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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디킨슨
영국의 음악가, 아이언 메이든의 멤버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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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디킨슨(영어: Bruce Dickinson, 1958년 8월 7일 ~ )은 영국의 가수, 작곡가, 음악가, 항공사 파일럿, 기업가, 작가, 방송인이다. 헤비 메탈 밴드 아이언 메이든의 리드 싱어로, 폭넓은 오페라 보컬 스타일과 활기찬 무대 존재감으로 유명하다.
노팅엄셔주 워크소프에서 태어난 디킨슨은 1970년대 셰필드 학교와 런던 대학 재학 중 작은 펍 밴드를 선도하는 음악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79년, 그는 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 메탈 밴드 샘슨에 합류했고, 그와 함께 "브루스 브루스"라는 예명으로 약간의 인기를 얻었고, 두 개의 스튜디오 레코드에서 공연을 했다. 1981년 샘슨을 떠나 아이언 메이든에 합류하여 폴 디애노를 대체하였으며 1982년 음반 《The Number of the Beast》로 데뷔하였다. 그가 밴드에 처음 재직하는 동안, 그들은 미국과 영국의 플래티넘과 골드 음반을 1980년대에 발행했다.
디킨슨은 1993년 아이언 메이든(블레이즈 베일리로 대체됨)을 그만두고 솔로 활동을 추진했는데, 그는 다양한 헤비 메탈과 록 스타일로 실험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1999년에 기타리스트 아드리안 스미스와 함께 밴드에 다시 합류했고, 그는 후속 스튜디오 음반을 5개 발매했다. 아이언 메이든으로 돌아온 이후 2005년에 한 차례 더 솔로 음반 《Tyranny of Souls》를 발표하였다. 그의 작은 사촌인 롭 디킨슨은 영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캐서린 휠의 리드 싱어였고, 그의 아들 오스틴은 메탈코어 밴드 라이즈 투 레메인을 리드했다.
음악 분야에서의 그의 경력 외에도, 디킨슨은 그의 다양한 다른 활동들로 잘 알려져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는 아스트라에우스 항공의 상업용 비행사로서 경력을 쌓았고, 이로 인해 아이언 메이든의 개조된 전세 항공기인 에드 포스 원을 세계 투어 중에 사로잡는 등 언론에서 보도된 여러 가지 벤처 사업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스트라에우스의 폐쇄에 이어 2012년 자체 항공기 정비와 조종사 훈련 회사를 설립했다. 디킨슨은 2002년~2010년부터 BBC 라디오 6 뮤직에서 자신의 라디오 쇼를 선보였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주최하고, 소설과 영화 대본을 집필했으며, 로빈슨 브루어리로 성공적인 맥주를 만들고, 국제적으로 펜싱에서 경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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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폴 브루스 디킨슨은 1958년 8월 7일, 노팅엄셔주 워크소프에서 태어났다.[1] 그의 어머니 소니아는 구두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의 아버지 브루스는 영국 육군의 정비공이었다.[2] 그의 출생은 당시 10대였던 젊은 커플을 서둘러 결혼시켰다.[1] 처음에 그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고, 그의 할아버지는 지역 식민지에서 석탄 얼굴 노동자로 일했고, 할머니는 주부였다.[1] 이것은 그의 음반 《Tattooed Millionaire》의 〈Born In '58〉에서 언급된다.[3] 디킨슨은 그의 부모가 셰필드로 이사하는 동안 워크소프의 맨튼 프라이머리에서 학교를 시작했다.