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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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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종말론(基督敎 終末論, 영어: Christian eschatology)은 기독교에서 세계와 인류의 종말을 전제로 하여 그들의 운명에 대한 문제를 다룬 종말론을 말한다. 그리스도재림과 인류의 부활최후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 등으로 이어지는 종말의 진행 과정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1] 종말론에는 철저한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 시작된 종말론, 미래 종말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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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주의

과거주의(Preterism)는 일부(부분 과거주의) 또는 모든(완전 과거주의) 예언을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는 기독교 종말론의 관점이다. 흔히 이 학파에서는 다니엘서의 예언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일어난 사건,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기원후 1세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성취되었다고 본다.

역사주의

역사주의(Historicism)는 성경의 예언을 역사적인 인물, 국가, 사건에 연관시키는 관점이다. 이 관점의 특징은 성경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날 미래에 걸쳐 예언이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취된다는 견해이다. 종교 개혁 이후 19세기까지 대부분의 개신교 종교 개혁가들은 이 관점을 취했다.

미래주의

미래주의(Futurism)는 (일부 역사적 사건을 인정할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종말론적 예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으며 이 시대와 세상의 끝에 일어날 사건에 대해 주로 말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에 따르면 대부분의 예언은 대환난이라는 전세계적 혼란의 시기 중에 또는 그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상주의

이상주의(Idealism)(영적 접근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림)는 요한계시록의 모든 개념이 어떠한 상징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천국의 전통적 개념을 의심하면서도 천국이 지상에 세워질 가능성을 믿으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FD 모리스, 카를 바르트 등은 천국을 물리적인 실제 왕국이 아닌 사회의 전반적인 개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해석하였다. 이들은 어떠한 예언도 실질적 의미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주의, 역사주의, 미래주의 모두와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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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신학적 이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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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천년설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은 크게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나뉜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일반적으로 환난 이후의 휴거를 주장하며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 사이에 강한 구별을 두지 않는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휴거에 대한 관점은 다양할 수 있으나 대체로 환난 이전의 휴거를 주장하며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를 강하게 구별한다.

전천년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문자 그대로 지상의 천년왕국을 시작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한 이 그리스도의 재림은 대환난의 때와 일치한다. 이때 죽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활하고 아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휴거되어 그리스도가 오실 때 그분을 만날 것이다. 이후 천년의 평화(천년왕국)가 뒤따른다고 하는데, 이 동안 그리스도가 통치하고 사탄은 심연에 갇힐 것이다. 이 이론은 휴거가 언제 일어날지에 대한 관점에 따라 다시 전휴거설, 중휴거설, 후휴거설로 나뉜다.

후천년설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은 요한계시록 20장의 해석에 따라, 기독교 윤리가 번성한 메시아 시대로서의 "천년왕국"이 세워진 뒤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는 설이다. 이 용어는 종말에 대한 여러 유사한 견해를 포괄하며, 전천년설과는 유사점이 있으나 무천년설과는 대조된다.

후천년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사역과 전파를 통해 지상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시며, 교회에는 복음과 성령을 통한 능력을 주셔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대명령(마태복음 28:19)을 맡기셨다고 한다. 후천년설은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복음의 성공이 증가함에 따라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믿음, 의로움, 평화, 번영이 사람들과 나라들 속에서 우세한 시대가 점차적으로 올 것이다. 그러한 상태가 오랜 기간 지속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게, 육신으로, 영광 속에 돌아오셔서 부활과 최후의 심판으로 역사를 끝내시고, 그 후에 영원한 질서가 뒤따를 것이다.

후천년설은 19세기와 20세기에 인종차별 철폐론이나 사회복음주의와 같은 개혁 운동을 추진하던 미국의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신학적 신념이었다. 후천년설은 기독교 재건주의라는 운동의 핵심 교리 중 하나가 되었다. 20세기 보수파는 이를 종말을 내재화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해 왔다.

무천년설

무천년설(Amillennialism)은 예수가 지상에서 문자 그대로 천년 간의 물리적 통치를 할 것이라는 믿음을 거부하는 주장이다. 무천년설이라는 명칭에는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데, 이들은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이 없다기보다는 전천년설과는 대조적인 주장에서 생긴 이름이기 때문이다.

