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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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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강목공 호연 익(雁門剛穆公[1][2] 呼延翼[주 1], ? ~ 309년 12월 18일(음력 11월 1일)[1][2][3])은 오호 십육국 시대 한나라(훗날의 전조)의 관료·군인이자 외척으로, 흉노 귀성(貴姓) 중 하나인 호연씨 출신이다.[6][2] 개국황제 유연(광문제)의 첫 황후인 호연황후[7][8]와 종정 호연유[9][10]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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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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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봉 원년 10월 3일[갑술일](308년 11월 2일)[3], 한왕 유연이 황제를 칭하고 즉위하였다(광문제).[11][12][13][7][8][4][14][15] 같은해 12월 5일[을해일](309년 1월 2일)[3], 어사대부 호연익은 대사공에 임명되고 안문군공에 봉해졌다.[12][16][7][8][4][17][15]
하서 원년(309년) 10월, 광문제는 초왕 유총·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왕미·시안왕 유요·여음왕 유경 등에게 50,000명의 정예 기병들을 이끌고 진나라(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사공 호연익은 보병들을 이끌고 후속부대로서 뒤따랐다.[12][18][1][2][5][19][20] 10월 21일[병진일](309년 12월 9일),[3] 한군이 의양에 다다르자, 불과 한 달 전에 격퇴된 그들이 얼마 안 가 또다시 쳐들어 오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한 진나라 조정은 매우 두려워하였다.[1][2][5][19] 그 사이에 유총 등이 이끄는 한군은 하남에서 진군을 격파하고,[12][18][20] 10월 26일[신유일](309년 12월 14일)[3]에는 서명문(西明門)[주 2]에까지 육박하여 그곳에 진을 쳤다. 그때 대하문(大夏門)[주 3]에 진을 치고 있던 한군의 장수 정로장군(征虜將軍) 호연호(呼延顥)[주 4]가 그날 밤에 진군의 장수 양주독호(督護) 북궁순과 호군 가윤(賈胤)[주 5]이 이끄는 1,000명의 결사대에게 진지를 습격당해 참살당하였다. 이튿날인 10월 27일[임술일](309년 12월 15일),[3] 유총은 잠시 군대를 낙양성 남쪽으로 후퇴시키고 낙수 가에 진을 쳤다.[12][18][1][2][5][19][20]
같은해 11월 1일[을축일](309년 12월 18일),[3] 후방에서 이미 대양(大陽)에 도착해 있던 한나라 군대 내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반란이 일어났다.[19] 호연익은 반란을 일으킨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한나라의 수도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광문제는 조서를 내려 유총에게 회군을 명하였으나, 유총이 진군은 나약한 데다가 호연호·호연익 두 장수가 죽었다고 하여 군대를 되돌릴 수는 없다면서 그대로 남아서 낙양을 공격하게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1][2][5][19] 한군은 유총의 지휘 아래 낙양성에 대한 포위 공격을 이어갔으나, 동해왕 사마월의 지휘 아래 농성하던 진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고, 그들에게 기습까지 당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12][18][1][2][22][19][20] 결국 한군은 낙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11] 평양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12][23][1][2][24][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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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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