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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청

김장청(金長淸):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집사랑으로 김유신의 행록을 저술한 관리.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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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청(金長淸, 생몰년 미상)은 신라의 관인(官人)으로 관직은 집사랑(執事郞)이었다.

김유신(金庾信)의 현손으로 김유신의 행적을 정리한 《행록》(行錄) 10권을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행록은 고려 중엽까지 전해졌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김유신열전은 이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김유신행록

요약
관점

김장청은 생전에 자신의 현조(玄祖) 김유신의 행적을 정리한 《행록》(行錄) 10권을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다.[주 1] 이 김유신행록은 고려 중엽까지 전해졌으며,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이 김장청의 《행록》을 바탕으로 《삼국사기》 열전 전체 분량의 1/3에 달하는 김유신의 열전(상, 중, 하)을 저술하였다.

서술 양상

고려 중엽까지는 현존했던, 김장청이 저술한 이 《행록》에 대해서 김부식은 "자못 꾸며낸 말(釀辭)이 많다"라고 평하고 있다.

유신의 현손인 신라 집사랑 장청이 《행록》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오는데, 자못 꾸며낸 말(釀辭)이 많다. 그런 까닭에 그러한 내용을 빼버리고, 그중에 적어둘 만한 것을 가져다가 이 열전을 지었다.[3]

김부식이 말한 '꾸며낸 말'의 의미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데, 단순히 '지어낸 말'일 수도 있고, '부풀린 말' 또는 '번잡한 말'일 수도 있다. 즉 사실 여부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표현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4] 전자의 경우 유교적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에 따라 유교적인 견지에서 '교화'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으레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분류되는 초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신화, 설화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유교적인 역사 서술 원칙과 관련이 있고, 후자의 경우는 중국 한문 문장의 문장 구성이나 서술 방식을 전범으로 삼는 견지에서 비추어 옛 기록의 표현 방식이나 문장 구성, 사건에 대한 서술 태도가 번잡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편찬 배경

김장청이 《행록》을 저술한 배경에 대해서는 혜공왕 6년(770) 김융의 모반에 연루되어 타격을 입고 몰락해가던 김유신의 후손이 김유신계의 복권을 위해 김유신을 현창함으로써 집안의 과거 위상을 회복시키려는 의도에서 저술되었다고 여겨진다.[5]

이기백은 김장청의 관직인 집사랑이 신라 역사상 최고의 공신이자 영웅으로 손꼽히는 김유신의 후손이라기에는 (단순히 김장청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 문제라고 해도) 지나치게 미관말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배경을 신라의 삼한일통 이후 신라에서 무열왕계 전제로 인한 왕권 강화 정책과 그에 수반한 기존 귀족 세력에 대한 견제와 숙청을 제시하였다.

무열왕대를 기점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유신의 집안이 몰락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혜공왕 6년(770년)에 일어난 김융의 난이었는데 [주 2] 김장청이 《행록》을 지은 배경에는 당시 신라 사회에서 푸대접받던 김유신 후손들의 불만과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었고, 김융의 일 이후에 김유신 후손들의 신원 운동이 벌어졌던 흐름에서 김장청 역시 이 흐름에 동조하여 위대한 선조의 업적을 기록한 《행록》을 지어 유포함으로써 실추된 집안의 위상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행록》이 갖는 의미는 김장청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그치지 않고 김유신 집안 전체의 염원을 대변한 것이고 나아가 삼한일통의 주역이었던 무열왕계 왕실과 김유신 후손 이렇게 두 일가의 결속과 위상 제고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까지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8] 한편으로 김유신 후손들의 지위가 하대에 하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행록 또한 그들의 신원을 위해서라기보다 기존 지위의 강화를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9] 보거나 하대 혼란기에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드러내 모범을 보이려는 목적에서 찬술했다는 견해, 진골 귀족의 왕위 쟁탈전 속에서 김유신계의 정치적 결속을 꾀하고자 찬술했다는 견해도 있다.[10]

이러한 《행록》 서술 당시의 분위기, 서술자의 입장이나 서술자와 그 서술 대상이 된 인물 사이의 관계를 고려할 때 《행록》에는 확실히 서술 대상에 대한 숭앙 의도가 크게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사실의 과장이 있을 수밖에 없고, 또한 집안의 내력이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 등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어 매우 번잡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공식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러한 내용이나 표현들은 지극히 일반을 제외하고는 '번쇄한' 또는 '내용이 과장된', '표현이 거친' 불필요한 것이고, 김부식이 언급한 '꾸며낸 말'이란 유학자로써의 합리주의적 견지에서 괴이하고 허탄한 내용으로 분류될 초현실적인 설화뿐만 아니라 행장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집안의 위인에 대한 지나친 과장과 현창의 문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11]

