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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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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훈(張鍾熏, 1968년 4월 10일 ~ )은 전 KBO 리그 한화 이글스내야수이자 현 세광고등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 겸 KBO 총재 특별 보좌 및 전력 강화 위원을 맡고 있으며 선수 시절 타격 5관왕을 차지한 한화 이글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그의 등번호 '35'번은 한화 이글스 최초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으며 2011년 KBO 리그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1루수 부문에 선정됐다.

간략 정보 기본 정보, 선수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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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아마추어 시절

청주용담초등학교 시절에 유도를 하다가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이후 세광중을 거쳐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세광고 시절에 고교 야구를 평정했다.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 시절

세광고를 졸업하고 당초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입학 조건이 장학금이 아니라 300만원의 기부금이었고, 당시 그에겐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는 부친의 권유로 1986년에 연봉 300만원의 조건으로 신고선수이자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배성서와 코치였던 이재환의 적극적인 권유로 1년 후 1987년 4월 14일 해태전에 출전하며 데뷔 첫 경기를 치렀다. 1990년 시즌 28홈런, 1991년 시즌 35홈런, 1992년 시즌 41홈런을 쳐내며 3년 연속 홈런왕을 기록했고, KBO 리그 사상 첫 40홈런 시대를 열었다. 이 기록은 1998년타이론 우즈가 42홈런으로 경신하기 전까지 KBO 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이었다. 또한 1991년 시즌에는 21도루를 기록해 20-20 클럽에 가입했으며, KBO 리그 사상 첫 세 자릿수 타점-세 자릿수 득점, 시즌 3할-30홈런-세 자릿수 타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 연속 홈런왕, 타점왕, 장타율 1위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1991년1992년 시즌에 2년 연속 정규 시즌 MVP로 선정됐으며, 골든글러브를 5회 수상했다. 1993년부터 부상으로 인해 하향세였으나 1995년에 반등에 성공했고,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다. 2000년대 들어서 성적 하락으로 인해 2005년에 7경기에만 출전했고, 2005년 9월 15일에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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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 은퇴 후

은퇴 후 이듬해부터 한화 이글스의 타격코치로 활동했고, 2012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은 후 한화 이글스에 복귀했다. 그러나 화려했던 선수 시절에 비해 한화 이글스의 지도자로서의 생활은 아쉬움을 남겼다. 일부 한화 이글스 팬들에게 부진한 팀 타격을 이유로 '철밥통'이라도 비난을 받았다. 결국 2014년 시즌 후 한화 이글스와 계약을 해지하고 팀을 떠났다. 시즌을 준비하며 이종운을 감독으로 선임한 롯데 자이언츠는 그를 롯데 자이언츠의 타격코치로 선임했다. 그는 2015년 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타격을 다시 살리기 위해선 “강민호 살리기가 최우선 과제”라며 지난 2년간 부진했던 강민호의 부활에 매진할 것을 천명했다. 강민호는 2015년 시즌 35홈런, 3할대 타율(380타수 118안타), 86타점 등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노력에 화답하며 다시 부활했다. 또한 그는 2015년 시즌 자신의 거포 본능을 롯데 자이언츠 타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이식하며 2014년 시즌 팀 홈런 121개로 9개 구단 중 6위에 머물렀던 팀 홈런 성적을 2015년 시즌 177홈런으로 끌어올렸다. 팀 홈런 부문 10개 구단 중 넥센 히어로즈(203홈런)에 이은 리그 2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2015년에 조아제약 프로코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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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비아

  • 1989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저질러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한 데다 시즌 후 김진욱과의 트레이드설이 있었지만 강병철, 노진호 사장의 반대로 팀에 남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배트 스피드가 갈수록 떨어진 데다 방망이가 뒤에서 돌아나와 강속구 대처가 잘 안 됐다.

