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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마이단

2014년 우크라이나의 아뉴코비치 퇴진 시위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유로마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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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마이단(/ˌjʊərəmˈdɑːn, ˌjʊər-/, 우크라이나어: Євромайдан 예우로마이단[*], IPA: [ˌjɛu̯romɐjˈdɑn])[f] 또는 마이단 봉기[85]는 2013년 11월 21일 키이우독립광장 내 대규모 시위로 시작된 우크라이나집회이자 민중봉기이다. 이 시위는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갑작스래 유럽연합-우크라이나 제휴 조약 서명 준비 작업을 중단하고 러시아유라시아 경제 연합과 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며 촉발되었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EU와의 협정 체결을 압도적으로 지지했지만[86]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EU와의 협정을 거부하도록 압력을 넣었다.[87] 이후 시위는 야누코비치와 아자로우 내각의 사임을 요구하며 더욱 확대되었다.[88] 또한 시위대는 광범위한 정부 부패, 직권 남용, 인권 침해,[89] 올리하르히의 영향력 등에 대해서도 항의했다.[90] 국제 투명성 기구는 야누코비치를 세계에서 최악의 부패 사례로 꼽았다.[91] 11월 30일 일어난 베르쿠트의 시위대 폭력 해산으로 더욱 분노를 일으켰다.[5] 유로마이단은 1989년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주화 대중 시위로 퍼졌으며[92] 이후 2014년 존엄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간략 정보 유로마이단, 날짜 ...

봉기 기간 키이우의 독립광장은 수천명의 시위대가 점거하고 임시 바리케이드로 보호되는 거대한 시위 캠프로 쓰였다. 주방, 응급처치실, 방송 시설 외에도 연설, 강연, 토론, 공연을 위한 무대도 있었다.[93][94] 즉석에서 만든 군복과 헬멧을 쓰고 방패를 들며 막대기와 돌, 휘발유 폭탄으로 무장한 자원병으로 구성된 "마이단 자위대"가 광장을 지켰다. 우크라이나 내 다른 여러 지역에도 시위가 일어났다. 키이우에서는 12월 1일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일어났으며 12월 11일에는 경찰이 시위대 캠프를 습격했다. 1월 중순부터는 정부가 강경한 시위 금지법을 도입한 것에 반발하면서 시위가 매우 커졌다. 1월 19일부터 22일까지 흐루셰우스키가를 중심으로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시위대는 이후 우크라이나 여러 지역의 지역 행정청사를 점령했다. 2월 18일에서 20일 사이 키이우의 마이단 시위대와 경찰 간의 격렬한 전투로 시위대 100여명과 경찰 13명이 사망하며 봉기가 절정에 달했다.[71]

이 결과 야누코비치와 의회 야당이 2월 21일 임시 거국정부, 개헌, 조기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경찰은 이날 오후 키이우 중심부에서 철수하고 야누코비치 및 다른 장관진은 이날 저녁 도시를 떠났다.[95] 다음 날 의회는 야누코비치 탄핵안을 가결하고[96] 임시 내각을 수립했다.[97] 존엄의 혁명은 곧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동우크라이나의 친러 소요사태로 이어져 결국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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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9일, 키이우의 시위대

유로마이단 시위는 2013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 시위가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위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와의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위해 우크라이나-유럽연합 제휴 협정 체결 준비를 중단하고 수감된 야권 지도자인 율리야 티모셴코 석방을 허용하는 법 초안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98] 유럽 연합에서 급격한 방향 전환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위협, 모욕, 선제적인 무역 제재 활동 등 때문에 일어났다.[99][100][101][102]

며칠간 이어진 시위 이후 점점 더 많은 대학생이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103] 유로마이단은 특히 "역사상 가장 큰 친유럽 집회"로 유럽연합 자체에 대해서도 주요 정치적 상징성을 띈 사건으로 평가받는다.[104]

시위는 우크라이나 경찰의 강경 진압에도 계속되었고[105][106] 정기적으로 시위가 열리는 장소는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고 눈까지 내렸다. 러시아의 야권 정치인 보리스 넴초프에 따르면 11월 30일 새벽 정부군의 폭력 행위가 확대되면서 시위 수위가 높아져 12월 1일과 8일 주말에 키이우에서 30~40만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모였다.[107][60] 이전 몇 주간 조직된 시위대는 5만명에서 20만명으로 늘어났다.[108][109] 12월 1일과 1월 19일부터 25일까지 경찰 폭력과 정부의 탄압에 대응해 폭력적인 소요사태가 일어났다.[110] 1월 23일부턴 서우크라이나 내 여러 의 여러 지방청사와 지역 의회 건물이 유로마이단 시위대의 움직임으로 점령되었다.[16] 러시아어권 도시인 자포리자, 수미, 드니프로에서도 시위대가 지방청사 건물을 점거하러다 경찰과 정부 지지자로부터 상당한 저항을 받았다.[16]

저널리스트인 레치아 부스하크는 2014년 2월 18일자 《뉴스위크》 지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유로마이단은 단순히 유럽연합 협상 철회에 대한 분노에 찬 대응을 넘어 훨씬 큰 조직적 운동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야누코비치와 그 부패한 정부를 축출하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200년 넘게 얽혀 있던 고통스러운 관계에서 벗어나며 자유롭게 항의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처벌의 위협 없이 평화롭게 행동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이 되었다.[111]

2월 말에는 여당인 지역당의 많은 의원이 탈당하거나 망명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의회인 최고 라다에서 여당이 과반 의석을 잃게 되었다. 의회는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충분한 야당 의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의회에서 키이우에서 경찰을 철수시키고 시위 진압 작전을 취소하며 2004년 헌법을 복귀시키고 정치범을 석방하며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하는 일련의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야누코비치는 의회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제2도시인 하르키우로 도피했다. 의회는 2014년 5월 조기선거를 실시했다.[112]

2019년 초 우크라이나 법원은 야누코비치를 이적죄로 유죄 판결했다. 또한 야누코비치는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후 러시아군을 파견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달라고 요청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혐의는 2014년 무장 경호원을 대동한 채 우크라이나를 빠져나간 후 러시아의 로스토프 도시에서 망명 생활을 해 온 야누코비치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주진 못했다.[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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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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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의 역사

"유로마이단"이라는 용어는 시위 첫 날 트위터에서 "Euromaidan"이라는 이름의 계정이 만들어진 후 트위터 내 해시태그로 처음 사용되었다.[82][114] 이 용어는 곧바로 국제 언론에서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115]

유로마이단이라는 명칭은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앞의 '유로'(Euro)는 유럽의 준말로 시위대의 친유럽적 성향을 가리키고, 뒤의 '마이단'(maidan)은 시위의 중심지인 키이우 시내의 대형 광장인 독립광장(우크라이나어: Maidan Nezalezhnosti 마이단 네잘레즈흐노스티[*])를 가리킨다. 마이단이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로 '광장' 혹은 '열린 공간'을 뜻한다. 이 단어는 다른 많은 언어의 외래어처럼 유입되어 오스만 제국우크라이나에 영향을 끼쳤던 시기에 우크라이나어로 유입되었다.[116] 시위 중에는 '마이단'이라는 용어가 대중의 정치적 항의 및 시위라는 의미로도 쓰이며 그 뜻이 넓어졌다.[117]

유로마이단 시위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우크라이나 내 언론은 이 운동을 주로 "유로레볼루션"(Eurorevolution, 우크라이나어: Єврореволюція 예우로레볼류치야[*][118][119])[120] 혹은 때때로 아랍의 봄에서 이름을 따온 "우크라이나의 봄"이라고 불렀다.[121][122]

직접적인 원인

2012년 3월 30일 유럽 연합(EU)과 우크라이나는 제휴 협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123] 하지만 EU 지도부는 나중에 2011년과 2012년에 각각 율리야 티모셴코유리 루첸코를 투옥하는 등 우크라이나 내 "민주주의 및 법치의 급격한 악화"에 대한 우려를 해결하지 않으면 협정을 비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124][g] 시위가 일어나기 몇 달 전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의회에 우크라이나가 EU가 제시하는 기준을 만족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해 달라고 촉구했다.[126][127] 2013년 9월 25일 최고 라다 의장 볼로디미르 리바크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제외하고는 "최고 라다는 이 법안을 중심으로 단결했다"고 말했다.[128] 제휴 협정의 우크라이나 측 협상단 중 한 명인 파울로 클림킨은 처음에는 "러시아는 단순히 (유럽 연합과의 제휴 협정이) 실현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좋은 협정을 협상할 우리의 능력을 믿지 않았고, 협정을 이행하겠다는 우리의 약속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129]

