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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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우(申興雨, 1883년 3월 26일(음력 2월 18일)~1959년 3월 15일)는 한국의 개화 운동가이자 감리교 목회자이다. 1920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로 기독교를 통한 농촌개조와 문맹 퇴치, 사회운동, 실력 양성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간략 정보 신흥우, 신상정보 ...
신흥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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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 | 1883년 3월 26일(1883-03-26) 조선 충청북도 청원 |
사망 | 1959년 3월 15일(1959-03-15)(75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
사인 | 병사 |
성별 | 남성 |
국적 |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
별칭 | 호는 금하(錦霞), 일본식 이름: 그레이 고우(高霊興雨)[1], |
직업 | 종교인, 사회운동가, 계몽운동가, 정치인 |
학력 |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
종교 | 감리교 |
부모 | 신면휴 (아버지),김씨 부인 (어머니) |
배우자 | 이재규(李梓奎) |
친척 | 형 신긍우, 신홍우 |
활동 정보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계몽운동 |
소속 | 협성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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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과 함께 협성회(協成會) 조직에 참가하여 협성회 청년부 지도자로 활동했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가담했다. 그 후 미국에 유학,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12년 YMCA 청년회 이사와 배재학당 교장을 지냈다. 1919년의 3.1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고, 1920년 조선체육회 발기에 참여하였으며 제7대 회장을 지냈다. 1927년 이상재, 허헌, 김병로, 조병옥 등과 함께 신간회(新幹會) 조직에 참여하여 기독교대표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에는 흥업구락부의 조직에 참여하고 적극신앙단을 결성했으며 1932년 YMCA 총무를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기독교 감리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박인덕, 전필순, 함태영 등과 함께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였고,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당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후반에는 한국감리교회의 일제 협력에 동참하기도 했다. 8·15광복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이승만을 지지하였으나 나중에 정적으로 변신하였다. 1952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57년에는 민주당에 입당했다. 아호는 금하(錦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