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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코나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 주에 있는 도시이다.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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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코나(이탈리아어: Ancona)는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주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안노나는 동명의 상위 행정구역 및 마르케주의 중심 도시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북동쪽 280 km (170 mi) 거리에 있으며, 코네로산의 갑(岬) 양쪽 돌출부인 아스타뇨산(Monte Astagno)과 구아스코산(Monte Guasco)의 절벽 사이 아드리아해와 접하고 있다. 안코나 주변의 구릉 지형은 북쪽 지역의 평탄한 해안 지대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앜노나는 아드리아해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특히 특히 여객 교통의 중심지로, 마르케 지역의 주요 경제 및 인구 중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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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그리스 식민지
그리스인들의 식민지 건설 이전, 이 지역에는 피켄테스라는 별개의 부족 공동체가 차지하고 있었다.
안코나는 기원전 370년경 시라쿠사에서 넘어온 그리스 정착민들에 의해 도시 형태가 갖춰졌고, 그리스인들은 이곳에 안코나를 이름을 붙였는데 안코나는 활 또는 굽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ἀγκών (안콘)에서 비롯했으며 도시의 동쪽에 있던 항구가 활 모양을 한 북쪽 갑에 의해서만 보호를 받았었다. 그리스 상인들은 이곳에 티리언 퍼플 염료 공방을 세웠다.[1] 로마 시대에 이곳은 언어 유희로서 종려나무 가지를 팔로 쥔 모습을 담고 있으며, 뒷면에는 아프로디테의 두상이 새겨진 자체적 주화를 유지했고, 그리스어 사용도 이어나갔다.[2]
로마 시대의 무니키피움
언제 이곳이 고대 로마의 도시가 됐는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178년 일리리아 전쟁 당시 군항이 위치했었다.[3]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자 마자 이곳의 통제권을 차지했다. 안코나 항구는 달마티아와 인접해 있어 제정 시대에도 상당히 중요성을 띠었고, 트라야누스에 의해 확장이 이뤄지는데, 그는 건축가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로 하여금 북쪽 선창을 지으라 하였다. 항구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단일 아치 구조 형태로 된 대리석 개선문인 트라야누스 아치가 있으며,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서기 115년에 그를 기념하며 저부조가 없는 형태로 세운 것이었다.[2]
비잔티움 시대
안코나는 서기 3세기와 5세기 사이에 고트족과 랑고바르드족들의 연달아 공격을 받았지만, 안코나의 저력과 중요성을 회복해냈다. 7세기와 8세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하에 있는 라벤나 총독부의 펜타폴리스 중 하나였다.[2][4] 840년, 사라센 약탈자들이 공격을 하여 도시를 불태웠다.[5] 샤를마뉴의 이탈리아 북부 정복 이후, 안코나 변경의 수도가 되었고, 오늘날 안코나도의 이름이 이때부터 비롯했다.
안코나 해상 공화국
1000년 이후, 안코나는 점차 독립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주요 해상 공화국[6] (가에타, 라구사)와 함께, 이탈리아 해군기에는 나타나지 않음)으로 바뀌었으며, 인접한 세력인 베네치아와 자주 충돌했다. 과두 공화정이던 안코나는 도시를 이루는 세 개 테르치에레 (S. Pietro, Porto, Capodimonte)에서 선출한 여섯 원로들에 의해 운영됐다. 자체 주화인 아곤타노를 발행했고, Statuti del mare e del Terzenale와 Statuti della Dogana라는 법률을 갖고 있었다. 안코나는 보통 라구사 공화국 및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 관계이었다.