2013년 8월 중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산 수입품에 관한 관세 규정을 변경하여[130] 2013년 8월 14일부터 러시아 연방관세청은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는 모든 상품의 통관을 중단했고[131] 정치인과[132] 언론[133][134][135]을 자극하여 우크라이나와 유럽 연합의 제휴 협정 서명을 막기 위해 사실상 우크라이나와의 무역 전쟁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산업부 장관 미하일로 코롤렌코는 2013년 12월 18일 러시아의 새로운 무역 제재 조치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수출액이 14억 달러 감소(올해 첫 10개월간 전년 대비 10% 감소)했다고 보고했다.[130] 2013년 11월 우크라이나 국가통계청은 2012년 같은 달과 비교하여 2013년 우크라이나의 산업 생산은 10월 4.9%, 9월 5.6%, 8월 5.4% 감소했으며 연간 총 산업생산량은 2012년 전년 대비 1.8% 감소했다고 발표했다.[136]

2013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 정부는 대통령령으로 제휴 협정 체결 준비 과정을 중단한다고 밝혔다.[137][138][139] 그 이유로는 지난 몇 달 간 우크라이나가 "산업 생산량 감소와 독립국가연합(CIS) 간의 관계 악화"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40][h] 또한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산업 생산량 감소와 독립국가연합 간의 관계가 유럽 시장으로 충분히 보상이 된다면 협정 준비를 재개하겠다"고 말했다.[140] 우크라이나의 총리 미콜라 아자로우국제 통화 기금(IMF)이 대출을 내세우면서(2013년 11월 20일 IMF가 제시) 대규모 정부 예산 삭감과 가스 요금 40% 인상 등 "매우 가혹한 조건"이 정부가 제휴 협정 체결 준비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데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밝혔다.[142][143] 2013년 12월 7일 IMF는 우크라이나의 천연 가스 관세를 40%로 곧바로 올리는 것이 아닌 경제적으로 정당한 수준까지 점진적으로 인상함과 동시에 선별적 사회 복지를 강화하여 인구 극빈층에게 인상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을 보상할 것을 권장했다고 밝혔다.[144] 같은 날 IMF 우크라이나 상주대표제롬 배처는 이 특정 IMF 대출은 40억 달러 규모로 "불균형을 없애고 성장을 촉진하는 정책"과 연계할 것이라고 밝혔다.[145][i]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2013년 11월 28일에서 29일까지 빌뉴스에서 열린 EU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EU-우크라이나 제휴 협정 체결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나, 협정을 결국 서명하지 않았다.[126][147][148] 야누코비치와 EU 고위 관료 모두 나중에 제휴 협정에 서명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149][150][151] 야누코비치는 나중에 측근들에겐 이 결정은 EU 협정에 서명한다면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남부 상당 부분을 점령하겠다고 위협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위협 때문이었다고 밝혔다.[152]

미국의 언론인 랠리 웨이머스는 《워싱턴 포스트》 지에서 우크라이나의 억만장자인 페트로 포로셴코와 한 인터뷰에서 포로셴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부터 전 마이단의 조력자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운영했던 텔레비전(카날 5)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죠. 우리는 언론인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12월 11일 (미국 국무부 차관보)빅토리아 눌런드와 (유럽 연합 외교관)캐서린 애시튼이 키이우에 왔을 때 밤에 그들이 마이단을 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진압 경찰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153]

2013년 12월 11일 총리인 미콜라 아자로우는 EU 협상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200억 유로(약 270억 달러) 규모의 대출 및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혔다.[154] EU는 우크라이나의 법률을 대폭 개정하는 조건으로 6억 1천만 유로(약 8억 3,800만 달러) 규모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밝혔고 러시아는 법률 개혁이라는 전제 조건 없이 150억 달러 규모 차관과 저렴한 가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155][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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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의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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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7일, 사복 차림으로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야권 지도자인 비탈리 클리츠코, 아르세니 야체뉴크, 올레흐 탸흐니보크의 모습

11월 29일 시위 주최 측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구 사항으로 구성된 결의안을 발표했다.[105]

  1. 유럽 공동체와 소통하기 위한 조정위원회의 구성
  2. 대통령, 의회, 내각이 국가를 지정학적으로 전략적인 발전 과정을 수행할 능력이 없으며 야누코비치의 사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
  3. 유로마이단 시위대, 학생, 시민 운동가, 야권 지도자에 대한 정치적 탄압 중단

이 결의안은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 22주년 기념일인 12월 1일 정오에 독립광장에서 모여 향후 행동 방침을 발표하겠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105]

11월 30일 밤 독립광장에 있던 모든 시위대를 경찰이 강압적으로 해산한 후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인 비탈리 자하르첸코의 해임도 시위대의 주요 요구 중 하나가 되었다.[156] 우크라이나 전역의 학생도 등록금 인상 가능성이 내포된 법안을 발의한 우크라이나 교육과학부 장관인 드미트로 타바치니크의 해임을 요구했다.[157]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우크라이나 주요 정부각료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는 백악관 청원은 나흘 만에 10만명 이상이 서명했다.[158][159][160]

12월 5일에는 바티키우시나의 원내대표인 아르세니 야체뉴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고 라다와 대통령을 향한 우리의 세 가지 요구는 변함이 없다. 내각 사임, 무엇보다도 모든 정치범의 석방, (전 우크라이나 총리) 율리야 티모셴코, (12월 1일 반코바가 집회에 참석했다 불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9명의 (석방), 모든 형사 사건 기소 중단, 독립광장에서 아동을 불법 구타한 데 책임이 있는 모든 베르쿠트 경찰관의 체포이다..[161]

또한 야권은 정부가 "야누코비치가 러시아에 기대게 만든 경제 문제를 통해 우크라이나를 돕는 데 필요한 대출을 위해 IMF와의 협상을 재개할 것"도 요구했다.[162]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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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7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유로마이단 시위대 모습

유로마이단 시위는 2013년 11월 21일 밤 늦게 평화 시위로 시작되었다.[163] 시위대 약 1,500명이 언론이 무스타파 나이옘의 반정부 집회를 촉구하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보고 모여들었다.[164][165]

키이우의 시위

2013년 11월 30일 시위대는 베르쿠트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해산당했다.[166] 12월 1일 키이우 시민 50만명 이상이 "학생을 지키고 심각한 권위주의에 맞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167]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12월 들어선 정부와의 추가 충돌과 야권의 정치적 최후통첩이 이어졌다. 이런 대치 상황은 2014년 1월 16일 정부가 시위 금지법을 제정해 폭발한 시위대의 소요 사태로 이어지면서 절정에 달했다. 2014년 2월 초에는 키이우 노동조합 건물 폭탄 테러[168]와 시위대의 "자위대" 결성이 이어졌다.[169]

2013년 12월 1일 시위

전날인 11월 30일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대 진압에 대한 항의로 키이우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 봉기가 발생했다.

2013년 12월 11일 시위

12월 11일 우크라이나 정부는 베르쿠트와 우크라이나 국내군 등 특수부대를 이용하여 유로마이단 시위대를 진압하러 시도했다.

