c]

대부분의 학자들은 테오토코풀로스 "가족이 거의 확실히 동방 정교회 신자였다"고 믿지만,[16] 일부 가톨릭 자료들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톨릭 신자였다고 주장한다.[d] 많은 비잔틴 학자들이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가톨릭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처럼, 일부 학자들은 엘 그레코가 스페인에 도착한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수 있으며, 스페인에서는 가톨릭 신자로 활동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스페인에서 그는 유언장에 자신을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묘사했다. 1960년대 초부터 니콜라오스 파나요타키스, 판델리스 프레벨라키스, 마리아 콘스탄투다키와 같은 학자들이 수행한 광범위한 기록 연구에 따르면, 엘 그레코의 가족과 조상들이 그리스 정교회 신자였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즉, 그의 삼촌 중 한 명은 정교회 사제였고, 크레타의 가톨릭 세례 기록에는 엘 그레코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19] 프레벨라키스는 더 나아가 엘 그레코가 실제로 로마 가톨릭 신자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20]

그의 초기 생애에 중요한 것은 엘 그레코가 크레타에 있을 때, 아마 1567년 이전에 성모 안식을 그렸다는 점이다. 모데나 삼면화, <성 루가가 성모자와 아기를 그림>, 그리고 동방 박사의 경배 등, '도미니코스'라는 서명이 있는 다른 세 작품도 엘 그레코에게 귀속된다.[21]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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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박사의 경배 (1565–1567, 56 × 62 cm, 아테네 베나키 박물관). 엘 그레코("Χείρ Δομήνιχου", 도미니코스의 손으로 제작됨)가 서명한 이 이콘은 칸디아에서 옛 흉갑에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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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박사의 경배 (엘 그레코, 1568), 1568, 멕시코시티 소우마야 미술관

크레타는 1211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젊은 엘 그레코가 베네치아로 이동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2] 정확한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엘 그레코가 1567년경 베네치아로 갔다는 데 동의한다.[e] 엘 그레코가 이탈리아에 얼마나 체류했는지에 관한 정보는 제한적이다. 그는 1570년까지 베네치아에서 살았으며, 그의 훨씬 나이 많은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세밀화가인 줄리오 클로비오의 편지에 따르면, 당시 80대였지만 여전히 활기 넘치던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제자"였다. 그가 티치아노의 대규모 스튜디오에서 일했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클로비오는 엘 그레코를 "회화에 있어 희귀한 재능"이라고 평했다.[25]

1570년, 엘 그레코는 로마로 이주하여, 베네치아에서 수습 기간중 배웠던 기법들이 강하게 드러나는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25] 그가 로마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1575–76년 경) 베네치아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26] 로마에서는 줄리오 클로비오의 추천으로,[27]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이 예술 및 지적 생활의 중심지로 만든 파르네세궁에 손님으로 초청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 학자 풀비오 오르시니를 비롯한 도시의 지식인 엘리트들과 교류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오르시니의 소장품에는 이 예술가의 그림 7점(<시나이산의 풍경>과 <클로비오의 초상화> 등)이 포함되었다.[28]

베네치아로 이주한 다른 크레타 예술가들과 달리, 엘 그레코는 자신의 스타일을 크게 바꾸고 전통적인 종교 주제에 대한 새롭고 특이한 해석을 담아 자신을 차별화하고자 했다.[29] 이탈리아에서 그린 그의 작품들은 그 시대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에 영향을 받았는데, 틴토레토를 연상시키는 민첩하고 길쭉한 인물들과 티치아노 베첼리오를 연상시키는 색채 구성을 보여준다.[2] 그는 또한 베네치아 화가들로부터 대기광이 생생한 풍경 속에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을 구성하는 방법을 배웠다. 어느 여름, 엘 그레코가 로마에 있을 때 클로비오가 그를 방문했다고 전한다. 엘 그레코는 어두운 방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낮의 빛이 "내면의 빛"을 방해하며, 어둠이 사고에 더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30] 로마에서의 체류 결과, 그의 작품은 강렬한 원근법 소실점이나 반복적으로 비틀고 돌리는 인물들의 이상한 자세, 격정적인 몸짓과 같은 요소들로 풍부해졌는데, 이 모든 것은 매너리즘의 요소들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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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오 클로비오의 초상화>, 엘 그레코의 현존하는 가장 초기 초상화 (1571년, 유화, 58 × 86 cm, 카포디몬테 미술관, 나폴리). 젊은 크레타 예술가의 로마 친구이자 후원자인 클로비오의 초상화에서 초상 화가로서의 엘 그레코의 재능을 볼 수 있다.

엘 그레코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파엘로 산치오는 이미 사망했지만, 그들의 영향은 여전히 지대했으며, 젊은 화가들에게는 다소 압도적이었다. 엘 그레코는 로마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예술적 견해, 사상, 스타일을 고수하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로 결심했다.[31] 그는 코레조파르미자니노를 특별히 칭찬했지만,[32] 시스티나 경당의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f] 그는 교황 비오 5세에게 새롭고 엄격한 가톨릭 사상에 따라 전체 작품을 다시 그릴 것을 제안했다.[34] 나중에 미켈란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엘 그레코는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림을 그릴 줄 몰랐다"고 대답했다.[35]

그러나 이러한 엘 그레코의 비판에도 불구하고,[36] 그의 <신성 동맹의 우화>와 같은 후기 엘 그레코 작품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37] 엘 그레코는 그의 작품 <성전 정화> 속에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클로비오와 라파엘로의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엘 그레코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을 뿐만 아니라 이 거장들과 경쟁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석에서 알 수 있듯이, 엘 그레코는 티치아노,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모방해야 할 모델로 보았다.[34] 17세기의 연대기에서 줄리오 만치니는 엘 그레코를 미켈란젤로의 가르침을 여러 방식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한 화가들 중 한 명으로 포함시켰다.[38]

그의 파격적인 예술적 신념(미켈란젤로의 기술에 대한 비판 등)과 성격 때문에 엘 그레코는 로마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건축가이자 작가인 피로 리고리오는 그를 "어리석은 외국인"이라고 불렀고, 새로 발견된 기록 자료에 따르면 파르네세는 그를 궁전에서 떠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38] 1572년 7월 6일, 엘 그레코는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평했다. 몇 달 후, 1572년 9월 18일, 그는 로마의 성 루가 길드미니어처 화가로서 회비를 지불했다.[39] 그 해 말, 엘 그레코는 자신의 작업실을 열고 화가 "라탄지오 보나스트리 데 루치냐노"와 "프란시스코 프레보스테"를 조수로 고용했다.[38]

스페인

톨레도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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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1577–1579, 캔버스 유화, 401 × 228 cm, 시카고 미술관)은 엘 그레코가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의뢰받은 산토 도밍고 엘 안티고 수도원을 위해 완성한 아홉 점의 그림 중 하나이다.

