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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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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영어: Realism)는 1840년대 프랑스에서 나타난 예술 사조이다.[1] 사실주의는 19세기 초부터 프랑스 문학과 예술을 지배했던 낭만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다.[2] 사실주의의 창시자이자 주창자인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는 현실적이고 전형적인 당대의 인물과 상황을 진실과 정확성으로 묘사하고자 했으며, 삶의 불쾌하거나 추악한 측면을 피하지 않았다.[3] 사실주의는 낭만주의 운동의 이국적인 주제, 과장된 감정주의, 드라마에 반발하여, 이전에는 예술 작품에서 거부되었던 이상화되지 않은 주제와 사건에 초점을 맞추었다.[2] 사실주의 작품은 평범한 삶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있는 모든 사회 계급을 묘사했으며, 산업 및 상업 혁명이 가져온 변화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주의는 세상의 이상적인 표현을 담기보다는 사물이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2] 사실주의는 다른 나라로 퍼져나갔으며, 국가 별로, 예술가들의 예술적 배경에 따라 차이점이 있지만, 비슷한 원칙을 유지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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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학자들은 사실주의가 1800년대 중반의 여러 사회적 조건들, 즉 참정권 운동, 도시 이주, 사회 계급 간의 긴장, 산업 및 상업 혁명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등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5][6] 1848-49년에 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제국, 헝가리,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났다.[5] 쿠르베의 1849년 첫 사실주의 작품들과 이후의 작품들은 종종 가난하고 노동 계급의 사람들을 묘사했는데, 아름답고 이상화된 세계를 묘사하고자 했던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주제가 아니었다.[5] 사실주의의 이러한 사회적 요소는 다른 나라의 사실주의에서 다양한 정도로 나타난다.[4][7]
프랑스 사실주의의 시작
요약
관점

사실주의 운동은 19세기 중반 낭만주의와 역사화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되었다.[7] 사실주의 화가들은 '진정한' 삶을 묘사하기 위해 평범한 환경에서 실제 활동에 참여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7] 프랑스 사실주의의 주요 주창자들은 귀스타브 쿠르베, 장프랑수아 밀레, 오노레 도미에,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였다.[8][9][10] 쥘 바스티앙르파주는 사실주의 운동의 후기 단계에서 나타나 인상주의의 도래를 알린 예술 양식인 자연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11] 사실주의 미술 운동은 에밀 졸라, 오노레 드 발자크,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자연주의 문학 운동과 때를 같이 했다.[12]
쿠르베는 사실주의의 선두 주자였으며 국가 지원 미술 아카데미에서 선호하던 인기 있는 역사화에 도전했다.[7] 그의 그림인 《오르낭의 매장》과 《돌 깨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역사화에 사용되는 거대한 캔버스에 묘사하였다.[13] 쿠르베의 초기 작품들은 렘브란트와 티치아노와 같은 고전 대가들의 세련된 방식을 모방했지만, 1848년 이후 그는 대중 인쇄물, 상점 간판, 기타 민속 장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대담하지만 우아하지 않은 스타일을 채택했다.[14] 논란을 일으킨 그의 첫 번째 그림인 《돌 깨는 사람들》에서 쿠르베는 인간을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표현하는 목가적인 전통을 피했다.[14] 대신, 그는 매력 없는 돌투성이 길가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남자를 묘사했다. 또한 얼굴을 숨김으로써 단조롭고 반복적인 노동의 비인간적인 본질을 강조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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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의 확산
요약
관점
프랑스 사실주의 운동은 다른 서구 국가들에서도 다소 늦게 발전했을 뿐, 스타일적, 이념적으로 유사한 흐름을 보였다.[4] 프랑스의 사실주의 운동은 역사화에 대한 공식적 지원에 대한 반항과, 이상화된 버전이 아닌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는 열망이 특징이었다.[2] 역사화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많지 않았던 나라에서는 기존의 풍속화 전통에서 사실주의로 비교적 쉽게 전환되었다.[4] 프랑스 사실주의 그림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 전시되고, 외국 예술가들이 파리와 뮌헨과 같은 유럽 미술 중심지에서 공부하고 여행하는 과정에서 사실주의에 노출되면서, 사실주의 미술 운동은 전 서방세계로 확산되었다.[16]
독일

쿠르베의 영향은 독일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 그곳의 저명한 사실주의자로는 아돌프 멘젤, 빌헬름 라이블, 빌헬름 트뤼브너, 막스 리버만 등이 있었다. 라이블을 비롯한 몇몇 젊은 독일 화가들은 1869년 쿠르베가 뮌헨을 방문하여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자연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시연했을 때 처음으로 만났다.[17][18] 라이블은 그 후 파리에서 1년을 보낸 후 뮌헨으로 돌아와, 1871년에 라이블 서클을 결성하여 뮌헨 미술원의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사실주의에 헌신했다.[18][19] 라이블의 작품은 대부분《교회의 세 여인》(1881)을 포함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그림이다.
아돌프 멘젤은 또 다른 저명한 사실주의 예술가로, 베를린에서 석판화가로 시작하여 1840년대에 그림을 독학하였다.[20][21] 멘젤은 자연, 초상화, 사람들로 가득 찬 무도회장 등 다양한 주제를 그렸다.[20][21]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베를린 3월 혁명에서 죽은 민간인 관들을 묘사한 《3월의 죽은 자들을 눕히다》 (1848)와 산업 공장 장면인 《철강 압연 공장》(1872–75) 등 두 가지가 있다.
러시아

