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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해협 식민지)
해협 식민지 시기 싱가포르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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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협 식민지 시기 싱가포르는 1826년부터 1942년까지 싱가포르가 해협 식민지 내 행정구역으로 있었던 시기를 가리킨다. 해협 식민지 시기에도 여전히 싱가포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819년 스탬퍼드 래플스가 싱가포르에 식민지를 수립하고 1824년 네덜란드-영국 조약을 통해 싱가포르가 공식적으로 영국 식민지로 인정받으면서, 영국은 1826년 말레이반도에 보유한 3개의 식민지를 하나로 묶어 해협 식민지를 만들었다. 1830년부터 1867년까지 해협 식민지는 영국령 인도의 예하 행정구역인 벵골 총독부에 속해 있었다. 1832년 해협 식민지 정부는 수도를 조지타운에서 싱가포르로 옮기면서 싱가포르는 정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다.[1]
1867년 3월 영국 정부는 식민지부로 해협 식민지 통치권을 넘겼다. 이 시기 싱가포르를 비롯한 해협 식민지는 영국령 인도의 '형벌 식민지' 역할을 했다. 1867년 해협 식민지가 영국의 왕령 식민지로 승격되었고, 이에 맞춰 1868년 해협 식민지법이 제정되었다.[2] 이 법은 시대의 변화 및 싱가포르 내부 사정에 따라 여러 차례 정비되었지만, 1955년 싱가포르가 부분적으로 자치를 인정받을 때까지 싱가포르의 기본 통치법으로 자리매김했다. 왕령 식민지 승격 이후 싱가포르의 실질적 수반은 영국 국왕의 임무를 대리하는 해협 식민지 총독이 맡았다. 영국 국왕의 특허를 통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등 실질적 통치 기구가 수립되었다. 기본적인 통치 체계는 웨스트민스터 체제를 따랐다.
싱가포르는 수립 초기부터 원자재를 수입하고 이를 재가공해서 수출하는 앙트레포로 크게 성장했다.[3]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한 이후 싱가포르를 통한 국제 무역은 더욱 증가하였고,[4] 싱가포르는 동아시아와 인도, 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교통의 거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5][6] 1898년에는 해협 식민지에 독자적인 화폐인 해협 달러가 통화로 사용되기 시작했다.[7] 1900년대 후반 싱가포르는 화물선 뿐만 아니라 여객선을 취급하기 시작했고, 말레이반도의 다양한 원자재가 싱가포르항을 통해 수출되면서 싱가포르는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8]
싱가포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전간기 스페인 독감, 경기후퇴, 그리고 대공황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싱가포르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1919년 일본 제국이 남양 군도를 차지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두각을 드러내자 이에 맞서 영국 해군이 싱가포르를 일본 제국의 방어 기지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영국은 이 계획을 싱가포르 전략이라고 부르고 1938년 싱가포르 해군 기지를 완성했다.[9] 그러나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1942년 싱가포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패배하면서 싱가포르는 일본 제국이 점령하게 되고, 이름 역시 쇼난도로 바뀌게 되었다.
해협 식민지에 속해 있었던 기간 동안 싱가포르에서는 유럽과 중국에서 도입된 다양한 예술과 건축 양식이 꽃을 피웠다. 125년의 영국 통치 기간 동안 싱가포르 관료들은 영국 법률과 영국식 통치 체계를 수용하고 이를 싱가포르 현지에 맞게 고쳤다. 싱가포르항과 시가지 역시 해협 식민지 시기 오늘날의 모습으로 대부분 완비되었다. 식민지 기간 동안 형성된 싱가포르의 문화와 사회 구조는 오늘날 싱가포르 사회의 기초를 마련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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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해협 식민지 초기
1826년 해협 식민지가 수립되었을 때, 해협 식민지는 영국 동인도 회사 치하 인도 산하 영토로 편입되었다. 1828년 식민 당국은 1822년 제안된 래플스타운 계획을 공식 발간해 싱가포르항과 시가지에 대한 개발 계획을 마련했다.[11] 1830년 동인도 회사는 해협 식민지를 벵골 총독부 산하로 편입시켰다.[12] 1832년 해협 식민지 정부는 페낭의 조지타운에서 싱가포르로 수도를 옮겼다. 1833년 영국 정부가 1833년 인도 정부법을 통과시켜 동인도 회사의 독점 무역권을 철폐하면서 다른 무역 회사들이 국제 무역에 참여하기 시작했다.[13] 이 효과로 국제 해로에서 선박 통행량이 증가하였고, 무역거점이었던 싱가포르도 반사이익을 얻게 되었다.