1577년, 엘 그레코는 마드리드를 거쳐 톨레도로 이주하여 그의 성숙기 작품들을 제작했다.[40] 당시 톨레도는 스페인의 종교적 수도이자 인구가 많은 도시로,[g] "영광스러운 과거, 번영하는 현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지니고 있었다.[42] 로마에서 엘 그레코는 일부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일부 미술 평론가들은 그를 적대하기도 했다.[43] 1570년대에 거대한 엘에스코리알 수도원-궁전은 여전히 건설 중이었고, 펠리페 2세는 이 건물을 장식할 많은 대형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예술가들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티치아노는 죽었고, 틴토레토, 파올로 베로네세, 안톤 모어는 모두 스페인으로 오는 것을 거부했다. 펠리페는 왕이 'gravedad y decoro'(진지함과 품위)를 승인한 후안 페르난데스 데 나바레테의 재능에 의존해야 했다. 엘 그레코가 톨레도로 이주한 1577년은 1579년에 사망하는 페르난데스를 대체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시기였다.[44]

클로비오와 오르시니를 통해 엘 그레코는 스페인 인문학자이자 펠리페의 대리인인 베니토 아리아스 몬타노, 성직자인 페드로 차콘, 그리고 톨레도 대성당 학장이었던 디에고 데 카스티야의 아들 루이스 데 카스티야를 만났다.[41] 카스티야와의 우정 덕분에, 그는 톨레도에서의 첫 대규모 의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577년 7월에 톨레도에 도착하여 톨레도의 산토 도밍고 엘 안티고 수도원을 장식할 그림과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45] 그는 1579년 9월까지 산토 도밍고를 위해 <성삼위일체>와 <성모 승천>을 포함한 9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이 작품들로 엘 그레코는 톨레도에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39]

엘 그레코는 톨레도에 영구히 정착할 계획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펠리페의 호의를 받아 궁정에서 명성을 떨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46] 실제로 그는 군주로부터 <신성 동맹의 우화>와 성 마우로의 순교라는 두 가지 중요한 의뢰를 받아냈다. 그러나 왕은 이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아, 성 마우로 제단화를 의도했던 예배당이 아닌 성가대석에 두었다. 그는 엘 그레코에게 더 이상 의뢰를 하지 않았다.[47] 왕이 만족하지 못한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은 펠리페가 종교적인 장면에 살아있는 인물을 포함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말했고,[47] 다른 학자들은 엘 그레코의 작품이 반종교개혁의 기본 규칙, 즉 스타일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규칙을 위반했다고 보았다.[48] 펠리페는 자신의 예술적 의뢰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취향이 매우 확고했다. 오랫동안 찾고 있던 벤베누토 첼리니의 조각 십자가상이 도착했을 때도 만족하지 않아, 마찬가지로 덜 중요한 장소로 옮겨졌다. 펠리페의 다음 시도인 페데리코 추카로와의 작업은 훨씬 더 실패했다.[49] 어쨌든 펠리페의 불만은 엘 그레코가 가졌던 왕실 후원에 대한 모든 희망을 끝냈다.[39]

성숙기 작품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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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1588, 유화, 480 × 360 cm, 톨레도 산토 토메 교회), 현재 엘 그레코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인기 있는 지역 전설을 묘사한다. 이례적으로 큰 그림으로, 천상과 지상이라는 두 영역으로 명확하게 나뉘며, 구성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왕의 호의를 얻지 못한 엘 그레코는 1577년 위대한 화가로 환영받았던 톨레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50] 17세기 스페인 설교자이자 시인인 오르텐시오 펠릭스 파라비시노에 따르면, "크레타는 그에게 생명과 화가의 기술을 주었고, 톨레도는 더 나은 고향을 주었으며, 그곳에서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시작했다."[51] 1585년, 그는 이탈리아 화가 프란시스코 프레보스테를 조수로 고용하여 그림뿐만 아니라 제단 틀과 조각상도 제작할 수 있는 작업실을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52] 1586년 3월 12일, 그는 현재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의뢰를 받았다.[53]

1597년부터 1607년까지는 엘 그레코가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여러 주요 의뢰를 받았으며, 그의 작업실은 다양한 종교 기관을 위한 회화 및 조각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 시기의 주요 의뢰로는 톨레도의 산 호세 예배당을 위한 세 개의 제단화(1597–1599), 마드리드의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수도원인 도냐 마리아 데 아라곤 대학을 위한 세 점의 그림(1596–1600), 그리고 일례스카스의 카리다드 병원(자선 병원)의 의뢰(주요 제단, 네 개의 측면 제단, 그리고 성 일데폰소 그림(1603–1605)) 등이 있었다.[2] 시 당국이 작성한 성모 원죄 없는 잉태 (1607–1613) 의뢰 기록에는 엘 그레코를 "이 왕국 안팎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묘사하고 있다.[54]

1607년과 1608년 사이에 엘 그레코는 일례스카스 자선 병원 당국과 자신의 작품(회화, 조각, 건축 포함)에 대한 대금 지불 문제로 장기적인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h] 이외의 다른 법적 분쟁들도 그가 생애 말기에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에 일조했다.[58] 1608년, 그는 톨레도 세례자 요한 병원에서 마지막 주요 의뢰를 받았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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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옷을 벗김(El Espolio) (1577–1579, 캔버스 유화, 285 × 173 cm, 톨레도 톨레도 대성당의 성구실)은 엘 그레코의 가장 유명한 제단화 중 하나이다. 엘 그레코의 제단화는 역동적인 구성과 놀라운 혁신으로 유명하다.

