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한(錢鎭漢, 1901년 11월 5일 ~ 1972년 4월 22일, 경북 상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사회부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장건상, 김성숙, 유림 등과 함께 1949년 독립노동당을 조직하였다. 본관은 문경(聞慶)이며 호는 우촌(牛村)이다.
- 도쿄 순천중학교졸업
- 일본 와세다 대학교 부속제1고등학원 문과 수업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경제과 졸업
- 전국협동조합총본부위원장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국청년총연맹조직위원장
- 대한독립노동총연맹위원장
- 33인민족대표단원
- 초대 대한노총위원장
- 노농당당수, 민정당최고위원
- 1948년 5월 10일 : 제헌 국회의원(경북 상주을)
- 초대 사회부장관
- 대한노총 대표로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30만 1천표를 얻고 6위로 낙선하였다.
- 1952년 자유당에 참가
- 1954년 자유당 탈당
- 민중당 지도위원 및 운영위원
- 1963년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국민의 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을 때 참석하였다.[1] 이날 대회는 민정당 대표위원 김병로, 신정당 위원장 허정, 민우당 고문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에 선출했다.[1]
- 196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
- 박용만, 경무대 비화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1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2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1 (인물과사상사, 2006)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자세한 정보 실시년도, 선거 ...
실시년도 |
선거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1948년 |
총선 |
1대 |
국회의원 |
경북 상주군 을 |
대한노동총연맹 |
31,518표 |
|
1위 |
|
초선 |
1950년 |
총선 |
2대 |
국회의원 |
경남 부산시 갑 |
노농청년연맹 |
9,062표 |
|
3위 |
낙선 |
|
1952년 |
2.5 재보선 |
2대 |
국회의원 |
경남 부산시 무 |
노농청년연맹 |
9,062표 |
|
1위 |
|
재선 |
1952년 |
대선 |
2대 |
부통령 |
대한민국 |
노농청년연맹 |
302,471표 |
|
6위 |
낙선 |
|
1954년 |
총선 |
3대 |
국회의원 |
경남 부산시 을 |
무소속 |
31,278표 |
|
1위 |
|
3선 |
1958년 |
총선 |
4대 |
국회의원 |
서울 영등포구 갑 |
노농당 |
6,379표 |
|
3위 |
낙선 |
|
1960년 |
총선 |
5대 |
국회의원 |
서울 성동구 갑 |
한국사회당 |
13,774표 |
|
2위 |
낙선 |
|
1960년 |
10.10 재보선 |
5대 |
국회의원 |
서울 종로구 갑 |
한국독립당 |
11,326표 |
|
1위 |
|
4선 |
1963년 |
총선 |
6대 |
국회의원 |
서울 종로구 |
민정당 |
36,123표 |
|
1위 |
|
5선 |
1967년 |
대선 |
6대 |
대통령 |
대한민국 |
한국독립당 |
232,179표 |
|
5위 |
낙선 |
|
1967년 |
총선 |
7대 |
국회의원 |
서울 종로구 |
한국독립당 |
2,347표 |
|
3위 |
낙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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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이영훈 지음 | 에디터 | 2006) 6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