흐루셰우스키가 시위

2014년 1월 19일 키이우 중심부에 최대 20만명의 시위대가 모여 일명 "독재법"이라고 부르는 우크라이나 반시위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다.[170][171] 많은 시위대가 파티용 마스크, 안전모, 방독면 등을 착용해 얼굴을 가리는 법 조항을 무시했다.[172] 이들은 마이단에서 의회 청사로 행진을 시도했다. 시위 행진이 진압경찰에게 막히자 흐루셰우스키가에서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폭력적인 대치 상황은 3일간 계속되었고 그 동안 시위대 3명이 진압경찰의 사격으로 사망했다.[71]

2014년 2월 혁명

가장 사망자가 많았던 충돌은 2014년 2월 18일~20일 사이에 일어났는데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래 가장 심각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173] 방패와 헬멧을 쥔 활동가가 이끄는 시위대 수천 명이 의회 방면으로 행진했고 베르쿠트와 경찰 저격수가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이 총격으로 시위대 100명 넘게 사망했다.[71][174]

2월 21일 야누코비치와 의회 야당 지도부(비탈리 클리츠코, 아르세니 야체뉴크, 올레흐 탸흐니보크는 EU와 러시아 대표단의 중재 하에 합의안에 서명했다. 이 합의안에 따라 임시 거국내각이 수립되고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개헌과 조기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90] 시위대는 점거한 건물과 광장을 떠나야 했고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기로 합의했다.[90] 미국은 야누코비치가 그 동안 대통령직에 유지한다는 조건을 지지했지만 마이단 시위대는 여전히 야누코비치의 사임을 요구했다.[90] 합의안 서명은 폴란드, 독일, 프랑스 외무장관을 대동해 지켜보았다.[175] 러시아 대표단은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90]

다음 날인 2월 22일 야누코비치는 도네츠크와 크림반도로 도망쳤고 의회는 이를 알고 난 후 야누코비치 대통령 탄핵안에 투표했다.[176][177][178] 2월 24일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망명했다.[179]

우크라이나 기타 지역 시위

자세한 정보 도시, 최대 시위자수 ...

2013년 11월 24일 이바노프란키우스크에서 시위대 수천명이 지방 행정 청사에 모였다.[209] 또한 리비우, 이바노프란키우스크, 우지호로드 등 우크라이나 서부의 여러 대학은 휴교했다.[210] 그 외에도 하르키우, 도네츠크,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현 드니프로) 루한스크 등 기타 여러 우크라이나 대도시에도 유로마이단 시위가 열렸다.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지지하는 리비우 집회는 지역 대학생이 주도해서 열었다. 리비우에 있는 스보보디 거리에서 2만 5천명에서 3만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행진했다. 주최 측은 2013년 11월 28일부터 29일 사이에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릴 예정인 제3차 동방 파트너십 회담에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발표했다.[211] 약 300명이 모인 심페로폴의 시위에서는 유럽과의 통합을 찬성하는 국민주의자와 크림 타타르인이 연합했으며, 시위대는 우크라이나의 국가와 우크라이나인 시치 소총병의 노래 둘 다 제창했다.[212]

11월 25일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에서 법원 명령으로 시위대의 텐트 야영지가 철거 명령으로 깡패 집단이 나타나 철거 작전을 펼쳐 충돌이 일어났고 이 결과 7명이 부상을 입었다.[213][214] 관계자들은 공격자 수를 10~15명으로 추정했으나[215] 경찰은 공격에 개입하지 않고 방관했다.[216] 이와 마찬가지로 오데사에서도 30명으로 구성된 도시 내 유로마이단 캠프 철거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그대로 건물에서 모든 시위대를 내쫓았다.[217] 같은 날 체르히니우에서도 경찰 및 사복을 입은 남성 50여명이 유로마이단 시위대를 내쫓았다.[218]

11월 25일 오데사에서 경찰 120명이 시위대가 모인 텐트 야영지를 기습해 모두 철거했다. 경찰은 민주동맹 오데사 지부 지도자인 알레헤이 츠호르니를 포함해 시위대 3명을 구금했다. 3명 모두 경찰차 안에서 구타당한 후 도착 기록 없이 포르토프란코우스크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번 조치는 앞서 지방행정법원이 새해까지 시민의 평화적 집회를 열 권리를 제한하는 금지령이 발효된 뒤 나왔다. 법원 판결에 따라 연말까지 모든 집회, 텐트, 음향 장비, 차량 사용이 불허된다.[219]

11월 26일 도네츠크에서 50명이 모인 집회가 열렸다.[220]

11월 28일 얄타에서 시위가 열렸으며 이 시위에 참여한 대학 교수진은 대학 관계자로부터 교수 사임 압력을 받았다.[221]

11월 29일 리비우에서 2만명이 모인 시위가 열렸다.[222] 키이우에서처럼 시위대가 인간 사슬을 이뤄 우크라이나가 유럽 연합과 서로 손을 잡았다는 상징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당시 시위대는 약 100여명이 유럽 연합 내 폴란드에서 넘어와 시위대에 합류했다고 말했다).[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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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외 지역에서 가장 큰 친 유럽연합 시위인 리비우 타라스 셰우첸코 기념비 앞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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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한스크에서 열린 유로마이단 시위

12월 1일에는 키이우 외 지역에서 열린 가장 큰 규모의 시위인 리비우 타라스 셰우첸코 기념비 앞 시위가 열렸으며 이 시위에서 5만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다. 이 시위에서 리비우 시장인 안드리 사도비, 시의회 의장 페테르 콜로디, 기타 저명인사와 정치인이 참여했다.[63] 도네츠크 동부 도시에서는 약 300명이 모여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미콜라 아자로우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열었다.[224] 한편 하르키우에서는 작가 세르히 자단를 포함한 수천명의 시위대가 모여 연설 중 혁명을 요구했다.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225][226][227] 시위대 측은 최소 4천명이 모였다고 주장했으며[228] 다른 출처에서는 2천명이 모였다고 분석했다.[229]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에선 시위대 1천명이 모여 EU와의 협정 중단에 항의하고 키이우의 시위대와 연대함을 표했으며 지방 및 대도시 관료의 사임을 요구했다. 이 시위대는 나중에 "우크라이나는 유럽이다"와 "혁명"을 외치며 행진했다.[230] 또한 심페로폴(150~200명이 참여)과[231] 오데사에서도 유로마이단 시위가 같이 열렸다.[232]

12월 2일 "연대행동일"에 리비우주는 키이우 시위 지원을 위한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총파업을 선언했고[233] 이후 테르노필과 이바노프란키우스크에서도 총파업 선언이 이어졌다.[234]

12월 3일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에서 시위대 300명이 모여 유럽 통합 찬성을 외치고 지방정부, 지역 경찰서장, 우크라이나 보안국(SBU) 인사 사임을 요구했다.[235]

12월 7일 테르노필과 이바노프란키우스크에서 경찰이 키이우로 운전하는 행위를 금지했다는 보도가 나왔다.[236]

12월 8일 시위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여러 도시를 포함해 많은 도시에서 일어났다. 이날 저녁에는 키이우 레닌 기념비의 붕괴 사건도 일어났다.[237]

12월 9일에는 오데사주 포딜스크에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 기념비 동상도 쓰러졌다.[238] 테르노필에선 유로마이단 시위대가 정부에게 고소를 당했다.[239]

키이우의 레닌 기념비가 붕괴된 이후 우크라이나 내 여러 곳의 레닌 기념비 철거 및 파괴가 이어졌다. 이런 기념비 철거를 "레니노파드"(우크라이나어: Ленінопад, 러시아어: Ленинопад)라고 부른다. 뒤이어 2014년 봄까지 유로마이단 시위 기간 키이우, 지토미르, 흐멜니츠키 등 여러 지역에서 12개 기념비가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다.[240] 기타 도시와 마을에서도 기념비가 중장비로 파괴되어 폐차장이나 쓰래기장으로 옮겨졌다.[241]

12월 14일 하르키우의 유로마이단 지지자들이 자유광장 주변을 금속 울타리로 막고 있는 데에 항의해 울타리에 플랜카드를 올렸다.[242] 12월 5일부터 시위대는 절도와 방화 피해자가 되었다.[243] 하르키우의 한 유로마이단 시위대는 남성 2명에게 공격받아 열두번이나 칼에 찔렀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진 않았으나 시위대는 하르키우에 있는 시민단체 마이단에서 시장인 겐나디 케르네스가 사건의 배후라고 말하고 있다며 조사를 주장하고 있다.[244]

12월 22일에는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에서 2천명의 시위대가 모였다.[245]

마이단의 새해 축하 행사

12월 말에는 도네츠크에서 500명의 시위대가 행진했다. 도네츠크 지역은 친정부적인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에 해외 평론가는 "도네츠크 행진에 500명이 모였다는 것은 리비우에서 5만명, 키이우에서 50만명이 모이는 것과 같다"고 평했다. 다음 해인 2014년 1월 5일에는 도네츠크,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오데사, 하르키우 등 여러 곳에서 유로마이단 지지 시위가 열렸는데 도네츠크에서는 100여명, 뒤의 3개 도시에서는 수백명이 모였다.[246]

