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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쿠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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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프랑스어: Jean Désiré Gustave Courbet, 프랑스어: [ɡystav kuʁbɛ]; 1819년 6월 10일 – 1877년 12월 31일)[1]는 19세기 프랑스 회화에서 사실주의 운동을 이끈 프랑스 화가였다. 그는 볼 수 있는 것만 그리기로 결심하고, 아카데미의 관습과 이전 세대의 낭만주의를 거부했다. 그의 독립적인 태도는 이후 인상주의와 입체주의 같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쿠르베는 혁신가이자 자신의 작품을 통해 대담한 사회적 발언을 서슴지 않은 예술가로서 19세기 프랑스 회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쿠르베의 1840년대 후반과 1850년대 초반 회화 작품들로 처음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들은 이상화되지 않은 이상화되지 않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모습을, 전통적으로 종교적 또는 역사적 주제에 사용되던 대형화로 묘사함으로써 당시의 회화적 관습에 도전했다. 이후 쿠르베의 작품들은 대부분 정치적 색채가 덜한 풍경화, 바다 풍경, 사냥 장면, 누드, 그리고 정물화 등을 그렸다. 쿠르베는 파리 코뮌에 연루되어 1871년에 6개월간 투옥되었고, 1873년부터 4년 후 사망할 때까지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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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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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쿠르베는 1819년 오르낭 (도브 주)에서 레지스와 실비 우도 쿠르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반군주주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프랑스 혁명에 참전했다.) 쿠르베의 누이들인 조에, 젤리, 줄리엣은 그의 첫 그림 모델이었다. 파리로 이주한 후에도 그는 사냥, 낚시를 즐기고, 영감을 얻기 위해 자주 오르낭으로 돌아갔다.[2]
쿠르베는 1839년 파리로 가서 슈투벤과 헤세의 작업실에서 일했다. 독립적인 정신을 가진 그는 곧 작업실을 떠나, 루브르 박물관에서 스페인, 플랑드르, 프랑스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하고 그들의 작품을 모사함으로써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3]

쿠르베의 첫 작품은 빅토르 위고의 글에서 영감을 받은 《오달리스크》와 조르주 상드를 그린 《렐리아》였지만, 그는 곧 문학적 영향을 버리고 관찰된 현실에 기반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840년대 초반의 그림들 중에는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한 여러 자화상이 있다. 여기에는 《검은 개와 함께 한 자화상》 (1842–44년경, 1844년 살롱전에서 전시), 《절망하는 남자》로 알려진 극적인 자화상 (1843–45년경), 《시골의 연인들》(1844, 리옹 보자르 미술관), 《조각가》(1845), 《부상당한 남자》(1844–54, 오르세 미술관, 파리), 《첼로 연주자, 자화상》(1847, 스웨덴 국립미술관, 스톡홀름, 1848년 살롱전에 전시), 그리고 《파이프를 문 남자》(1848–49,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등이 있다.[4]
1846–47년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여행하면서, 쿠르베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 및 다른 네덜란드 거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 주변의 삶을 묘사해야 한다는 신념을 굳혔다. 1848년까지 그는 샹플뢰리를 비롯한 젊은 비평가들, 신낭만주의자들, 사실주의자들 사이에서 지지자들을 얻었다.[5]
쿠르베는 1849년 살롱전에서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로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장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과 르 냉 형제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으로 쿠르베는 금메달을 획득했고 국가가 구입했다.[6] 금메달 수상으로 그의 작품은 살롱전에 출품하기 위해 더 이상 심사위원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7] — 쿠르베는 규칙이 변경된 1857년까지 이 혜택을 누렸다.[8]
