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 (1478년)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시인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이행(李荇, 1478년 ~ 1534년 11월 11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시인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 별호는 청학도인(靑鶴道人), 어택어수(漁澤漁搜), 창택어수(滄澤漁水) 등이다. 박은과 함께 해동의 강서파로도 불렸다. 시호는 문정(文定), 문헌(文獻)이다.[1]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연현 이의무의 아들이고, 영의정 풍성부원군 이기의 동생이다.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외조카이며, 사육신 성삼문은 7촌 재종숙이었다. 신사임당은 그의 당질부이고, 대학자 율곡 이이의 재종조부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인 최부(崔溥)의 문인이다.
1513년 김정, 박상 등이 단경왕후의 복위를 상소했을 때는 선봉으로 강하게 비판 논박하고 처벌을 건의하였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 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했고, 성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연산군 때 응교로 재직 중 왕의 폐비 윤씨의 추숭을 반대하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충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석방되고 교리로 등용, 1507년(중종 2)에는 명나라에 파견되는 중종의 책봉승습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온 뒤 관직을 역임하였다. 대사간, 성균관사성, 대사성 등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러 조광조 일파와 갈등하다가 사직했다. 기묘사화 후 부제학으로 기용된 뒤 공조참판, 대제학, 공조판서, 의정부우참찬 겸대제학과 겸경연관, 좌참찬, 우찬성,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의정부우의정에 올라 대제학을 겸했다. 그는 남곤(南滾) 등과 함께 기존 동국여지승람을 수정, 보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 정리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시문과 글씨에 재능이 있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왕실의 외척이 된 김안로를 공격하다가 그의 미움을 받아 1531년 중추부판사로 좌천되었다가 함경도 함종으로 유배, 유배지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시를 잘 짓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글씨도 능하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그는 시를 짓는데 있어서 기교를 부리거나, 억지로 꾸미지 않으면서도 시상을 자연스럽게 전개하였다. 특히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잘 지어 후대의 교산허균 등에게 극찬을 받았다. 관료이면서 학자이기도 했던 그의 문하에서는 소세양(蘇世讓), 정사룡(鄭士龍), 이희보(李希輔) 등이 배출되었다. 이행은 자신의 문인이면서 관료생활을 하게 된 소세양과 정사룡을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려고 노력하였지만 정사룡은 처첩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