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AI tools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원녕태자(元寧太子, ? ~ 976년)는 고려의 왕족으로 태조와 숙목부인의 아들이다. 진주낭군(鎭州郞君)이라고도 한다.
고려의 초대 왕 태조와 태조의 제10비 숙목부인의 아들이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성은 왕, 본관은 개성이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1]. 혜종, 정종, 광종 등의 이복 형제이다.
원녕태자의 생모 숙목부인에 대해 《고려사》에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단지 진주(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2]) 출신이며 대광 명필(名必)의 딸이라고만 적혀 있다[3].
이에 대해 현대의 일부 학자는 태조 즉위 후 곧바로 행한 인사이동에서 나타나는 임명필(林明弼)을 숙목부인의 아버지 명필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될 경우 숙목부인은 진천 임씨(진주 임씨)가 된다[2]. 한편 충북대학교 교수 신호철도 자신의 연구 논문 〈고려의 건국과 진주 임씨의 역할〉에서 숙목부인을 진주 임씨라고 주장하고, 그 혼인 시기는 태조가 궁예의 휘하에 있으면서 진주 지역을 정벌하러 갔을 때, 즉 고려 건국 전으로 추측하였다[4].
광종은 960년(광종 11년) 이후 왕권 강화를 위해 호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작업을 실시하였다[5]. 그러나 광종이 죽고 그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광종 때 숙청되었던 호족들은 976년(경종 원년) 경부터 집정 왕선의 주도 하에 복수극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원녕태자와 효성태자(태조와 천안부원부인의 장남 천안부원낭군)도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6]. 그러나 경종은 자신의 숙부뻘이 되는 원녕태자 등이 살해당하자 복수법에 염증을 느끼고, 이 해 음력 11월 왕선을 귀양보냈다[7]. 한편 이러한 점을 근거로, 원녕태자 등이 광종의 호족 숙청에 상당한 지원을 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2][8].
호는 원녕태자(元寧太子)이며, 생전에는 진주낭군(鎭州郞君)으로도 불렸다[2]. 원녕태자는 아들 효당태자를 둔 것으로 보아[1] 혼인을 한 것은 확실한 듯 하나, 아내가 누구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Every time you click a link to Wikipedia, Wiktionary or Wikiquote in your browser's search results, it will show the modern Wikiwand interface.
Wikiwand extension is a five stars, simple, with minimum permission required to keep your browsing private, safe and transpa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