1849–50년에 쿠르베는 《돌 깨는 사람들》(1945년 드레스덴 폭격 중 파괴)을 그렸는데,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은 이 작품을 농민 생활의 상징으로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위대한 작품 중 첫 번째"라고 불렸다.[9] 이 그림은 쿠르베가 길가에서 목격한 장면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샹플뢰리와 작가 프랜시스 웨이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처럼 완전한 빈곤의 표현을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고, 다음 날 아침 제 스튜디오로 오라고 말했습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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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요약
관점

쿠르베의 작품은 그 당시 지배적인 사조였던 낭만주의나 신고전주의 화파에 속하지 않았다. 파리 살롱에서는 역사화를 화가의 최고 소명으로 여겼지만, 그는 "예술가들은 과거 또는 미래의 모습을 재현할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10] 대신 그는 살아있는 예술의 유일한 원천은 예술가 자신의 경험이라고 주장했다.[10] 그와 장프랑수아 밀레는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는 것에서 영감을 얻었다.[11]
쿠르베는 풍경, 바다 풍경, 정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그렸다. 그는 작품에서 사회 문제를 다루고, 시골 부르주아, 농민,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저속하다고 여겨진 주제를 그림으로써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작품은 오노레 도미에와 장프랑수아 밀레의 작품과 함께 사실주의로 알려졌다. 쿠르베에게 사실주의란 선과 형태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 불규칙성을 직접 관찰한 듯한 생생하고 거친 붓질을 통해 표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삶의 혹독함을 묘사함으로써, 당시 아카데미즘 미술관에 도전했다. 쿠르베 사실주의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그의 고향 프랑슈콩테와 그의 출생지 오르낭에 대한 평생의 애착이었다.
돌 깨는 사람들

쿠르베의 위대한 작품 중 첫 번째로 여겨지는 1849년의 《돌 깨는 사람들》은 1850년 파리 살롱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회 사실주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1848년 10월 쿠르베가 8개월간 오르낭을 방문했을 때, 길가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젊은 남자와 노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영감에 대해 쿠르베는 친구이자 미술 비평가인 프랜시스 웨이와 쥘 샹플뢰리에게 "이처럼 완전한 빈곤의 표현을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며,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라고 말했다.[12]
다른 예술가들도 농촌 빈민의 고통을 묘사했지만, 쿠르베의 농민들은 브르통의 1854년 그림 《이삭 줍는 사람들》과 같은 작품들처럼 이상화되지 않았다.[13]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연합군은 드레스덴을 지속적으로 폭격했다. 독일군은 드레스덴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급히 미술품을 트럭에 실었다. 《돌 깨는 사람들》은 드레스덴 근처 쾨니히슈타인 요새로 그림을 옮기던 수송 차량이 연합군에 의해 폭격당하면서 153점의 다른 그림들과 함께 파괴되었다.[14]
오르낭의 매장

1850–1851년 살롱전[a]에서 그는 《돌 깨는 사람들》, 《플라제 농민들》, 《오르낭의 매장》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쿠르베의 대표작중 하나인 《오르낭의 매장》은 그가 1848년 9월에 참석했던 그의 큰삼촌의 장례식을 기록한 것이다.[17]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이 그림의 모델이 되었다. 이전에는 모델들이 역사적 서사의 배우로 묘사되었으마, 쿠르베는 "매장에 참석했던 바로 그 사람들, 즉 모든 마을 사람들을 그렸다"고 말했다. 