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한국계 미국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은 조선의 문신, 대한제국의 정치인·언론인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의사이다. 또한 미국에서 병리학자·의사·시인·소설가로 활동하였다. 1977년 11월 30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서재필 徐載弼 Philip Jaisoh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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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당시의 의학박사 서재필 前 미군정청 고문 | |
조선국 교서관 예하 부정자 (朝鮮國 校書館 隸下 副正字) | |
임기 | 1882년 8월 21일 ~ 1882년 9월 18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영의정 홍순목 |
미군정청 고문 (美軍政廳 顧問) | |
임기 | 1945년 9월 8일 ~ 1947년 11월 20일 |
대통령 |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
수상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
장관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
사령관 | 존 리드 하지 미군정청 군정사령관 |
이름 | |
별명 | 자(字)는 윤경(允卿) 호(號)는 송재(松齋), 쌍경(雙慶) 영문 이름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 또는 필립 제이슨(Philip Jason) 필명 피제손(皮堤遜), 또는 피제선(皮堤仙), 오시아(Nelson Samuel Osia, Nelson Howard Osia)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64년 1월 7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 |
사망일 | 1951년 1월 5일(1951-01-05)(86세) |
사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
국적 | 미국 |
학력 |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원 M.D. |
경력 | 문신, 혁명가, 언론인, 교육인, 정치가, 의사, 병리전문의, 시인, 소설가, 작가, 상인, 독립운동가 중추원 고문, 농상공부 고문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초빙교수 미 육군 명예 공중보건의[1] 미 육군 명예 군의관[2] |
정당 | 무소속 |
부모 | 서광하(양부) 안동 김씨 부인(양모)[3] 서광효(생부) 안동 권씨 부인(친전모)[4] 성주 이씨 부인(생모) |
형제자매 | 동복 친형 서재춘 이복 형 서재형 동복 친동생 서재창 동복 친동생 서재우 동복 여동생 서기석 |
배우자 | 초취 경주 이씨 부인(慶州 李氏 夫人) 계취 광산 김씨 부인(光山 金氏 夫人) 삼취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 |
자녀 | 슬하 1남 3녀 |
친인척 | 사위 김두진, 매부 정해은, 사위 파울 보이드, 조부 서상기, 조모 울산 김씨 부인,장인 이씨,장인 김영석, 장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 양외조부 김온순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
웹사이트 | 서재필 기념재단 |
군사 경력 | |
청년 시절의 의학박사 서재필 前 교수 | |
복무 | 조선 관군 |
복무기간 | 1884년 6월 30일 ~ 1884년 12월 8일 |
근무 | 조선 병조 조련국 |
최종계급 | 조선 병조 조련국 사관장 |
지휘 | 사관장 |
주요 참전 | 갑신정변 미국-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
동복군에서 태어나 논산에서 자랐다.[5] 자(字)는 윤경(允卿), 호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다. 본관은 대구이며 이름 대신 일명 “피제손”과[6][7] 필명은 오시아(N. H. Osia)를 사용하였다.[8]
김성근,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며 1879년 초시에 합격 이후 1882년(고종 20년) 증광시에 급제해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과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났다.[9] 이후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였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그해 7월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재미 한국인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였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정부의 최고고문 역을 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1948년 미국으로 출국하여 1951년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미국에서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