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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바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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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바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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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레데리크 바지유(프랑스어: Jean Frédéric Bazille, 1841년 12월 6일 ~ 1870년 11월 28일)는 인물 묘사로 잘 알려진 프랑스인상주의 화가이다. 바지유의 주요 작품 중 다수는 야외 풍경 속에 인물을 배치한 인물화이다.[1]

간략 정보 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 Bazille, 신상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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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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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유의 작업실, 1870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바지유는 이젤 옆에서 팔레트를 들고 있으며, 이젤 앞의 붉은 수염 인물은 에두아르 마네이다. 기타 여러 친구들이 그려져 있다.[2]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랑그도크루시용 지방의 에로주에 위치한 몽펠리에에서 부유한 와인 상인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바지유는 그의 가족이 소유한 몽펠리에 근처 카스텔노르레즈의 와인 생산지인 르 도멘 드 메리크에서 자랐다.[3] 그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들을 본 뒤 그림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의학을 공부할 것을 전제로 그림을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다.[1]

바지유는 1859년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1862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이사하였다. 여기서 그는 인상주의 화가가 되는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알프레드 시슬레를 만났고, 인상주의 회화에 매료되어 샤를 글레르의 스튜디오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1864년 의학 시험에 불합격한 뒤 바지유는 전업화가가 되었다. 그의 친한 친구들 중에는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그리고 에두아르 마네 등이 있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바지유는 그의 작업실 내부의 공간이나 그림에 필요한 재료 등을 제공해 주면서 이 예술가들을 지원해 주었다.[1]

바지유는 〈분홍 드레스〉를 포함하여 여러 유명한 그림들을 그렸을 때 불과 23세였다. 이 그림은 바지유의 사촌인 테레즈 데 우르의 뒷모습과 햇살 가득한 풍경을 결합한 초상화 같은 묘사이다.[4]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가족의 재회〉(1867년–1868년, 오르세 미술관)이다.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후인 1870년 8월에 주아브병 연대에 입대했다. 그해 11월 28일, 그는 본라롤랑드 전투에서 지휘관이 부상을 입자, 지휘권을 맡아 독일 진지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다. 이 공격에 실패하여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전장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며칠 후 전장으로 가서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일주일 후 몽펠리에 개신교 묘지에 묻었다.[5][6]

개인 생활

바지유는 "어떤 여자와의 첫 실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에드몽 메트르와 같은 남성들과 친밀한 우정을 쌓았지만, 우울증을 앓았고 "벌거벗은 남성들을 그릴 때 끊임없이 편두통을 앓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그의 그림에 나타난 동성애적 취향은 바지유가 게이였고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갈등을 겪었을 수 있다는 현대적인 제안으로 이어졌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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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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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같이 보기

내용주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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