1820년대 후반부터 래플스타운 계획에 따라 싱가포르항 일대가 정비되기 시작했다.[14] 해협 식민지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부터 싱가포르강 입구에는 '레플스 플레이스'라는 상업중심구역이 들어섰다.[15] 1827년에는 의사당이 건립되었다. 1833년부터 2년 간 공사한 끝에 싱가포르시의 주요 도로인 노스브릿지 로드가 완성되었다. 싱가포르 시가지 북쪽에서는 넛맥, 후추 등 향신료를 키우는 플랜테이션이 이루어졌고, 이 농업지와 항구를 잇기 위해 오차드 도로가 만들어졌다.[16] 간선도로를 기본으로 싱가포르강과 총독부 건물이 있는 포트캐닝 사이의 넓은 부지에 다양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835년에는 세인트앤드류 성당의 건립이 시작되었으며, 1839년에는 싱가포르 화교들의 무사 항해 기원을 위한 천복궁이 들어섰다.
성장기: 1840년대~1850년대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이후, 1842년 난징 조약을 통해 영국이 홍콩섬을 할양받았다.[17] 이 사건으로, 싱가포르는 아시아에 있는 영국 식민지를 잇는 중요한 지역 항구이자 해외 각지의 다양한 수입품을 영국 식민지로 재수출하는 앙트레포로 성장했다.[18] 1840년대 중반부터 해협 식민지 당국은 늘어나는 해외 무역을 해결하고자 싱가포르 시가지에 새 도로를 여러 개 새로 깔았다. 1년 뒤인 1849년에는 싱가포르 항구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새로운 땅을 확보하기 위해 싱가포르강 어귀에서 간척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19] 1840년대 싱가포르에는 다양한 기관 및 시설이 설립되었으며, 우드브릿지 병원 (1841), 리틀 백화점 (1845), 세인트조셉 교회 (1845), 앨런버러 시장 (1845),[20] '레플스 도서관 및 박물관' (1849)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1840년대 싱가포르는 전통적인 동남아시아 무역로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싱가포르는 점차 다른 동남아시아 항구들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회사령 인도네시아보다 정크선이 더 많이 정박하는 항구가 되고 원두, 후추, 쌀, 원목, 해산물 등 다양한 물품을 거래하는 교역항으로 성장했다.[21] 19세기 중반 싱가포르는 증기선의 보급 기지이자 영국령 말라야의 배후 기지 역할을 하였고, 말라야에서 많이 나는 원목, 설탕, 고무를 수출하는 국제 항구로 거듭났다.[21]
1860년대~1890년대

1867년 4월 영국 정부는 인도 제국 벵골 총독령 산하였던 해협 식민지를 왕령 식민지로 승격시켰다. 1868년 영국 정부는 해협 식민지법을 통과시키고,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설치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22] 이 법에 따라 해협 식민지 입법국이 1867년 6월 1일 설치되었다.[23] 1877년에는 총독의 업무를 돕기 위해 행정국이 설치되었지만 실질적인 행정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해협 식민지 총독은 매우 위급한 사안이 있을 시 행정국과 논의를 거쳐 사안을 처리해야 했다.[24] 1855년 수립된 최고법원은 1870년대 세 차례 변화를 겪으며 법 판결에 추밀원 사법위원회와 영국 왕의 심사를 거치는 제도로 바뀌었고, 최고법원의 부서도 2개로 나뉘었다.
