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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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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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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프랑스어: Oscar-Claude Monet, 1190년 11월 14일~1926년 12월 5일)는 프랑스인상주의 화가로,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상파의 창시자이자 개척자다. 특히 자연을 자신이 인지하는 대로 그리려고 한 시도에서 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선구자로 여겨진다.[1] 오랜 경력 동안 그는 인상주의 철학을 가장 일관되게 실천한 화가로서, 특히 야외 사생 풍경화에 자연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고 하였다.[2]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기원전 1874년 살롱 드 파리의 대안으로 모네와 뜻을 같이하는 여러 예술가들이 주도한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전시된 그의 그림 인상, 해돋이 (Impression, soleil levant)의 제목에서 유래했다.

간략 정보 클로드 모네, 신상정보 ...

모네는 노르망디 르아브르에서 자랐으며, 어린 나이부터 야외 활동과 그림 그리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어머니 루이즈-쥐스틴 오브레 모네는 화가가 되고자하는 모네를 지지했지만, 그의 아버지 클로드-아돌프는 이를 반대하며 그의 사업을 잇기를 바랬다. 그는 어머니와 매우 가까웠지만, 16세 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녀가 없고 부유한 과부 이모 마리-잔 르카드르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이후 파리에 있는 아카데미 쉬스에서 공부했으며, 아카데미즘 역사화가샤를 글레르 밑에서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함께 수학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풍경화, 바다 풍경화,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는 초기에 야외 사생의 개념을 알려준 외젠 부댕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1883년부터 모네는 북프랑스의 지베르니에 살았으며, 그곳에서 집과 토지를 구입하고 수련 연못을 포함한 광대한 조경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프랑스 시골을 기록하려는 모네의 야망은 빛의 변화와 계절의 흐름을 포착하기 위해 같은 장면을 여러 번 그리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는 그의 건초더미 연작 (1890–1891), 루앙 대성당 연작 (1892–1894), 그리고 지베르니 정원에 있는 수련 연작이 있으며, 이는 그의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그를 사로잡았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 자주 전시되었고 성공을 거두었지만, 모네의 명성과 인기는 20세기 후반에 급증하여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었고, 급성장하는 예술가 집단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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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출생과 유년기

클로드 모네는 1840년 11월 14일 파리 9구에서 클로드 아돌프 모네(1800–1871)와 루이즈 쥐스틴 오브레 모네(1805–185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 1841년 5월 20일, 그는 지역 파리 교회인 노트르담 드 로레트 성당에서 오스카르-클로드로 세례를 받았지만, 그의 부모는 그를 단순히 오스카르라고 불렀다.[3][4] 1845년에 그의 가족은 노르망디 르아브르로 이사했다. 도매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업인 선박 용품 공급 및 식료품 사업을 이어받기를 원했지만,[5][6] 모네는 예술가가 되고자 했다. 그의 어머니는 가수였기 때문에, 모네의 예술에 대한 열망을 지지했다.[7]

1851년 4월 1일, 그는 르아브르 예술 중등학교에 입학했다.[8] 그는 무관심한 학생이었지만, 어린 나이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여, 15세에 돈을 받고 지인들의 캐리커처와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9] 그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학생이었던 자크-프랑수아 오샤르에게서 첫 드로잉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9] 1858년경, 그는 동료 화가 외젠 부댕을 만났다. 부댕은 모네가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하도록 격려하고, 그에게 "야외 사생" 회화 기법을 가르치고, 모네를 그림 여행에 데려갔다.[10][11] 모네는 부댕을 자신의 스승으로 여겼으며, "나의 모든 것은 그에게 빚진 것"이라고 말했다.[12] 1857년에 그의 어머니가 사망했다.[13] 그는 아버지와 이모 마리-잔 르카드르와 함께 살았는데, 르카드르는 그의 초기 미술 경력에 지지자가 되었다.[11][13]

첫 파리 체류 (1859-1860)

클로드 모네는 1859년 4월 파리에 도착하여 하브르 광장의 호텔 "뒤 누보 몽드"에 정착했다.[14] 그는 막 개장한 살롱을 방문하여, 이모 잔 르카드르의 친구인 아르망 고티에의 환영을 받았다. 이모는 그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보내주고, 그가 그림 판매를 통해 모은 약 2,000프랑의 저축을 관리해 주었다. 이 돈은 그에게 귀중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1858년 8월 6일에 르아브르 시에 보조금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샤를 뤼이예, 샤를 몽기노, 콘스탕 트로용을 만났는데, 몽기노와 트로용은 그에게 토마 쿠튀르의 스튜디오에 들어가 에콜 데 보자르를 준비하도록 조언했다. 그러나 쿠튀르는 젊은 모네를 거부했다.[15] 1860년 초(2월 경)에, 그는 시테 섬에 위치한 샤를 쉬스(Charles Suisse)가 운영하는 아카데미 쉬스에 입학하였고[16] 그곳에서 그는 카미유 피사로를 만났다.[17][18] 그 해 살롱에서 그는 특히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들을 감탄했다(전년도에는 샤를프랑수아 도비니가 그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첫 파리 체류 동안 작업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클로드모네는 파리의 카페들, 특히 당시 작가와 예술가들의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였던 브라스리 데 마르티르(Brasserie des Martyrs)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19][20]

1861년 3월 2일, 20세가 된 모네는 르아브르에서 군대에 징집되었다.[21] 분명 그의 가족은 대리병 비용 2,500 프랑을 지불할 수 있었지만, 모네가 1900년에 가족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예술 경력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21] 모네는 이를 거부하고, 1861년 4월 29일 아프리카 경기병 부대에 입대하였다.[21][22] 군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건강했으며, 키 1.65m에 갈색 머리와 밤색 눈을 가졌다.[21] 1861년 6월, 그는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프랑스령 알제리를 건너갔다.[23] 그전까지 그는 노르망디를 벗어나 파리보다 멀리 가본 적이 없었고 말을 타본 적도 없었다. 1862년 봄,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여름 동안 르아브르로 돌아가 이모 잔 르카드르와 함께 노르망디 생타드레스에서 회복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외젠 부댕을 다시 만났다.[24] 그의 이모는 3,025 프랑을 지불하고 그를 군대에서 제대시켰다.