편찬 시기

행록의 찬술 시기는 대체로 열전에 수록된 김암이 일본에 다녀온 혜공왕 15년(779년)에서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봉되는 흥덕왕대 사이로 보는 것에[12] 큰 이견은 없다. 전덕재는 김장청이 김유신의 '현손'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현손이 손자의 손자가 아니라 단순히 '먼 후손'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장청의 직함인 '집사랑'(執事郞)과 김유신을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으로 봉하였다는 기사를 지적하여 《김유신행록》의 찬술 시기를 경문왕-헌강왕대로 내려보기도 하였다.[13]

이에 대해서 윤경진은 당대의 기사에서 선덕왕이나 원성왕을 각각 내물왕의 10세손, 12세손으로 명시하거나 애장왕의 외할아버지인 김숙명을 내물왕의 13세손, 김양을 무열왕의 9세손으로 표기하는 등 계보 관념에서 그 대수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데 김유신을 현창하는 자료에서 구체적인 대수를 파악하지 않을 리가 없으며, 전덕재의 주장처럼 '먼 후손'이라는 의미라면 '원손'(遠孫)이라고도 쓸 수도 있는 것을 굳이 '현손'(손자의 손자)이라는 단어를 쓸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반박하였다.[14] 또한 혜공왕대 이후에 경문왕대까지 김유신 관련 사적은 확인되는 것만을 기준으로 해도 흥무대왕 추봉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데, 김유신의 위상을 표현할 수 있는 핵심적인 사적이고 경문왕대와 시차도 별로 나지 않는 중요한 사건을 (경문왕대에 행록이 편찬되었다고 할 경우) 빼놓을 이유가 없으며,[15] 열전 내용이 김유신 후손의 억울한 죽음과 김유신의 분노를 담은 취선사 연기설화로 마무리되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대왕 추봉으로 김유신의 위상이 한껏 높아진 것에 수반하여 김유신계의 복권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 이보다 후대에 찬술되었다고 하면 사적이 김유신의 분노로 마무리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16]

장청의 직함인 집사랑이나 태대서발한도, 집사랑이 장청의 행록 찬술 당시의 관직인지 아니면 전직인지에 따라 준거 시점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혜공왕대 이전에 장청이 집사랑을 역임하였다고 하면 찬술 시점에 상관없이 '집사랑 장청'이 나올 수 있다고 반박하였다.[16] 태대서발한이라는 관직도 음차 과정에서 다른 표기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혼용될 여지가 있으며, 전덕재는 '태대서발한' 표기가 경문왕대 이후의 자료에서 주로 확인된다는 점을 지적하였지만 국초 이래 쓰이던 '서불한' 표기도 효공왕대 기사[17]에 나오고 있는 등 양자가 대체 관계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18]

한편 윤경진은 찬자 김장청과 김암을 동일인물로 보면서 찬술 시기를 원성왕대로 파악하였다(후술).

내용

《삼국사기》 열전의 내용은 국자박사 설인선이 지었다는 김유신의 비문을 두 번 인용한 것과 주, 편찬 경위, 논찬을 제외하고는 모두 《행록》에서 취재한 것이다. 열전에서 김유신의 사망 이후 서술은 그의 처자에 대한 언급이나 흥덕왕대에 흥무대왕으로의 추봉, 차남 원술의 사적과 손자 윤중의 사적, 윤중의 서손인 암의 사적, 혜공왕 15년(779년)에 김유신묘에서 일어난 사건, 현손 장청의 행록 저작(즉 김유신열전의 편찬 경위) 그리고 김유신에 대한 김부식 자신의 논찬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유신 자손에 대한 기록은 김장청과 같은 세대인 김암에 이르기까지 세대별로 특기할 만한 인물들의 사적을 기술하고 있는데, 모두 《행록》에서 취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19]

관산성 전투와 김무력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은 신주군주(新州軍主)로 있던 554년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의 관산성(管山城) 공격에서 백제의 공격을 격퇴하였고, 이 과정에서 성명왕을 전사시키는 공을 세웠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하에서는 문무왕의 발언으로 "옛날 백제의 명농왕(明穠王)이 고리산(高利山)에 있으면서 우리 나라를 치려고 꾀하였을 때, 유신의 조부 무력 각간이 장수가 되어 맞아 쳐서, 승세를 타고 그 왕 및 재상(宰相) 4명,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 침입을 좌절시켰다"[20]고 언급하고 있고, 같은 책 김유신열전 상에서도 김무력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명왕을 잡아 죽인 공을 거론하고 있는데, 삼국사기 본기와 대조해 보면 기록에서 세세한 차이점이 있다.

