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조선의 문신 (1546-1589)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정여립(鄭汝立, 1546년~158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字)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 본관은 동래(東萊).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다. 선조 22년에 역모자로 몰리자 자결했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나 사인은 불분명하다.[1]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사상이기는 하나, 이로 인해 정여립은 한국사 최초의 공화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다.
간략 정보 정여립鄭汝立, 자 ...
정여립 鄭汝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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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자 | 인백 |
호 | 죽도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46년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전주부 |
거주지 | 조선 전라도 전주부 |
사망일 | 1589년 |
사망지 | 조선 전라도 진안군 죽도 |
직업 | 문신, 학자, 사상가 |
본관 | 동래 |
부모 | 아버지 정희증 |
자녀 | 아들 정옥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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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냈다. 정당은 서인이었으나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스승이었던 이이(李珥)를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다.[2]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2][3]
고향에 내려온 뒤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대동계(大同契)를 결성해 왜구 토벌에 앞장섰다. 그런데 반역을 획책한다는 고변이 있어 피신하다가 자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서인은 그가 역모를 꾸몄다고 했고, 동인은 이를 부정하여 양측이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이후 사건은 기축옥사로 확대되어 천 여 명의 희생자를 낳았으며[4] 동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