이 시기 싱가포르의 인구는 수립 때와 비교해서 4배로 증가했고, 싱가포르항 역시 화물량과 통행량의 증가로 운용이 어려웠다.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싱가포르의 무역은 더욱 증대했다. 여러 문제로 인해 해협 식민지 당국은 싱가포르 항구와 시가지를 재정비했다. 1859년 제1호 도크를 시작으로, 1868년 빅토리아 도크, 1879년 앨버트 도크가 싱가포르항 서쪽에 새로 만들어졌고, '케펠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싱가포르 북동쪽에도 오랑 라우트가 살던 곳에 세랑군항이라 하여 새로운 항구를 건립했다.[25]
1870년대부터 영국 정부는 싱가포르 본섬 주변의 여러 작은 섬들에 격리 기관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이는 19세기 말부터 전세계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자 영국 정부가 본섬에서 환자들을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함이었다.[26] 1868년 격리법 제7조에 따라 싱가포르항에 들어오는 선박 중 전염병 환자가 있을 경우 해당 선박이 입항이 금지되었다.[27] 그러나 1873년 시암에서 들어온 보트로 인해 싱가포르에 두 달 동안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총 858명이 감염되고 443명이 사망했다. 해리 오드는 이 사태로 세인트존스섬에 격리 시설을 지을 것을 건의했다.[28] 1874년 11월 세인트존스섬에 첫 격리 시설이 완공되었다.[29] 격리 시설이 완공된 이후, 제방으로 연결된 쿠수섬과 라자루스섬에는 격리 시설에서 사망한 자들을 안치하기 위한 공동 묘지가 건립되었다.[30]
싱가포르의 자유무역 정책 덕분에 19세기 후반에도 많은 아시아인과 유럽인이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1871년을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인구는 100,000명이었고 이 중 절반인 50,000명이 중국인이었다.[31]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중국인들은 서구화되었고 이들은 자신의 고향을 청나라가 아닌 해협 식민지로 생각했으며 영국 신민으로 여겼다.[32] 동시에 이 시기에는 가라유키상이라 불린 일본 여성들이 싱가포르로 넘어왔으며,[33]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미얀마인이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었다.
1900년대~1930년대

20세기 초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사건은 1915년 싱가포르 폭동이었다. 이는 인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1914년 독일 제국과 연합해 대영제국의 식민지 곳곳에서 범인도인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인도-독일 음모의 일부였다.[34] 싱가포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령 인도 육군 중 제5경보병연대의 세포이들이 오스만 제국에 파병된다는 소식에 1915년 1월 27일 폭동을 일으켰다.[35] 당시 싱가포르 방어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중국계 자원군은 설 연휴라 방비를 서지 않고 있었고, 이에 따라 식민 정부는 폭동군에 재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1개월 뒤인 1915년 2월 16일 러시아 제국, 프랑스, 일본 제국의 함선이 싱가포르에 진입해 폭동군을 격퇴하고 뒤이어 싱가포르 인근 영국 식민지에서 군대가 파견되어 남은 폭동군을 소탕하면서 폭동은 완전히 진압되었다.[36] 이 사건으로 민간인 20명이 사망했고,[37] 폭동 주모자들은 공개 처형되거나 섬에서 추방되거나 무기징역형을 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영국은 2가지 목표를 가지고 싱가포르를 정비했다. 하나는 싱가포르항의 물동량과 교통량이 심해져 이를 대체할 수단을 찾는 것이었다. 20세기 초부터 말레이반도가 원목, 고무, 갬비어, 후추를 생산하는 국제 시장으로 발돋움했고,[38] 거대해진 시장 수요에 맞춰 영국 정부는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 본섬을 잇는 페리를 활용해 말레이반도의 원산품을 싱가포르항을 통해 수출했다.[39] 그러나 싱가포르항은 여전히 새로운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항구 규모와 선박이 부족했고, 이에 1919년 영국 정부는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 본섬을 잇는 제방을 건설하기 시작했다.[40] 1920년부터 시작된 경제 침체로 제방의 건설이 지연되었지만, 1923년 6월 28일 제방을 완공했고 철도와 도로가 동시에 개통되었다.[41] 한편 영국 정부는 이 제방을 활용해 싱가포르 본섬 안까지 철도를 연장시켰고, 1932년 탄중파가르역을 종점으로 하는 노선으로 변경했다. 모든 철도 노선은 말레이 연합주 철도라는 회사에서 관리했다.
