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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풍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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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풍익(左馮翊)[1]은 중국 전한의 관직으로, 수도 주변 지역인 삼보를 관할하는 특수한 지방 장관이다. 이후에 관할 영역이 군인 풍익군(馮翊郡)으로 바뀌면서 관직도 태수, 즉 풍익태수(馮翊太守)로 바뀐다. 이름은 《시경》 권아편의 유빙유익(有馮有翊)에서 유래했다.
전한
요약
관점
고제가 삼진을 정복하고 수도를 이곳의 약양현(櫟陽縣)[2]으로 옮겨, 고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장안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수도로 기능했다.
전한의 수도권을 관할하는 직책은 경조윤, 좌풍익, 우부풍이 있으며 이는 모두 전한의 내사와 관련이 있다. 전한 고제가 새나라를 정복하고서 위남군과 하상군을 세웠는데 좌풍익의 관할 영역은 이 중 하상군에 상당한다. 고제 9년(기원전 198년), 전한의 수도권 지역의 군을 폐지하고 진나라처럼 내사를 두면서 하상군도 폐지됐다. 무제 건원 6년(기원전 135년)에 내사의 관할 영역을 좌우로 나누면서 우내사에 옛 위남군과 중지군이 속하고 좌내사에 옛 하상군이 속했다. 태초 원년(기원전 104년)에 좌내사를 고쳐서 처음으로 좌풍익을 두었다.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23만 5101호, 91만 7822명, 24현을 관할했다. 현대의 셴양시 동부와 옌안시 남부, 웨이난시의 웨이허 이북 지역, 그리고 퉁촨시에 걸쳐 있었다.
후한
13성 37,090호 145,195명을 거느렸다. 후한말 헌제 탈출전시기 이각, 곽사의 난으로 경조윤, 우부풍과 함께 크게 황폐화되었다. 213년(건안 18년) 강족과 선비족의 연이은 침공으로 군역이 황폐화되고 행정력을 상실한 북지군을 대우현에 옮겨 설치하고 지양현을 부풍군으로 이관되면서 군역이 축소되었고 옹주가 설치되면서 옹주의 관할로 옮겨졌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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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
서진에서는 8현 7,700호를 거느렸다. 영가의 난시기 장안을 공격한 전조 유요에 의해 점령되었다. 본군의 실향민들은 남양군을 비롯한 강남지방에 정착했다. 조예시기 치소가 있던 고릉현이 고륙현(高陸縣)으로 개명되어 경조군으로 이관되자 임진현으로 치소가 옮겨졌다.[5]
북위
6현을 거느렸다. 본래 옹주에 소속되었으나 화주로 이관되었다. 서위는 동주(同州)로 주명을 고쳤는데, 이후 주현제를 실시할 때 풍익군의 주명이 되는 동주가 이에서 비롯되었다.[6][7]
수
8현 91,572호를 거느렸는데, 지금의 웨이난시일대로 옮겨 설치되면서 군역이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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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618년(당 고조 무덕 원년), 동주(同州)로 개명했고 수나라 풍익군의 8속현을 통치했다. 620년(당 고조 무덕 3년) 조읍현 동쪽에 하빈현(河濱縣)이 신설되었다. 627년(당태종 정관 원년), 하빈현을 폐지했다. 742년(당 현종 천보 원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풍익군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758년(당 숙종 건원 원년), 주현제가 재실시되면서 동주로 개명되었다. 760년(당 숙종 건원 3년), 포주를 하중부로 승격시켰고 조읍현이 하중부로 이관되었고 하서현은 하양현으로 개명되어 하중부로 이관되었다. 과거 9현 53,315호 232,016명을 거느렸으나 천보연간에는 상기한 행정개편으로 속현은 6현으로 줄었고 60,928호 408,705명을 거느렸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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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풍익군이라는 군명을 쓴 동주(同州)되었고 주급은 망(望)급이었다. 정국군절도(定國軍節度)가 파견되었다. 숭녕연간에는 81,011호 233,965명이 살았다. 백질려(白蒺藜)와 날로 익힌 건지황(生熟乾地黃)을 공납으로 바쳤다. 6현을 두었다.[9]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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