할아버지 무력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이 되어, 일찍이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 왕과 그 장수(將)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목베었다.[21]
백제왕 명농(明穠)이 가야(加良)와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飡)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 김무력이 주병(州兵)을 이끌고 나아가 전투를 벌였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갑자기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대들이 승기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4명과 사졸(士卒) 29,600명의 목을 베었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22]

관산성 전투에 관한 신라본기의 기록과 김유신열전의 기록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왕이 언급되는 것은 같은데, 본기에서는 '좌평'이었던 것이 열전에서는 '재상' 또는 '장수'로 바뀌어 있고, 이는 '좌평'으로 전승되어 오던 것을 어느 시점에서 '재상' 또는 '장수'로 개서되고 김장청이 행록 저술 단계에서 개서된 것을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김부식이 김유신열전을 찬술하면서 행록이 인용한 개서된 기록을 그대로 전재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김춘추 구출

선덕대왕 11년 임인(642년)에 백제의 대야성 공격으로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이 죽자 김춘추는 백제에 원수를 갚겠다며 고구려에 군사를 빌리러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에 대해 옛 고구려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는 고구려에 억류되었고, 이에 김유신이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공격하려 계획을 세우자 이를 접한 고구려에서 김춘추의 억류를 풀어 주었다. 이후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연계를 포기하고 왜국에 이어 당과의 제휴를 꾀했고, 이는 신라-당 동맹에 이어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김유신열전에서는 이 과정에 대해서 신라본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세세한 사건들을 기록하였는데, 김춘추가 고구려로 떠나기 전에 김유신과 맹세하여 김춘추가 60일 안에 돌아오지 못하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겠다고 김유신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서로 나누어 마셨다는 것, 김춘추가 고구려로 가는 길에 대매현(代買縣) 사람 두사지(豆斯智) 사간(沙干)으로부터 푸른 베(靑布) 3백 보를 받았고 이것을 김춘추가 억류되었을 때 보장왕의 측근 선도해에게 뇌물로 바쳐 선도해가 김춘추에게 억류에서 풀려날 방법을 은근히 알려 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김춘추가 말한 60일이 지나자 김유신이 결사대 3천 명을 모으고 선덕여왕으로부터 군사 동원의 허락까지 받아 냈으며 이것이 신라에 간첩으로 와 있던 고구려 승려 덕창에 의해 고구려에 보고되어 고구려에서 김춘추를 풀어 주게 하였다는 것 등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은 이 부분을 기록하고 "이는 본기(本記) 진평왕(眞平王) 12년에 적혀 있는 것과 동일 사건이지만 조금 다르다. 모두 고기(古記)에 전하므로 둘 다 남겨 둔다"[23]는 주기를 붙였다. 이강래는 《삼국사기》 주기에서 언급한 '고기'란 고기라는 제목을 붙인 책 제목이 아니라 단순히 '옛 기록'이라는 의미이며, 해당 김유신열전 기록의 원전은 김장청이 찬술한 《행록》에 전하는 기록이라고 지적하고 있다.[24]

북한산성 전투에서의 천문·기상상 이변

《삼국사기》 본기에는 태종 무열왕 8년(661)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이 술천성(述川城)에 이어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했을 때 북한산성의 성주였던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이 이를 상대로 20일을 버텼고, 성안에 양식이 다하고 힘이 부칠 무렵에 고구려군 진영에 큰 별이 떨어지고 뇌성폭우가 쏟아지자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고[25] 적고 있다. 본기는 고구려군의 철수를 이끌어낸 이러한 천문·기상상의 이변을 성주 동타천의 간절한 기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서술하였는데, 열전에서는 김유신이 불사(佛寺)에 나아가 제단을 설치하고 기도하였더니 마침 하늘의 변괴가 있었다고 전하여 김유신과 연결지어 서술하고 있다. 한편으로 《삼국유사》에는 성부산(星浮山)에 제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쓰니, 홀연히 큰 항아리만한 광채가 단 위로부터 나와, 이내 별이 되어 북쪽으로 날아갔다고 전하여 삼국사기 본기나 열전과도 차이를 보이며 이는 북한산성 전투에서의 천문·기상 이변과 관련해서 이미 당대에도 다양한 전승 자료가 존재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박찬흥은 열전에서 북한산성에서의 천문·기상 이변을 김유신의 행위로 부회한 것은 김장청이 행록을 저술하면서의 일로 보았다.[26]