그 결과 그들과 오르낭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3.1 x 6.7 m 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은, 비평가와 대중에게 찬사와 맹렬한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이전에는 종교적 또는 왕실을 위한 주제에만 사용되었던 대규모 그림으로 평범한 의식을 묘사함으로써, 기존의 관습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 사라 폰스에 따르면, "파리에서 《오르낭의 매장》은 마치 더러운 부츠를 신은 건달이 고상한 파티에 난입한 것처럼 역사화의 위대한 전통에 무단으로 뛰어든 작품으로 평가 받았으며, 그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히 부족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고 한다.[18] 이 그림은 풍속화에서 기대되던 감상적인 수사가 부족하다. 쿠르베의 조문객들은 연극적인 몸짓을 하지 않으며, 그들의 얼굴은 고귀하기보다는 캐리커처처럼 보였다. 비평가들은 쿠르베가 의도적으로 추함을 추구했다고 비난했다.[18]
결국 대중은 새로운 사실주의적 접근 방식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낭만주의의 호화롭고 퇴폐적인 환상은 인기를 잃었다. 쿠르베는 이 그림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오르낭의 매장》은 사실상 낭만주의의 매장이었다"고 말했다.[19]

쿠르베는 유명인이 되었고 천재, "끔찍한 사회주의자", "야만인"으로 불렸다.[20]는 자신을 교육받지 못한 농부로 인식하도록 적극적으로 부추겼으며, 그의 야망, 언론에 대한 대담한 발언, 그리고 자신의 삶을 예술에 담아내려는 고집은 그에게 제멋대로인 허영심 많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안겨주었다.[21]
쿠르베는 예술의 사실주의 사상을 정치적 아나키즘과 연결시켰고, 대중의 인기를 얻자, 정치적인 에세이와 논문을 작성하여 정치적 사상을 전파했다. 그의 익숙한 얼굴은 프랑스 대중 언론에서 자주 풍자 대상이 되었다.[22]
1850년, 쿠르베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의 매우 문명화된 사회에서 나는 야만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정부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며, 그들에게 직접 말을 걸어야 한다.[23]
1850년대 동안 쿠르베는 《시골 아가씨들》 (1852), 《레슬러들》 (1853), 《목욕하는 사람들》 (1853), 《잠자는 방직공》 (1853), 그리고 《밀 이삭 줍는 사람들》 (1854)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과 친구들을 주제로 한 수많은 구상화를 그렸다.
화가의 아틀리에

1855년, 쿠르베는 1855년 만국 박람회의 일부인 1855년 살롱전에 출품할 14점의 그림을 제출했다. 공간 부족으로 《오르낭의 매장》과 그의 또 다른 기념비적인 작품인 《화가의 아틀리에》등 세 점이 거절되었다.[24] 쿠르베는 이 사태를 직접 해결하기로 했다. 그는 만국 박람회 옆에 공식적인 살롱과 유사한 임시 전시관인 '사실주의 파빌리옹(Pavillon du Réalisme)'을 세우고, 《화가의 아틀리에》를 포함한 40점의 그림을 전시했다.[24]
이 작품은 화가로서 쿠르베의 삶을 영웅적인 모험으로 묘사한 알레고리로, 그는 오른쪽에는 친구들과 숭배자들이, 왼쪽에는 도전과 반대파들이 둘러싸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친구들로는 미술 평론가 샹플뢰리와 샤를 보들레르, 미술 수집가 알프레드 브뤼야스가 있다. 왼쪽에는 쿠르베가 샹플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찮은 삶의 또 다른 세계, 비참함, 가난, 부, 착취당하는 자들과 착취하는 자들, 죽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한 인물들(성직자, 매춘부, 무덤 파는 사람, 상인 등)이 있다.[25]
왼쪽 전경에는 개와 함께 있는 남자가 있는데, 쿠르베가 샹플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엑스레이 결과 이 남자는 나중에 그려졌음이 밝혀졌지만, 그림에서 그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는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알레고리로, 그의 유명한 사냥개와 상징적인 콧수염으로 식별된다. 그를 왼쪽에 배치함으로써 황제에 대한 경멸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그를 범죄자로 묘사하며, 프랑스에 대한 그의 "소유권"이 불법적임을 시사한다.[26]
외젠 들라크루아와 같은 예술가들이 그의 노력을 열렬히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대부분 호기심으로 전시회를 찾았고 그를 비웃었다. 관람객 수와 판매는 실망스러웠지만,[27] 쿠르베는 프랑스 아방가르드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인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에게 찬사를 받았고, 에두아르 마네와 인상주의 화가들을 포함한 젊은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들라크루아, 보들레르, 샹플뢰리는 《화가의 아틀리에》을 걸작으로 인정하였다.