[1] 곧이어 그가 6살이었을 때, 그는 셰필드로 파견되어[4] 마노르 탑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5] 6개월 후, 그의 부모는 그를 샤로우 베일 주니어라고 불리는 작은 사립 학교로 옮기기로 결정했다.[5] 끊임없는 이동으로 인해, 디킨슨은 인생의 이 시기가 그가 가까운 친구를 사귈 수 없었기 때문에 자립심을 갖도록 가르쳤다고 말한다.[6] 디킨슨에게는 1963년에 태어난 프로 쇼 점프 선수 헬레나 스토먼스가 있다.[7] 그는 어렸을 때 가능한 한 그녀와 격리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자신과 달리 계획된 임신과 출산이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그랬을 것이다.[8]
디킨슨의 첫 번째 음악 경험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앞 방에서 그가 여전히 워크소프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을 때인 처비 체커의 〈The Twist〉에 춤을 추는 것이었다.[9] 디킨슨이 소유했던 첫 음반은 비틀즈의 싱글 〈She Loves You〉로, 그는 할아버지를 설득하여 음악에 더욱 관심을 갖게 했다.[9] 그는 아버지 소유의 통기타를 연주하려 했으나 손가락에 물집이 생겼다.[5] 그가 셰필드로 이사했을 때, 디킨슨의 부모는 부동산을 사고, 그것을 새로 단장하고, 이익을 위해 팔아서 상당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10] 그 결과, 디킨슨의 어린 시절 대부분은 그의 부모가 하숙집과 그의 아버지가 중고차를 팔기 시작한 파산한 차고지를 살 때까지 건물 부지에서 살았다.[5] 사업 성공으로 얻은 수입은 당시 13세였던 디킨슨에게 기숙학교 교육을 시킬 기회를 주었고, 그들은 노샘프턴셔주에 있는 퍼블릭 스쿨인 오들을 선택했다.[5] 디킨슨은 여섯 살 때까지 워크소프에서 조부모에 의해 길러진 부모에 대한 "진정한 애착"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떠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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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메이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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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및 성공: 1981년~1985년

디킨슨은 1981년 9월, 해크니구의 연습실에서 아이언 메이든 오디션을 보았고, 이전에 활동했던 샘슨보다 훨씬 전문적인 밴드라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11] 연습실에서 밴드는 〈Prowler〉, 〈Sanctuary〉, 〈Running Free〉, 〈Remember Tomorrow〉를 연주했고, 이어 녹음 스튜디오에서 같은 곡들을 다시 부르게 한 후 디킨슨을 즉시 밴드에 합류시켰다.[11]
아이언 메이든은 밴드의 작곡 스타일에 맞는 엄격하고 체계적인 일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디킨슨은 이를 "시간표"라고 표현했다.[12] 몇 차례 공연을 마친 후, 밴드는 세 번째 음반 《The Number of the Beast》의 새로운 곡 작업을 시작했다. 샘슨과의 계약 문제로 인해 디킨슨은 음반의 곡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릴 수 없었고[13], 자신이 한 작업을 "도덕적 기여"라고 표현했다. 그는 나중에 〈The Prisoner〉, 〈Children of the Damned〉, 〈Run to the Hills〉에 기여했다고 밝힌 바 있다.[14] 다큐멘터리 《12 Wasted Years》에서 매니저 로드 스몰우드는 〈The Prisoner〉가 디킨슨과 아드리안 스미스의 공동작곡이라고 언급했다. 이 음반은 큰 성공을 거두며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했고[15], 영국과 미국에서 플래티넘을 달성했다.[16] 음반 발매 후, 밴드는 전 세계를 도는 투어를 시작했다.
