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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여
410년까지 존재했던 한국의 왕조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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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여(東夫餘)는 부여의 일부 세력이 동쪽으로 이동해 세운 나라이며, 동시에 해모수왕이 세운 북부여와 구분짓기 위해 부르는 명칭이다. 두만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그 위치와 영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동부여는 410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9년 6월) |
역사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서기 285년의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으로 인해 부여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여 왕실과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 북옥저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듬해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해 귀환했는데, 그중 일부가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이렇게 되어 원 부여가 있던 곳을 북부여라고 하고,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형성하여 동부여가 되었다는 것이 견해이나 당시 동부여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은 전혀없다. 4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북부여를 장악하자, 본국과 차단된 동부여는 자립하다가 41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전해지는 이야기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는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21년 고구려가 후한과 충돌할 때 부여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의 군사를 공격하여 현도성을 구원했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눙안에서 이를 오해해 구태가 백제의 시조인 것으로 기록해 시조 구태설이 생겨났다.
167년에는 부여왕 부태(夫台)가 후한 본토와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현도성과 무역 마찰이 생겨 선비족과 고구려의 묵인하에 현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285년의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으로 인해 부여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았으나 옥저로 도피했던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하였다. 346년 전연의 침공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입은 부여는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여 그 왕실만을 이어갔다. 결국 410년 광개토왕의 침공을 받고, 고구려에게 타격을 받고 494년 고구려의 문자명왕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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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여의 실체에 대한 견해들
- 3세기 후반(285) 모용선비의 공격에 옥저로 피신해왔던 부여인들의 잔여 세력이 세운 국가로서 파악하는 견해이다.[1] 이러한 견해는 동부여가 3세기 후반에 건국되었다면 광개토대왕비문의 추모왕때부터 속민이었다는 기록과 상충되는 점과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에 부여 왕족이 나라를 버리고 피신했던 옥저 지역은 당시 고구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여건을 상정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
- 부여가 농안(農安) 지역으로 밀려난 뒤 부여의 옛 고도 길림시에 잔존했던 부여 세력을 동부여로 파악하는 견해이다.[2] 이러한 견해는 북부여와 동부여가 동일 계통의 정치체라면, 이를 광개토왕비문 안에서 북부여와 부여, 동부여 등으로 구분하여 표기한 이유가 무엇인지 불분명해지며, 모두루묘지에 보이는 북부여수사 모두루가 관리하고 있던 길림시 일대가 갑작스레 광개토왕 재위 20년(410) 시점에 와서 이반한게 된 정황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
- 기원전 시기 부여족이 길림↔돈화↔연길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따라 동쪽으로 확장 이주하는 과정에서 성립한 정치체로 보는 견해이다. 근래 학계에 보고된 敦化 崗子 유적에서 출토한 두형토기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이 길림시를 중심으로 번성한 부여 문화의 그것과 동일하며, 이를 통해 양자를 동일한 ‘부여 문화권’으로 묶어낼 수 있다는 최근 고고학적 성과에 근거한 주장이다.[3]
동부여의 왕
위구태(慰仇太)의 기록은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처음 나타나며, 삼국지 동이전에서 그 후계들이 자세하다.
현왕(玄王)은 사서에서 '346년 1월에는 모용준과 모용각이 부여를 쳐서 그 왕 여현(餘玄)을 사로잡고 5만여명을 끌어갔다.'라는 기록으로 존재하나 여울은 단지 부여 왕자로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郞)을 지내고, 후연의 재상을 한 자라 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494년에 부여가 멸망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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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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