바다 풍경

1860년대 후반 프랑스 북부 해안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그린 쿠르베의 바다 풍경은 살롱전 출품작만큼 논란이 되지는 않았지만,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과 위험을 강조함으로써 (자발적이든 아니든) 사실주의에 기여했다. 이 시기 작품들에는 썰물의 고요함을 묘사한 《고요한 바다》(1869)와 격렬한 조류와 씨름하는 돛단배를 보여주는 《돛단배》(1869년경)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작품들과 뚜렷한 색조 범위가 있다.[28]
사실주의 선언
쿠르베는 이 독립적인 개인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 당시 정치 선언문의 어조로 사실주의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목표는 "내 시대의 관습, 사상, 외관을 내 자신의 평가에 따라 번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9]
'사실주의자'라는 칭호는 마치 1830년대 화가들에게 '낭만주의자'라는 칭호가 붙여진 것처럼 내게도 툭 던져진 것이었다. 칭호는 결코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 작품들은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 이름의 정확성에 대한 논쟁은 접어두고,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몇 마디만 하고자 한다.
나는 고대 미술과 현대 미술을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연구해 왔다. 더 이상 어느 한쪽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고 싶지 않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하찮은 목표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나는 전통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나만의 개성을 이끌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알기 위해 행하는 것, 그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내 시대의 풍습, 사상, 그리고 모습을 나 자신의 판단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 단순히 화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 한마디로 살아있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나의 목표이다. (귀스타브 쿠르베, 18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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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요약
관점

1857년 살롱전에서 쿠르베는 여섯 점의 그림을 전시했다. 여기에는 나무 아래 두 명의 매춘부를 묘사한 《센 강변의 젊은 여인들 (여름)》[31]과 쿠르베가 남은 생애 동안 그릴 많은 사냥 장면 중 첫 번째인 《눈 속의 암사슴》과 《채석장》이 포함되었다.[8]
1856년에 그려진 《센 강변의 젊은 여인들》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풍경 속에 있는, 전통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누드 여성에 익숙했던 미술 비평가들은 쿠르베가 속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당대 여성을 묘사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32]
영국 화가 에드윈 랜드시어에게 대중적 성공을 가져다준 종류의 사냥 장면과 함께 선정적인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쿠르베는 "악명과 판매"를 모두 확보했다.[33]
1860년대 동안 쿠르베는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여인》과 같은 점점 더 에로틱한 작품들을 그렸는데, 1988년까지 대중에게 전시되지 않았던 여성 생식기를 묘사한 《세상의 기원》 (1866)와 침대에 누운 두 여인을 특징으로 하는 《잠》 (1866)으로 절정에 달했다.[34] 후자 그림은 1872년 그림 딜러에 의해 전시되었을 때 경찰에 신고되었다.[35]
1861년경까지 나폴레옹 3세의 정권은 언론 검열을 통해 반대 의견의 확산을 막고, 선거를 조작하며, 의회의 자유로운 토론권이나 실질적인 권력을 박탈하는 등 권위주의적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반대파를 달래기 위해 더 많은 양보를 했다. 이에 따라 의회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허용되고 의회 토론에 대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언론 검열도 완화되어 1870년에는 나폴레옹 정권의 반대파 지도자였던 자유주의자 에밀 올리비에를 사실상의 총리로 임명하는 것으로 정점에 달했다. 쿠르베를 존경하는 자유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나폴레옹 3세는 1870년에 쿠르베를 레지옹 도뇌르에 지명했다. 그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부한 것은 집권자들을 화나게 했지만, 현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여인》, 1862
- 《조의 초상 (아름다운 아일랜드 여인)》, 1865–6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잠》의 모델로 추정되는 조애나 히퍼난의 그림
- 《잠》, 1866, 프티 팔레, 파리 보자르 미술관
- 《젊은 목욕하는 사람》, 1866