러시아의 사실주의는 1850년대와 1860년대에 나타났다.[20] 아카데미와 차르에 대한 불만으로 많은 미술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 여행 전시회를 시작했으며, 시골에서 농민과 농촌 생활을 그리는 과정에서 이동파 (여행자, 방랑자, 유랑자)로 알려지게 되었다.[4][22] 이들 이동파 중에는 풍속화가인 바실리 페로프, 풍경화가인 이반 시시킨, 알렉세이 사브라소프, 아르힙 쿠인지, 초상화가인 이반 크람스코이, 역사화가인 바실리 수리코프 등이 있다.[23] 러시아 사실주의자들 중 가장 잘 알려진 화가는 일리야 레핀으로,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1870–73)과 혁명을 테마로 한 농민 그림으로 유명하며, 바실리 베레샤긴은 전쟁과 인도를 여행하며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20][24][25]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는 1853년에서 1860년 사이에 마키아이올리 예술가 그룹이 결성되었는데, 일부 회원들이 파리를 여행하면서 사실주의 미술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26] 마키아이올리는 피렌체 예술 아카데미의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대신 농촌과 도시 생활의 사실주의 장면을 그렸다.[27] 예술가들이 투스카니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에는, 피렌체와 19세기 중반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통 만남의 장소였던 카페 미켈란졸로에서 시간을 보냈다.[26][27] 마키아이올리는 또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인 리소르지멘토에도 참여했다.[26][27]
마키아이올리는 원래 회화에서 빛과 그림자에 중점을 두었다는 이유로 에페티스티(effet: 프랑스어로 빛의 효과)라고 불렸지만, 한 비평가가 그들을 "점"과 "얼룩"을 의미하는 마키아라고 부른 후에 이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27] 마키아이올리는 전반적으로 사실주의로 간주되지만, 그들의 예술 양식은 낭만주의의 밝음과 인상주의와 같은 빛에 대한 관심과 비교된다.[26] 마키아이올리의 그림은 다양한 농촌 풍경과 농민, 도시 장면과 노동자, 전투 그림을 포함한다. 마키아이올리 예술가들 중 일부는 조반니 파토리, 세라피노 데 티볼리, 실베스트로 레가, 텔레마코 시뇨리니 등이 있다.[26]
네덜란드

헤이그 화파는 186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기반을 둔 사실주의 예술가 그룹으로, 바르비종 화파의 풍경화, 프랑스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17세기 네덜란드 대가들의 주제에 영향을 받았다.[20][28][29] 또한 많은 그림에서 회색 톤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회색 화파'라는 별명도 붙었다.[28] 프랑스 사실주의자들과 비슷하게, 그들은 낭만주의를 무시하고 평범한 것을 객관적으로 그렸지만, 인간의 곤경에 대한 관심은 덜했다.[20]
빌렘 로엘롭스와 안톤 마우베는 농촌 풍경을 그렸고, 헨드릭 빌렘 메스다흐는 바다 풍경과 어선을 그렸으며, 야코프 마리스는 마을과 수로를 그렸다.[29] 학자들은 헤이그 화파의 작품 중에서 요제프 이스라엘스의 작품이 귀스타브 쿠르베와 장프랑수아 밀레의 작품과 가장 비견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주 농민과 노동을 묘사했다.[29] 빈센트 반 고흐는 마우베에게 지도를 받았고, 1886년 파리를 방문하여 인상파 작품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는 원래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20]
영국

후버트 폰 헤르코머, 루크 필즈, 프랭크 홀은 1870년대부터 비공식적인 영국 사회적 사실주의 화파를 구성했다.[30] 그들은 1872년부터 1876년까지 더 그래픽에서 함께 일하며 신문 삽화용 목판화 이미지를 제작하며 영국의 사회 문제와 빈곤에 대해 주목하였다.[30][31] 독일 태생의 헤르코머는 멘젤의 목판화와 작품을 존경했으며, 이는 더 그래픽을 위해 제작한 판화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다.[31] 판화에서의 초기 경력 후, 헤르코머, 필즈, 홀은 그림으로 전환하여, 빈곤한고 노동자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영국 귀족을 위한 초상화를 그렸다.[31][32] 10년 일찍 활동했던 프레데릭 워커도 이들과 비슷하게 판화에서 사실주의 회화로 전환하였는데, 19세기 후반 헤르코머의 작품과 다른 영국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33][31]
라파엘 전파도 이들과 비슷한 경향이 있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들을 사실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34] 라파엘 전파는 프랑스와 러시아 사실주의자들처럼 1800년대 중반에 아카데미를 거부하고 자연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자 했지만, 그들의 작품은 더 감성적이고 낭만주의와 나자렛 화파를 연상시킨다고 주장된다.[35] 다만, 라파엘 전파의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작품은 《작업》 (1855, 1863)과 《잉글랜드의 마지막》 (1852-5)에서 예시되듯이 더 전통적인 사실주의적이었다.[34]
미국