1월 11일 하르키우에서 시위대 150명이 전국 유로마이단 시위 플랫폼 통일을 위한 대포럼 참석을 위해 떠났다. 하지만 일부 인원이 모인 교회에서 12명 이상의 티투스키에게 습격당했고 나머지 인원들도 서점에 열린 회의장을 습격해 창문을 부수고 최루탄을 던지며 마이단 회의를 막았다.[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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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9일 시위에서 경찰과 충돌하는 시위대의 모습

1월 22일 도네츠크에서 친유로마이단 시위와 친정부 시위가 각각 열렸다. 친정부 시위에서는 600명이, 유로마이단 시위에서는 100명이 모였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친정부 시위에서는 5천명이 참석했으나 유로마이단 집회는 60만명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유로마이단 시위 도중 티투스키 약 150명이 나타나 메가폰으로 "파시스트 물러나라!"고 외치며 스보보다 당기를 불태우면서 충돌을 시도했지만 경찰이 두 세력을 분리했다.[248] 한편 도네츠크 시의회는 키이우에게 유로마이단 시위대에게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정부에게 요구했다.[249]

1월 22일 경찰이 수도 키이우에서는 시위대에게 총격을 하는 가운데 리비우에서 군 막사가 시위대에게 포위되었다. 시위대 중에는 아들이 군 복무중인 어머니도 있었는데 그들은 키이우로 군을 배치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또한 1월 22일 빈니차에서는 시위대 수천명이 주요 도로를 점거했다. 또한 시위대는 야누코비치에게 선물로 "관 속에 들어간 민주주의"를 들며 시청까지 행진했다.[250]

1월 23일 오데사 시의원이자 유로마이단 활동가인 올렉산드르 오스타펜코의 차가 폭탄 테러를 당했다.[251] 수미 시장은 1월 24일 유로마이단 운동을 지지하며 키이우의 시민 소요 사태를 지역당과 공산당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252]

크림 의회는 키이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크림 자치령이 러시아로 합류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2월 27일에는 무장 괴한이 크림 의회를 점령하고 러시아 국기를 계양했다.[253] 나중에 러시아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2월 27일을 러시아 스페츠나츠 특수부대를 위한 특별한 날로 선포했다.[254]

3월 초에는 크림 타타르인 수천명이 심페로폴에 모여 소수의 친러시아 시위대와 충돌했다.[255][256]

2014년 3월 4일 도네츠크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친유로마이단 집회가 열렸다. 시위대 2천명이 모였다. 도네츠크는 우크라이나 극동의 대도시로 야누코비치의 거점이자 지지자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2014년 3월 5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7천~1만명에 달하는 유로마이단 시위가 열렸다.[257] 지도자가 집회 종료를 선언한 후 친유로마이단과 2천명의 친러 시위대 사이 충돌이 벌어졌다.[257][258]

행정청사 점령

2014년 1월 23일부터 우크라이나 서부의 정부 건물과 지역 행정청사(RSA) 건물이 유로마이단 시위대에게 점령되었다.[16] 점령된 주의 행정청사에서는 그 주 내에서 우크라이나 지역당 및 공산당의 지역 활동과 상징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17] 자포리자,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오데사 도시에서도 시위대가 지역 행정청사를 점령하러 시도했다.[16]

해외에서 발생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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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헨에서 열린 유로마이단 지지 시위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가 많은 북아메리카와 유럽 지역에서 소규모 지지 시위나 유로마이단 시위가 열렸다. 우크라이나 외 해외에서 일어난 유로마이단 시위 중 가장 컸던 시위는 2013년 12월 8일 뉴욕에서 열렸으며 1천명 이상의 시위대가 참여했다. 특히 2013년 12월에는 폴란드 바르샤바문화과학궁전,[259] 미국 필라델피아 시라 센터,[260] 조지아 트빌리시 의회 건물,[261] 미국-캐나다 국경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우크라이나와의 연대의 상징으로 파란색과 노란색 조명이 켜졌다.[262]

안티마이단 및 친정부 집회

유로마이단 기간 우크라이나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은 여러 친정부 집회가 열렸다.[263][264] 여러 언론 매체가 친정부 집회의 정부 개입에 대해 조사한 결과 대체로 친정부 집회 참여자들은 정치적 이유가 아닌 금전적 보상을 위해 참여했으며 유로마이단에 대한 유기적 대응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 키이우에 있는 키이후 모힐라 학회의 정치학자 올렉시이 하란는 "사람들은 국가의 인권 침해에 항의하기 위해 유로마이단 시위를 열고 있으며,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안티마이단 측은 오직 돈만을 위해 존재한다. 정부는 저항을 유발하기 위해 이 인력을 고용한다. 그들은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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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마이단 단체

요약
관점

오토마이단

오토마이단(Automaidan)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사임을 요구한 유로마이단 내 운동 단체이다. 주로 시위대 캠프를 보호하고 거리를 봉쇄한 운전자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이 단체는 2013년 12월 29일 우크라이나-유럽연합 제휴 협정 체결 거부에 항의하기 위해 메지히리야에 있는 대통령 관저까지 자동차 행렬을 조직했다. 이 자동차 행렬은 대통령 관저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까지 행진했다. 오토마이단은 정부군과 정부 지지자의 여러 표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자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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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단의 자위대 모습

2013년 11월 30일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가 강제 해산당한 다음 날 유로마이단 시위대는 스보보다 같은 친마이단 정당과 우크라이나의 정치인이자 기업가인 아르센 아바코우의 지원을 받아[266] 키이우에서 진압경찰로부터 시위대를 보호하고 키이우 내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독립적인 경찰 단체인 "마이단 자위대"라고 부르는 자위대 단체를 만들었다.[267][268] 자위대 책임자는 안드리 파루비가 맡았다.[269]

마이단 자위대는 "우크라이나의 친유럽화 및 단결을 지지"하는 성명을 채택했고[266] 공식적으로 가면을 쓰거나 무기를 휴대하는 행위를 허용하진 않았지만 단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고 자원대는 주로 중앙집중적인 지도부 아래 파편화되어 활동했다. 이 단체는 키이우 중심부의 한 여성 신발 가게에 본부를 두어 순찰대를 조직하고 새로운 회원을 모집하며 대중의 문의를 접수했다. 임시본부는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온 자원봉사자의 노력으로 운영되었다.[266]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된 후 대부분의 경찰관이 보복 우려로 자신의 보직을 포기하면서 이 단체는 2014년 초 키이우에서 사실상의 경찰 역할을 하며 그 규모와 역할이 더욱 커졌다.[266] 약탈이나 방화로 유로마이단의 성공이 더럽혀지는 일을 막기 위해 마이단 자위대는 최초로 정부 관련 건물을 보호하기 시작했으며 최고 라다(우크라이나 의회) 및 우크라이나 국립은행 같은 기관 건물은 24시간 감시했다.[266]

"마이단 자위대" 같은 여러 자위대 단체는 "정부 보안군과의 폭력적인 대결에서 창끝 세력"이라고 말하는 여러 소트냐(수백이란 뜻)로 나뉘어 활동했다. 소트냐는 전통적인 카자크 기병대 편제에서 딴 말로 우크라이나 인민군, 우크라이나 반란군, 우크라이나 국민군에서도 사용한 용어이다.[270]

"마이단 자위대"와 함께 2014년 1월 2일까지 노동조합 건물을 지키는 것과 같은 여러 '독립적인' 자위대(일부는 스스로를 소트냐나 자위대라고만 칭함)가 활동했다.[271] 그 외 키이우 시정부의 나르니아와 비킨그스,[272] 음악원 건물의 볼로딤르 파라시우크의 소트냐[273][274] 등 독립 무장대가 있었으나 안드리 파루비는 공식적으로 이런 독립적인 무장대에겐 스스로를 "자위대"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275]

우익 섹터는 스토냐로 등록할 당시 이미 수백 명의 회원이 있었으나 자위대 행동을 조정하고 공식적으로는 제23소트냐에 속했다.[276] 제2소트냐(스보보다 당원이 대부분)는 "마이단 자위대 소트냐"와는 별도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277]

야권에 동정하는 일부 러시아 시민은 미잔트로피크 사단 일원으로 시위에 활동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얻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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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요약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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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을 입은 시위대에게 응급 처치를 시행하는 우크라이나 적십자사 자원봉사자의 모습. 2014년 1월 19일 촬영.