쿠르베와 파리 코뮌
요약
관점


1870년 9월 4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쿠르베는 나중에 자신을 괴롭히게 될 제안을 했다. 그는 국민방위 정부에 편지를 써서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군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방돔 광장의 기둥을 철거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방돔 기둥은 모든 예술적 가치가 전혀 없는 기념비이며, 과거 제국주의 왕조의 전쟁과 정복 사상을 표현함으로써 공화주의 국가의 감정에 의해 비난받는 것이므로, 시민 쿠르베는 국민방위 정부가 이 기둥을 해체하는 것을 허가해 줄 것을 희망한다."[36]
쿠르베는 기둥을 앵발리드(군 병원)와 같은 더 적절한 장소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독일군과 독일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통해, 독일과 프랑스의 대포를 녹여 자유의 모자를 씌우고, 독일과 프랑스 인민의 연합을 기리는 새로운 기념비를 방돔 광장에 세울 것을 제안했다. 국민방위 정부는 그의 제안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지만, 그 제안은 잊혀지지 않았다.[37]

3월 18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여파로, 파리 코뮌이라는 혁명 정부가 잠시 도시를 장악했다. 쿠르베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예술가 연맹을 조직했으며, 4월 5일 의과대학 대강당에서 첫 회의를 개최했다. 약 300명에서 400명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장식가들이 참석했다. 회원 명단에는 앙드레 질, 오노레 도미에,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외젠 포티에, 쥘 달루, 에두아르 마네와 같은 유명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네는 코뮌 기간 동안 파리에 없어서 참석하지 않았고, 75세였던 코로는 코뮌 기간 동안 시골집과 스튜디오에 머물며 정치적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다.
쿠르베는 회의를 주재하고 봉기 중 폐쇄되었던 파리의 두 주요 미술관인 루브르 박물관과 뤽상부르 박물관을 가능한 한 빨리 재개관하고, 전통적인 연례 전시회인 살롱전을 과거와 같이 개최하되, 급진적인 변화를 줄 것을 제안했다. 그는 살롱전이 어떠한 정부 간섭이나 특정 예술가에 대한 보상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메달이나 정부의 위탁도 없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더욱이 그는 프랑스 예술의 가장 유명한 국립 기관들, 즉 에콜 데 보자르, 로마 아카데미 드 프랑스, 아테네 프랑스 학교, 프랑스 학술원 미술 부문의 폐지를 요구했다.[39]
4월 12일, 코뮌 집행 위원회는 쿠르베가 아직 코뮌의 공식 회원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박물관을 개방하고 살롱전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들은 같은 회의에서 다음 법령을 발표했다. "방돔 광장의 기둥은 철거될 것이다."[40] 4월 16일, 사임한 온건파 코뮌 의원들을 교체하기 위한 특별 선거가 열렸고, 쿠르베는 파리 6구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미술 대표라는 칭호를 받았고, 4월 21일에는 교육 위원회 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 4월 27일 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쿠르베가 방돔 기둥 철거를 요청하고, 그 자리에 3월 18일 코뮌의 권력 장악을 상징하는 우의적인 조형물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베는 본질적으로 반체제 인사였고, 곧 코뮌 구성원 대다수의 일부 조치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 정치를 자행했던 공안위원회를 본뜬 새로운 공안위원회 창설에 반대한 소수의 코뮌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41]
쿠르베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에 대해 코뮌에 반대했다. 그가 초상화를 그렸던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치안 판사이자 언론인인 그의 친구 구스타브 쇼데의 체포였다. 인기 있는 코뮌 신문 르 필스 뒤 페르 뒤셴은 쇼데가 코뮌이 결성되기 전 잠시 파리 9구의 부시장을 지냈을 때 시청을 둘러싼 군중에게 발포를 명령했다고 비난했다. 쿠르베의 반대는 소용이 없었다. 1871년 5월 23일, 코뮌의 마지막 날에 쇼데는 코뮌 총살대에 의해 총살되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쿠르베는 항의의 의미로 코뮌에서 사임했다.[42]
5월 13일, 쿠르베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정부의 최고 책임자였던 아돌프 티에르의 파리 저택이 철거되고 그의 미술 컬렉션이 압수되었다. 쿠르베는 압수된 미술품을 루브르 박물관과 다른 박물관에 기증할 것을 제안했지만, 루브르 박물관장은 이를 거부했다.[43] 5월 16일, 코뮌이 함락되기 불과 9일 전, 군악대와 사진작가들이 참석한 대규모 행사에서 방돔 기둥은 철거되어 조각조각 부서졌다. 일부 목격자들은 쿠르베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했지만, 다른 이들은 부인했다. 다음 날, 예술가 연맹은 프랑스 정부와 비밀 접촉을 했다고 의심되는 루브르 박물관장과 뤽상부르 박물관장을 해고하고 새로운 박물관장을 임명하는 안건을 논의했다.