엘 그레코는 톨레도를 자신의 고향으로 삼았다. 현존하는 계약서에 따르면 그는 1585년부터 빌례나 후작 소유의 아파트 3채와 방 24개로 이루어진 복합 건물의 세입자로 기록되어 있다.[7] 그는 이 아파트(작업실로도 사용되었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연구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상당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때로는 식사 중에 음악가들을 고용하여 연주하게 했다.

그가 스페인인 여성 동반자 헤로니마 데 라스 쿠에바스와 함께 살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결혼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아들 호르헤 마누엘의 어머니였는데, 1578년에 태어난 호르헤 마누엘 또한 화가가 되어 아버지를 도왔고,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작업실을 물려받아 아버지의 작품 스타일을 따른 그림을 그렸다.[i]

엘 그레코는 타베라 병원의 의뢰를 수행하던 중, 심각한 병에 걸려 한 달 뒤인 1614년 4월 7일에 사망했다. 죽기 며칠 전인 3월 31일, 그는 아들에게 유언장 작성할 권리를 넘겨주었다. 화가의 친구인 두 명의 그리스인이 이 유언장의 증인이 되었다 (엘 그레코는 그의 그리스적 기원을 결코 잊지 않았다).[59] 그는 73세의 나이로 산토 도밍고 엘 안티고 교회에 묻혔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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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요약
관점

기술과 양식

엘 그레코 양식의 근본 원리는 상상력과 직관이 주관적 성격보다 우선한다는 것이었다.[35] 엘 그레코는 원근법이나 비례와 같은 고전주의적 기준을 버렸다. 그는 우아함이 예술의 최고의 목표라고 믿었으며, 가장 복잡한 문제들을 쉽게 해결함으로써만 우아함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35]

엘 그레코는 색채를 회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다루기 어려운 요소로 여겼으며, 색채가 형태보다 우선한다고 선언했다.[35] 1611년에 엘 그레코를 방문했던 화가이자 이론가인 프란시스코 파체코는, 그가 "거친 색채를 혼합하지 않고 큰 얼룩으로 손재주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큰 덩어리를 자연과 같이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다시 칠하고 수정하는 것을 믿었다"고 썼다.[61]

"나는 색채의 모방이 예술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생각한다."

— 엘 그레코, 그의 주석 중 하나에 있는 화가의 기록에서.[62]

미술사학자 막스 드보르자크는 엘 그레코의 예술을 매너리즘반자연주의와 연결시킨 최초의 학자였다.[63] 현대 학자들은 엘 그레코의 이론을 "전형적인 매너리스트적"이라고 특징지으며, 그 원천을 르네상스의 신플라톤주의에서 찾는다.[64] 조나단 브라운은 엘 그레코가 정교한 형태의 예술을 창조했다고 믿는다.[65] 또한 니콜라스 페니에 따르면, "스페인에 도착한 엘 그레코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었는데, 이는 회화의 재현적 야망을 대부분 부정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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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의 풍경 (1596–1600c., 캔버스 유화, 47.75 × 42.75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엘 그레코가 그린 현존하는 두 점의 톨레도 풍경화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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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와 성 프란치스코(1595, 유화, 캔버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의 세부 묘사, 예술가의 그리스어 서명을 보여준다.

성숙기의 작품에서 엘 그레코는 단순한 묘사보다는 극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특징이었다.[2] 그의 그림에서는 강렬한 정신적 감정이 관객에게 직접 전달된다. 파체코에 따르면, 엘 그레코의 동요되고 격렬하며 때로는 부주의해 보이는 예술은, 자유로운 스타일을 얻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에서 비롯되었다.[61] 엘 그레코가 유난히 키가 크고 날씬한 인물과 길쭉한 구성을 선호했던 것은, 그의 표현적 목적과 미학적 원칙 모두에 부합했으며, 특히 제단화를 위한 작품에서,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구성을 더 큰 범위로 확장시키기 위함이었다.[67] 엘 그레코의 성숙기 작품에서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는 더욱 비현실적으로 변한다. 엘 그레코는 원죄 없는 잉태를 그리면서 제단 자체를 1.5 피트(45 cm)를 더 늘려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런 식이어야만 형태가 완벽해지고 줄어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태가 줄어든다는 것은 인물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다." 라고 말했다. 엘 그레코의 성숙기 작품의 중요한 혁신은 형태와 공간의 상호 작용이다. 둘 사이에 상호 관계가 발전하여 그림 전체를 완전히 통합한다. 이러한 상호 작용은 3세기 후에 폴 세잔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에서 다시 나타난다.[67]

엘 그레코의 성숙기 양식의 또 다른 특징은 빛의 사용이다. 조나단 브라운이 지적하듯이, "각 인물은 내부에 자신만의 빛을 지니고 있거나 보이지 않는 근원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68] 엘 그레코의 친필 노트를 해독한 학자 "페르난도 마리아스"와 "아구스틴 부스타만테 가르시아"는 엘 그레코가빛에 부여하는 힘을 기독교 신플라톤주의 사상과 연결시킨다.[69]

현대 학술 연구는 엘 그레코의 성숙기 스타일이 완전한 발전한 것은 톨레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엘 그레코가 주변 환경에 맞춰 자신의 스타일을 조정했음을 강조한다.[70] 해럴드 웨디는 "그리스 혈통으로 이탈리아에서 예술적 준비를 했음에도, 엘 그레코는 스페인의 종교적 환경에 너무나 몰입하여 스페인 신비주의의 가장 활기찬 대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엘 그레코의 성숙기 작품에서 "경건하고 강렬한 분위기가 반종교개혁 시기의 로마 가톨릭 스페인의 종교적 정신을 반영한다"고 믿는다.[2]

