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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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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군(太原郡)은 중국 전국 시대 진나라에서부터 당나라까지 존속한 군이다. 군국제 시행 시에는 한국(韓國), 태원국(太原國), 대국(代國)이기도 했다. 현재의 타이위안시를 중심으로 하면서 뤼량시·진중시 일대도 관할했다.
진
요약
관점
장양왕 3년(기원전 247년), 몽오가 조나라를 쳐 빼앗은 37성으로 처음 설치했다.[1] 치소는 진양현(지금의 타이위안시 남서)다. 유물과 문헌으로 확인되는 속현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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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요약
관점
고제 4년(기원전 204년) 조나라가 한나라에 망했을 때 조나라의 태부 진여가 왕을 겸하는 대나라 땅을 태원군으로 삼았다.[3] 고제 6년(기원전 201년), 이 군의 서른한 현을 모두 한(韓)나라의 봉토로 삼고 진양을 서울로 삼았다. 한왕 신이 흉노에 투항하면서 한나라는 폐지됐는데, 고제 11년(기원전 196년)에 진희와 한왕 신의 난이 평정되고 대나라를 복국하면서 태원군을 대나라에 보태었다.[4] 대나라 왕 유항이 황제(문제)로 즉위하면서 대나라를 갈라 태원나라를 만들면서 태원군은 태원나라의 봉토가 됐다. 얼마 못 가 태원나라를 폐하면서 다시 대나라의 관할을 받았다. 대나라에 속한 시절 대부분 태원군에 대나라의 서울이 있었기에 태원군이 대나라의 내사지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는 대상·대내사와 대군태수가 별도로 존재하게 된다.
대왕 유의를 청하왕으로 옮기고 대나라를 폐하면서 전한의 관할로 들어갔다.[5] 원정 4년(기원전 113년) 이후 서하군을 설치하면서 서하군에 태원군의 일부 현을 양도했다.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6만 9863호, 68만 488명을 관할했다.[6] 무제가 주를 설치하면서 병주자사부에 속했다. 철관을 진양현에 두었다. 가마관(家馬官)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 지리지를 따른 것으로 원연·수화 지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21현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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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후한, 위진
16성 30,902호 200,124명을 거느렸다.[8] 210년(후한 헌제 건안 15년)경 상요(商曜)일당이 본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가 하후연, 서황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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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13현 14,000호를 거느렸다. 304년(서진 혜제 영안 원년), 동영공 사마등이 도주하기전까지 동영공 사마등이 관할하고 있었고, 이후 병주자사 유곤이 서하군, 평양군일대를 기반으로 거병한 유연에게 저항했으나 유곤이 몰락한 이후 유연의 전조에 점령되었다.[9][10]
위
요약
관점
396년(북위 도무제 황시 원년) 탁발규가 후연을 공격하면서 병주가 수복될 때 같이 수복되었다. 10현 45,006호 207,578명을 거느렸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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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수
요약
관점
북제때 병주가 폐지되고 별궁(別宮)이 설치되었으나 북주때 병주 6부가 설치되었고 후에 총관부가 설치되면서 6부가 모두 폐지되었다. 582년(수 문제 개황 2년) 하북도행태(河北道行台)가 설치되었고 589년(수 문제 개황 9년) 총관부로 바뀌었다. 대업초기 부가 폐지되었고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태원군이 재설치되었다. 15현 175,003호를 거느렸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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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태수
진
- 영호범(令狐范)[13]
전한
대상
- 이채 (기원전 124년 당시)
태원태수
후한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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