1137년, 1167년, 1174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병력들을 격퇴시킬 만큼 강성했다. 안코나의 함선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고, 항해사들에는 안코나의 키리아코스가 있었다. 12세기 이후로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혼란시킨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간의 분쟁 기간, 안코나는 교황 측 편에 섰다 (구엘프와 기벨린).[7]

다른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과 달리, 안코나는 시뇨리아 체제가 된 적은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1348년에 이곳을 점령한 말라테스타 가문의 지배 시기로, 그는 흑사병과 화재를 이용했으며 도시의 여러 건물들을 파괴했다. 말라테스타 가문은 1383년에 철수하였다. 1532년, 안코나는 최종적으로 자치를 상실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 시기 교황령의 일부가 되었다. 새로운 교황령 행정부의 상징은 커다란 성채이었다.
교황령
교황 비오 4세는 유대교로 다시 돌아간 혐의로 안코나의 콘베르소 상인들을 화형시키라는 명을 내렸다.[8] 이후, 안코나는 로마 및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과 더불어 교황 비오 5세의 1569년 추방 명령 이후에도 잔류가 허용된 교황령 도시 세 개 중 하나였다. 유대인들은 1555년에 설치된 안코나의 게토 지역에 거주했다.
1733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선창을 확장시켰고, 트라야누스 아치를 모방한 건축물이 세워졌으며, 또한 항구의 남쪽 끝에 라차레토를 세웠는데, 루이지 반비텔리가 건축 책임자이었다. 남쪽 선창은 1880년에 세워졌으며, 안코나는 고지대의 요새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1797년 이래로 프랑스가 차지했으며, 중요 요새로서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1832년 프랑스의 안코나 원정군이 도시를 점령하여 1838년까지 남아있다가 이들과 볼로냐의 오스트리아군은 철수하기로 상호 합의했다.[9]
안코나의 그리스 공동체
안코나는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16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온 교역상들의 중요한 행선지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외국 상인들 공동체 중 가장 큰 규모를 이뤘다. 이들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옛 비잔티움 제국이나 베네치아 영토에서 온 망명자들이었다. 최초의 그리스 공동체는 16세기 초 안코나에서 성립됐다.
현대사
안코나는 루이 쥐쇼 드 라모리시에르가 카스텔피다르도에서 패한 지 11일 만에 일어난 공방전 끝에 1960년 9월 29일에 그가 항복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2]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 왕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국에 가담했다. 1915년, 이탈리아가 참전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함단이 막대한 포격을 가하여 안코나의 모든 설비에 막대한 피해를 가하고 다수의 사람들을 사망케하였다.[10] 안코나는 대전쟁 기간 아드리아해 지역 이탈리아의 최핵심 항구 중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안코나는 영국군 소속으로 복무하던 자유 폴란드군의 제2 폴란드 군단에 의해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폴란드군은 1944년 6월 16일에 도시를 점령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한달 뒤인 1944년 7월 18일에 이를 해냈으며 이때의 행방은 안코나 전투로 알려져 있다. 이때 공격은 북이탈리아로 진격을 위한 보급로를 줄이기 위해 고딕 라인과 가까운 항구를 이용하기 위해 벌인 연합국의 작전의 일환이었다.[11]
유대인 역사
유대인들은 기록물에 의하면 서기 967년에 안코나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그 이전에도 그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존재하기도 한다.[12][13] 1270년 당시, 안코나에 거주하던 유대인인 안코나의 야코브가 마르코 폴로보다 4년 앞서 중국을 여행했다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The City of Lights"이라는 책에서 그가 느낀 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1300년부터, 안코나의 유대인 공동체는 점차 성장하였으며, 이는 대부분 도시가 가진 중요성과 레반트 지역과의 교역 중심지인 데서 기인했다.[14] 같은 해, 유대인 시인 임마누엘 로마노는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징수되던 과중한 세금을 경감시키려 노력하였다. 200년 뒤, 독일, 스페인, 시칠리아, 포르투갈 등지의 유대인들이 안코나로 이주해왔는데, 고향땅의 박해 및 안코나를 무역 중심지로 만들어준, 교역 및 은행업 분야에서 유대인들의 중요성으로 인해 안코나 유대인들에 대한 친 유대인 정서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1555년에, 교황 바오로 4세는 1555년 칙령의 일환으로 안코나의 비밀 유대교인 공동체로 하여금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하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개종을 했으나, 나머지는 거부를 하면서 교수형을 당하고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13] 이렇게 되자, 유대인 상인들은 일시적으로 안코나 측에 보이콧 행동을 벌였다. 이 보이콧은 도나 그라차 멘데스 나시가 주도했다.