유로마이단 시위로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총 2,5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278] 총 사망자 수 중 시위대가 108명, 경찰관이 13명이다.[71] 사상자 절대다수는 2014년 2월 있었던 존엄의 혁명 기간에 일어났다.

2015년 11월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실은 마이단 시위에 대한 법적 분석을 발표하며 "사망자와 중상자를 초래한 과도한 무력사용과 여러 형태의 학대를 포함해 시위대를 향한 폭력이 야누코비치 치하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조장하거나 장려했다."고 결론을 내렸다.[71]

2016년 6월까지 유로마이단 사상자 책임으로 55명이 기소되었는데 여기에는 전직 베르쿠트 특수경찰 29명, 티투스키 10명, 정부 고위 관료 10명이 포함되었다.[71]

경찰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언론인과 의료인

경찰관이 언론인과 의료진을 공격했다는 여러 보고가 있었다. 2013년 12월 1일 방코바 거리에서 벌어진 조직적인 공격으로 약 40명의 언론인이 부상을 입었다. 2014년 1월 22일 흐루셰우스키가에서 최소 42명의 언론인이 경찰 공격의 피해자가 되었다.[279] 2014년 1월 22일, 텔레비전 뉴스 서비스(TSN)는 언론인들이 표적이 되고 있으며, 때로는 고의적으로, 때로는 우발적으로 공격받고 있어 식별용 유니폼(조끼와 헬멧)을 벗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280] 2013년 11월 21일부터 총 136명의 언론인이 부상을 입었다.[281]

2014년 1월 21일, 26명의 언론인이 부상을 입었는데 최소 2명은 경찰의 섬광탄에 심하게 다쳤고,[282] 2명은 경찰에 체포되었다.[283] 1월 22일, 로이터 통신의 특파원 바실리 페도센코는 흐루셰우스키가에서의 충돌 도중 저격수에 고무탄으로 머리에 고의적으로 총격을 받았다.[284][285][286] 나중에 에스프레소 TV의 언론인 드미트로 드보이첸코프는 납치되어 폭행당하고 알 수 없는 장소로 끌려갔으나, 나중에 의원으로부터 그가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87] 1월 24일,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구금된 모든 언론인을 석방할 것을 명령했다.[288] 1월 31일, 2014년 1월 22일자 영상이 공개되었는데, 베르쿠트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손을 든 의료진에게 고의적으로 발포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289] 2014년 2월 18일, 미국 사진 저널리스트 마크 이스터브룩은 베르쿠트 부대에게 두 개의 섬광탄을 흐루셰우스키가 바리케이드 안쪽 문에서 맞았고, 파편이 어깨와 아랫다리에 박혀 부상을 입었다. 그는 수술을 위해 독일 쾰른으로 가는 내내 피를 흘렸다. 그는 마이단에 도착하자마자 야누코비치의 베르쿠트 경찰에 체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키이우의 병원들을 멀리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2014년 2월).[290][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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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요약
관점

유로마이단에 대한 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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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9일, 키이우의 마이단 시위대

2013년 12월 여론조사(세 개의 다른 여론조사 기관에서 실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45%에서 50%가 유로마이단을 지지했으며, 42%에서 50%는 반대했다.[293][294][295] 시위에 대한 가장 큰 지지는 키이우(약 75%)와 서우크라이나(80% 이상)에서 나타났다.[293][296] 유로마이단 시위대 중 55%는 서부 지역 출신이었고, 24%는 중앙 우크라이나, 21%는 동부 지역 출신이었다.[297]

12월 7일부터 8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시위대의 73%는 자신들의 요구가 충족될 때까지 필요한 만큼 키이우에서 계속 시위할 것을 약속했다.[5] 이 수치는 2014년 2월 3일 기준으로 82%로 증가했다.[297] 또한 여론조사는 국가가 연령별로 여론이 나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젊은 세대의 대다수는 친EU였지만, 나이가 많은 세대(50세 이상)는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러시아 관세 동맹을 선호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298] 2월 기준으로 시위대의 41% 이상이 행정 건물 점거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이는 2013년 12월 10일과 20일 여론조사에서는 각각 13%와 19%에 불과했다. 동시에 50% 이상이 독립적인 군사 부대 창설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이는 과거 조사에서는 각각 15%와 21%에 불과했다.[297]

1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45%가 시위를 지지했고, 48%는 유로마이단을 반대했다.[299]

3월 여론조사에서 우크라이나인의 57%가 유로마이단 시위를 지지한다고 밝혔다.[300]

정규 및 소셜 미디어의 여론 조사 결과,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사용자 중 74%가 유로마이단 운동을 지지했고, 4분의 1은 반대했다.[301]

우크라이나 내 유로마이단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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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8일 야당 지도자

Research & Branding Group이 2013년 12월 4일부터 9일까지 실시한 연구[293]에 따르면, 전체 우크라이나인의 49%가 유로마이단을 지지했고 45%는 반대 의견을 가졌다. 서부(84%)와 중앙 우크라이나(66%)에서 주로 지지가 많았다. 남부 우크라이나 주민의 3분의 1(33%)과 동부 우크라이나 주민의 13%도 유로마이단을 지지했다. 시위대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은 동우크라이나에서 81%, 남부 우크라이나에서 60%였고[j], 중앙 우크라이나에서는 27%, 서우크라이나에서는 11%였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키이우 주민의 3분의 2가 진행 중인 시위를 지지했다.[296]

쿠체리우 민주 이니셔티브 기금과 라줌코우 센터가 12월 20일부터 24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50% 이상이 유로마이단 시위를 지지했으며, 42%는 반대했다.[295]

또 다른 Research & Branding Group 조사(12월 23일부터 27일까지 실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45%가 유로마이단을 지지했고, 50%는 지지하지 않았다.[294] 응답자의 43%는 유로마이단의 결과가 "오히려 부정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31%는 반대로 생각했다. 17%는 유로마이단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294]

일코 쿠체리우 민주 이니셔티브 재단이 2013년 12월 7일과 8일 시위대에게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키이우로 온 사람들 중 92%는 자발적으로 왔고, 6.3%는 공공 운동 단체의 조직으로, 1.8%는 정당의 조직으로 왔다고 한다.[5][303] 70%는 11월 30일 경찰의 잔혹 행위에 항의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고, 54%는 유럽연합과의 협정 체결을 지지하기 위해 시위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요구 사항 중 82%는 구금된 시위대의 석방을 원했고, 80%는 정부의 사임을, 75%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사임과 조기 선거를 원했다.[5][304] 이 여론조사는 시위대의 49.8%가 키이우 주민이고 50.2%는 우크라이나 다른 지역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위대의 38%는 15세에서 29세 사이, 49%는 30세에서 54세 사이, 그리고 13%는 55세 이상이었다. 총 시위대의 57.2%가 남성이었다.[5][303]

도네츠크, 루한스크, 하르키우 동부 지역 주민의 29%는 "특정 상황에서는 권위주의 체제가 민주주의 체제보다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305][306]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인구의 11%가 유로마이단 시위에 참여했으며, 또 다른 9%는 기부를 통해 시위대를 지원했다.[307]

EU 통합에 대한 여론

Research & Branding Group이 2013년 12월 4일부터 9일까지 실시한 연구[293]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46%가 유럽 연합으로의 통합을 지지했으며, 36%는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러시아 관세 동맹으로의 통합을 지지했다. EU 통합에 대한 지지는 서부(81%)와 중앙(56%)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았다. 남부 우크라이나 주민의 30%와 동부 우크라이나 주민의 18%도 EU 통합을 지지했다. 관세 동맹과의 통합은 동우크라이나의 61%, 남부 우크라이나의 54%가 지지했으며, 중앙 우크라이나의 22%와 서우크라이나의 7%도 지지했다.