무천년설은 계시록 20장에 언급된 "천년"을 문자 그대로의 설명이 아닌 상징적인 숫자로 간주한다. 이들은 천년왕국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현재 교회 시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 동안 그리스도의 통치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고, 교회 시대가 끝나면 그때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심판을 위해 돌아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영구적인 통치를 수립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의 사후세계

이승구 박사는 사후의 상태에 대하여 성경에 근거하여 몇가질 설명한다.[2]

1. 사후 상태에 대해서 생각하는 성도들의 기본적인 시각 기본적으로 성도들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미 이 세상에서도 영생을 누리고 있고,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영생을 누리며, 또한 그 후에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영원히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죽은 다음의 상태가 성도들에게 대해 최종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영생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부활체가 누리는 영생의 극치의 빛에서 사후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거부터 신학에서는 사후 상태를 ‘중간 상태’(the intermediate state)라고 말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개개인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성도를 중심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영생과 극치 상태에서 누릴 영생 사이에 있는 시기(즉, 中間期; intermediate period)의 상태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중간 상태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인 ‘하늘’에서의 삶과 불신자들의 중간 상태인 불신자의 영혼만이 ‘지옥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 나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표현한 바와 같이, 최고의 하늘(the highest heaven)과 지옥(hell) 이외에 다른 중간 상태는 없는 것이다. 즉, 천주교회가 말하는 연옥(purgatory)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연옥에 대한 생각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생각이 중세기에 발전한 것이다. 중간 상태는 ‘최고의 하늘’과 ‘지옥’뿐인 것이다. 성도들의 중간 상태는 최고의 하늘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고, 불신자들의 중간 상태는 지옥의 고통과 형벌을 미리 누리는 것이다.

2. 성도는 죽으면 하나님께서 계신 그 곳, 즉 ‘하늘’(heaven)에 있게 된다. 성도의 사후 상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면전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하늘(heaven)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편재성(遍在性), 즉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을 부인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늘에만 계신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편재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초월하셔서도 계신다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충만히 채우시면서 계시지만, 또한 이 세상을 초월하신다. 이 초월성을 중점으로 말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심이로다”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초월성을 중심으로 말하는 하늘이라는 말은(루터파 신학자들이 루터를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기를 즐겨하듯이) 장소성 또는 경역성(境域性; locality)을 전혀 배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살과 뼈를 지닌 그러나 변화되신 몸을 가지시고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체를 가지고 있는 곳은 분명히 장소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영혼이 사후에 있게 되는 ‘하늘’(heaven) 또는 ‘최고의 하늘’(the highest heaven) 또는 ‘삼층천’(the third heaven)은 다 같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성경은 이것을 ‘낙원’(paradise)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삼층천과 낙원을 동일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의 한 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인 “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그 문맥상 죽으면 그 영혼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낙원은 루이스 벌코프 등이 잘 지적하듯이 하나님께서 계신 그 ‘하늘’(heaven)을 의미하는 것이다(the paradise is the heaven). 한국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계신 그 ‘하늘’(heaven),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승천하신 그 ‘하늘’(heaven), 그리고 성도들의 영혼이 죽음 후에 있게 될 그 ‘하늘’(heaven)을 번역할 때 ‘천당’(天堂)이라는 용어를 써서 번역해 왔다. “예수 천당”이라는 구호에서 말하는 천당이 바로 이 heaven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사용한 말이다. 이는 단순히 영어의 heaven에 대한 한글 번역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천당(天堂)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늘 집’이라는 뜻으로 한자어 풀이를 해서는 안 되고, 이는 그저 영어의 ‘heaven’이라는 말의 번역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죽은 후에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신 그 ‘하늘’(heaven), 한국 교회에서 흔히 그렇게 불러 오던 대로 ‘천당’(heaven)에 있게 되는 것이다.