수년간 나폴레옹 1세를 통해 해방을 겪었지만, 1843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유대인들이 게토 밖에 거주하는 것을 금하고, 의복에 유대인을 나타내는 표시를 착용하도록 하고 그 외 종교 및 재정적 제한을 가하는 오래된 칙령을 부활시켰다.[15] 대중들의 반응은 이 제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얼마 뒤에 취소되었다.[16]
안코나의 유대인들은 교황 비오 9세 선출로 1848년에 완전한 해방을 겪었다. 1938년 당시, 안코나에 1,177명이 거주했으며[16] 그 중 53명이 독일로 보내졌고, 거기서 15명이 살아 남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귀향했다. 유대인 공동체의 다수는 파시스트 정권에 많은 뇌물을 지불함으로써 안코나에 남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2004년 기준, 안코나에 약 유대인 200명이 거주했다.
안코나에는 시나고그 두 곳과 공동묘지 두 개가 여전히 존재한다. 옛 Monte-Cardeto 공동묘지는 유럽 내 최대 유대인 공동묘지 중 하나이고 이곳의 비석들은 1552년 이래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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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요약
관점
기후
안코나의 기후는 온난 습윤 (쾨펜의 기후 구분상 Cfa)하고 도시는 지중해 및 대륙 지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예상 강수는 연간 일정한 편이다. 겨울은 서늘하며(1월 평균 기온 5 °C or 41 °F), 비가 자주 내리고 구름이 낀다. 가장 추운 겨울 시기에 도심 밖의 기온은 −10 °C (14 °F) 또는 더 낮아지기도 한다. 북유럽, 발칸반도 및 러시아에서 기원한 한랭 기단의 영향으로 강설이 드물지 않으며, 특히 도심을 둘러싼 구릉지대에서 두드러진다 (아드리아해 효과이기도 함). 여름은 보통 따뜻하고 습하다 22.5 °C or 72.5 °F). 이따금 기온이 높아지면 35 and 40 °C (95 and 104 °F) 무렵까지 올라가며, 특히 바람이 남쪽이나 서쪽에서 불어올 때 두드러진다 (아펜니노산맥의 푄 현상). 천둥은 꽤나 자주 치며, 특히 8월과 9월에 잦으며, 또한 때때로 돌발 홍수와 강한 바람, 심지어 큰 우박을 동반할 정도로 격렬해질 수 있다. 봄과 가을은 날씨 변화가 잦지만 대체로 온화한 계절이다. 기록된 극단적인 기온은 −15.4 °C (4.3 °F) (1967년)와 40.8 °C (105.4 °F) (1968년) / 40.5 °C (104.9 °F) (198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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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007년, 마르케주 안코나도의 안코나에 거주하는 인구는 101,480명 (도심 범위를 확장하면 인구가 네 배 이상으로 커짐)이며, 이 중 47.6%는 남성이고 52.4%는 여성이었다. 미성년자 (18세 및 그 이하)는 전체 인구의 15.54 퍼센트이며 연금 수령자 비율 24.06 퍼센트와 대조된다. 이는 이탈리아 평균 18.06 퍼센트 (미성년자) 및 19.94 퍼센트 (연금 수령자)와도 차이를 보인다. 안코나 인구의 평균 연령은 48세이며, 이탈리아 42세와 비교된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년 동안, 안코나 인구는 1.48 퍼센트씩 성장했고, 이탈리아는 전반적으로 3.56 퍼센트 성장했다.[18][19] 출산율은 1,000명당 8.14명 출산이며 이탈리아 평균 9.45명보다 낮다.