엘 그레코는 또한 초상 화가로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특징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격까지 전달하였다.[71] 그의 초상화는 종교화보다 수는 적지만, 종교화만큼의 높은 품질을 보여준다. 웨디(Wethey)는 "이러한 단순한 수단으로 기억에 남을 만한 인물 묘사를 창조함으로써, 자신을 티치아노 베첼리오렘브란트와 함께 최고의 초상화가로 올려놓았다"고 말한다.[2]

비잔틴적 유사성 논쟁

20세기 초부터 학자들은 엘 그레코의 스타일이 비잔틴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논쟁해왔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엘 그레코의 뿌리가 비잔틴 전통에 확고히 박혀 있었으며, 그의 가장 개성적인 특징들이 조상들의 예술에서 직접 유래했다고 주장한 반면,[72] 비잔틴 예술이 엘 그레코의 후기 작품과 전혀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73]

엘 그레코가 크레타 시절에 제작한, 진품이자 서명된 작품인 성모 안식이 발견되고, 1960년대 초에 광범위한 기록을 연구한 결과, 이러한 토론들이 재점화되고 재평가되는데 기여했다. 이 작품은 비록 비잔틴 이콘의 많은 관습을 따르고 있지만, 스타일 측면은 분명히 베네치아의 영향을 보여주며,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묘사한 구도는 동방 정교회의 성모 안식과 가톨릭의 원죄 없는 잉태라는 교리를 결합하고 있다.[74] 20세기 후반 이루어진 엘 그레코에 관한 중요한 학술 연구들은, 그의 비잔틴적 특성을 포함하여 그의 작품에 대한 많은 해석들을 재평가한다.[15] 연구자들은 엘 그레코의 친필 기록, 그의 독특한 스타일, 그리고 그가 그리스 문자로 서명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비잔틴 회화와 그의 예술 사이에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고 본다.[75] 마리나 람브라키-플라카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영향과는 거리가 먼, 그의 고향 칸디아와 지적으로 유사한 중립적인 장소에서 그의 교육의 비잔틴적 요소들이 발현되었으며, 이는 그의 성숙기 작품에 나타나는 새로운 이미지 개념에 촉매 역할을 했다."[76] 이러한 판단을 내리면서,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 시릴 망고엘리자베스 제프리스의 주장("엘 그레코의 작품의 유일한 비잔틴적 요소는 그리스어 서명이었다")을 반박한다.[77] 니코스 하지니콜라우는 1570년 이후의 엘 그레코의 그림은 "비잔틴적이지도, 후기 비잔틴적이지도 않고 서유럽적이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작품들은 이탈리아의 미술 역사에 속하고, 스페인에서 제작한 작품들은 스페인의 미술 역사에 속한다"고 말한다.[78]

영국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데이비스는 엘 그레코 스타일의 뿌리를 그의 그리스-기독교 교육의 지적 원천과 정교회 전례 및 의식의 측면에서 찾으며, 여기에 반종교개혁의 종교적 분위기와 매너리즘의 미학이 그의 개별적인 기술을 활성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그는 플라톤주의와 고대 신플라톤주의, 플로티노스위 디오니시우스의 작품, 교부들의 글과 전례가 엘 그레코의 스타일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79] 이 문제에 대한 학술 논쟁을 요약하면서,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큐레이터 호세 알바레스 로페라는 엘 그레코의 성숙기 작품에서 "비잔틴적 기억"의 존재가 분명하다고 결론짓지만, 그의 비잔틴적 기원에 관한 몇 가지 모호한 문제들은 여전히 추가적인 해명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80]

건축과 조각

엘 그레코는 생전에 건축가이자 조각가로서도 높이 평가 받았다.[81] 그는 주로 완전한 제단 구성을 디자인했는데, 예를 들어 카리다드 병원에서는 화가 뿐만 아니라 건축가이자 조각가로도 활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병원의 예배당을 장식했지만, 그가 만들었던 목재 제단과 조각들은 아마도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82]엘 에스폴리오의 경우, 엘 그레코는 금박을 입힌 나무로 만든 원래 제단을 설계했지만(현재는 파괴됨), 성 일데폰소의 기적을 묘사한 그의 작은 조각품은 여전히 프레임 하단 중앙에 남아 있다.[2]

그의 가장 중요한 건축적 업적은 산토 도밍고 엘 안티고 교회와 수도원이었는데, 그는 여기에서도 조각과 그림을 제작했다.[83] 엘 그레코는 자신의 그림에 건축을 통합시킨 화가로 여겨진다.[84] 그는 또한 톨레도에 있는 자신의 그림에 건축적 프레임을 고안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파체코는 그를 "회화, 조각, 건축의 작가"라고 묘사하였다.[35]

엘 그레코는 다니엘레 바르바로의 번역본 비트루비우스데 아키텍투라에 남긴 여백 주석에서, 비트루비우스가 고고학적 유적, 정형화된 비례, 원근법, 수학에 집착하는 것을 반박했다. 그는 또한 비트루비우스가 눈과의 거리를 보정하기 위해 비례를 왜곡하는 방식이 괴물 같은 형태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라고 보았다. 엘 그레코는 건축에서 규칙이라는 개념 자체를 싫어했으며, 무엇보다 발명의 자유를 믿고 참신함, 다양성, 복잡성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그의 시대 건축계에서는 너무나 극단적이었고 즉각적인 반향을 얻지 못했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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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요약
관점

사후 비판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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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위일체 (1577–1579, 300 × 178 cm, 캔버스 유화,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는 "산토 도밍고 엘 안티고" 교회를 위해 제작된 작품 그룹의 일부였다.