3. 중간 상태는 영혼의 상태이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그 몸은 무덤에 묻히게 되고, 그리하여 그 몸은 썩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늘’(heaven)에 있을 때 그는 몸을 가지지 않은 영혼으로만 있게 된다. 물론 중세 때에 사후에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일종의 몸(a kind of body)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것은 ‘영체’(airy body)라고 부르는 일도 있어 왔다. 심지어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을 한 이들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모든 바른 신학자들이 성경에 근거해서 바로 생각하여 온 바와 같이 죽은 다음의 상태는 영혼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있는 상태이다. 영은 살과 뼈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후 상태의 영혼이 그 어떤 형태의 몸을 가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특히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는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라는 표현에서 이를 확인받을 수 있을 것이다(히 12:23). 그러므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와 나사로가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비유가 사후 상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주는 비유적 표현으로 주어진 것이지, 그것이 문자적으로 성도들이 사후에 몸을 가진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생각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다른 곳에서 가르치신 것과 모순되는 것을 제시하면서 이 비유를 통해 신자의 사후 상태를 가르치시려고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후 상태가 영혼만의 상태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중간 상태는 영혼의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영혼만이 있는 것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를 적극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몸과 관련된 어떤 생각을 영혼의 상태에 부과해 넣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 아주 분명한 언급이 있지 않으므로 이에 대해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가장 자연스러운 추론을 할 수는 있다. 그리고 성경에 단언되어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는 것도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좋은 해석의 전통을 따라서 우리는 사후 상태의 영혼이 흰 옷을 입고 있다든지,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성도들이 중간 상태를 지내게 되는 ‘하늘’에서 흰 옷을 입고 있다는 내용의 간증들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찬양한다는 표현들을 그 말씀의 본래적인 의도에 대해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문제가 생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들에 대한 다음 설명에서 분명해 진다: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더라”(계 7:14). 이 말을 문자적으로 취하면 그들의 옷은 붉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어린 양의 구속으로 인한 정결케 함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는 문자적으로 구원 받은 이들의 영혼이 지금 하늘에서 흰 옷을 입고 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구속 받은 이들의 영혼이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부르짖어 기도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계 6:9-11) 그들이 항상 제단 아래 엎드려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이 있는 상태를 이 지상에서 몸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4. 사후의 신자의 영혼은 쉬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순교자들과 증언자들에게 대해 “저희에게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아직 잠시 쉬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부터(계 6:11)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는 본문의 직접적인 대답은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는 것이다(계 6:11). 그러므로 하늘의 온전케 된 성도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정해진 때가 차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후의 하늘의 영혼은 기본적으로 그 일을 그치고 쉬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영혼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므로 기도도 하며 찬양도 하며 즐거움도 누리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 좋으나”(빌 1:23)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는 것도 유익하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면서 바울은 그들 중 어느 것을 가릴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결국 자신만을 생각하면 이 세상을 떠나서 주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상태가 성도들의 최종적 상태는 아니므로 성도들은 기쁨을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주적으로 말하면 우주 전체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최종적 목적에 도달하는 것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피조세계 전체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러 피조세계가 허무한 것에 굴복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롬 8:19-21 참조). 이는 또한 개인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부활체를 가지고 그 부활한 온전한 존재 전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행하게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5. 사후 상태를 바로 이해하는 성도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이 성경적인 사후 상태의 이해를 가지게 된 성도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1) 지금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근거해서 누리고 있는 영생을 확신하고 그 영생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성령 안에서 사랑과 화평과 희락을 누리고 그것을 전하는 도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사후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면전에 있게 될 것임을 분명히 믿으면서 우리는 죽을 때에도 ‘하늘’ 소망을 가지고 죽음에 임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이 성도들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사후 상태에 대해서 정확하고 바른 이해를 가지고 그 상태가 몸을 가진 상태인 것과 같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3) 그러나 성도의 사후 상태가 최종적인 상태인 것과 같이 생각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온전한 영원 상태를 분명히 하지 않는 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성도들의 궁극적 상태는 부활체를 가지고 새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4)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믿지 않는 이들은 △ 지금 여기서도 영생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한 △ 사후에도 ‘하늘’의 복락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그 영혼이 ‘지옥’의 고통을 미리 경험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 영원의 상태에서도 그 몸과 영혼이 ‘지옥’의 형벌을 영원히 받게 되는 영벌의 상태에 있게 될 것임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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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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