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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 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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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 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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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공암 허씨(孔巖許氏)라고도 한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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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 시조 허선문이 태어났다는 "허가바위"

양천 허씨(陽川 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金首露王妃)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으로 전한다. 허선문(許宣文)은 공암촌(孔巖 : 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살면서 농사(農事)에 힘써 많은 양곡(糧穀)을 비축(備蓄)하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이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량(軍糧)을 제공해주어 병사들이 사기가 충전되어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후삼국 통일에 큰 힘을 보태게 되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그의 충의에 감동하여 공암촌주(孔岩村主)로 임명하여 공암촌을 식읍으로 내렸고, 허선문은 고려 건국에 대한 공으로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본관을 공암허씨(孔巖許氏)로 했다. 고려 말에 지명 '공암'이 '양천'으로 변경됨에 '공암허씨'들은 '양천허씨(陽川許氏)'로 불려지게 되었다.

허선문의 손자 허원(許元)이 고려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지제고(知制誥)·태자사의(太子司議)등을 지냈으며, 증손 허정(許正)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후 태자재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 허정의 아들 허재(許載)가 는 일찍이 병마사(兵馬使)에 재임 시 여진의 정세를 파악하여 변경수비의 방책을 왕에게 올려 채택되기도 하였다.[1] 10세손 허공(許珙)은 고려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284년(충렬왕 10) 수국사(修國史)를 겸하여 원부(元傅) 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찬술(撰述)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올랐다.[2] 허공의 딸은 충선왕의 제6비 순비(順妃)로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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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파도

1
허선문
許宣文
공암촌주
2
허현
許玄
소부소감
3
허원
許元
예빈성경
4
허원
許正
예부시랑
5
허재
許載
평장사
6
허순
許純
공부상서
7
허이섭
許利涉
전구서령
7
허경
許京
좌복야
9
허수
許遂
예부상서
10
허공
許珙
문경공
11
허정
許程
동주사공파
(東州使公派)
11
허숭
許嵩
11
허관
許冠
판도좌랑공파
(版圖佐郞公派)
11
허총
許寵
11
허부
許富
대제학공파
(大提學公派)

분파

  • 동주사공파(東州使公派): 허정(許程)
  • 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허관(許冠)
  •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허부(許富)

본관

양천은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구 일대의 지명이다. 고구려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공암현(孔岩縣)으로 고쳤다. 공암 허씨로 불리다가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양천현(陽川縣)으로 개칭되어 양천 허씨(陽川 許氏)가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1895년(고종 32)에 양천군(陽川郡)으로 개편됐다. 1914년 경기도 김포군에 통합돼 양동면, 양서면이 됐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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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許穆)

조선조에 와서는 재령군수(載寧郡守) 허손(許蓀)의 아들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허종(許琮)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허침(許琛) 형제가 뛰어났다. 허종과 허침은 형제 정승으로 유명하다.

한편 선조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허욱(許頊)은 허종(許琮)의 현손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능창군(綾昌君) 추대사건에 관련하여 원주에 유배된 후 배소(配所)에서 임종하였으나 인조반정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조선조에서 허씨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과 미수(眉叟) 허목(許穆)을 빼놓을 수 없다. 허엽(許曄)은 선조때 동서붕당에서 동인의 영수였다. 그의 슬하에 허성(許筬), 허봉(許篈), 허균(許筠), 허난설헌(許蘭雪軒) 4남매가 있는데,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나 이들 모두를 그와 함께 '허씨 5문장가'라 부른다.

숙종 때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허목(許穆)은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던 학자로 남인의 영수였으며 학문(學問)이 높았고, 문장(文章)·그림·서예(書藝)에 뛰어났다. 특히 전서(篆書)에 능하여 동방(東方)의 제일인자(第一人者)로 일컬어졌다. 과거를 보지 않았음에도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숙종으로부터 집을 하사 받았다.

그이외 20세손 허준(許浚)은 선조 때 명의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였으며 호성삼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올랐다. 그리고 22세손 허적(許積)은 현종, 숙종때 세차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탁남의 영수였으며,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해 1678년(숙종 4)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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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대동항렬
자세한 정보 31세, 32세 ...

유적지

자세한 정보 구분,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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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과의 인척 관계

고려

조선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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