싱가포르 전략과 멸망
1923년 영일 동맹이 만료된 후 일본 제국이 태평양 일대에서 크게 성장하면서, 영국은 전간기 일본 제국의 확장을 막기 위해 싱가포르를 극동 방어 전략의 핵심으로 선정한 뒤 해군 기지를 수립했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의 영향으로 해군 기지 수립은 지체되었고, 1938년이 되어서야 해군 기지가 완공되었다.[42]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영제국의 아시아 방어 전략은 그 기본 전제부터 어긋나게 되었다.[43]
1941년 싱가포르 폭격을 통해 싱가포르의 방공망이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1941년 말레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 주력함 2척이 침몰하면서 싱가포르 해안 방어에도 공백이 발생했다.[44] 1942년 2월 8일 일본군은 싱가포르섬을 침략했고 영국군은 7일 간의 저항 끝에 일본 제국 육군에 항복했다. 싱가포르 방어에 실패한 것을 두고 영국군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을 비난했지만,[45] 학계에서는 이를 싱가포르 전략의 실패로 보고 있다.[46]
영국군의 항복 이후, 일본 제국은 3년 동안 싱가포르섬을 지배했다. 일본 제국은 싱가포르의 이름을 '쇼난도'(일본어: 昭南島)라고 고쳤다.[47][48] 영국군이 싱가포르에서 철수하고 3일이 지난 뒤, 일본 식민 당국은 일본 제국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했다. 영국군은 싱가포르를 되찾고자 여러 차례 특수 부대를 파견했지만, 1945년 9월 12일 조석 작전을 통해 일본 제17군이 공식적으로 동남아시아 사령부에 항복한 후 영국 식민지로 반환되었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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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르면 1827년에 이미 중국인들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이 되었다. 정착 초기에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대부분이 수세기 전에 군도에 정착했던 중국인의 후손인 프라나칸이었는데, 이들은 대개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항구가 발전하면서 훨씬 더 많은 수의 중국인 쿨리들이 일자리를 찾아 싱가포르로 몰려들었다. 이주노동자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남성이었고, 19세기 말 청나라의 혼란을 피해 떠나왔다.[50]
말레이인들은 1860년대까지 싱가포르에서 두 번째로 큰 민족 집단이었다. 비록 많은 말레이인들이 계속해서 캄퐁 (전통적인 말레이 마을)에 살았지만, 대부분은 임금 노동자나 장인으로 일했다. 이는 농부로 남아있던 말라야의 말레이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51] 1860년에는 인도인들이 두 번째로 큰 민족 집단이 되었다. 인도인 중에는 중국인 쿨리들과 같은 비숙련 노동자도 있었지만 상인, 또는 벵골 총독부의 명령으로 싱가포르에 주둔한 군인들,[2] 그리고 정글과 습지 개간 및 도로 건설과 같은 공공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보내진 많은 인도인 죄수들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또한 세인트앤드루 성당을 포함한 여러 건물을 짓는 데 도움을 주었다. 형기를 마친 후 많은 죄수들이 싱가포르에 머물기로 선택했다.[52][53]