사회학 그룹 "RATING"이 2013년 12월 7일부터 17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9.1%는 국민투표에서 우크라이나의 유럽 연합 가입에 찬성할 것이라고 답했으며, 29.6%는 반대할 것이라고 답했다.[308] 한편, 응답자의 32.5%는 우크라이나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러시아 관세 동맹 가입에 찬성할 것이라고 답했으며, 41.9%는 반대할 것이라고 답했다.[308]

EU 가입에 대한 여론

도네츠크연구 및 브랜딩 그룹이 2013년 8월에 실시한 연구[309]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49%가 협정 체결을 지지했고, 31%는 반대했으며, 나머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회사의 12월 여론조사에서는 30%만이 협정 조건이 우크라이나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39%는 우크라이나에 불리하다고 말했다. 같은 여론조사에서 30%만이 야당이 집권하면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가를 잘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37%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310]

2013년 10월 2일부터 15일까지 GfK 우크라이나가 실시한 여론조사의 저자들은 응답자의 45%가 우크라이나가 유럽 연합과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14%만이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러시아 관세 동맹에 가입하는 것을 선호했고, 15%는 비동맹을 선호했다고 주장했다. GfK가 질문한 EU 관련 질문의 전문은 "우크라이나는 EU-우크라이나 협정을 체결하고, 미래에 EU 회원국이 되어야 하는가?"였다.[311][312]

IFAK 우크라이나 사회학 연구소도이체 벨레-트렌드의 요청으로 11월에 실시한 또 다른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58%가 EU 가입을 지지했다.[313] 반면, 키이우 국제 사회학 연구소가 2013년 11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39%가 EU 가입을 지지했고, 37%는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러시아 관세 동맹 가입을 지지했다.[314]

2013년 12월, 당시 우크라이나 총리 미콜라 아자로우는 친EU 여론조사 수치를 반박하며, 많은 여론조사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에 대해 질문했지만, 우크라이나는 EU에 가입하라는 초대를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315] 하지만 그는 유럽 연합 제휴 협정 서명만 제안받았다(EU와 다른 국가, 이 경우 우크라이나 간의 조약).[316]

오렌지 혁명과의 비교

파이낸셜 타임스는 2013년 시위가 이전의 잘 조직된 시위에 비해 "주로 자발적으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촉발되었고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야당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만들었다"고 보도했다.[317] 해시태그 #euromaidan (우크라이나어: #євромайдан, 러시아어: #евромайдан)은 시위 첫 회의에서 즉시 등장했으며 시위자들을 위한 통신 수단으로서 매우 유용했다.[318]

폴 로버트 마고치는 유로마이단에 대한 오렌지 혁명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렌지 혁명은 진정한 혁명이었는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 영향을 보고 있다. 그 혁명은 거리의 혁명이나 (정치적) 선거의 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인과 영토 우크라이나에 사는 사람들이 시위하고 상황을 바꿀 기회를 보았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의 마음의 혁명이었다. 이것은 이전 소련 인구의 성격에 대한 심오한 변화였다.[319]

르비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역사학자 야로슬라프 흐리차크 또한 세대교체에 대해 언급하며,

이것은 우리가 우크라이나 독립의 동시대인(1991년경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세대의 혁명이다. 이는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올해의) 이스탄불 시위와 더 유사하다. 이는 매우 교육받은 젊은이의 혁명으로, 소셜 미디어 활동이 활발하고 이동성이 좋으며 90%가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다.[105]

흐리차크에 따르면 "젊은 우크라이나인은 50세 이상인 우크라이나인보다 젊은 이탈리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독일인과 더 유사하다. 이 세대는 유럽 통합에 대한 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기성세대보다 지역적 분열이 적다."[320] 9월에 실시된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럽 연합 가입은 젊은 우크라이나인(18세에서 29세 사이의 69.8%)이 주로 지지했으며, 이는 전국 평균 43.2%보다 높았다.[321][322] 같은 연구소의 2013년 11월 여론조사에서는 18세에서 29세 사이의 70.8%가 유럽 연합 가입을 원했으며, 전국 평균 지지율은 39.7%로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321] 10월 2일에서 15일 사이에 실시된 GfK의 여론조사에서는 통합에 대한 입장을 가진 16세에서 29세 응답자의 73%가 EU와의 유럽 연합 제휴 협정 체결을 선호한 반면, 45세 이상 응답자의 45%만이 제휴를 선호했다. 유럽 통합에 대한 지지율이 가장 낮은 집단은 중등 교육을 마치지 못했거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311]

폭력 사태로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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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2일, 키이우 흐루셰우스키가에서의 충돌

유로마이단 초기 단계에서는 유로마이단 운동이 혁명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 많은 시위 지도자(올레흐 탸흐니보크 등)은 이미 대중에게 연설할 때 이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탸흐니보크는 12월 2일 공식 보도자료에서 경찰관과 군인에게 '우크라이나 혁명' 편에 서라고 촉구했다.[323]

미디어 분석가 안드리 홀로바티(Andrij Holovatyj)와의 스카이프 인터뷰에서 "마이단" 국가 연합 이사회의 의원이자 우크라이나 TV 채널 TVi의 사장 겸 편집장인 비탈리 포르트니코프는 "유로마이단은 혁명이며 혁명은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으며,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은 훨씬 더 깊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구조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언급했다.[324]

12월 10일,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혁명을 요구하는 것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말했다.[325]조지아 대통령 미헤일 사카슈빌리는 이 운동을 "21세기 최초의 지정학적 혁명"이라고 묘사했다.[326]

정치 전문가 안데르스 아슬룬드는 이 측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혁명적인 시대에는 알렉시 드 토크빌부터 크레인 브린톤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가르쳐왔듯이 일반적인 정치 논리와는 매우 다른 그 시대의 논리가 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대해 이해해야 할 첫 번째는 혁명적인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새로운 환경을 합리적으로 다루는 것이 좋다.[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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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요약
관점

정치적 영향

2014년 1월 말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연례 세계 경제 포럼 회의에서 미콜라 아자로우 우크라이나 총리는 주요 행사에 초청받지 못했다. 파이낸셜 타임스기디언 락먼에 따르면, 이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2014년 흐루셰우스키가 폭동의 폭력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328]

빅토리아 눌런드 미국 외교관이 제프리 파이엇 주 우크라이나 미국 대사와 우크라이나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화 통화가 유출되었는데, 이 통화에서 눌런드는 비탈리 클리치코가 미래 정부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아르세니 야체뉴크를 선호한다고 표현했으며, 야체뉴크는 임시 총리가 되었다. 그녀는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젠장, EU"라고 말했다.[329][330]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눌런드의 발언을 "전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331] 이후 상황에 대해 젠 사키 국무부 대변인은 눌런드가 EU 관계자에게 사과했다고 말했으며[332] 백악관 대변인 제이 카니는 "러시아 정부가 트윗으로 올렸다는 점이 러시아의 역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주장했다.[333]

2014년 2월, IBTimes는 "만약 자유당과 다른 극우 단체들이 시위에 참여하여 더 큰 노출을 얻는다면, 정치적 부패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향력에 지친 대중으로부터 더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보도했다.[334] 다음 10월 말 2014년 우크라이나 총선에서 자유당은 2012년 총선에서 얻었던 37석 중 31석을 잃었다.[335][336] 다른 주요 극우 정당인 우익 섹터는 같은 2014년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의회 450석 중 1석을 얻었다.[335] 2014년 2월 27일부터 2014년 11월 12일까지 자유당 소속 의원 3명은 우크라이나 내각에서 직책을 맡았다.[337]

2월 21일,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유럽 연합과 러시아 대표의 중재로 협상을 벌인 후, "우크라이나 정치 위기 해결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2004년 헌법으로의 복귀, 즉 의회-대통령제 정부로의 전환, 2014년 말까지 조기 대통령 선거 실시, "국민 신뢰 정부" 구성을 규정했다.[338] 최고 라다는 시위 행동 중 체포된 모든 사람을 석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황금 독수리" 부대와 내무군이 키이우 중심부를 떠났다. 2월 21일, 야당 지도자가 서명된 협정의 조건을 공개적으로 발표했을 때, "우익 섹터" 대표는 문서에 규정된 정치 개혁의 점진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즉각적인 사임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 행정부와 최고 라다에 대한 폭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선언했다.[339]