엘 그레코는 사망 후 곧바로 다음 세대들에게 경멸당했다. 그의 작품이 17세기 초에 등장하여 매너리즘의 마지막 잔재를 대체한 초기 바로크 양식의 원칙과 여러 면에서 상충되었기 때문이다.[2] 엘 그레코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로 여겨졌고 중요한 추종자도 없었다.[85] 그의 아들과 몇몇 알려지지 않은 화가들만이 그의 작품을 약하게 모방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 스페인 해설가들은 그의 기술에 대해서는 칭찬했지만, 반자연주의적 스타일과 복잡한 도상학은 비판했다. 안토니오 팔로미노후안 아구스틴 세안 베르무데스와 같은 일부 해설가들은, 그의 성숙기 작품을 "경멸할 만한", "우스꽝스러운", "멸시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86] 스페인 역사학에서는 "이상한", "기이한", "독창적인", "괴짜", "별난"과 같은 용어와 함께 이들의 견해가 자주 반복되었다.[87] 그러한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행에 빠져"라는 구절은 시간이 지나면서 "광기"로 변했다.[i] 그러나 그의 그림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벨라스케스는 그의 그림의 주인공들을 엘 그레코와 같은 방식으로 배치했고, 옷의 주름을 유사한 방식으로 그렸다.[88]

18세기 후반 낭만주의적 감성이 도래하면서 엘 그레코의 작품은 새롭게 조명되었다.[85]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에게 엘 그레코는, 모든 기이하고 극단적인 것을 갈망한, 유럽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다.[89] 고티에는 엘 그레코를 이상적인 ("재능 있는", "오해받는", "미친") 낭만주의 영웅으로 여겼으며,[j] 최초로 그의 후기 기법에 대한 감탄을 명시적으로 표현했다.[87] 프랑스 미술 비평가 자카리 아스트룩폴 르포르는 그의 그림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의 부활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1890년대, 파리에 살던 스페인 화가들은 엘 그레코를 자신들의 지도자이자 멘토로 받아들였다.[89] 그러나 일반적인 영어권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1899년 에프라임 챔버스사이클로피디아의 말처럼 "엘 에스코리알에 공포를 그린 남자"로 남아 있었다.[91]

1908년, 스페인 미술사학자 마누엘 바르톨로메 코시오는 엘 그레코의 작품에 대한 최초의 종합 목록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엘 그레코는 스페인 화파의 창시자로 소개되었다.[92] 같은 해 프랑스 인상주의 학자인 율리우스 마이어-그라페가 스페인을 여행하며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연구할 예정이었으나, 대신 엘 그레코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1910년에 그의 경험을 『스페인 여행』(Spanische Reise, 1926년 영어판 출간)에 기록했는데, 이 책은 "다소 좁은 범위에서" 엘 그레코를 과거의 위대한 화가로 널리 확립시켰다.[93] 엘 그레코의 작품에서 마이어-그라페는 현대성의 전조를 발견했다.[94] 다음은 마이어-그라페가 엘 그레코가 당시의 예술 운동에 미친 영향을 묘사한 말이다.

엘 그레코는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발견했다. 그 자신조차도 그것을 다 소진할 수 없었다. 그의 뒤를 잇는 모든 세대는 그의 영역에서 살고 있다. 그와 그의 스승인 티치아노 사이의 차이가, 그와 르누아르 또는 세잔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누아르와 세잔은 흠잡을 데 없이 독창성을 지닌 거장들이다. 이는 엘 그레코의 언어를 사용하려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마이어-그라페, 스페인 여행[95]

1920년 영국의 예술가이자 비평가인 로저 프라이에게 엘 그레코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한 전형적인 천재였다. 프라이는 엘 그레코를 "단순히 현대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보다 몇 발짝 앞서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올드 마스터"라고 묘사했다.[32] 영국 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도 1938년에 "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썼다.[96] 1925년 미국 예술가 윌리엄 알렉산더 그리피스에 따르면, 엘 그레코가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았으며, 높은 기준의 영예를 얻어 "바로크 양식 회화의 최고 사례"라고 하였다.[97] 1914년 리터러리 다이제스트 기사에서는 엘 그레코가 "일부 비평가들에게 스페인 최고의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5~6명의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고 언급했다.[98]

같은 기간 동안, 다른 연구자들은 대안적인, 더 급진적인 이론들을 발전시켰다. 안과 의사 아우구스트 골트슈미트와 게르만 베리텐스는 엘 그레코가 길고 늘어진 인물들을 그린 것이 난시사시와 같은 시력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99][k] 한편 의사 아르투로 페레라는, 엘 그레코의 스타일이 마리화나 사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104] 뉴욕 타임스의 평론가 마이클 키멜만은 "그리스인들에게 [엘 그레코]는 전형적인 그리스 화가가 되었고, 스페인인들에게는 전형적인 스페인 화가가 되었다"고 말했다.[32]

엘 그레코의 영향에 대한 합의를 요약하자면, 1980년 4월에 미국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가 말한 것처럼, 엘 그레코가 "그 당시 가장 비범한 화가"였으며, "아마도 그의 시대보다 3, 4세기 앞서 있었다."[89] 엘 그레코의 "재발견"을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보는 역사가 에릭 스톰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율리우스 마이어-그라페와 같은 작가들과 파블로 피카소, 프란츠 마르크, 그리고 바실리 칸딘스키와 같은 획기적인 현대 예술가들 덕분에, 엘 그레코는 50년도 채 되지 않아 결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선포되었다.

에릭 스톰, 엘 그레코의 발견: 문화의 국유화 대 현대 미술의 부상 (1860-1914), p. 191

다른 예술가들에게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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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의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 추기경의 초상, 1600년 경, 캔버스 유화, 170.8 cm × 108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에 대한 주요 영향이자 "직전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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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 1650년 경, 캔버스 유화, 141 cm × 119 cm,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엘 그레코의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 추기경의 초상화에서 영향을 받아 그린 그림으로, 특히 교황의 붉은 예복은 엘 그레코의 섬세함으로 채워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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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봉인의 개봉, 1608–1614, 캔버스 유화, 225 × 193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의 주요 영감의 원천으로 제안되었다.
파일:Les Demoiselles d'Avignon.jpg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캔버스 유화, 243.9 × 233.7 cm, 뉴욕, 뉴욕 근대미술관). <다섯째 봉인의 개봉>과 특정 형태학적 및 양식적 유사성을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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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마누엘 테오토코풀로스의 초상화, 1600–1605, 유화, 캔버스, 81 × 56 cm, 세비야 미술관, 세비야.
파일:Picasso Painter El Greco.jpg
엘 그레코를 따라 한 화가의 초상화, 1950, 합판에 유화 100.5 × 81 cm, 안젤라 로젠가르트 컬렉션, 루체른. 피카소의 호르헤 마누엘 테오토코풀로스 초상화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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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텐알레고리, 2009, 마티아스 로렌츠 그래프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처음으로 엘 그레코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벨라스케스는 그의 그림의 주요 인물들을 엘 그레코와 같은 방식으로 배치했고, 옷의 주름을 유사한 방식으로 그렸다.[88] 그의 구성에서도 엘 그레코의 작품처럼 상단에는 빛나는 비둘기가 있고 인물들을 둘러싼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있다.[88] 찰스 헨리 캐핀에 따르면:[105]

