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티에르
프랑스의 제2대 대통령 (1797–1877)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1797년 4월 15일~1877년 9월 3일)는 프랑스의 변호사, 언론인, 역사가이자 정치인이다. 티에르는 1871년 8월 31일부터 1873년 5월 24일까지 프랑스 공화국 제2대 대통령에 재임하였다.[1]
아돌프 티에르 Adolphe Thier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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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티에르. 나다르 촬영. | |
프랑스의 하원의원 | |
임기 | 1871년 2월 8일 - 1877년 9월 3일 (6년 6개월 26일) |
선수 | 1871년 국민의회 (초선) 1876년 프랑스 총선 (재선) |
프랑스의 대통령 | |
임기 | 1871년 8월 31일 - 1873년 5월 24일 (1년 8개월 23일) |
전임 | 아돌프 티에르 (행정수반)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간접적으로) |
후임 | 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 |
총리 | 쥘 뒤포르 (국무회의 부의장) |
선수 | 1871년 8월 31일 |
프랑스의 행정수반 | |
임기 | 1871년 2월 17일 - 1871년 8월 31일 (6개월 14일) |
전임 | 나폴레옹 3세 (프랑스 황제, 간접적으로) 루이 쥘 트로쉬 (국민방위정부 통령) |
후임 | 아돌프 티에르 (프랑스 대통령) |
총리 | 쥘 뒤포르 (국무회의 부의장) |
프랑스의 입법원 하원의원 | |
임기 | 1863년 5월 31일 - 1870년 9월 4일 |
프랑스의 국민입법의회 하원의원 | |
임기 | 1849년 5월 31일 - 1851년 12월 2일 (2년 6개월 19일) |
선수 | 1849년 5월 14일 |
프랑스의 제헌국회 하원의원 | |
임기 | 1848년 6월 4일 - 1849년 5월 26일 (11개월 22일) |
선수 | 1848년 4월 24일 |
프랑스의 국무회의 의장 | |
성립되지 않음 | |
임기 | 1848년 2월 24일 (1일) |
전임 | 마티외 몰레 백작 |
후임 | 샤를 뒤퐁 드 뢰르(1848년 임시정부 통령)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티에르 2기 | |
임기 | 1840년 3월 1일 - 1840년 10월 29일 (7개월 28일) |
전임 | 달마시 공작 |
후임 | 달마시 공작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티에르 1기 | |
임기 | 1836년 2월 22일 - 1836년 9월 6일 (6개월 15일) |
전임 | 브뢰유 공작 |
후임 | 마티외 몰레 백작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프랑스의 외무장관 | |
티에르 2기 | |
임기 | 1840년 3월 1일 - 1840년 10월 29일 (7개월 28일) |
전임 | 달마시 공작 |
후임 | 프랑수아 기조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티에르 2기 | |
임기 | 1836년 2월 22일 - 1836년 9월 6일 (6개월 15일) |
전임 | 달마시 공작 |
후임 | 프랑수아 기조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프랑스의 내무장관 | |
모르티에 드 브뢰유 | |
임기 | 1836년 11월 18일 - 1836년 2월 22일 (1년 3개월 4일) |
전임 | 바사노 공작 |
후임 | 몽탈리베 백작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총리 | 에두아르 모르티에 브뢰유 공작 |
술트 1기 제라르 | |
임기 | 1834년 4월 4일 - 1834년 11월 10일 (7개월 6일) |
전임 | 아르구 백작 |
후임 | 바사노 공작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총리 | 달마시 공작 제라르 백작 |
술트 1기 | |
임기 | 1832년 10월 11일 - 1832년 12월 31일 (2개월 20일) |
전임 | 몽탈리베 백작 |
후임 | 아르구 백작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총리 | 달마시 공작 |
프랑스의 재무장관 겸 공공사업장관 | |
술트 1기 | |
임기 | 1832년 12월 31일 - 1834년 4월 4일 (1년 3개월 4일) |
전임 | 아르구 백작 |
후임 | 이폴리트 파시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총리 | 달마시 공작 |
프랑스의 하원의원 | |
임기 | 1830년 10월 21일 - 1848년 2월 24일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97년 4월 15일(1797-04-15) |
출생지 | 프랑스 부슈뒤론 마르세유 |
사망일 | 1877년 9월 3일(1877-09-03)(80세) |
사망지 | 프랑스 세네우아즈 생제르맹앙레이 |
1789년 부르봉 왕조의 절대군주정이 붕괴한 이후, 프랑스는 정치 체제가 급격히 뒤바뀌는 혼란을 겪었다. 1830년의 7월 혁명 이후, 티에르는 왕정과 공화정에서 주요 역할을 맡으며, 안정적인 제도의 새 질서를 갈구한 프랑스 지도층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티에르는 시골 출신의 야심가로 출발하여 파리에 오게 된다. 이후 자유주의 언론인으로서, 또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저서를 저술하는 역사가로서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을 꿰뚫어 보다가, 7월 혁명에 참여하며 7월 왕정에서 두 차례 국무회의 의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티에르는 오를레앙파이자,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정을 지지하는 자유주의파였다.
허나 티에르는 이후 외교 정책(1840년 위기)에 관한 의견차로 국왕 루이 필리프 1세와 멀어졌으며, 1848년 혁명의 원인이 될 국무회의 의장 프랑수아 기조의 완강한 태도를 비판했다. 7월 왕정이 2월 혁명으로 무너진 이후에는 제2공화국을 지지했다.
1851년 12월 2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티에르는 이에 반대하였으며, 나폴레옹 3세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제2제국 시기인 1864년에는 의회에서 "필연적 자유(libertés nécessaires)"를 청원하는 연설을 펼치기도 하였다.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1871년 2월, 티에르는 제3공화국 정부 행정수반이 되었고, 같은 해 5월 파리 코뮌을 진압하였다. 이후 1871년 8월 31일, 티에르는 마침내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뽑혔다. 제3공화국 시기 티에르는 보수적 공화제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며 왕당파와 결별하였고, 이로 인해 왕당파가 주도한 불신임안이 의회에서 가결되자 1873년 5월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