2월 22일 밤, 유로마이단 활동가는 법 집행 기관이 떠난 정부 청사를 점거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특히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즉각적인 사임을 요구했다.[340] 그날 일찍 그들은 야누코비치의 저택을 습격했다.[341]

2014년 2월 23일,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 이후, 라다는 러시아어를 포함한 소수 민족의 언어법을 변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우크라이나어를 모든 수준에서 유일한 국어로 만들었을 것이다.[342] 그러나 다음 주 3월 1일, 투르치노우 임시 대통령은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343]

시위 이후, 유로마이단 활동가는 국가 변혁을 위해 동원되었다. 활동가는 "개혁을 추진하고, 입법 제안을 작성하고 옹호하며, 개혁 이행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344]

경제적 영향

미콜라 아자로우 총리는 EU에 200억 유로(270억 달러)의 대출과 지원을 요청했다.[154] EU는 6억 1천만 유로(8억 3천 8백만 달러)의 대출을 제공할 의향이 있었지만,[155] 러시아는 150억 달러의 대출을 제공할 의향이 있었다.[155] 러시아는 또한 우크라이나에 더 저렴한 가스 가격을 제시했다.[155] 대출 조건으로 EU는 우크라이나의 규정 및 법률에 대한 주요 변경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그렇지 않았다.[154]

무디스 인베스터스 서비스는 2013년 12월 4일 "시위의 심각성으로 인해 외화 수요가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으며, 이는 이미 좋지 않은 우크라이나의 지불 능력에 또 다른 타격이라고 언급했다.[345] 세르히 아르부조우 제1부총리는 12월 7일 우크라이나가 100억 달러를 조달하지 못하면 채무불이행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밝혔다. "나는 우리를 지원하기 위한 대출을 요청했고, 유럽[EU]은 동의했지만 실수가 있었다. 우리는 이를 서류로 만들지 못했다."[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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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 포로셴코가 2013년 12월 8일 유로마이단에서 연설하고 있다.

12월 3일, 아자로우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천연가스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347] 그는 이 문제에 대해 2009년 1월 18일 가스 공급 재개 협상을 비난했다.[347]

12월 5일, 미콜라 아자로우 총리는 "연금, 임금, 사회복지 비용 지급, 주택 및 공공 서비스 부문 및 의료 기관 운영 지원 자금이 거리 시위로 인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하며, 당국은 적시에 자금 조달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348] 우크라이나 사회 정책부 장관 나탈리아 코롤렙스카는 2014년 1월 2일 이러한 2014년 1월 지불이 일정대로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349]

12월 11일, 제2차 아자로우 내각은 "정부의 일시적 마비"로 인해 사회 복지 지급을 연기했다.[350] 같은 날 로이터는 (유로마이단에 대해 언급하며) "이번 위기는 이미 파산 직전인 국가의 재정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고 논평하며 (당시) 투자자는 우크라이나가 향후 5년 내에 채무 불이행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당시 우크라이나는 1천만 달러의 국채를 보장하는 데 연간 1백만 달러 이상을 지불해야 했다).[351]

피치 그룹은 12월 16일 (정치적) "교착 상태"가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외화 수요가 증가하고 추가적인 외환보유액 손실을 초래하며 무질서한 통화 변동 위험이 증가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보고했다.[352] 또한 "국립은행이 흐리우냐 유동성을 강화하려 하면서 금리가 급격히 상승했다"고 덧붙였다.[352]

아나톨리 미아르코프스키 재정부 제1차관은 12월 17일 2014년 우크라이나의 정부 예산 적자가 "플러스 마이너스" 0.5%의 편차로 약 3%에 이를 수 있다고 밝혔다.[353]

12월 18일, 러시아와의 경제 협정이 체결된 다음 날, 미콜라 아자로우 총리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금융-경제 상황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 하나의 경제적 요인도 없다"고 밝혔다.[354] 그러나 BBC 뉴스는 "러시아 구제금융은 우크라이나의 경제 혼란을 가린다"라는 기사에서 이번 합의가 "우크라이나의 더 깊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도했다.[355]

2014년 1월 21일, 키이우시 행정부는 키이우에서의 시위로 인해 현재까지 200만 달러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356] 키이우시는 정치적 소속과 관계없이 모든 시위자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356]

2014년 2월 5일, 우크라이나 흐리우냐는 미국 달러 대비 5년 최저치를 기록했다.[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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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일의 키이우

2014년 2월 21일,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우크라이나의 신용 등급을 CCC로 강등했으며, "상당히 우호적인 변화" 없이는 국가가 디폴트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358]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분석가들은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야당 간의 같은 날 타협 합의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절실히 필요한 러시아 원조를 받을 가능성이 "더 낮아져 채무 불이행 위험이 증가한다"고 믿었다.[359]

사회적 영향

키이우에서는 "시위 구역"(독립광장 인근) 밖에서는 삶이 "평상시처럼" 계속되었다.[360][361]

유로마이단 시위가 발생하기 전,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강력하고 통일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시민적 또는 민족적 기준으로 한 사람을 우크라이나인으로 간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유로마이단 동안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시민은 시위를 정권과의 전투로 인식했다. 따라서 유로마이단이 우크라이나인에게 미친 사회적 영향은 국가적 정체성과 단합의 강화이다.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유로마이단 이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람들의 비율이 시위 전에 실시된 설문조사에 비해 1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362]

"유로마이단"은 현대 우크라이나어 및 속어 사전 Myslovo에서 2013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었으며,[363] 웹 분석 회사 Public.ru에서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조어로 선정되었다.[364]

문화적 영향

키이우 역사 박물관 대표에 따르면, 2월 18~19일 밤 경찰이 시위대에게서 탈환한 후 우크라이나 하우스에 소장되어 있던 소장품이 사라졌다.[365] 목격자는 경찰이 박물관의 재산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했다.[366]

마이단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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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자가 불탄 "베르쿠트" 버스 지붕 위에서 공연하고 있다. 2014년 2월 10일 키이우 흐루셰우스키가의 바리케이드.

우크라이나의 유명 공연자가 카자크 음계의 "브라트 자 브라타" (영어: "형제는 형제를 위해")라는 노래를 부르며 시위자를 지지했다. 이 노래는 유로마이단의 비공식 대표 노래 중 하나였다.[367]

우크라이나-폴란드 밴드 Taraka는 "유로마이단"을 위한 노래 "Podaj Rękę Ukrainie" (우크라이나에 손을 내밀다)를 발표했다. 이 노래는 우크라이나의 국가의 첫 몇 단어인 "우크라이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를 사용한다.[368][369][370]

다른 곡들 중에는 우크라이나 민요 "불타는 소나무" (우크라이나어: Горіла сосна, палала)의 리메이크 버전도 등장했다.[371][372]

우크라이나 밴드 스크랴빈(Skriabin)은 마이단의 혁명적인 날을 기념하는 노래를 만들었다.[373] 또 다른 키이우 출신은 티투시키에 헌정하는 노래를 만들었다.[374]

DJ 루디 파울렌코는 마이단에서의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마이단 전투"라는 트랙을 만들었다.[375]

벨라루스 록 밴드 랴피스 트루베츠코이의 노래 "전사의 빛" (Voiny Svieta)은 마이단의 비공식 국가 중 하나였다.[376]

마이단의 영화

2013년 혁명에 대한 단편 영화 모음집 바빌론'13이 제작되었다.[377]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활동가는 퍼렐 윌리엄스의 히트곡 "Happy"와 바빌론'13의 일부 장면을 편집하여 단편 영화 "Happy Kyiv"를 만들었다.[378]

2014년 2월 5일, 활동가 영화 제작자 그룹은 유로마이단 사람에 대한 영화 시리즈를 시작했다.[379]

미국 영화 제작자 존 벡 호프만은 저격 사건에 대한 영화 Maidan Massacre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시에나 국제 영화제에서 초연되어 관객상을 수상했다.[380]

2014년에 벨라루스-우크라이나 영화 제작자 세르게이 로즈니차는 다큐멘터리 영화 마이단을 개봉했다. 이 영화는 2013년과 2014년 혁명 기간 동안 로즈니차의 지시를 받은 여러 카메라맨이 촬영했으며, 평화로운 집회부터 경찰과 시위대 간의 유혈 충돌까지 다양한 측면을 묘사한다.[381]