벨라스케스는 다른 어떤 위대한 예술가의 영향을 받으려는 경향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엘 그레코에게 배우는 것만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엘 그레코의 구도를 참고했고, 한편으로는 엘 그레코의 색채 사용, 즉 그의 훌륭한 검정과 흰색, 그리고 장미색과 파란색의 미묘한 색조에 영향을 받았다.

찰스 헨리 캐핀

벨라스케스의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106][107] 그리고 그의 (현재는 소실된) 보르하 추기경의 초상화[106] 또한 엘 그레코의 영향을 받았다.[107]

엘 그레코는 프란시스코 고야를 포함하여 그 이후의 여러 스페인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108] 미술사학자 "호세 루이스 모랄레스 이 마린"에 따르면:

엘 그레코의 영향은 고야가 육체적 존재를 그 자체가 아닌 "영적인 힘의 기초"로 구체화하려는 경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야는 삶과 쾌락과 관능의 형태로 나타내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먼 존재의 감각으로 냉정하게 표현했다.

호세 루이스 모랄레스 이 마린, 고야: 그의 그림 목록, p. 105

에피 파운둘라키에 따르면, "20세기 초의 화가들과 이론가들은 새로운 엘 그레코를 '발견'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발견하고 드러냈다."[109] 엘 그레코의 표현력과 색채는 외젠 들라크루아에두아르 마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110] 1912년 뮌헨의 청기사파 그룹에게 엘 그레코는 그들의 세대가 재발견해야 할 신비로운 내부 구조라고 생각했다.[111] 성숙한 엘 그레코의 작품 속 형태에서 구조적 코드를 처음으로 알아차린 화가는 입체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인 폴 세잔이었다.[85] 두 화가의 비교 형태 분석을 통해, 인체의 왜곡, 붉고 (겉으로만) 다듬지 않은 배경, 공간 표현의 유사성 등의 공통 요소가 드러났다.[112] 브라운에 따르면, "세잔과 엘 그레코는 그들을 분리하는 수세기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형제이다."[113] 프라이는 세잔이 "디자인의 모든 부분에 균일하고 연속적인 조형적 주제가 침투하는 위대한 발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언급했다.[114]

상징주의 화가들과 청색 시대파블로 피카소는, 엘 그레코의 차가운 색조를 빌려 그의 금욕적인 인물들을 해부하였다. 피카소가 원시 입체주의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을 작업하던 중, 파리의 작업실에 있던 친구 이그나시오 줄로아가를 방문하여 엘 그레코의 다섯째 봉인의 개봉을 연구했다.[115] 아비뇽의 처녀들과 다섯째 봉인의 개봉 사이의 관계는 1980년대 초에 두 작품의 양식적 유사성과 모티브 간의 관계가 분석되면서 밝혀졌다.[116]

살바도르 달리도 엘 그레코에게 영향을 받았다.[117] 그는 엘 그레코를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 디에고 벨라스케스,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와 함께 "다섯 명의 스페인 불멸자"중 한 명으로 여겼으며, 1965년에는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118][119] 달리에게 엘 그레코는 "금욕적이고 신비로운 스페인 정신의 모든 맛, 본질, 정수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으며", 스페인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사람들보다 더 스페인 사람이 되었다".[120]

피카소는 초기 입체주의를 연구하면서, 엘 그레코의 작품에서 다른 측면들을 발견했다. 그의 구성에 대한 구조적 분석, 형태의 다면적 굴절, 형태와 공간의 상호 작용, 그리고 하이라이트의 특수 효과, 왜곡과 시간의 물질적 표현과 같은 입체주의의 몇 가지 특성은 엘 그레코의 작품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피카소에 따르면, 엘 그레코의 구조는 입체주의적이다.[121] 1950년 2월 22일, 피카소는 <엘 그레코를 따라한 화가의 초상화>를 시작으로 다른 화가들 작품의 "의역" 시리즈를 시작했다.[122] 파운둘라키는 피카소가 "마네가 시작하고 세잔이 이어나간 엘 그레코의 회화적 가치를 활성화하는 과정을 ... 완성했다"고 주장한다.[123]

표현주의자들은 엘 그레코의 표현주의적 왜곡에 집중했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주요 화가 중 한 명인 프란츠 마르크에 따르면, "우리는 엘 그레코를 기쁘게 그리고 확고하게 참조한다. 이 화가의 영광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진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124] 추상 표현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인 잭슨 폴록도 엘 그레코의 영향을 받았다. 1943년까지 폴록은 엘 그레코를 모방한 60점의 드로잉 작품을 완성했고, 크레타 거장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소유했다.[125]

폴록은 예술가 조셉 글라스코가 엘 그레코의 예술에 관심을 갖도록 영향을 미쳤다. 글라스코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인 엘 그레코의 톨레도의 풍경을 기반으로 여러 현대 회화를 제작했다.[126]

키사 존슨원죄 없는 잉태를 그린 엘 그레코의 그림을 자신의 일부 작품의 구성적 틀로 사용했으며, "프리츠 체스넛"의 초상화에는 엘 그레코의 해부학적 왜곡이 다소 반영되어 있다.[127]

엘 그레코의 성격과 작품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릴케의 시집 중 한 권(Himmelfahrt Mariae I.II., 1913)은 엘 그레코의 원죄 없는 잉태에 직접적으로 기반을 두었다.[128] 엘 그레코에 대한 강한 정신적 친밀감을 느꼈던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자서전을 『그레코에게 보고함』이라고 명명하고 크레타 출신 예술가에게 헌사를 썼다.[129]

1998년 그리스 전자 음악 작곡가이자 예술가인 반젤리스는, 엘 그레코에게 영감을 받아, El Greco라는 교향악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반젤리스의 이전 앨범인 Foros Timis Ston Greco (엘 그레코에게 바치는 헌사, Φόρος Τιμής Στον Γκρέκο)를 확장한 것이다.

