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조선의 제22대 임금 (1752–1800)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재위: 1776년 4월 27일(음력 3월 10일)[1] ~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2])는 조선 제22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성은 이(李), 휘는 산 또는 성(祘)[주해 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형운(亨運)[3], 호는 홍재(弘齋)다.[4]
정조 正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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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어진에 실린 정조 | |
제22대 조선 국왕 | |
재위 | 1776년 3월 10일 ~ 1800년 6월 28일 (음력) |
즉위식 | 경희궁 숭정문 |
전임 | 영조 |
후임 | 순조 |
조선국 왕세손 | |
재위 | 1759년 2월 12일 ~ 1776년 3월 10일 (음력) |
전임 | 의소세손 정 |
후임 | 왕세손 환 (헌종) |
이름 | |
휘 | 이산(李祘) 혹은 이성 |
별호 | 자 : 형운(亨運) 호 : 홍재(弘齋) |
묘호 | 정종(正宗, 1800년) → 정조(正祖, 1899년) |
시호 | 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 (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
존호 | 경천명도홍덕현모 (敬天明道洪德顯謨) |
능호 |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52년 10월 28일(1752-10-28) (양력)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
사망일 | 1800년 8월 18일(1800-08-18)(47세) (양력)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 영춘헌 |
부친 | 친부 : 장조 (사도세자), 양부 : 진종 (효장세자) |
모친 | 생모 : 헌경왕후 홍씨 (혜경궁 홍씨), 양모 : 효순왕후 조씨 (효순현빈 조씨) |
배우자 | 효의왕후 김씨 |
자녀 | 문효세자 · 순조 · 숙선옹주 |
서명 |
11세 때 아버지 장조(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으며, 할아버지인 영조가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왕통을 계승하게 했다.[5]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 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청명당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소론이 생부 장조(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특히 노론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 기간 중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힘이 한쪽으로 기우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 정치의 배경이 되었다. 윤지충 사건(신해박해)이후 노론 벽파의 공세가 강화되자 노론 내 소수파였던 북학파 박지원 등의 문장을 이용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켜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