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황희(黃喜, 1362년 ~ 1452년)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재상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 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역대 영의정 중 최장수로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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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정보 황희, 재임 ...
황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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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의 영정 | |
조선의 영의정 | |
재임 | 1431년 ~ 1449년 |
전임 | 이직 |
후임 | 하연 |
이름 | |
별호 | 초명 수로(壽老) |
자 | 구부(懼夫) |
호 | 방촌(厖村) |
시호 | 익성 |
신상정보 | |
출생일 | 1362년 |
출생지 | 고려 개경부 개풍 가조리 |
거주지 | 조선 전라도 남원 |
사망일 | 1452년(89–90세)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파주에서 노환으로 병사 |
국적 | 조선 |
성별 | 남성 |
경력 |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
본관 | 장수 |
부모 | 황군서(부), 용궁 김씨 부인(모) |
배우자 | 초배 최씨 부인(최안(崔安)의 딸) 계배 청주 양씨 부인(양진(楊震)의 딸) 그 외 첩실 1명 |
자녀 | 아들 황치신, 황보신, 황수신, 황직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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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고려조 말기 시절이던 1376년에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종묘 세종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성격이 원만하여 존경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사후 청백리로 규정되어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아들과 사위가 저지른 뇌물수수[1], 부패 등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으나,[2]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임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