1862년 여름, 카프 드 라 에브(Cap de la Héve)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는 네덜란드 화가 요한 종킨트를 만났고 친구가 되었다. 종킨트는 부댕과 함께 모네에게 중요한 멘토였다.[10][25] 그는 1862년 11월 21일 모범 제대 증명서를 받았다.[21] 알제리에서의 시간은 모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나중에 북아프리카의 빛과 생생한 색깔이 "내 미래 연구의 보석을 담고 있었다"고 말했다.[26] 그는 또한 귀스타브 제프루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제리는 모든 면에서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내 머리에 약간의 백연을 넣었다. 나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 도취되어 오직 그림만 생각했고, 이제는 나의 열정적인 모습에 가족의 전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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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1866, 쿤스트할레 브레멘 미술관

파리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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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점심 식사 (오른쪽 부분), 1865–1866, 파리, 귀스타브 쿠르베,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작가의 첫 번째 부인인 카미유 동시외와 함께, 오르세 미술관[28]

모네는 1862년 12월 파리로 돌아와, 사촌 오귀스트 툴무슈의 추천으로 70번지 노트르담-데-샹 거리의 파리 제국 미술학교 샤를 글레르 스튜디오에 등록했다.[29] 그러나 그들은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글레르의 스튜디오를 떠나게 되었다.[30] 그곳에서 그는 오귀스트 르누아르프레데리크 바지유를 만났다.[13][31][32] 바지유는 결국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12] 그들은 모티프를 찾아 옹플뢰르로 여행을 떠났고, 모네는 항구와 센 강 어귀를 여러 "연구" 작품으로 그렸다.[33] 모네는 종종 르누아르와 알프레드 시슬레와 함께 그림을 그렸는데,[34] 셋 모두 전통적인 주제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을 공유했다.[35]

이 시기에 그는 그의 첫 성공적인 대규모 그림인 '정원의 여인들'과 "모네 초기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그림"인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그렸다.[34][36][37] 1865년 '썰물 때의 라 에브 곶'과 '옹플뢰르의 센 강 어귀'로 살롱에 성공적으로 데뷔한 후, 그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1866년 살롱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제때 그림을 완성할 수 없었고, 대신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샤이 공원의 포장도로'를 제출하여 승인받았다.[13][38] 그 후 그는 1870년까지 매년 살롱에 작품을 제출했지만, 1866년과 1868년 두 번만 수락되었다.[10] 이후 1880년에 마지막 시도로 살롱에 출품한 것 외에는 더 이상 작품을 보내지 않았다.[10] 그의 작품은 급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모든 공식적인 수준에서 미달"되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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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리 소가 풀을 뜯는 모습, 1868년, 종이에 파스텔

1867년 그의 당시 정부였던 카미유 동시외—그는 2년 전 자신의 그림 모델로 그녀를 만났다—가 첫 아들 을 낳았다.[11] 모네는 장과 강한 유대 관계를 맺었으며, 장이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카미유가 자신의 법적인 아내라고 주장했다.[39] 이 관계의 결과로 모네의 아버지는 그에게 재정적 지원을 중단했다. 그 때문에 모네는 생타드레스에 있는 이모의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13][38]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지만, 일시적인 시력 문제(아마도 스트레스가 원인)로 인해 햇빛 아래서 작업할 수 없었다.[13][38][10] 모네는 가족을 매우 사랑했으며, 장 모네의 초상화와 같이 그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특히 이 그림은 모네를 유명하게 한 인상주의의 첫 징후를 보여준다.[40]

미술품 수집가 루이-조아킴 고디베르의 도움으로 그는 카미유와 재회하여 다음 해 도버해협에 면한 에트르타로 이사했다.[12][13] 이 시기에 그는 "노골적으로 현대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인물 화가로 자리매김하려 노력했고, 이러한 의도는 1870년대까지 이어졌다.[13][41][31][32] 그는 자신의 그림 기법을 발전시키고 야외 사생 스타일 실험을 통합했으며—이 결과는 각각 생타드레스의 해변베네쿠르 센강변에서에서 볼 수 있다. 생타드레스의 해변은 그의 "관광을 포함한 첫 지속적인 회화 활동"이었다.[13][38]

고디베르는 그의 그림 몇 점을 구입했으며, 다른 프로젝트와 함께 그의 아내의 그림을 의뢰했다. 고디베르 부부는 2년 동안 "모네의 고향 후원자 중 가장 많이 지지해준" 사람들이었다.[10][39] 모네는 나중에 예술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귀스타브 카유보트, 바지유, 그리고 아마도 귀스타브 쿠르베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채권자들의 추적을 받아야 했다.[10][31]

런던 망명과 아르장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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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의 초상, 카롤루스-뒤랑, 1867년경c.

그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870년 6월 28일 카미유와 결혼했고,[42] 전쟁이 발발하자 징병제를 피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런던과 네덜란드에서 자발적인 망명 생활을 했다.[13][17] 런던에 사는 동안 모네는 옛 친구 피사로와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를 만났고, 그의 첫 번째이자 주요 미술상폴 뒤랑-뤼엘과 친구가 되었다. 이 만남은 그의 경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존 컨스터블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보고 감탄했으며, 특히 템스강의 안개를 묘사한 터너의 빛 처리 방식에 감명을 받았다.[10][13][43][44] 그는 템스강, 하이드 파크, 그린 파크를 반복해서 그렸다.[13] 1871년 봄, 그의 작품은 왕립 미술원 전시회 포함 승인을 거부당했고, 경찰은 그를 혁명 활동 혐의로 의심했다.[45][42] 같은 해 그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10]

가족은 1871년 아르장퇴유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는 네덜란드 화가들과의 영향을 받아 주로 센강 주변 지역을 그렸다.[41][46] 그는 강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요트를 구입했다.[10] 1874년, 그는 6년 반 동안의 임대 계약을 맺고 아르장퇴유의 새로 지어진 "녹색 셔터가 있는 장미색 집"으로 이사하여 파노라마적 관점에서 정원 그림 15점을 그렸다.[41][47] '글라디올리'와 같은 그림들은 모네가 자신의 예술을 위해 정원을 가꾼 첫 번째 시기를 나타낸다.[41] 그 집과 정원은 아르장퇴유에서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가장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47] 다음 4년 동안 그는 주로 아르장퇴유에서 그림을 그렸고, 화학자 미셸 외젠 슈브뢸의 색채 이론에 관심을 가졌다.[10] 이 10년 중 3년 동안 그는 생드니에 있는 큰 빌라를 연 1,000프랑에 임대했다. '정원 벤치에 앉은 카미유 모네'는 그 빌라의 정원을 보여주는데, 일부 학자들은 카미유가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슬픔이라고 주장한다.[48]

모네와 카미유는 이 시기에 종종 재정난을 겪었다. 1870년 여름에는 호텔 비용을 지불할 수 없어 런던 외곽에서 살아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의 유산과 그림 판매 덕분에 1872년에는 하인 두 명과 정원사 한 명을 고용할 수 있었다.[11][49][50] 몇몇 바다 그림이 전시회에서 성공하고, 르아브르에서 은메달을 수상한 후, 모네의 그림들은 채권자들에게 압류되었고, 미술상 고디베르가 이 그림들을 다시 사들였다. 고디베르는 부댕의 후원자이기도 했다.[51]

인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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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해돋이 (Impression, soleil levant), 1872년; 이 그림이 화풍과 미술 운동에 이름을 부여했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파리