한 전설에 따르면 쿠르베는 "약탈하는 폭도들"로부터 루브르 박물관과 다른 박물관들을 지켰다고 하지만, 박물관에 대한 그러한 공격에 대한 기록은 없다. 루브르 박물관에 대한 유일한 실제 위협은,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피의 주간" 동안, 코뮌 장군 쥘 베르주레가 이끄는 코뮌 부대가 루브르 박물관 옆의 튀일리궁에 불을 질렀던 사건이다.[44] 불은 루브르 박물관의 도서관으로 번져 도서관은 파괴되었지만, 박물관 큐레이터와 소방관들의 노력으로 미술관은 보존되었다.[45]
5월 28일 프랑스군에 의해 코뮌이 최종 진압된 후, 쿠르베는 여러 친구들의 아파트에 숨어 지냈다. 그는 6월 7일에 체포되었다. 8월 14일 군사 재판에서 쿠르베는 코뮌에 가담한 것은 코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고, 방돔 기둥을 파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옮기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코뮌에 짧은 기간 동안만 참여했으며, 회의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다른 코뮌 지도자들보다 가벼운 형벌인 징역 6개월과 벌금 500프랑을 선고받았다. 파리의 생트 펠라지 감옥에서 형의 일부를 복역하는 동안, 그는 이젤과 물감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인물 모델을 세울 수는 없었고, 감금 기간 동안 유명한 꽃과 과일 정물화 연작을 그렸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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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과 죽음

쿠르베는 1872년 3월 2일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방돔 기둥 파괴로 인한 그의 문제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1873년, 새로 선출된 공화국 대통령 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은 기둥을 재건하고 그 비용을 쿠르베가 지불하도록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쿠르베는 파산을 피하기 위해 스위스로 자발적인 망명을 떠났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스위스의 다양한 전시회에 참가했다. 스위스 정보국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그는 작은 스위스 미술계에서 "사실주의 학파"의 수장으로 명성을 얻었고 오귀스트 보 보비와 페르디난트 호들러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47]
이 시기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낚싯바늘에 걸려 아가미에서 피를 흘리는" 송어류 그림 몇 점이 있는데,[48] 이 작품들은 망명한 쿠르베의 우의적인 자화상으로 해석되어 왔다.[48] 그의 마지막 해에 쿠르베는 프랑스-스위스 국경의 쥐라산맥에서 "지구 깊은 곳에서 신비롭게 솟아나는 물" 을 묘사하는 등 여러 점의 풍경화를 그렸다.[49] 쿠르베는 망명 중 조각 작업도 했다. 이전 1860년대 초반에 그는 몇 점의 조각품을 제작했는데, 그중 하나인 《샤보트의 어부》(1862)는 오르낭에 공공 분수대용으로 기증했지만 쿠르베 체포 후 철거되었다.[50]
1877년 5월, 국가는 방돔 기둥 재건 비용을 323,000프랑으로 책정했으며, 쿠르베는 향후 33년간 연간 10,000프랑씩 분할 상환해야 했다.[51] 첫 할부금 납부일 하루 전인 1877년 12월 31일,[52] 쿠르베는 스위스 라 투르 드 페이즈에서 58세의 나이로 과음으로 악화된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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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 자화상