2015년 넷플릭스는 유로마이단 시위에 관한 다큐멘터리 윈터 온 파이어: 우크라이나의 자유 투쟁을 공개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시위 시작부터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사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2015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그롤시 피플스 초이스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했다.[382]

2016년 다큐멘터리 우크라이나 온 파이어타오르미나 필름 페스트에서 초연되었다.[383] 이 영화의 핵심 주제는 2014년 2월 야누코비치의 망명을 초래한 사건이 미국이 주도한 쿠데타였다는 것이다.[384]

더 롱 브레이크업은 2020년 동부 오레곤 영화제에서 초연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복잡한 관계를 다룬 이 장기 다큐멘터리는 유로마이단과 오렌지 혁명, 그리고 크림 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385]

마이단의 시각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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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 "아티스트-파이터"

시위는 마이단에서의 일상생활과 상징적인 순간을 기록한 수많은 사진작가들을 끌어모았다.[386][387][388][389] 마이단 시위는 또한 일러스트레이터 사샤 고디아예바[390]와 화가 테모 스비렐리를 포함한 시각 예술가들의 지지를 받았다.[391]

연극

많은 우크라이나 극작가와 감독이 자국에서의 기회 부족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동안 러시아에서 훈련하고 일했지만, 나탈리아 보로즈빗(Natalia Vorozhbit)과 막심 키로치킨(Maksim Kyrochkin)과 같은 점점 더 많은 수가 유로마이단 이후 우크라이나로 돌아와 새로이 떠오르는 활기찬 신극 분야, 즉 우크라이나 신극에 기여하기로 결정했다.[392] 또한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어로 글을 쓰는 경향이 뚜렷해졌는데, 2014년 이전에는 일부 이중 언어 구사 우크라이나 극작가가 더 많은 관객층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사용했었다. 보로즈빗은 유로마이단에 관한 매우 중요한 희곡인 "마이단 일기(The Maidan Diaries)"를 썼고, 이 희곡은 프란코 국립극장(우크라이나의 두 국립극장 중 하나이며, 프란코는 우크라이나어 국립극장이다)에서 개막했다.[392]

스포츠

2014년 2월 20일 2013-14년 UEFA 유로파리그 32강전 FC 디나모 키이우발렌시아 CF의 경기는 "우크라이나 수도의 안보 상황"으로 인해 유럽 축구 연맹에 의해 키이우올림피스키 국립 스포츠 단지에서 키프로스 니코시아GSP 스타디움으로 옮겨졌다.[393][394]

2월 19일, 2014년 동계 올림픽에 참가 중이던 우크라이나인 선수는 키이우에서 발생한 폭력 충돌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검은 완장을 착용할 수 있도록 국제 올림픽 위원회 (IOC)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395]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395]

2014년 2월 19일, 알파인 스키 선수 보흐다나 마초츠카키이우에서 발생한 폭력 충돌에 항의하며 2014년 동계 올림픽 출전을 포기했다.[396]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는 페이스북에 "마이단의 바리케이드에서 싸우는 전사와 연대하고, 시위자에 대한 범죄 행위, 대통령과 그의 꼭두각시 정부의 무책임에 항의하여, 우리는 2014년 소치 올림픽 출전을 거부한다"는 메시지를 게시했다.[396]

2014년 3월 4일, 2013-14년 유로컵 농구 16강전 BC 부디벨니크 키이우JSF 낭테르의 경기는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잘기리스 아레나로 옮겨졌다. 2014년 3월 5일, 또 다른 16강전 히미크 유즈니아이콘 TED 앙카라의 경기는 이스탄불아브디 이펙치 아레나로 옮겨졌다.[397]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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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유로마이단을 기념하는 동전.

2014년 10월 중순,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은 11월 21일(유로마이단은 2013년 11월 21일에 시작되었다)이 "존엄과 자유의 날"로 기념될 것이라고 밝혔다.[163]

2019년 2월 기준 우크라이나 정부는 현재 천백 명의 거리로도 알려진 인스티투츠카 거리의 길이를 따라 새로운 마이단 기념비를 착공했다.[398]

2022년 1월 10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2022년 카자흐스탄 시위의 시위자가 "마이단 기술"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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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건과 상징

시위대 사이에서 흔히 외쳐지던 구호는 “슬라바 우크라이니! 히어로암 슬라바!”였다.("영광스러운 우크라이나, 영웅들에게 영광을!"이란 뜻)[400] 이 구호는 우크라이나인을 넘어 크림 타타르인러시아인도 사용했다.[400][401]

붉은색과 검은색의 전투기우크라이나 반란군 (UPA)의 또 다른 인기 있는 상징이며, 전시 반란군은 유로마이단 시위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402] 빅토리아 대학교의 세르히 예켈치크(Serhy Yekelchyk)는 UPA 이미지와 슬로건의 사용이 반군 자체에 대한 찬양이라기보다는 현 정부와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상징이었다고 설명하며, "키이우에서 [UPA 상징주의]가 갑자기 부각된 이유는 그것이 현 정부의 친러시아적 성향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의 표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403] 깃발의 색깔은 우크라이나의 검은 흙에 흘린 붉은 피를 상징한다.[404]

반응

2014년 2월 24일 국영 러시아 여론 조사 센터가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 러시아 응답자의 15%만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당국이 전복된 것에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405]

법적 심리 및 수사

요약
관점

유로마이단에 대한 조사는 11월 30일 밤 학생 시위가 처음 해산된 후 2013년 12월부터 계속되었다. 2013년 12월 13일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는 세 명의 고위 관료가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고 발표했다.[406][407]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실은 12월 13일에 올렉산드르 포포우 키이우 시 국가 행정부 의장을, 12월 16일에 안드리 클류예우 안보위원회 비서관을 심문했다.[408] 진행 중인 수사에 대한 발표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우추크가 주도한 소위 "원탁 회담"에서 공개되었다.[409] 12월 14일, 시브코비치와 포포우는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공식적으로 일시 해임되었다.[410]

12월 17일, 검찰총장은 활동가 루슬라나를 심문했고, 그녀는 포포프 외에 시브코비치, 코랴크, 페드축도 재판 전 조사를 받고 있다고 알렸다.[411] 의회 야당의 요청에 따라 빅토르 프숑카 검찰총장은 최고 라다 (우크라이나 의회)에서 11월 30일 시위대 해산에 관한 수사 보고서를 낭독했다.[412] 보고서에서 검찰총장은 공공 질서 경찰 "베르쿠트" 대원이 시위대의 도발 이후 "과도한 무력을 사용했다"고 인정했다. 프숑카는 또한 아직 누가 정확히 무력 사용을 명령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언급했다.[413] 검찰총장의 보고서에 따라 의회 야당은 키이우 평화 시위에 대한 법 집행 기관의 행동과 관련하여 임시 조사 위원회 설립에 대한 성명을 등록했다.[414]

이전에 2013년 12월 8일 우크라이나 보안국은 우크라이나에서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행동에 대한 별도의 조사를 시작했다.[415] 2013년 12월 1일 유로마이단 봉기 상황에서 검찰총장은 정부 전복 요구에 급진 단체 구성원이 관련되어 있다고 밝혔다.[416] 반코바 거리 사건 동안 우크라이나 경찰은 9명을 체포했으며 며칠 후 내무부는 드미트로 코르친스키를 참조하는 우크라이나 조직 브라츠트보가 소요 사태 선동에 관여했다고 간주했지만 체포된 사람 중 아무도 해당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었다고 발표했다.[417][418]

우크라이나 언론은 법의학 조사 결과를 보도했는데, 이에 따르면 마이단 시위자들의 시체에서 추출된 탄환과 정부 경찰 베르쿠트의 무기에서 일치하는 탄환이 발견됨에 따라 정부 경찰 베르쿠트가 마이단 시위자 살해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졌다.[419][420][421][422][423][424] 전문가들은 2015년 1월에 실시된 탄환 검사 결과 탄환과 베르쿠트 특수 부대에 배정된 무기 사이에 일치하는 부분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같은 해 12월에 실시된 검사에서는 그러한 일치하는 부분이 발견된 이유를 설명했다.[42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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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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