뒤랑-뤼엘가 모네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지원을 줄이기 시작하자,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폴 세잔, 에드가 드가, 베르트 모리조는 그들의 작품을 독립적으로 전시하기로 했다. 그들은 모네가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익명 화가, 조각가, 판화가 협회'라는 이름으로 전시했다.[10][13] 모네는 자신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동료인 피사로와 에두아르 마네의 스타일과 주제에서 영감을 받았다.[52] 이 그룹의 이름은 어떠한 스타일이나 운동과의 연관성을 피하기 위해 선택하였으며, 살롱으로부터의 독립과 지배적인 아카데미즘에 대한 거부를 목적으로 하였다.[10][53] 모네는 그룹 내 최고의 풍경화가로 명성을 얻었다.[17]

1874년 첫 전시회에서 모네는 인상, 해돋이, '점심 식사', 카퓌신 대로를 전시했다.[54] 미술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적대적인 평을 썼다. 르아브르 항구를 안개 낀 모습으로 묘사한, 새로운 양식의 인상, 해돋이 (1872)에 특히 주목하며 그는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보수적인 비평가들과 대중은 이 그룹을 비난했으며, 인상주의란 용어는 처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이 미완성작임을 뜻했다.[13][53] 일부 진보적인 비평가들은 현대 생활의 묘사를 칭찬했으며, 루이 에드몽 뒤랑티는 그들의 스타일을 "회화의 혁명"이라고 불렀다.[53] 루이 르루아는 나중에 "대부분이 인상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그룹이라며, 이 이름을 사용한 것을 후회했다.[12]

총 관람객 수는 3,500명으로 추정된다. 모네는 인상, 해돋이에 1,000프랑의 가격을 매겼지만, 판매에는 실패했다.[55][56][57] 이 전시회는 60프랑을 지불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예술가들은 누구의 심사도 받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55][56][57] 1876년에도 살롱에 반대하여 또 다른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모네는 18점의 그림을 전시했는데, 그중 생타드레스의 해변은 여러가지 인상주의적 특징을 보여주었다.[38][58]

세 번째 전시회인 1877년 4월 5일, 그는 지난 3개월 동안 그린 생 라자르 역 그림 12점 중 7점을 출품했다. 이는 그가 "같은 장소의 많은 그림을 신중하게 장면과 시간을 조율하여 동기화"한 첫 사례였다.[59] 이 그림들은 비평가들로부터 기차의 도착과 출발을 포착하는 방식에 대해 특히 칭찬을 받으며 호평을 받았다.[59] 네 번째 전시회에서는 카유보트의 협상으로 그의 참여가 이루어졌다.[13] 모네는 1882년에 인상파 전시회에 마지막으로 참가했다. 이는 마지막 인상파 전시회 4년 전이었다.[60][61]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모리조, 세잔, 시슬레는 현실을 묘사하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 실험했다. 그들은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회화의 어둡고 대비되는 조명을 거부하고,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와 부댕과 같은 동료 화가들의 밝은 색조를 선호했다.[62] 일시적인 효과를 그리는 방법을 개발한 후, 모네는 더 까다로운 주제, 새로운 후원자와 수집가를 찾으려 노력했다. 1870년대 초반에 제작된 그의 그림들은 이 운동과 그의 동료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의 묘사에 감탄하여 아르장퇴유로 이사했다.[63][13]

카미유의 죽음과 베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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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임종에 처한 카미유 모네, 1879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1875년, 모네는 파라솔을 든 여인 - 모네 부인과 그 아들를 그려, '점심 식사' 이후 사실상 중단했던 인물화를 다시 시작했다. 인물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다음 4년간 계속되었고, 1877년에 정점에 달했으며 1890년에 완전히 끝났다.[39][71] 테오도르 뒤레에게 보낸 "매우 솔직한" 편지에서 모네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된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나는 내가 이해하는 야외 인물화라는 새로운 시도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작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항상 나를 사로잡았던 오래된 꿈이며, 한 번에 완전히 마스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나는 거의 병이 날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1876년, 카미유 모네는 중병에 걸렸다.[72] 1878년에 둘째 아들 미셸이 태어나자, 카미유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72] 그해 가을, 그들은 베퇴유 마을로 이사하여 부유한 백화점 주인이자 예술 후원자인 에르네스트 오슈데 가족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오슈데는 모네에게 4점의 그림을 의뢰했다.[10][13] 1878년, 카미유는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73] 그녀는 다음 해에 사망했다.[13] 그녀의 죽음과 재정적 어려움 - 채권자들을 피하기 위해 한때 집을 떠나야 했었다 - 은 모네의 경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는 오슈데가 최근 여러 그림을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곧 파산했고, 재산을 되찾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1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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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르누아르, 화가 클로드 모네의 초상, 1875년,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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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뒤랑이 그린 알리스 오슈데, 클로드 모네의 두 번째 부인이자 블랑슈 오슈데 모네의 어머니, 18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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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와 오슈데 가족 1880년경c., 왼쪽부터: 클로드 모네, 알리스 오슈데, 장-피에르 오슈데, 자크 오슈데, 블랑슈 오슈데 모네, 장 모네, 미셸 모네, 마르타 오슈데, 제르멘 오슈데, 쉬잔 오슈데

모네는 죽은 아내의 유화 습작을 그렸다. 여러 해 후, 그는 친구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색을 분석하는 것이 자신에게 기쁨이자 고통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날 나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은 얼굴을 보면서 자동 반사적으로 체계적으로 색을 기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74] 존 버거는 이 작품을 "흰색, 회색, 보라빛 물감의 휘몰아침... 그녀의 얼굴을 영원히 지워버릴 끔찍한 상실의 눈보라. 사실, 이렇게 강렬하게 느껴지거나 주관적으로 표현된 임종 그림은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묘사했다.[75]

모네의 센강 연구는 계속되었다. 그는 1880년 살롱에 두 점의 그림을 제출했고, 그 중 하나가 채택되었다.[10] 그는 어두운 색조를 사용하여 센 강과 같은 풍경을 혹독한 날씨로 묘사하면서 인상파 기법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 10년의 나머지 동안 그는 자연의 원소적 측면에 집중했다.[34][63] 1881년 겨울의 주요 사건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다시 뒤랑-뤼엘에게 그림을 팔았다는 것이었다.[10] 모네가 계속해서 월세를 내기 힘들었기 때문에 베퇴유의 집주인은 임대 기간을 연장하는 것을 거부했고, 1881년 12월 모네는 에르네스트 오슈데의 부인인 알리스와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푸아시로 이사했다. 그가 쌓아온 빚 외에도 아들 장에게 적합한 학교를 찾아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76] 푸아시에서의 체류는 그리 길지 않았다. 1882년 12월 센 강이 범람하여 모네의 거주지가 침수될 위험이 있었다.[77]

그의 개인적인 삶은 인상주의자들과의 거리감을 만들었다.[13] 1883년 1월, 그는 에트르타로 돌아왔고, 남편의 죽음으로 미망인이 된 알리스 오슈데에게 편지를 보내어 죽음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12][13][71] 이 시기에 모네는 에르네스트 가 갑자기 아내를 다시 데려가겠다고 할까 봐 두려워했다. 2월 21일, 모네와 알리스 오슈데는 푸아시에서 마침내 다시 만났고, 그녀가 그의 곁에 머물 것임을 확신하였다.[78] 알리스의 셋째 딸 쉬잔 오슈데는 카미유 다음으로 모네의 "가장 선호하는 모델"이 되었다.[71]