명소
요약
관점
안코나 대성당


유다 치리아코에게 봉헌된 안코나 대성당은 11세기가 시작된 시기에 착공되어 1189년에 완공되었다.[20] 일부 저술가들은 본래 있던 교회는 바실리카 형태의 구조였고 7세기의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최초의 재축은 1234년에 완공이 이뤄졌고 회색 빛 석재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된 건물로, 그리스 십자 모양으로 지어졌으며 비잔틴 예술 요소도 갖고 있었다. 중앙부에는 12 면체 돔이 있으며, 1270년 마르가리토네 다레초(Margaritone d’Arezzo)에 의해 약간 개조되었다. 정면은 1228년에 조르조 다 코모(Giorgio da Como)가 제작한 고딕 양식의 출입구을 지니고 있는데, 원래는 그 양쪽에 아치 하나씩이 더해질 예정이었다. 내부에는 양쪽 익랑 아래에 지하묘소를 두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본래의 양식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내부의 열 개의 기둥은 베누스 신전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진다.[2] 대성당은 1980년대에 복원이 이뤄졌다.
트라야누스 아치

트라야누스 아치는 넓은 계단을 따라 오를 수 있는 높은 기단 위에 있는, 18 미터 (59 피트) 높이에 너비는 3 미터 (9.8 피트)인 대리석 건축물로, 마르케 지역에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로마 기념물 중 하나이다. 114/115년에 항구의 벽 위로 닦인 도로로 향하는 입구로서 세워졌고 안코나 항구를 설치한 황제인 트라야누스를 기념하여 명명됐다. 본래 있었던 청동 장식물의 대부분은 사라졌다. 아치 양쪽의 하부 페데스탈 위로 홈이 새겨진 코린트식 기둥이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페디먼트에는 비문이 있었다. 형태는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의 형태이나, 좀 더 크게 제작되어, 이 위로 올려져 있는 트라야누스, 그의 아내 플로티나, 그리고 자매인 마르키아나 등의 청동상은 로마의 아드리아해 최대 항구로 진입하는 배들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외 명소
- '라차레토' : 1732년에 건축가 루이지 반비텔리가 계획한 건축물로, 검문소 역할을 하던 오각형 모양의 인공섬에 마찬가지로 오각형 건축물로 세워졌으며, 크기는 20,000 제곱미터 (220,000 제곱피트) 이상이고 선박과 함께 들어오는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됐다. 이후 군병원 및 병영으로도 사용됐으며 현재는 문화 전시 목적으로 쓰이고 있다.
- 안코나 주교궁 : 1164년 교황 비오 2세가 이곳에서 사망했다.
- '산타 마리아 델라 피아차' :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로 화려한 아케이드 형식의 파사드(1210)가 있다.[2]
- '팔라체 델 코무네' (또는 팔라초 델리 안차니) : 1250년에 세워졌고, 후면에는 높이 솟은 아치형 하부 구조물이 있으며, 마르가리토네 다레초의 고딕 양식 작품이다.[2]
- '고베르노 궁전' (현재 청사),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의 르네상스 작품.[2]
- '산티 펠레그리노 에 테레사'(Santi Pellegrino e Teresa): 18세기 교회.
- '산티시모 사크라멘토'(Santissimo Sacramento): 16세기 및 18세기 교회.
또한 고딕 및 르네상스 요소가 혼합된, 조르조 다 세비니코가 지은 건축물이 몇몇 있으며 '베닌카사 궁전'(Palazzo Benincasa), '로자 데이 메르칸티', 프란치스코 교회인 '산 프란체스코 알레 스칼레', 성 모니카, 성 니콜라 다 톨렌티노, 성 심플리키아누스, 복자 아고스티노 트리온피를 묘사한 조각상들이 있고 루이지 반비텔리가 확장하여 1860년 이후 궁전으로 전환된 아우구스티노회 교회인 '산타고스티노' 등이 있다.