이 탓인지 팀에서도 분위기 쇄신과 체질 변화를 위해 트레이드를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1999년에 감독으로 부임한 이희수가 그만 가지곤 안 된다고 판단해 로마이어를 영입했으며 1989년 시즌 후 그와 김진욱의 맞트레이드설 당시 이희수의 뒤를 이어 2001년에 감독으로 부임한 이광환도 그의 비중을 줄이려고 했다. 더군다나, 2003년에 부임한 유승안은 아예 그를 대놓고 배제하려 했지만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 감독 재임 기간 동안 노장 선수들을 지나치게 외면한 탓인지 많은 팬들의 반발을 사 재계약에 실패했다.

출신 학교

수상·타이틀 경력

  • 1990년 최다 타점 신기록(91타점)
  • 1991년 홈런 신기록(35홈런), 최다 안타 신기록(160안타), 최초 세 자릿수 타점(114타점), 세 자릿수 득점(104득점) 돌파, 20-20클럽 달성, 전 구장 상대 홈런
  • 1992년 최초 단일 시즌 40홈런 이상 기록, 최다 타점 신기록(119타점), 최다 득점 신기록(106득점)
  • 1995년 제 2회 한일 슈퍼 게임(일본)
  • 2011년 KBO 리그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1루수)

에피소드

  • 1999년 7월 10일 쌍방울전에서 그가 투수 김원형의 공을 타격해 김원형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 김원형은 그 자리에 쓰러졌고, 공은 옆으로 흘렀다. 그는 1루가 아니라 김원형이 쓰러져 있는 마운드로 달려가 아웃됐다. 그 후로 김원형은 마운드에 있을 때 그가 타석에 들어서면 항상 모자를 벗어서 경의를 표했다.

주요 기록

자세한 정보 기록, 날짜 ...

1991년

기록 소속 팀 기간 총타점 주석 및 기타
11경기 연속 타점 빙그레 1991. 7. 21 - 8. 6 22
  • 11월 10일: 한·일 슈퍼게임 5차전 나가라가와 구장 개장(1991년 4월 1일 개장) 이래 첫 장외 홈런(비거리 160M) / 기념비 건립

1999년

  • 4월 22일: 청주 쌍방울전, 최다 득점 (769), 최다 루타 신기록 (2287)
  • 5월 23일: 광주 해태전, 최다 홈런 신기록 (253개 / 기존, 삼성 이만수, 252개)
  • 5월 31일: 대전 두산전, DH1 최다 2루타 신기록 (248개 / 기존, 해태 김성한 247개)
  • 6월 6일: 인천 현대전, 최다 타점 신기록 (862)

2000년

  • 4월 6일: 대전 현대전, 최다 안타 신기록 (1390)
  • 4월 18일: 1400안타
  • 4월 21일: 최다 타수 신기록 (4866)
  • 5월 23일: 청주 삼성전, 13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1988년 이후, 프로 통산 첫 번째)
  • 8월 2일: 대전 LG전, 900득점 (프로 통산 첫 번째)

2001년

  • 6월 16일: 인천 SK전, 14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 9월 22일: 대구 삼성전, 1,600안타 (프로 통산 첫 번째)

2002년

  • 4월 20일: 수원 현대전, 300 2루타 (프로 통산 첫 번째)
  • 9월 22일: 대전 현대전, 15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프로 통산 첫 번째), 16년 연속 세 자릿수 루타 (프로 통산 첫 번째)

2003년

  • 4월 19일: 대전 롯데전, 개인 통산 1,800경기 출장 (프로 통산 첫 번째)
  • 5월 1일: 대전 기아전, 개인 통산 1,100타점 (프로 통산 첫 번째)
  • 5월 3일: 대전 SK전, 개인 통산 1,700안타 (프로 통산 첫 번째)
  • 5월 5일: 대전 SK전, 개인 통산 330홈런 (프로 통산 첫 번째)
  • 5월 10일: 대전 현대전, 개인 통산 6,000타수 (프로 통산 첫 번째)

2004년

  • 6월 9일: 부산 롯데전, 개인 통산 1900경기 출장 (프로 통산 첫 번째)

2005년

  • 4월 6일 대전 두산전, 9회말 대타 홈런 (개인 통산 340홈런, 1771안타)
  • 9월 15일 대전 KIA전, 은퇴 경기 (2타수 무안타 1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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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통산 기록

자세한 정보 연도, 소 속 ...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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