1883년 4월, 모네는 뒤랑-뤼엘에게 파리와 노르망디를 오가며 자주 지나쳤던 도시인 베르농 근처에 집을 찾고 있다고 알렸다. 4월 29일, 그는 자녀들과 함께 베르농 근처 지베르니의 임대 주택으로 이사했고, 다음 날 알리스 오슈데가 뒤따랐다. 이 집은 나중에 모네 가족의 영구적인 거주지가 되었다.[79] 같은 해 그의 첫 주요 회고전이 열렸다.[63]

보르디게라와 경제적 문제 해결

1883년 12월, 클로드 모네와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이탈리아 리비에라와 제노아로 짧은 이탈리아 그림 여행을 떠났다.[80]

돌아오는 길에 모네와 르누아르는 마르세유 근처 라 에스타크(l´Estaque)에 잠시 들러 세잔을 방문한 후, 12월 말 지베르니로 돌아왔다. 이 여행 중에 모네는 매력적인 작은 마을 보르디게라를 발견했다. 1884년 1월 12일 뒤랑-뤼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곳을 "우리가 여행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81]

온화한 기후와 멋진 해안 풍경을 자랑하는 보르디게라는, 1883년까지 관광객, 특히 유럽 엘리트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지식인들에게 겨울 휴가지로 널리 인기를 얻었다. 이 도시의 주요 명소 중 하나는 모레노 정원으로, 당시 관광 안내서에는 지중해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즐거운 장소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정원 중 하나라고 묘사되었다(현재는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82] 1883년 초 유명한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는 '보르디게라의 예술적 특징'이라는 여행 책에 글을 썼다. 첫 장에서 그는 "진실로 보르디게라는 이탈리아라기보다 팔레스타인에 가깝다…"고 주장하며 오래된 마을, 자유롭게 자라는 야자수, 이국적인 정원을 언급한다. 그의 글에서 가르니에는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여덟 가지 관점을 추천한다.[83]

지베르니로 돌아온 직후 모네는 자신의 미술상 폴 뒤랑-뤼엘에게 이탈리아 보르디게라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혼자 가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자신의 희망을 아무에게도 (특히 르누아르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뒤랑-뤼엘에게 요청했다.[81] 모네는 처음에는 리구리아 지방 도시에서 3주를 보낼 생각이었으나, 결국 1월 18일부터 4월 5일까지 거의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보르디게라를 모티프로 한 그림을 38점 제작했다.[84] 모네는 보르디게라와 그 주변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했으며, 이를 마법 – 동화의 나라라고 묘사했다.[85] 독특한 빛과 풍요로운 식물은 완전히 새로운 도전 과제로 다가왔다. 그는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야자수들은 짜증나고, 모티프도 캔버스에 옮기기 극도로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무성해요"라고 썼다.[86]

보르디게라에 머무는 동안 모네는 처음에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오렌지와 레몬 나무"를 그릴 생각이었지만, 그를 정말 만족시키는 것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렌지류 나무를 모티프로 한 그림은 <레몬 나무 아래> 한 점만 제작했다.[87] 보르디게라에 머무는 동안 모네는 근처 돌체아쿠아(Dolceaqua)에 가서 그가 "우아함의 작은 보석"이라고 부른 다리를 그렸다.[88]

보르디게라 체류 기간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보르디게라의 풍경>, <올리브 나무>, <보르디게라의 빌라>, <모레노 정원>, <사쏘 계곡>, <돌체아쿠아>가 있다.

보르디게라 그림들은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 가지 설명[89]은 1882년 모네의 미술상 뒤랑-뤼엘이 파리 주식 시장 붕괴 이후 심각한 재정 손실을 입었고, 그 결과 그는 모네의 보르디게라 그림 몇 점을 받자마자 전당포에 맡겨야 했다는 것이다.[90] 자신의 최신 작품에 대한 비평가들의 반응을 간절히 듣고 싶어 했던 모네는 그 작품들이 전시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큰 좌절감을 느꼈다. 결국 뒤랑-뤼엘이 1886년 미국으로 떠난 후, 모네는 "우리는 (인상파 화가들은) 프랑스에서 잊혀지고 있는데, 당신은 미국에만 관심을 가진다"며 딜러를 비난하는 편지를 쓰는 것으로 극심한 좌절감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91]

마침내 보르디게라를 떠나면서 모네는 망통에 들러 <카프 마르탱>과 <몬테 카를로>를 그렸다.[92]

폴 뒤랑-뤼엘은 1884년에 모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의 재정적 어려움을 언급하며, 증권 중개인 테오도르-샤를 가달라(Theodore-Charles Gadala)와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가 그림을 구입했다고 전했다.[93] 모네의 채권자들과의 갈등은 그의 성공적인 그림 여행 덕분에 해결되었다. 1884년의 보르디게라 여행과[10][63] 1886년 네덜란드 튤립 그림 여행 덕분이었다. 그는 곧 귀스타브 제프루아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제프루아는 모네에 대한 기사를 발표했다.[10] 그의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모네의 그림들은 미국에서 팔렸고 그의 재정적 안정에 기여했다.[13] 그의 경력의 마지막 20년과는 대조적으로, 모네는 혼자 작업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혼자 작업하는 게 더 좋다고 느꼈으며, "번잡한 관광지나 세련된 도시 환경에서 벗어나 고독을 갈망"했다.[94][63] 이러한 열망은 알리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 반복적으로 나타났다.[94][71]

지베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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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수생정원, 2019년

1883년, 모네와 그의 가족은 지베르니의 집과 정원을 임대하여, 그 전까지는 누려보지 못한 가정의 안정을 찾았다.[13] 그 집은 베르농과 가스니 마을 사이의 주 도로 근처 지베르니에 위치해 있었다. 그림 작업실로 사용하던 헛간과 과수원, 작은 정원이 있었다. 이 집은 동네 학교와도 가까워 아이들이 쉽게 학교에 갈 수 있었고, 주변 풍경은 모네가 그림을 그리기 좋은 수많은 자연 공간이 존재했다.[95][96][97]

지베르니에 도착한 지 이틀 후, 모네는 에두아르 마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차표 비용이나 조문 복장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뒤랑-뤼엘에게 필요한 돈을 청원해야 했다.[98] 모네 외에도 필리프 뷔르티, 테오도르 뒤레, 앙토냉 프루스트, 에밀 졸라 등이 운구자 명단에 있었다.

지베르니에서 가족들은 정원을 가꾸고 조성했으며, 뒤랑-뤼엘이 그의 그림을 판매하는 데 성공을 거두면서 모네의 재정 상황은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99] 정원은 40년 동안 모네에게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었다.[100][101] 1890년, 모네는 그 집을 구입했다.[63] 1890년대에는 온실과 두 번째 스튜디오를 지었는데, 이 스튜디오는 채광창이 잘 갖춰진 넓은 건물이었다.