이오안니스 스마라그디스 감독이 연출하고 그리스, 스페인, 영국 공동 제작한 영화 "엘 그레코"는 2006년 10월 크레타섬에서 촬영을 시작하여 1년 후 스크린에 데뷔했으며,[130] 영국 배우 닉 애쉬던이 엘 그레코 역을 맡았다.[131]

오스트리아 예술가 마티아스 로렌츠 그래프는 엘 그레코를 참조하여 2009년 자신의 대형 종교 삼면화 "벨텐알레고리"(세상의 우화)를 제작했는데, 이 작품에는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 따온 다양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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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속 논쟁

요약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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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나 삼면화 (1568, 패널 템페라, 37 × 23.8 cm (중앙), 24 × 18 cm (양면 패널), 갈레리아 에스텐세, 모데나. 엘 그레코의 작품으로 알려진 작은 규모의 삼면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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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ομήνικ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 (Doménicos Theotocópoulos) ἐποίει." 엘 그레코가 자신의 그림에 서명할 때 사용한 단어. 엘 그레코는 자신의 이름 뒤에 "epoiei" (ἐποίει, "(그가) 만들었다")라는 단어를 덧붙였다. 성모 승천에서는 화가가 "epoiei" 대신 "deixas" (δείξας, "(그가) 전시했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엘 그레코 작품의 정확한 수는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1937년, 미술사학자 로돌포 팔루키니의 영향력 있는 연구는 엘 그레코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작품의 수를 크게 늘렸다. 팔루키니는 모데나갈레리아 에스텐세에 있는 작은 삼면화를 중앙 패널 뒷면에 있는 서명("Χείρ Δομήνιϰου", 도미니코스의 손으로 제작됨)을 근거로 엘 그레코의 작품으로 귀속시켰다.[132] 삼면화가 실제로 엘 그레코의 초기 작품이라는 합의가 있었고, 따라서 팔루키니의 출판물은 예술가에게 귀속되는 작품의 기준이 되었다.[133] 그러나 (Wethey)는 모데나 삼면화가 예술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으며, 1962년에 작품수가 대폭 줄어든 작품 목록을 담은 카탈로그를 제작했다. 미술사학자 호세 카몬 아스나르는 크레타 거장의 그림을 787점과 829점 사이로 귀속시켰지만, 웨디는 진품의 수를 285점으로 줄였고, 스페인 미술 연구자 할도르 죄너는 137점만을 인정했다.[134] 웨디와 다른 학자들은 크레타가 그의 형성에 어떤 역할도 했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엘 그레코의 작품에서 일련의 작품들을 제거하는 것을 지지했다.[135]

1962년 이래로 <성모 안식>이 발견되고, 광범위한 기록 연구가 이루어진 결과, 학자들은 웨디의 평가가 전적으로 정확하지 않으며, 그의 목록 결정이 엘 그레코의 기원, 발전 및 작품의 전체적 특성에 대한 인식을 왜곡했을 수 있다는 점을 점차 확신하였다. <성모 안식>의 발견은 "도미니코스"라고 서명된 다른 세 작품(모데나 삼면화, <성 루가가 성모와 아기를 그림>, <동방 박사의 경배>)을 엘 그레코에게 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 후에 더 많은 작품들을 진품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그중 일부는 예를 들어 1566년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수난>과 같이 서명이 되지 않은 작품들도 있다.[136] 이 작품들은 엘 그레코의 초기 작품 그룹에 편입되었다. 엘 그레코는 이제 크레타에서 훈련을 받은 예술가로 간주되며, 그의 초기 스타일을 조명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크레타에 있을 때 그린 작품들, 베네치아 시기의 작품들, 그리고 이후 로마 체류 시기의 작품들로 구분된다.[15] 심지어 웨디도 "엘 그레코는 크레타를 떠나기 전에 모데나의 갈레리아 에스텐세에 있는 작고 논란이 많은 삼면화를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정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 그레코의 진품 작품의 정확한 수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웨디의 카탈로그가 이러한 이견의 중심에 있다.[137]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를 포함한 몇몇 조각품들도 엘 그레코에게 귀속되었다. 이 의심스러운 귀속은 파체코의 증언에 근거한다(그는 엘 그레코의 작업실에서 일련의 모형들을 보았지만, 이것들은 단순히 모델이었을 수도 있다). 엘 그레코의 현존하는 작품 중에는 네 점의 드로잉도 있는데, 그 중 세 점은 산토 도밍고 엘 안티고의 제단화를 위한 예비 작품이며, 마지막는 그의 그림 중 하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위한 스케치이다.[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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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나치 약탈 미술품

2010년, 모르 리포트 헤르초크 남작의 상속인들은 나치에게 약탈당했던 엘 그레코의 《겟세마네의 고뇌》에 대해 반환을 청구했다.[139][140] 2015년, 1944년 나치에 의해 독일계 유대인 미술품 수집가 율리우스 프리스터로부터 약탈당한 엘 그레코의 《신사의 초상》은 경매에서 위조된 출처를 가지고 나타난 후 그의 상속인들에게 반환되었다.[141] 유럽 약탈 예술 위원회의 공동 의장인 앤 웨버에 따르면, 이 그림의 출처는 "지워졌다"고 한다.[142]