- 《검은 개와 함께 있는 자화상》, 1842
- 《자화상》, 1842
- 《자화상 (절망하는 남자)》, 1843–1845년경
- 《첼로 연주자, 자화상》, 1847, 스웨덴 국립미술관, 스톡홀름
- 《이젤 앞의 예술가》, 1847–48년경, 종이에 목탄
- 초상화
- 《폴 앙수트의 초상화》, 1842–43년경
- 《H. J. 판 위셀링의 초상화》, 1846
- 《젤리 쿠르베》, 1847
- 《보들레르의 초상화》, 1848
- 《프루동과 그의 아이들》, 1865
- 《스페인 여인》, 1854
- 《귀스타브 마티외》, 1869, 오스카 라인하르트 컬렉션 암 뢰머홀츠, 빈터투어
- 풍경화
- 《무티에르의 바위들》, 1855
- 《에트르타의 절벽, 폭풍 후》, 1870
- 《파도》, 1870
- 《노르망디 해안》, 1867
- 《랑그도크 퐁 앙브로익스》, 1857
- 《에트르타의 썰물 때 빨래하는 여인들》 (1866년 또는 1869년), 캔버스에 유채, 54.3 × 65.7 cm), 클라크 미술관
- 《쥐라산맥의 시냇물 (급류)》, 1872–73, 호놀룰루 미술관
- 《눈 효과》, 1860년대c.
- 《고요한 바다》, 1869,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낭 수 생트 안느 근처 사라진느 동굴》, c. 1875
- 《시옹성》, 1874
- 누드
- 《샘》, 1862,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흰 양말을 신은 여인》, 1864, 반스 재단
- 《앵무새를 든 여인》, 186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 《파도 속의 여인》, 186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 《샘》, 1868, 오르세 미술관
- 기타
- 《해벅》, 1844
- 《조각가》, 1845
-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 1849
- 《돌 깨는 사람들》, 1849
- 《시장에서 돌아오는 플라제 농부들》, 1850, 브장송 미술 및 고고학 박물관, 브장송
- 《레슬러들》, 1853, 부다페스트 미술관, 부다페스트
- 《잠자는 방직공》, 1853
-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 1854,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 《밀 이삭 줍는 사람들》, 1854
- 《사냥 아침 식사》, 1858,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쾰른
- 《눈 속의 여우》, 1860, 댈러스 미술관
- 《덩굴》, 1862, 톨레도 미술관, 오하이오주 톨레도
- 《갈매기와 소녀》, 1865
- 《어선》, 186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쇼아죄르 백작의 그레이하운드》, 1866
- 《사슴 사냥의 결말》, 1867, 브장송 미술 및 고고학 박물관, 브장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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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요약
관점

쿠르베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존경받았다. 클로드 모네는 1865년부터 1866년까지 자신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오르세 미술관, 파리)에 쿠르베의 초상화를 포함시켰다. 쿠르베의 독특한 사실주의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빌헬름 라이블 서클의 독일 화가들,[53]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그리고 폴 세잔이 그러했다. 쿠르베의 영향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파리의 다리》(1906)와 《도시에 접근하며》(1946)는 쿠르베의 《루의 샘》과 《세상의 기원》에 대한 프로이트적 재해석으로 묘사되었다.[54] 그의 제자로는 앙리 팡탱라투르, 엑토르 아노토와 올라프 이삭센이 있다.