모네는 정원사에게 매일 지시를 내렸고, 식재를 위한 정확한 디자인과 배치를 하고, 꽃 구매 영수증과 식물학 책 컬렉션을 보관했다. 모네의 재산이 늘면서 그의 정원도 진화했다. 그는 일곱 명의 정원사를 고용한 후에도 여전히 직접 정원을 관리했다.[102] 모네는 수생 목초지가 있는 추가 토지를 구입했다.[10] 프랑스 토종 흰 수련과 남아메리카와 이집트에서 수입한 재배종을 함께 심었고, 그 결과 노란색, 파란색, 흰색 수련과 점차 분홍색으로 변하는 다양한 색깔의 수련이 피어났다.[103] 1902년, 그는 수생정원의 크기를 거의 4000제곱미터까지 늘렸다. 연못은 1901년과 1910년에 확장되었고, 다양한 시점을 포착할 수 있도록 이젤이 곳곳에 설치되었다.[13][101]

인상주의의 한계에 불만을 품은 모네는 좌절감을 해소하기 위해 단일 주제—건초더미, <사시나무>, 루앙 대성당—를 묘사하는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34][71] 이러한 연작들은 비평에서도, 재정적으로도 광범위한 성공을 가져왔다. 1898년에는 61점의 그림이 쁘띠 갤러리(Petit Gallery)에서 전시되었다.[104] 그는 또한 센 강 새벽을 묘사한 <센 강 위의 아침> 연작을 시작했다.[13] 1887년과 1889년에는 <벨릴>(Belle Île) 연작을 전시하여 비평가들로부터 열광적인 평가를 받았다.[94] 모네는 "배운 공식을 우회하고, 자연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에게만 고유한, 다른 누구와도 다른 새로운 미학적 언어"를 찾고자 하는 희망으로 그 장소를 선택했다.[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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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베르니 집의 큰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모네

런던

1899년 9월, 모네는 알리스 오슈데, 제르멘 오슈데와 함께 런던에서 6주간 체류를 했다(모네는 1870~71년에 런던에 망명한 경험이 있었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그해 봄부터 런던에 살고 있던 아들 미셸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템스 강과 런던 남부의 멋진 전망을 제공하는 유명한 사보이 호텔 6층 스위트룸에 머물렀다.[105] 모네는 이 방문에서 활력을 얻었고, "나는 런던을 정말 사랑한다! 하지만 겨울에만 사랑한다. 안개가 없으면 런던은 아름다운 도시가 아닐 것이다. 웅장함을 주는 것은 바로 그 안개다."라고 말했다.[105]

그들이 체류하는 동안 모네 부부는 영국의 여주인이자 예술 후원자인 메리 헌터(1857–1933)와 친구가 되었다.[105] 메리 헌터는 모네 부부를 그녀의 언니이자 작곡자인 에텔 스미스를 포함한 사교계 인사들에게 소개했다. 모네는 1900년 2월과 3월, 그리고 1901년 1월부터 3월까지 두 번 더 같은 호텔에 머물렀다. 1901년 방문에서는 흉막염으로 인해 모네가 그림도 못그리고 3주 동안 호텔 방에 머물러야 했다.[106] 그는 체류 기간 동안 이른 아침 일출 때 워털루 다리를 그렸고, 오후에는 채링 크로스 다리를 그렸다. 그의 두 번째 체류 기간 동안에는 오후 늦게와 일몰 때 성 토머스 병원에서 국회의사당을 그리기 시작했다.[106] 메리 헌터는 모네가 병원에서 적절한 관측 지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왔다.[105] 모네는 총 41점의 워털루 다리, 34점의 채링 크로스 다리, 19점의 국회의사당 연작을 제작했다.[107] 그림들은 1904년까지 스튜디오에서 계속 수정되었다. '런던 템스 강 풍경 - 1900-1904' 연작은 1904년 5월과 6월에 전시되었다.

수련

1899년, 그는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의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의 마지막이자 "가장 야심찬" 회화 연작이었다.[41][108] 그는 1900년에 주로 일본식 다리에 초점을 맞춘 이 첫 번째 정원 그림들을 전시했다.[13]

교차하는 빛과 거울 같은 반사가 있는 수련의 묘사는 그의 작품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109] 1910년대 중반까지 모네는 "완전히 새롭고 유동적이며 다소 대담한 회화 스타일"을 이루었는데, 여기에서 수련 연못은 거의 추상 예술의 출발점이 되었다.[110] 클로드 로제-마르크스(Claude Roger-Marx)는 모네의 첫 수련 연작 성공적인 1909년 전시회에 대한 평론에서 그가 "현실과 결합한 추상과 상상력의 궁극적인 단계에 도달했다"고 언급했다.[111] 이 전시회는 "수련, 수경 연작"이라는 제목으로 42점의 캔버스 작품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의 "가장 크고 가장 통일된 연작"이었다.[13] 그는 결국 250점 이상의 수련 그림을 그렸다.[60]

그의 집에서 모네는 프랑스, 영국, 일본, 미국의 예술가, 작가, 지식인, 정치인들을 만났다.[17] 1887년 여름, 그는 존 싱어 사전트를 만났고, 그의 야외 인물화 실험에 흥미를 느꼈다. 두 사람은 이후 서로에게 자주 영향을 미쳤다.[71]

베네치아

1908년 가을, 알리스는 친구인 메리 헌터가 빌려둔 베네치아의 바르바로 궁전에서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112][13] 처음에는 모네가 베네치아 방문을 꺼려했다. 알리스는 딸 제르멘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모네는 떠나는 것을 매우 슬퍼했어... 자신의 연못과 꽃을 포기하기 힘들었거든.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정말이지 여행의 즐거움이 망가질 지경이었단다."[112] 모네 부부는 10월 1일 이탈리아에 도착했다.[113] 모네 부부는 헌터와 2주를 함께 지낸 후, 전망이 좋은 브리타니아 호텔로 옮겼다.

처음에는 모네가 도시 그림을 그리기를 주저했지만, 알리스는 제르멘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네치아는 너무 아름답고 유혹적이지만, 누가 저 놀라운 효과들을 표현할 수 있겠니? 모네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라는 의견을 밝혔다.[112] 모네는 곧 매료되어 "내가 젊었을 때, 모든 대담함을 가졌을 때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불행한가.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내가 늙었다는 사실을 거의 잊었다."라고 썼다. 매일 부부는 오전 8시 전에 곤돌라를 타고 도시를 탐험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점심 식사 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7시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다.[112] 그들이 오래 머무르고 날씨가 추워지자 알리스는 모네가 야외에서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따뜻한 옷을 찾아다녔고, 심지어 젊은 예술가 루이 애스턴 나이트에게서 모피 코트를 구해 주기도 했다.[105] 그들이 3개월간 체류한 동안, 모네는 대운하와 같은 주제를 여러 시간대에 묘사한 연작을 포함하여 베네치아 그림 37점을 제작했다. 여기에는 대운하 5점과 산조르조마조레에서 바라본 두칼레 궁전, 그리고 황혼의 산조르조마조레가 포함된다. 12월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부는 니스 근처 카뉴에서 르누아르와 4일간 머물렀다. 지베르니로 돌아온 후 일부는 미완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네는 1908년 12월 12일 베른하임-죈 형제에게 모든 베네치아 그림을 각 12,000프랑에 팔았다.[112]

시력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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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 정원에 있는 모네, 1917년경c.