마르케주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 펠레그리노 티발디가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세운 페레티 궁전에 위치해 있으며, 페데리코 추카리가 제작한 프레스코가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은 다음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 선사시대 구역 -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유물, 청동기 시대 및 철기 시대 물품이 배치되어 있다.
- 원사시대 구역 - 피켄테스 문명에 관하여 가장 풍부한 컬렉션을 갖추고 있으며 그리스 시대 뛰어난 도자기 컬렉션을 포함하고 있다.
- 그리스-헬레니즘 구역 - 안코나의 네크로폴리스에서 출토된 주화, 비문, 유리 물건, 그 외 유물 등이 소장
- 로마 구역 - 사르코파구스에 새겨진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 아우구스투스 조각상, 상아로 정교하게 조각된 로마 시대의 트리클리니움 2개 소장[2]
- 고대 주화 컬렉션

안코나 시립 미술관 (Pinacoteca Civica Francesco Podesti)이 1558년과 1561년 사이에 펠레그리노 티발디가 재설계한 보스다리 궁전(Palazzo Bosdari)에 자리 잡고 있다. 소장 미술품은 다음과 같다:
- 올리부초 디 치카렐로의 '할례', '성모 승천', '성모대관'
- 카를로 크리벨리의 '성모자'
- 티치아노의 '고치 제단화'
- 로렌초 로토의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
-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의 '프란체스코 아르실리 초상'(Francesco Arsilli)
-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할례'
- 구에르치노의 '무염시태', '성 팔라치아'
- 안드레아 릴리오의 '네 성인의 법열', '16세기 안코나 전경','음악가 천사'
그 외 예술가들에는 프란체스코 포데스티, 치로 페리, 아르칸젤로 디 콜라 등이 있다. 현대 예술가들에는 안셀모 부치, 마시모 캄필리, 브루노 카시나리, 엔초 쿠키, 카를로 레비, 알리지 사수, 오르페오 탐부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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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인물
- 안드레아 아고스티넬리 (1957년 출생) - 축구 감독 및 전 축구 선수
- 루이지 알베르티니 (1871년–1941년) - 뉴스 편집자 및 정치인
- 니콜로 알레만니 (1583년–1626년) - 그리스 출신의 로마 유물 수집가
- 안토니오 아무리 (1925년–1992년) - 작가, 라디오 및 텔레비전 각본가
- 이반 안치치 (1624년–1685년) -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헤르케고비나의 프란치스코회 사제이자 종교 서적 저자
- 프란체스코 아피아니 (1704년–1792년) - 화가
- 라파엘 이사야 아줄라이 (1743년경–1826년 또는 1830년) - 랍비
- 발티모라 (2001년 출생) - 가수
- 시모네 바론티니 (1999년 출생) - 중거리 경주 선수