쿠르베는 한때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항상 자유롭게 살았다. 자유롭게 삶을 마치게 해달라.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해달라. '그는 어떤 학파에도, 어떤 교회에도, 어떤 기관에도, 어떤 아카데미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특히 자유의 체제 외에는 어떤 체제에도 속하지 않았다.'[55]
쿠르베와 입체주의

19세기 두 예술가, 쿠르베와 폴 세잔이 20세기 입체주의의 등장을 위한 길을 닦았다.[57] 세잔의 공헌은 잘 알려져 있다.[58] 쿠르베의 중요성은 입체주의자들의 시인이자 대변인인 기욤 아폴리네르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그는 《입체주의 화가들, 미학적 명상록》(1913)에서 "쿠르베는 새로운 화가들의 아버지"라고 선언했다.[59] 장 메챙제와 알베르 글레즈는 종종 쿠르베를 모든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묘사했다.[59]
세잔과 쿠르베는 모두 자연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초월하고자 했다. 세잔은 보는 과정을 드러내는 변증법적 방법으로, 쿠르베는 그의 유물론을 통해 이를 추구하였다.[60] 입체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을 결합하여 예술 혁명을 발전시켰다.[61]
형식적인 수준에서 쿠르베는 자신이 그리는 대상의 물리적 특성, 즉 밀도, 무게, 질감을 전달하고자 했다. 존 버거 미술 비평가는 "쿠르베 이전의 어떤 화가도 자신이 그리는 대상의 밀도와 무게를 그토록 타협 없이 강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62] 이러한 물질적 현실에 대한 강조는 그의 작품 속 대상에 위엄을 부여했다.[63] 버거는 입체주의 화가들이 "자신이 나타내고 있는 것의 물리적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들은 쿠르베의 후계자들이다"라고 언급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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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약탈 미술품
나치 독일 시대(1933~1945) 동안 유럽 전역의 유대인 미술품 수집가들은 홀로코스트의 일환으로 재산을 압류당했다. 쿠르베가 만든 많은 미술품들이 이 기간 동안 나치와 그들의 요원들에 의해 약탈되었고, 최근에야 이전 소유주 가족들에게 반환되었다.
쿠르베의 《에트르타 절벽》은 유대인 수집가 마르크 볼프슨과 그의 아내 에르나 소유였는데, 두 사람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나치 프랑스 점령 중 사라진 후, 몇 년 뒤 오르세 미술관에서 다시 나타났다.[65]
위대한 헝가리 유대인 수집가 모르 리포트 헤르초크 남작은 《블로나이 성 (눈)》(1875년경, 현재 부다페스트 미술관 소장)[66]과 쿠르베의 가장 악명 높은 작품인 세상의 기원을 포함한 여러 쿠르베 작품을 소유했다. 그의 2000-2500점의 컬렉션은 나치에 의해 약탈되었으며 많은 작품들이 아직도 실종 상태이다.[67]
구스타프 쿠르베의 그림 《염소를 든 시골 소녀》, 《아버지》, 《바위가 있는 풍경》은 뮌헨에 숨겨진 구를리트 미술품에서 발견되었다. 이 작품들이 누구의 소유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68][69]
독일계 유대인 조세핀 바인만과 그녀의 가족은, 《그랑 퐁》을 소유했었지만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 군인 헤르베르트 셰퍼가 이를 획득하여 예일 대학교 미술관에 대여했고, 바인만 가족은 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70]
주드 폼에 있는 프랑스 미술품 데이터베이스(아인자츠스타프 라이히슬라이터 로젠베르크의 문화 약탈)에는 쿠르베에 대한 41개의 항목이 있다.[71]
2023년 3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한 박물관은 1941년 파리에서 나치에게 도난당한 귀스타브 쿠르베의 그림 《어린이들의 춤》을 반환했다. 이 캔버스는 유대인 레지스탕스 단원의 소유였다. 영국 정부가 2000년에 설립한 약탈 자문 위원회는 3월 28일 "로베르 빙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림이 나치 점령군에 의해 도난당했다"고 결론 내렸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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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내용주
각주
추가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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