모네의 두 번째 부인 알리스는 1911년에 사망했고, 모네가 특히 좋아했던 알리스의 딸 블랑슈와 결혼했던 그의 장남 장은 1914년에 사망했다.[114] 이들의 죽음은 모네를 우울하게 만들었는데, 블랑슈가 그를 돌보았던 이유도 있었다.[13][115] 이 시기에 모네는 백내장의 첫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115] 1913년, 모네는 독일 안과 의사 리하르트 리브라이히와 상담하기 위해 런던으로 여행했다. 그는 새 안경을 처방받았고 오른쪽 눈의 백내장 수술을 거부했다.[116] 다음 해, 클레망소의 격려를 받아 모네는 "수생 정원에 바쳐진 장식 회화 연작"을 만들기 위해 새롭고 큰 스튜디오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13]

이후 몇 년간 그는 색채 인식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의 넓은 붓놀림은 더 넓어졌고 그의 그림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그는 물감 튜브에 라벨을 붙이기 시작했고, 팔레트 위에 엄격한 순서를 유지했으며, 눈부심을 상쇄하기 위해 밀짚모자를 써야했다.[116] 그는 아이디어와 특징을 마음속으로 공식화하고 "큰 덩어리로 모티프를 취하여" 기억과 상상력을 통해 전사하는 방식으로 그림에 접근했다. 이것은 그가 "가까이서 본 색조와 색채의 미세한 음영"에 "무감각"했기 때문이었다.[117]

모네는 은퇴하면서 작품 생산량이 줄었지만, 1914년부터 1918년까지 프랑스 정부를 위해 여러 패널화를 제작하여 큰 재정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나중에는 국가를 위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116][101][111] 그의 "회화 연작" 작업은 주로 1916년부터 1921년경에 이루어졌다.[13] 클레망소가 백내장 수술을 다시 권했지만[116] 오노레 도미에메리 카사트의 수술 실패 사례를 알고 있었던 모네는 불안해하며 "내가 사랑하는 이 작은 것들을 포기하는 것"보다 차라리 시력이 나빠져 그림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116] 1919년, 모네는 "전력으로" 풍경화 연작을 시작했지만,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111] 10월까지 날씨가 나빠 모네가 야외 사생을 할 수 없었고, 작품 활동 재개가 힘들 것을 예상했음에도 11점의 수련 그림 중 4점을 팔았다.[111] 이 연작은 동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그의 후기 작품들은 딜러와 수집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는 한 수집가로부터 20만 프랑을 받았다.[111]

1922년, 동공확대제 처방으로 잠시 동안 완화되었다. 그는 결국 1923년에 백내장 수술을 받았지만, 지속적인 청색증과 무수정체 조치용 안경때문에 힘들어했다. 그래도 "실제 색상을 볼 수 있게 된" 그는 수술 전의 캔버스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116] 칼자이스 선글라스 렌즈를 받고 모네는 매우 좋아했지만, 그의 왼쪽 눈은 곧 검은 렌즈로 완전히 가려져야 했다. 1925년 들어 시력 장애가 개선되었고, 그는 수술 전 제작한 작품 중 일부를 수정하기 시작했는데, 이전보다 더 파란 색조가 강해졌다.[118][116]

제1차 세계 대전 중 막내아들 미셸이 참전했고, 모네는 전사한 프랑스 군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버드나무 연작을 그렸다.[119] 그는 전쟁 중 정원 장식에 깊이 몰두했다.[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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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법

요약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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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아르장퇴유의 클로드 모네, 1874년, 노이에 피나코테크

모네는 "인상주의의 원동력"으로 묘사되어 왔다.[120] 인상파 화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의 고유 색에 대한 빛의 효과와 색깔들이 서로 병치될 때의 효과를 이해하는 것이었다.[121] 모네의 자유분방한 스타일과 색채 사용은 "거의 비물질적"이며 "인상주의 스타일의 전형"으로 묘사되어 왔다. '인상, 해돋이'는 순전히 보이는 것만을 묘사하는 "근본적인" 인상주의 원칙의 예이다.[34][122] 모네는 빛의 효과에 매료되었고 야외 사생을 즐겼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장점은 자연 앞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고, 가장 덧없는 효과에 대한 나의 인상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라고 믿었다.[12][122] 모네는 "공기를 그리고 싶어서" 현대 생활의 주제들을 야외 빛과 결합하곤 했다.[3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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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싱어 사전트, 숲 가장자리에서 그림 그리는 클로드 모네, 1885년, 테이트 브리튼

모네는 빛을 그림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그는 때로는 준비 없이 한 번에 그림을 완성하기도 했다.[124] 그는 빛이 색깔과 현실 인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고자 했다.[34] 빛과 반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186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그의 생애 내내 지속되었다.[31] 그가 런던에 처음 머물렀을 때, 그는 예술가와 모티프 사이의 관계, 즉 그가 "봉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107] 그는 연필 드로잉을 사용하여 주제와 모티프를 빠르게 기록했다.[13]

모네의 풍경화는 철도와 공장 같은 산업 요소를 강조했으며, 그의 초기 바다 풍경화에서는 침울한 자연과 지역 주민들을 차분한 색상으로 묘사했다.[38][53] 비평가이자 모네의 친구인 테오도르 뒤레는 1874년에, 모네가 "시골 풍경에 거의 끌리지 않았다... 그는 아름답게 꾸며진 자연과 도시 풍경에 특히 끌렸고, 가급적이면 꽃이 핀 정원, 공원, 숲을 그렸다."고 언급했다.[41] 인물과 풍경을 함께 묘사할 때, 모네는 풍경이 단순한 배경이 되지 않고 인물이 구도를 지배하지 않기를 바랐다.[71] 모네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는 데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는 르누아르를 꾸짖는 결과를 낳았다.[71] 마네는 종종 파리의 교외 및 시골 레저 활동을 묘사했으며, 젊은 예술가로서 정물화를 실험하기도 했다.[31][53] 1870년대에 들어서는, 그는 점차 교외 및 도시 풍경에서 벗어났으며, 이러한 풍경을 묘사하는 것도 빛에 대한 그의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60] 동시대 비평가들은—그리고 후대 학자들도—그가 벨릴(Belle Île) 바닷가 바위들을 그린 것은 인상주의 회화의 현대 문화에서 벗어나 원시적인 자연으로 나아가려는 열망을 나타냈다고 보았다.[94]