같이 보기

내용주

엘 그레코의 생애 타임라인 (1541년–1614년 4월 7일)
  1. 테오토코풀로스는 이탈리아에서 엘 그레코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그곳에서는 출신 국가나 도시를 지정하여 사람을 식별하는 관습이 흔했다. 특이한 관사(El)는 베네토어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고, 스페인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스페인어에서는 그의 이름이 El Griego였을 것이다.[2] 크레타 출신인 엘 그레코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일반적으로 Dominico Greco로 알려져 있었고, 죽은 후에야 El Greco로 불렸다.
    한 동시대인의 증언에 따르면, 엘 그레코는 그의 출신지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의 숭고함 때문에 이 이름을 얻었다. "그의 위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는 그리스인(Il Greco)이라고 불렸다" (엘 그레코 사망 후 몇 년 뒤에 쓰인 줄리오 체사레 만치니의 연대기에 실린 엘 그레코에 대한 언급).[3]
  2. 엘 그레코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과 학자들은 칸디아를 그의 출생지로 보고 있다.[6] 그러나 20세기 그리스의 저명한 언론인 아킬레우스 A. 키루에 따르면, 엘 그레코는 포델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 집터가 옛 포델레가 있던 곳(해적의 습격으로 인해 마을이 나중에 위치를 변경했다)에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7] 칸디아의 주장은 화가가 65세였던 1606년 재판 기록 두 건에 근거한다. 포델레 주민들은 엘 그레코가 스페인에서 자신을 이라클리오 출신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작은 포델레 옆에 가장 잘 알려진 도시였기 때문일 것이다.[8]
  3. 이 문서는 칸디아 공증 기록 보관소에서 나왔으며 1962년에 발표되었다.[14] MénegoDomḗnikos의 베네치아어 형태이고, sgouráfos는 화가를 뜻하는 그리스어 용어로, zōgráfos (ζωγράφος)의 변형이다.[15]
  4. 이 가톨릭 자료들의 주장은 크레타에 정교회 세례 기록이 없고, 엘 그레코의 젊은 시절에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의식 간의 교류가 완화되었음에 근거한다.[17] 그의 예술이 로마 가톨릭 스페인의 종교적 정신을 반영한다는 평가와, 그가 자신을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묘사한 유언장의 언급에 근거하여, 일부 학자들은 엘 그레코가 활기찬 가톨릭 크레타 소수 집단에 속했거나 섬을 떠나기 전에 그리스 정교회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가정한다.[18]
  5. 1990년대 후반의 기록 연구에 따르면, 엘 그레코는 26세에도 여전히 칸디아에 있었다. 그곳에서 크레타 화파의 후기 비잔틴 화가들의 정신으로 창작된 엘 그레코의 작품들은 크게 존경받았다. 1566년 12월 26일, 엘 그레코는 베네치아 당국에 "금 배경에 그려진 그리스도 수난화" ("un quadro della Passione del Nostro Signor Giesu Christo, dorato")를 복권으로 판매할 허가를 요청했다.[15] 젊은 엘 그레코가 금 배경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비잔틴 이콘은, 1566년 12월 27일 칸디아에서 감정되어 70 금 두카트(두 명의 예술가, 그 중 한 명은 이콘 화가인 게오르기오스 클론차스가 감정했는데, 한 명은 80 두카트, 다른 한 명은 70 두카트로 평가했다)의 합의된 가격으로 판매되었는데, 이는 그 시대의 티치아노나 틴토레토의 작품과 동등한 가치였다.[22] 따라서 엘 그레코는 1566년 12월 27일 이후에 베네치아로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23] 그의 마지막 논문 중 하나에서 웨디는 이전의 추정치를 재평가하고 엘 그레코가 1567년에 크레타를 떠났다는 것을 받아들였다.[24] 다른 기록 자료(엘 그레코가 크레타 지도 제작자에게 보낸 그림)에 따르면, 그는 1568년에 베네치아에 있었다.[22]
  6. 만치니는 엘 그레코가 교황에게 전체 작품이 철거된다면 자신이 품위 있고 보기 좋게 다시 작업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한다.[33]
  7. 이 시기에 톨레도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을 것이다. 1571년 도시 인구는 62,000명이었다.[41]
  8. 엘 그레코는 1603년 6월 18일 자선 병원 교회의 주요 제단 장식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다음 해 8월까지 작업을 완료하기로 동의했다. 그러한 마감 기한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지만, 이는 잠재적인 갈등의 지점이었다. 그는 또한 수도회가 감정사를 선택하도록 허용하는 데 동의했다.[55] 수도회는 이 선의의 행위를 이용했고 공정한 합의에 도달하기를 원치 않았다.[56] 결국 엘 그레코는 자신의 법적 대리를 프레보스테와 그의 친구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몬테로에게 위임하고 2,093 두카트의 지불을 수락했다.[57]
  9. 도냐 헤로니마 데 라스 쿠에바스는 엘 그레코보다 오래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거장이 그녀와 아들을 모두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연구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는데, 그는 유언장을 포함한 여러 문서에서 그녀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엘 그레코가 젊은 시절 불행한 결혼을 했고 따라서 다른 관계를 합법화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2]
  10. 엘 그레코의 광기 신화는 두 가지 버전으로 존재했다. 한편으로 고티에는 엘 그레코가 과도한 예술적 감수성으로 인해 미쳤다고 믿었다.[90] 다른 한편으로 대중과 비평가들은 고티에의 이데올로기적 기준을 가지지 못했으며, 엘 그레코를 "미친 화가"로 인식했고, 따라서 그의 "가장 미친" 그림들은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그의 "광기"를 증명하는 역사적 문서로 여겨졌다.[87]
  11. 이 이론은 20세기 초반에 놀라운 인기를 누렸지만, 독일 심리학자 다비트 쿤츠의 반대에 부딪혔다.[100] 엘 그레코가 진행성 난시를 앓았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101] 캘리포니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스튜어트 안스티스는 "엘 그레코가 난시였더라도 그것에 적응했을 것이고, 기억이나 실물에서 그린 그의 인물들은 정상적인 비율을 가졌을 것이다. 그가 인체를 길게 묘사한 것은 시각적 증상이 아니라 예술적 표현이었다"고 결론짓는다.[102] 스페인 교수 존 암스트롱 크로우에 따르면, "난시는 결코 캔버스에 고품질을 부여할 수도, 바보에게 재능을 줄 수도 없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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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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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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