- 굴리엘모 바르나보 (1888년–1954년) - 배우
- 빈첸초 바로네 (1952년 출생) - 화학자
- 알베르토 레온치니 바르톨리 (1932년 출생) - 외교관
- 모세 벤 모르데카이 바솔라 (1480년–1560년) - 랍비
- 구이도 베다리다 (1900년–1962년) - 유대인 작가
- 클레토 벨루치 (1921년–2013년) - 천주교 고위 성직자
- 피에트로 벨루스키 (1899년–1994년) - 이탈리아계 미국인 건축가
- 로레다나 베르테 (1950년 출생) - 가수, 작곡가, 배우
- 니콜라 베르투치 (1710년 출생–1777년) - 화가
- 레오 비앙키 (1974년 출생) - 벨기에의 싱어송라이터
- 페데리코 보나벤투라 (1555년–1602년) - 귀족
- 피에르조르조 본템피 (1968년 출생) - 자동차 경주 선수
- 마티아 보르톨루시 (1996년 출생) - 축구 선수
- 브루노 브리보네시 (1886년–1970년) - 함장
- 브루토 브리보네시 (1888년–1979년) - 제2차 세계대전 함장
- 마르첼로 브루넬리 (1939년–2020년) 신경 생리학자
- 코라도 칼리 (1910년–1976년) - 화가
- 아나스타샤 카르보나리 (2003년 출생) - 라트비아의 사이클 선수
- 피에트로 카사레토 (1810년–1878년) - 베네딕토회 수도사
- 아브라함 이삭 카스텔로 (1726년–1789년) - 랍비, 전도사, 시인
- 크리스티안 카탈리니 - 경제학자
- 미켈라 카테나 (1999년 출생) - 축구 선수
- 파올로 바르톨로메오 클라리치 (1673년–1721년) - 화가
- 엘리사베타 코차레토 (2001년 출생) - 테니스 선수
- 루카 코니니 (1991년 출생) - 축구 선수
- 베냐민 콘솔로 (1806년–1887년) - 히브리어 작가 및 번역가
- 페데리코 콘솔로 (1841년–1906년) - 바이올린 연주자 및 작곡가
- 체사레와 빈첸초 콘티 - 화가
- 알레산드로 콘티니보나코시 (1878년–1955년) - 정치인
- 프랑코 코렐리 (1921년–2003년) - 오페라 성악가
- 안코나의 치리아코 (1391년–1453/55년) - 항해사 및 고고학자
- 조르조 다 세베니코 (1410년경–1473년) - 베네치아의 조각가 및 건축가
- 엔리코 다비드 (1966년 출생) - 예술가
- 지노 데 도미니치스 (1947년–1998년) - 예술가
- 안드레아 데 팔코 (1986년 출생) - 축구 선수
- 로도비코 데 필리피스 (1915년 출생) - 축구 선수
- 안토니오 데 가에타노 (1934년–2007년) - 경보 선수
- 잔니 델 부오노 (1943년 출생) - 중거리 경주 선수
- 샤를 펠릭스 장밥티스트 카메라타파시오네이 디 마촐레니 (1826년–1853년) - 프랑스계 이탈리아 귀족
- 바르톨로메오 디 톰마소 (1400년경–1453/54년) - 화가
- 줄리아 도메니케티 (1984년 출생) - 축구 선수 및 풋살 선수
- 프란체스카 도나토 (1969년 출생) - 정치인
- 에우제니오 두카 (1950년–2021년) - 정치인
- 아말피 공작부인 조반나 다라고나 (1478년–1510년) - 귀족
- 로베르타 파카니 (1968년 출생) - 가수 및 배우
- 피에르 시모네 파넬리 (1641년–1703년) - 화가
- 야콥 파노 - 랍비 및 히브리어 시인
- 안토니오 파타티 (1410년경–1484년) - 천주교 주교
- 가브리엘 페레티 (1385년경–1456년) - 성직자
- 가브리엘레 페레티 (1795년–1860년) - 천주교 추기경
- 주세페 밀레시 피로니 페레티 (1817년–1873년) - 천주교 추기경
- 라이몬도 페레티 (1650년–1719년) - 천주교 고위 성직자
- 요셉 피아메타 (1721년 사망) - 랍비