외젠 부댕을 만난 후, 모네는 새로운 회화적 표현 방법을 찾는 데 전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젊은 시절 살롱을 방문하여 나이든 화가들의 작품을 익혔고, 다른 젊은 예술가들과 친구가 되었다.[120] 아르장퇴유에서 보낸 5년 동안, 그는 작은 떠다니는 스튜디오와 센 강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빛과 반사의 효과를 연구하였다. 그는 장면이나 사물보다는 색깔과 형태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밝은 색깔을 점과 선, 물감 얼룩으로 사용했다. 글레르 스튜디오의 아카데미적 가르침을 거부한 그는, 이론에서 벗어나 "나는 새가 노래하듯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125] 모네는 부댕, 도비니, 종킨트, 쿠르베, 코로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종종 아방가르드 미술의 발전과 함께 보조를 맞췄다.[32][12][71][126]

1877년, 모네는 생라자르역 연작을 통해 연기와 증기가 색깔과 가시성에 미치는 영향, 즉 때로는 불투명하고 때로는 투명한 방식을 연구하였다. 그는 이 연구를 풍경에 안개와 비의 효과를 그리는 데 더 활용할 예정이었다.[127] 대기의 효과에 대한 연구는 여러 연작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모네는 같은 주제[128]를 다른 빛, 다른 시간, 그리고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그렸다. 이 과정은 1880년대에 시작되어 1926년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후기 에서 모네는 인상주의 스타일을 "초월"하여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기 시작했다.[3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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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의 모네, 1920년경c.

모네는 1870년대에 색조를 다듬어 어두운 색조의 사용을 의식적으로 최소화하고 파스텔 톤을 많이 사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는 작고 다양한 붓놀림을 사용하는, 부드러운 접근 방식과 일치했다. 그의 색조는 1880년대에 다시 변화를 겪었는데, 이전보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 간의 조화를 더 많이 강조하였다.[13] 그는 1880년대 후반부터 구도를 단순화하고 넓은 색상과 톤을 제공할 수 있는 주제를 찾았다.[116][130] 그는 점점 더 빨간색과 노란색 색조를 사용했는데, 이는 베네치아 여행 이후 처음 시작된 경향이었다.[122] 모네는 이 시기에 종종 새로운 도전적인 주제를 찾아서 홀로 프랑스에서 노르망디, 런던, 리베라루앙 등을 여행했다.[1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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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 대성당, 햇빛 속의 파사드, c. 1892–94, 클라크 미술 연구소, 윌리엄스타운 (매사추세츠주)

1923년 시력 수술 후, 모네는 10년 전의 스타일로 돌아왔다. 그는 화려한 색상이나 "거친 적용" 대신 파란색과 녹색의 강조된 색조를 적용했다.[116] 백내장으로 고통받는 동안 그의 그림은 더 넓고 추상적으로 변했다. 스타일 변화는 질환의 부산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16] 모네는 시력 저하로 인해 종종 큰 캔버스에 작업했으며, 1920년에는 넓은 그림에 너무 익숙해져 작은 캔버스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인정했다.[34][111] 그의 백내장이 작품에 미친 영향은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레인 등(1997)은 1860년대 후반부터 백내장이 악화되면서 선명한 선이 감소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122] 정원은 그의 예술 전반에 걸쳐 초점이었으며, 특히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후기 작품에서 두드러졌다.[41][101] 다니엘 빌덴슈타인은 그의 그림에서 "혁신으로 풍요로워진" "매끄러운" 연속성을 언급했다.[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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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의 모네, 1920년경c.

1880년대부터, 특히 1890년대에 걸쳐 모네의 특정 주제 연작 그림들은 빛과 날씨의 다양한 조건을 기록하고자 했다.[13] 낮 동안 빛과 날씨가 변함에 따라 그는 캔버스를 바꾸어 가며—때로는 한 번에 8점까지 작업하며—보통 하나의 그림에 한 시간씩 투자했다.[13] 1895년, 그는 루앙 대성당 그림 20점을 전시했는데, 빛, 날씨, 분위기 등의 다양한 조건에 따른 파사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13] 이 그림들은 웅장한 중세 건물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 표면을 가로지르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132] 이 연작을 위해 그는 자신만의 액자를 만드는 실험을 했다.[133]

그의 첫 전시된 연작은 건초더미였다. 15점의 그림은 1891년 뒤랑-뤼엘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다. 1892년 그는 루앙 대성당 풍경 26점을 제작했다.[121] 1883년과 1908년 사이에 모네는 지중해로 여행하며 랜드마크, 풍경, 해경을 그렸는데, 여기에는 베네치아 연작도 포함된다. 런던에서는 런던 국회의사당, 채링 크로스 다리, 워털루 다리, 웨스트민스터 다리 풍경 등 4가지 연작을 그렸다. 헬렌 가드너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모네는 동일한 형태 위를 움직이는 빛에서 보이는 시간의 흐름을, 과학적인 정밀함으로 비할 데 없이 탁월한 기록으로 남겼다.[134]

수련

런던에서 돌아온 후, 모네는 주로 자신의 정원에서 수련, 연못, 다리 등의 자연을 그렸다. 1900년 11월 22일부터 12월 15일까지 뒤랑-뤼엘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에 약 10점의 수련 연작이 전시되었다. 이와 동일한 전시회는 1901년 2월 뉴욕시에서 개최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44]

1901년 모네는 그의 집 연못을 루(Ru), 즉 지역 수로 반대편에 있는 초원을 사들여 확장했다. 그 후 그는 야외 작업과 스튜디오 작업을 병행했다.[136]

수련 그림들은 그의 정원의 변화와 함께 발전했다. 또한, 1905년경 모네는 연못의 경계를 버리고 원근법을 수정함으로써 점차 자신의 미학을 변경했다. 그는 또한 직사각형 캔버스에서 정사각형, 그리고 원형으로 캔버스의 형태와 크기를 변경했다.[44]

이 캔버스들은 제작은 상당히 어려웠다. 모네는 완벽한 효과와 인상을 찾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들여 수정 작업을 했다. 그는 성공적이지 않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파괴했다. 그는 작품에 만족할 때까지 뒤랑-뤼엘 전시회를 계속 연기했다. 2006년부터 여러 차례 연기된 끝에, 2009년 5월 6일 '수련'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1903년부터 1908년까지의 그림 48점, 즉 풍경화와 수련 장면 연작으로 구성된 이 전시회는 다시 성공을 거두었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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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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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에 있는 모네 가족묘

1926년 12월 5일, 모네는 86세에 폐암으로 사망하여 지베르니 교회 묘지에 묻혔다. 모네가 간소한 장례를 원하여 약 50명만이 장례식에 참석했다.[137] 그의 장례식에서 클레망소는 관 위에 덮인 검은 천을 제거하며 "모네에게는 검은색이 안 돼!"라고 말하고 꽃무늬 천으로 교체했다.[138] 그가 사망했을 때 '수련'은 "기술적으로 미완성"이었다.[60]

모네의 집, 정원, 수련 연못은 1966년 미셸에 의해 프랑스 학술원의 하부조직인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에 기증되었다. 집과 정원은 클로드 모네 재단을 통해 복원 후 1980년에 대중에게 개방되었다.[139] 모네의 기념품과 그의 삶과 관련된 다른 물건들 외에도, 그의 예술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던 그의 우키요에 목판화 컬렉션이 소장되어 있다.[140] 집과 정원은 인상주의 미술관과 함께 전 세계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지베르니의 주요 명소이다.