행정부의 무관심한 태도로 인해 싱가포르 사회는 오히려 무법적이고 혼란스러웠다. 성매매, 도박, 그리고 약물 남용이 만연했다. 중국인 범죄 비밀 결사는 극도로 강력했으며, 일부는 수만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고, 경쟁 조직 간의 영역 다툼은 때때로 수백 명의 사망자를 초래했다. 이러한 비밀 결사를 억압하려는 시도는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들은 20세기까지도 계속해서 문제로 남아있었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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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요약
관점
건축

싱가포르는 1822년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 경이 계획했으며, 그의 도시 배치 계획인 래플스 계획은 도시가 수년에 걸쳐 크게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대부분 살아남아 있다. 래플스는 정부 청사, 다양한 민족 공동체, 종교 건물, 상업 및 교육 시설, 그리고 식물원을 위한 지역을 지정했다. 래플스는 주택 크기, 거리 폭, 사용될 재료까지 계획했다. 래플스 자신은 목재와 아탑으로 지어진 말레이 양식의 집을 선택했지만(부킷 라랑안 또는 포트캐닝 힐에 있는 래플스 하우스), 당시 다른 유럽인들은 벽돌과 회반죽으로 된 유럽 양식의 건물을 선호했다.[55]
싱가포르의 주요 건축 양식 중 파이브 풋 웨이가 싱가포르 고유의 특징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56] 래플스는 1822년 싱가포르 계획에서 새로운 식민지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일련의 지침을 발표했다. 그는 새로 건설되는 식민지의 건물들이 균일해야 하고 화재 위험을 줄이기 위해 벽돌과 타일로 지어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 각 가옥이 일정 깊이의 베란다를 갖도록 요구함으로써 대중에게 더 큰 편의를 제공할 것이다. 이 베란다는 거리 양쪽에 연속적이고 지붕이 있는 통로로 항상 개방되어야 한다.[57]
이것이 파이브-풋 웨이가 되었고, 측량사이자 엔지니어인 존 턴불 톰슨은 1840년대 싱가포르의 이 건축 양식을 그림으로 남겼다. 토지 임차인은 그들의 상점과 주택 앞에 특정 너비의 공공 보행로를 제공해야 했다. 그들이 공공 보행로 위에 2층을 건설함에 따라, 거리 곳곳에 지붕이 있는 연속적인 보행로가 형성되었다.[58] 비록 공공 보행로로 계획되었지만, 파이브-풋 웨이는 또한 노점상들이 장사하는 장소가 되었고, 소매, 창고, 심지어 주거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1880년대에 싱가포르에서 보행로를 막는 노점상들을 치우려는 시도는 이른바 베란다 폭동으로 이어졌다.[59] 19세기 후반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싱가포르의 지배 계층과 군인들 또는 기업인들은 흑백 벙갈로를 만들어 거주하기도 했다.[60]
예술

해협 식민지 시기 싱가포르는 싱가포르의 예술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싱가포르의 예술은 19세기 해안 측량을 위해 제작된 이미지들에서 출발했다.[61] 이런 스케치들은 이후 19세기 중후반 예술적 표현을 위해 주로 제작된 풍경화 작품들과 시각적으로 유사하다. 예술가들은 싱가포르를 매력적인 영국의 식민지 항구로 여겼으며, 싱가포르 항구나 싱가포르 항만의 풍경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싱가포르를 그린 초기 화가들 중에는 존 턴불 톰슨과 찰스 앤드루 다이스가 있는데, 이들은 측량, 건축, 공학 분야에서도 활동했던 식민지 싱가포르의 장교들이었다.[61] 1844년에 프랑스 사진작가 줄 이티에의 다게레오타이프를 시작으로, 19세기 중후반에는 싱가포르의 풍경이나 사람을 담은 사진도 활발하게 촬영되었다.[62] 이 외에도 19세기 후반 싱가포르에서는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 회화가 전수되기도 하고,[63] 식민지 장관들이나 공무원들의 모습을 본 따 다양한 조각상을 만들기도 했다.[64]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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