사실주의는 1860년대와 1870년대 파리와 뮌헨에서 유학하던 미국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9] 윈슬로 호머와 토마스 에이킨스 등 초기 미국 사실주의자 두 명은 각각 1867년과 1866-69년에 파리에서 수학했다.[36] 호머의 초기 작품은 사실주의 양식의 남북 전쟁 캠프와 농민 그림으로 구성되었지만, 그는 생애 후반에는 해안 도시와 자연을 묘사하는 더 낭만적인 양식으로 전환했다.[36][37][38] 에이킨스는 사실주의 양식의 초상화와 야외 장면, 특히 물 위에서 노 젓는 사람들을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다.[39] 1870년대 뮌헨의 뮌헨 미술원에서 유학하던 미국 예술가들은 사실주의를 역사화에 적용했던 카를 폰 필로티에게 배웠다.[19] 그에서 수학한 학생들 중에는 프랭크 뒤베넥,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 프랭크 커리어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또한 사실주의 라이블 서클의 회원들이었다.[18]
이후 1890년대 뉴욕 시의 애쉬캔 화파과 함께 후기 미국 사실주의 물결이 일어났다. 이들은 도시 장면과 노동자들을 작품에 묘사했다.[36][40] 이들의 지도자격인 로버트 헨라이는 1886년에 펜실베이니아 미술아카데미에 다녔는데, 그곳의 교육은 토마스 에이킨스의 사실주의 양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에이킨스는 헨라이가 입학하기 직전에 사임해야 했다.[36] 렌라이는 파리에서 3년을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에 정착하였으며 주류 아카데미와 인상파 미술 운동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36][41] 그룹의 다른 사실주의 회원으로는 존 슬론, 윌리엄 글래컨스, 에버렛 신, 조지 럭스 등이 있다.[36] 멘젤을 비롯한 영국 사실주의자들과 비슷하게, 이 네 명 모두 신문 인쇄 삽화가로 경력을 시작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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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 일라리온 프리야니시니코프, 《조커들》 (1865). 모스크바의 고스티니 드보르
- 콘스탄틴 사비츠키, 《철도 수리》 (1874)
- 이반 시시킨, 《호밀밭》 (1878)
- 빌헬름 라이블, 《마을 정치인들》 (1877)
- 빌헬름 라이블, 《교회의 세 여인》 (1881)
- 빌헬름 트뤼브너, 《베슬링 호수 강가의 목수들》 (1876)
- 아돌프 멘젤, 《집 뒤뜰》 (1846)
- 막스 리버만, 《거위 털을 뽑는 여인들》 (1872)
- 조반니 파토리, 《들판의 세 농부》 (1866–67)
- 실베스트로 레가, 《라 페르골라》 (1868)
- 안톤 마우베, 《해변의 아침 산책》 (1876)
- 후버트 폰 헤르코머, 《어려운 시절》 (1885)
- 루크 필즈, 《임시 수용소 입소 신청자들》 (1874)
- 프레데릭 워커 (화가), 《방랑자들》 (1868)
- 포드 매독스 브라운, 《잉글랜드의 마지막》 (1852–1855)
- 윈슬로 호머, 《전방의 죄수들》 (1866)
- 에버렛 신, 《뉴욕의 교차로》 (1899). 코코런 미술관, 워싱턴 D.C.에버렛 신, 《뉴욕의 교차로》 (1899). 코코런 미술관, 워싱턴 D.C.
- 톰 로버츠, 《황금 양털》 (1894).
- 유제프 헤우몬스키, 《떠나는 두루미》 (1871). 크라쿠프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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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문헌
Boime, Albert. (2004). Art in an Age of Counterrevolution, 1815-1848.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Boime, Albert. (2007). Art in an Age of Civil Struggle, 1848-1871.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u, Petra ten-Doesschate. (2012). Nineteenth-Century European Art. Third Edition. Prentice Hall.
Eisenman, Stephen F., ed. (2011). Nineteenth Century Art, A Critical History. Thames & Hudson.
Manstein, Marianne von, and Bernhard von Waldkirch. (2019). The Art of Seeing: Wilhelm Leibl. Hirmer Publishers.
Slayton, Robert A. (2017). Beauty in the City: The Ashcan School.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Werner, Marcia. (2005). Pre-Raphaelite Painting and Nineteenth Century Real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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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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