유산

요약
관점

모네는 바지유, 시슬레, 르누아르, 피사로 등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31][129] 모네는 당대의 인상주의 화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였으며, 그의 인상주의에 대한 공헌은 "19세기 후반 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17][141] 모네의 작품에 대해 빌덴슈타인은 "그의 작품들이 너무 방대해서, 그의 야망과 다양성으로 인해 중요성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131] 지베르니에서 백내장의 영향 아래 제작된 그의 그림들은 20세기 미술 및 현대 추상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116][131] 그의 후기 작품들은 객관 추상주의에 "주요한" 영감을 주었다.[142] 엘즈워스 켈리는 지베르니를 경험한 후, 그곳에서 창작된 모네의 작품들에 경의를 표하며 <타블로 베르트>(Tableau Vert, 1952)를 제작했다.[129] 모네는 전통과 모더니즘 사이의 "중개자"로 불려왔다. 그의 작품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에 대해 연구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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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수련

1927년 5월, 프랑스 정부와의 오랜 협상 끝에 27점의 패널 그림이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되었다.[111] 그의 후기 작품들은 예술가, 미술사학자, 비평가, 대중에게 무시되었기 때문에, 전시회에 참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129] 1950년대에 모네의 후기 작품들은 전쟁의 직설적이고 이념적인 예술에 관심이 없었던 추상표현주의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129][34] 1952년 앙드레 마송의 에세이는 그림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었고, 1956~1957년에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평가에 영감을 주었다.[129] 다음 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장하고 있던 수련 그림들이 불탔다.[129]

1978년, 50년 동안 황폐해졌던 모네의 정원이 복원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100] 2004년, 안개 속 햇빛의 런던 국회의사당 (Londres, le Parlement, trouée de soleil dans le brouillard; 1904)은 2,010만 미국 달러에 팔렸다.[143] 2006년, 학술지 영국 왕립학회 회보는 이 그림들이 템스강 건너편 성 토머스 병원에서 현장 제작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144][145] 1981년, 로널드 픽반스는 1880년 이후 모네의 작품들이 학문적 관심을 점점 더 많이 받고 있다고 언급했다.[146]

<디에프 근처 절벽>은 두 차례 도난당했는데, 한 번은 1998년(이때 미술관 큐레이터는 절도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두 공범과 함께 5년 2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이고, 또 한 번은 2007년 8월이었다.[147] 그림은 2008년 6월에 회수되었다.[148]

2001년 11월 14일, 클로드 모네의 161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구글 로고가 모네의 서명 스타일로 묘사된 구글 두들이 제작되었다.[149] 이는 누군가의 생일을 기념하는 최초의 구글 두들이었다.

모네의 1873년 파리 근처 센강을 가로지르는 철도교를 그린 <아르장퇴유의 철교>가 2008년 5월 6일 뉴욕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익명의 전화 입찰자에게 4,140만 달러라는 기록적인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모네 그림의 이전 최고 기록은 3,650만 달러였다.[150] 몇 주 후, <수련> 연작 중 수련 연못(Le bassin aux nymphéas)이 2008년 6월 24일 런던 크리스티스 경매에서[151] 40,921,250파운드(약 80,451,178달러)에 판매되어, 모네의 판매가 기록을 거의 두 배로 경신했다.[152] 이 구매는 당시 가장 비싼 그림에서 상위 20위 안에 드는 가격이었다.

2013년 10월, 모네의 그림 <베퇴유의 교회>와 수련 연못이 빌마 바티스타(Wilma Bautista)를 상대로 한 뉴욕 법정 소송의 대상이 되었다. 바티스타는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내인 이멜다 마르코스의 전 보좌관으로,[153] 스위스 구매자에게 '수련 연못'을 3,200만 달러에 팔았다. 이 그림들과 다른 두 점은 이멜다가 국가 자금을 사용하여 구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바티스타의 변호사는 보좌관이 이멜다를 위해 그림을 팔았지만, 그녀에게 돈을 돌려 줄 기회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필리핀 정부는 그림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153] <수련 연못>, 일명 <지베르니의 수련 연못 위의 일본식 다리>는 모네의 유명한 수련 연작 중 일부이다.

R. W. Meek의 역사 소설 《꿈 수집가》 1권[154]과 2권[155]에서 클로드 모네에 대한 동정적인 초상을 찾을 수 있다. 소설에서 모네의 히스테리성 실명은 꿈 수집가 줄리 포레트의 최면을 통해 재해석되고 치료된다.

나치 약탈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과 독일 점령 국가들의 나치 정권 하에서, 유대인 미술품 수집가들은 나치와 그들의 요원들에 의해 작품을 강탈당했다. 도난당한 예술품 중 일부는 정당한 소유자에게 반환되었지만, 법정 싸움의 대상이 된 작품들도 있다. 2014년, 뮌헨에서 숨겨진 예술품 더미가 극적으로 발견되었고, 한 유대인 거물 소매상이 소유했던 모네의 그림이 아돌프 히틀러의 공식 약탈 미술품 딜러 중 한 명인 힐데브란트 구를리트의 아들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의 여행 가방에서 발견되었다.[156][157]

아래는 나치가 약탈한 모네 작품의 예이다:

  • <바닷가>, 오스트리아인 아달베르트와 힐다 팔라기(Hilda Parlagi)가 1936년 구매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빈 창고에 그림을 남겨두고 도주했다. 이 그림은 2016년 프랑스에서 다시 나타났고 2024년에 팔라기 부부의 손녀들에게 반환되었다.[158]
  • <지베르니의 건초더미>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한 프랑스 유대인 미술상 르네 김펠 소유였다.[159][160]
  • <수련>, 1940년 폴 로젠버그로부터 나치에 의해 도난당함.[161]
  • <몽소 공원>, 이전에 루트비히 카이너의 소유였으나, 그의 방대한 컬렉션과 함께 나치에게 약탈당했다.[162]
  • <아르장퇴유 정원의 휴식>, 이전에 헨리와 마리아 뉴먼의 소유였으나, 베를린 은행 금고에서 도난당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합의를 보았다.[163]
  • <아니에르의 센 강/센 강의 바지선>, 이전에 페르낭 알펜 부인이 소유했으나, 1940년 7월 10일 파리 독일 대사관 요원에 의해 압수되었다.[164]
  • <두칼레 궁전>과 1880년작 <베퇴유 근처 양귀비 밭>은 이전에 막스 엠덴의 소장품이었으며, 반환 청구의 대상이 되었다.[165][166] <연못, 눈 효과>는 리하르트 젬멜의 상속인들과의 합의 대상이었다.[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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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클로드 모네의 작품 목록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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