- 스테파니아 폴리니 (1961년 출생) - 실내 공간 디자이너
- 프란체스코 포스키 (1747년–1819년) - 화가
- 다니엘레 갈리아노네 (1966년 출생) - 영화 감독
- 레나토 갈레아치 (1945년 출생) - 안코나 시장을 역임한 정치인
- 잔마르코 가로폴리 (2002년 출생) - 사이클리스트
- 주세페 가타 (1967년 출생) - 축구 선수
- 오세로의 가우덴티우스 - 오세로 주교
- 로베르토 졸리토 (1962년 출생) - 자동차 디자이너
- 레온디노 좀비니 (1975년 출생) - 배구 선수
- 스테파노 마리아 벤베누티 고스톨리 (1976년 출생) - 정치인
- 교황 그레고리오 12세 (1327년–1417년)
- 카를로 일라리 (1991년 출생) - 축구 선수
- 패트릭 칼람바이 (1984년 출생) - 축구 선수
- 피에트로 란프란코니 (1596년–1674년) - 테르니 주교
- 리카르도 라탄치 (1934년–1991년) - 축구 심판
- 유다 메세르 레온 (1420년~1425년경–1498년경) - 랍비
- 브루노 레오니 (1913년–1967년) - 고전적 자유주의 성향 정치 철학자 및 변호사
- 레오네 레비 (1821년–1888년) - 영국의 법률가 및 통계학자
- 안드레아 릴리오 (1555년–1642년) - 화가
- 비르나 리시 (1936년–2014년) - 배우
- 필리포 롬바르디 (1990년 출생) - 축구 선수
- 루카 롬바르디 (2002년 출생) - 축구 선수
- 에드몬도 로렌치니 (1937–2020) - 축구 선수
- 로렌초 로토 (1480년경–1556/57년) - 르네상스 화가, 제도사, 삽화가
- 엘레나 루차토 (1900년–1983년) - 건축가
- 카를로 마키니 (1996년 출생) - 체조 선수
- 발레리아 만치넬리 (1955년 출생) - 정치인 및 안코나 시장
- 루카 마르케자니 (1966년 출생) - 축구 선수
- 톰마소 마리니 (2000년 출생) - 펜싱 선수
- 라파엘레 마르텔리 (1811년–1880년) - 이탈리아계 오스타레일리아인 성직자
- 로베르토 마시아렐리 (1963년 출생) - 배구 선수
- 루차 마시노 (1977년 출생) - 배우
- 니콜로 마타스 (1798년–1872년) - 건축가[14]
- 엔초 마테우치 (1933년–1992년) - 축구 감독 및 선수
- 조반니 민가치니 (1859년–1929년) - 신경학자
- 안젤로 민게티 (1822년–1885년) - 도예가
- 로베르토 몰리넬리 (1963년 출생) - 음악가
- 에마누엘레 나스페티 (1968년 출생) - 자동차 레이싱 선수
- 카를로 넴브리니 (1611년–1677년) - 파르마 주교
- 비토리아 벤니 (1915년–1943년) - 반파시즘 활동가
- 알레시오 네피 (2000년 출생) - 축구 선수
- 아브 닌치 (1914년–1997년) - 배우
- 프란체스코 마리아 노키에리 - 조각가
- 가스토네 노벨리 (1895년–1919년) - 제1차 세계대전 에이스 파일럿
- 루이지 올비 (1894년–1917년) - 제1차 세계대전 에이스 파일럿
- 마르코 오시오 (1966년 출생) - 축구 감독 및 전 축구 선수
- 알레산드로 파욜라 (1999년 출생) - 농구 선수
- 사무엘레 파피 (1973년 출생) - 배구 선수
- 다니엘레 파포니 (1988년 출생) - 축구 선수
- 안토니오 프란체스코 페루치니 (1643년 또는 1646년–1724년) - 화가
- 조반니 페루치니 (1629년–1694년) - 화가
- 에마누엘레 페사레시 (1976년 출생) - 축구 선수
- 마리아 페트라치니 (1759년–1791년) - 해부학자, 의사
- 마테오 피초네 (1615년–1671년) - 화가
- 가스토네 피에리니 (1899년–1967년) - 역도 선수.