이어 발표된 1983년의 《Piece of Mind》와 1984년의 《Powerslave》에서는 스티브 해리스의 작곡 독점이 일부 완화되어 다른 멤버들의 아이디어가 반영되었고, 디킨슨은 싱글 곡 〈Flight of Icarus〉와 〈2 Minutes to Midnight〉 등 여러 곡에 기여했다.[17] World Slavery Tour 동안, 밴드의 무대 연출에 새롭게 도입된 극적 요소의 일환으로 디킨슨은 〈Powerslave〉 공연 중 깃털 가면을 착용했다.[18] 이 투어는 밴드 역사상 가장 긴 투어였으며, 디킨슨은 공연 수가 너무 많아 투어 도중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19] 아이언 메이든의 매니지먼트는 공연 일정을 계속 추가했지만, 디킨슨은 중단하지 않으면 밴드를 떠나겠다고 요구했다.[20]
긴장 고조 및 탈퇴: 1986년~1993년
6개월간의 휴식 후, 디킨슨은 대부분 검술 연습에 시간을 보내며[21], 아이언 메이든은 다음 음반 《Somewhere in Time》의 작곡을 시작했다. 디킨슨은 밴드가 이전 음반과 차별화된 더 극적인 스타일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작업 결과에 실망했다. 비록 음반에서 신시사이저 베이스와 기타가 도입되었지만[22], 그는 밴드의 나머지 멤버들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이번 음반에 작곡 크레딧이 없다. 디킨슨은 음반을 더 어쿠스틱 중심으로 만들자는 자신의 제안이 거부되었다고 밝혔다.[22] 한편 스티브 해리스는 자신의 곡이 충분히 좋지 않아서 거부되었고, 디킨슨이 "지난 투어가 끝날 때 누구보다도 지쳐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23]
이후 투어가 끝난 후, 아이언 메이든은 다음 스튜디오 음반 《Seventh Son of a Seventh Son》 작업을 시작했다. 이 음반은 이전 음반보다 프로그레시브 록 요소를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24] 비록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한 두 번째 음반이 되었지만[15], 미국에서는 디킨슨이 참여한 밴드 음반 중 처음으로 플래티넘을 달성하지 못했다.[25] 《Somewhere in Time》과 달리, 디킨슨은 음반의 콘셉트에 매료되어 훨씬 더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며, 여러 곡에서 작곡 크레딧을 받았다.[26] 1988년 이후의 투어가 끝난 후, 밴드는 1년간 휴식을 갖기로 결정했다.[27]
다음 음반의 작곡 단계에서 아드리안 스미스는 아이언 메이든을 떠났고, 대신 야닉 거스가 합류했다. 아이언 메이든의 여덟 번째 스튜디오 음반 《No Prayer for the Dying》 (1990년)은 올뮤직의 회고적 평가에 따르면, 과거의 노력에 비해 "잘 견디지 못했다"는 원시적인 사운드를 가지고 있었다.[28] 이는 스티브 해리스가 소유한 헛간과 롤링 스톤스가 소유한 이동식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기 때문이다.[29] 음반에는 영화 사운드트랙을 위해 원래 작곡된 디킨슨의 곡 〈Bring Your Daughter... to the Slaughter〉가 수록되었으며, 1989년 최악의 오리지널 송으로 골든 래즈베리상을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밴드가 영국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첫 번째이자 유일한 싱글이 되었다.[15] 1992년까지 해리스는 헛간을 본격적인 스튜디오로 개조했고, 새 음반 《Fear of the Dark》는 그곳에서 녹음되어[30] 《No Prayer for the Dying》보다 전반적으로 더 나은 사운드를 만들어냈지만[31], 디킨슨은 여전히 스튜디오의 크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고 언급했다.[29]
Fear of the Dark Tour 이후, 디킨슨은 솔로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아이언 메이든을 떠나기로 결정했다.[32] 당시 밴드는 이미 1993년 예정된 투어를 예약해 놓은 상태였으며, 디킨슨은 이를 즐기지 못했다. 투어 기간 동안 디킨슨은 밴드 동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스티브 해리스는 "정말 그를 죽이고 싶었다"고 언급했다.[33] 해리스에 따르면, 디킨슨은 언론이 있는 자리에서만 공연을 했고[34], 다른 공연에서는 노래를 중얼거리며 불렀다.[33] 디킨슨은 이후 일부러 공연을 소홀히 했다는 주장에 대해 부인하며, 어떤 날에는 공연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주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34] 디킨슨이 밴드와 함께한 마지막 공연은 1993년 8월 28일,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BBC에 의해 촬영되었으며, 다음 해 라이브 비디오 《Raising Hell》로 발매되었다.[35]