태종 무열왕의 묘호와 김암

직관의 당풍 표기

또한 김유신 및 그의 부조인 김무력, 김서현의 관직을 기록함에 있어서 열전은 본기나 다른 열전 기록에 등장하는 '남천군주', 기존의 신라식 관등이나 직책을 중국식으로 부회한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 '대량주도독 안무대량주제군사'(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事),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당나라와 통일전쟁기의 '행군총관'의 사례를 참조하여 당풍으로 부회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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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요약
관점

김장청의 가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김윤중의 손자라고 되어 있고, 《김해김씨 족보》에는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 할아버지: 김윤중
  • 아버지: 김융(金融)?
    • 부인: 박씨(朴氏) - 박회(朴檜)의 딸
      • 장남: 김웅원(金雄元)
      • 차남: 김웅윤(金雄允)

일설로 김융(金融)이 김장청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한다.

김암과의 관련성

윤경진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태종 묘호 논쟁 기사를 분석하여, 김유신열전의 원사료로 이용된 김유신행록의 저자 김장청이 김암과 동일인물이며 행록 찬자에 대한 정보(김장청)는 국내에서 쓰던 이름으로 전승되었던 반면 본문에는 재당 활동 때의 이름(김암)으로 실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7] 윤경진은 태종 무열왕의 '태종' 묘호와 관련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사가 '일통삼한' 인식과 관련하여 당대의 기사가 아니라 후대의 윤색이 가미되었다는 견지에서 다음과 같은 정황을 제시하였다.[28]

  1. 《김유신행록》에서 김유신의 자녀와 부인들에 대한 소개에서 원술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아들들이나 그 손자인 윤중에 대해서는 그 구체적인 사적에 대한 기술이 없는 것에 반해, 윤중에 이어 수록된 김암은 김유신과 직접 관련한 내용이 없고 개인적인 이력과 행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김유신의 아들이나 손자보다도 두드러지는 서사를 갖추지 않은 그가 이런 형태로 부록되어 있는 특이한 양상을 띤다. 이는 김암이 바로 김유신행록의 찬자인 김장청이며 그가 찬자로써 자신의 이력을 현조 김유신의 행록 안에 담았고 이를 열전 찬자가 채록한 것이다.
  2. 《삼국유사》의 태종 묘호 관련 기사에서 태종 묘호에 대해 당 고종이 신라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우리 성고께서 위징, 이순풍 등을 얻어서 일통천하의 대업을 이루셨다"라고 하는 발언에서 음양가로써 주로 활약하며 위징과 동급에 두고 '일통천하'에 기여했다고 언급할 만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이순풍을 굳이 언급하고 있는데, 해당 기사는 김유신이 불교의 신격인 삼십삼천의 하나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원전이 김유신의 행록임을 짐작할 수 있고, 이는 (같은 음양가이기도 했던) 김암이 서사의 작성자가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3. 김암과 김장청은 김유신의 후손으로써 항렬이 같다.

또한 김암과 김장청이 다른 인물인 것처럼 실린 것은 그가 입당숙위하면서 성을 칭하고 이름을 바꾼 결과로 보이는데, 행록의 찬자에 대한 정보는 국내에서 쓰던 이름으로 전승되었던 반면에 본문에서는 재당 활동 때의 이름으로 실렸던 것이다.[29]

한편 전덕재는 김장청의 관직이 집사랑이라는 점과 김유신에 대해 '태대서발한'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김유신행록이 경문왕대 이후에 찬술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는데, 윤경진은 집사랑이라는 관직이 장청의 행록 찬술 당시의 관직인지, 아니면 전직인지에 따라서도 준거 시점이 달라질 수 있고 장청이 혜공왕대 관제 개정 이전에 집사랑을 지냈고 이것이 그의 이름과 연계되어 전승되었다면 찬술 시점이 원성왕대가 되어도 '집사랑 장청'으로 나올 수 있으므로 장청의 직함은 행록의 찬술 시점을 파악하는 준거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하고,[30] 장청이 김암과 동일인물이라는 견지에서, 김암이 입당유학을 떠나기 전에 사용했던 이름이 김장청이고 그때 직함이 집사랑이었으며, 입당유학 과정에서 이름을 김암으로 고쳤고 행록에 수록된 그의 이력은 고친 뒤의 이름인 김암으로 제시되었지만, 국내에서 활동할 때의 이름은 여전히 장청이었으므로 행록 찬자의 이름도 장청으로 전승된 것이라고 추론하였다.[31]

이에 대해 윤진석은 윤경진이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구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논지를 보강하기 위해 멋대로 끌어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32] 윤경진 자신도 "정황만으로 김암이 장청과 동일인이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인정하였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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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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