- 마시모 필로니 (1948년 출생) - 축구 감독 및 전 축구 선수
- 라우라 피사티 (1869/1870년–1908년) - 수학자
- 프란체스코 포데스티 (1800년–1895년) - 화가
- 아킬레 폴로나라 (1991년 출생) - 농구 선수
- 안토니오 리치 (1565년경–1635년경) - 스페인 바로크 화가
- 엠마 가조티 리처즈 (1825년 – 1912년) - 화가
- 로렌초 살비 (1810년–1879년) - 오페라 테너
- 에밀리오 사보난치 (1580년 – 1666년) - 화가
- 벤베네투스 스코티볼리 (1282년 사망) - 오시모 주교
-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1841년–1910년) - 모델
- 로셀라 프란치니 셰리피스 (1953년 출생) - 외교관
- 츠리스티안 슈펜디 (2003년 출생) - 알바니아 축구 선수
- 스티벤 슈펜디 (2003년 출생) - 알바니아 축구 선수
- 다니엘레 실베티 (1973년 출생) - 정치인 및 현 안코나 시장
- 안니발레 시모네티 - 귀족
- 카를로 스무랄리아 (1923년–2022년) - 정치인
- 안나마리아 솔라치 (1965년 출생) - 비치 발리볼 선수
- 움베르토 스파다로 (1904년–1981년) - 배우
- 안나 리타 스파라차리 (1959년 출생) - 펜싱 선수
- 스타미라 (1173년 사망) - 1173년 안코나 공방전 당시 자기를 희생해 도시를 구한 여인
- 주세피 스투라니 (1855년–1940년) 지휘자
- 마르코 탐베리 (1958년 출생) - 높이뛰기 선수
- 폴 타나 (1947년 출생) - 이탈리아계 캐나다인 영화 감독 및 각본가
- 톰마소 텐토니 (1997년 출생) - 축구 선수
- 다니엘 테르니 (1760년대–1814년) - 랍비
- 펠레그리노 티발디 (1527년–1596년) - 매너리즘 건축가, 조각가, 벽화가
- 아리엘 토아프 (1942년 출생) - 역사가
- 조베 토피 (1888년–1942년) - 만화가
- 로산나 바우데티 (1937년 출생) - 텔레비전 호스트
- 비토 볼테라 (1860년–1940년) - 수학자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1856년–1941년) - 제1차 세계대전 오스트리아군 장군
- 레나토 차카렐리 (1951년 출생) - 축구 감독 및 전 축구 선수
- 필리포 차파타 (1894년–1994년) - 공학자
- 브루노 차울리 (1902년–1963년) - 이탈리아 운동 선수 협회장
- 루이지 체노비 (1547/48년–1602년 이후) - 비르투소 코르넷 연주자
- 치비예타 주조리치 (1552년–1648년) - 라구사 공화국 출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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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해운
안코나 항구에는 다음 도시들과 정기 여객선 노선이 운항되고 있으며, 각 노선은 아래의 선사들이 운영하고 있다.:
공항
안코나는 팔코나라 마리티마에 위치한 라파엘로 산치오의 이름을 딴, 안코나 공항 (IATA: AOI, ICAO: LIPY)을 이용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옛 수상비행기 운항사 유러피언 코스털 에어라인스가 2015년 11월 크로아티아와 이탈리아 간 아드리아해를 넘나드는 노선을 설립하였고, 안코나 팔코나라 공항서부터 스플리트 (59분)와 리예카 (49분)로 4주간 운항했었다.
철도
안코나역은 안코나시의 주요 역사이며 마르케 지역 및 장거리 기차 노선이 오가고 있다. 그 외 역사에는 안코나 마리티마, 안코나 토레테, 안코나 스타디오, 팔롬비나, 바라노 등이 있다.
도로
아우토스트라다 A14가 안코나를 관통하며‘Ancona Nord’와 'Ancona Sud’ 출입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도심 대중교통
안코나 트롤리버스가 1949년 이래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Conerobus가 운영하는 도심 및 교외 버스 노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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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 도시
안코나는 다음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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