복귀: 1999년~현재

아드리안 스미스와 함께, 디킨슨은 1999년 아이언 메이든에 재합류했으며, 야닉 거스는 밴드에 남았다. 이는 매니저 로드 스몰우드의 접근 이후 이루어진 결정이었다.[37] 스몰우드는 또한 스티브 해리스에게 디킨슨의 복귀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해리스는 처음에는 회의적이었으나 곧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해리스는 디킨슨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 "알고 있는 악마가 더 낫다"는 마음으로 판단했다.[37] 해리스와 디킨슨은 1999년 1월, 브라이턴에 있는 스몰우드의 집에서 1993년 이후 처음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기로 합의했다.[38] 두 사람 모두 만남에 긴장했지만, 서로를 본 순간 긴장은 즉시 풀렸고, 디킨슨이 밴드에 돌아와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38]
소규모 투어를 시작한 후, 밴드는 디킨슨과 함께하는 첫 스튜디오 음반 《Brave New World》의 녹음을 시작했다. 디킨슨은 밴드의 기존 프로듀서였던 은퇴한 마틴 버치의 대체자를 찾아야 하며, 《No Prayer for the Dying》와 《Fear of the Dark》를 녹음한 스튜디오와 다른 곳에서 녹음할 것을 주장했고, 해리스는 이에 동의했다.[39] 음반은 프랑스 파리의 기욤 텔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 케빈 셜리와 함께 녹음되었으며[40], 이후 아이언 메이든은 25만 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한 락 인 리오 페스티벌을 포함한 서포팅 투어를 진행했다.[41]
2003년, 아이언 메이든은 런던의 삼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 케빈 셜리와 함께 《Dance of Death》를 녹음하고 발매했다.[42] 이후 Dance of Death World Tour와 Eddie Rips Up the World Tour라는 두 차례의 투어를 진행한 뒤, 아이언 메이든은 2006년 다시 삼 스튜디오에서 다음 스튜디오 음반 《A Matter of Life and Death》를 녹음하고 서포팅 투어를 시작했다.[43] 2008년과 2009년에는 Somewhere Back in Time World Tour를 진행했으며[44], 이 투어는 밴드가 맞춤 제작한 보잉 757 여객기 에드 포스 원을 디킨슨이 직접 조종한 것으로 "혁신적"이라고 평가되었다.[44] 이 투어는 다큐멘터리 영화 《Iron Maiden: Flight 666》로 제작되어 2009년 4월, 한정 극장 개봉되었다.[45] 아이언 메이든은 2010년과 2011년에도 《The Final Frontier》를 지원하는 세계 투어를 진행했으며[46], 이 음반은 1986년 《Somewhere in Time》 이후 처음으로 바하마의 컴퍼스 포인트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고, 28개국에서 1위를 기록했다.[47] 곡 〈El Dorado〉는 밴드에 최우수 메탈 퍼포먼스 그래미 어워드를 안겨주었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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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목록
아이언 메이든
- The Number of the Beast (1982년)
- Piece of Mind (1983년)
- Powerslave (1984년)
- Somewhere in Time (1986년)
- Seventh Son of a Seventh Son (1988년)
- No Prayer for the Dying (1990년)
- Fear of the Dark (1992년)
- Brave New World (2000년)
- Dance of Death (2003년)
- A Matter of Life and Death (2006년)
- The Final Frontier (2010년)
- The Book of Souls (2015년)
- Senjutsu (2021년)
솔로
스튜디오 음반
- Tattooed Millionaire (1990년)
- Balls to Picasso (1994년)
- Skunkworks (1996년)
- Accident of Birth (1997년)
- The Chemical Wedding (1998년)
- Tyranny of Souls (2005년)
- The Mandrake Project (2024년)
라이브 음반
- Alive in Studio A (1995년)
- Scream for Me Brazil (1999년)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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