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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뇰의 작업실
앙리 팡탱라투르의 그림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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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뇰의 작업실》(프랑스어: Un Atelier aux Batignolles, 영어: A Studio at Les Batignolles)은 앙리 팡탱라투르가 1870년에 그린 유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티뇰 지구에 있는 에두아르 마네의 작업실에 모인 바티뇰 그룹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1870년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다.
《바티뇰의 작업실》은 팡탱라투르가 6년 전에 그린 《들라크루아에게 바치는 경의》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이 작품은, 1년 전에 사망한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를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두 그림은 모두 화가들 간의 우정과 당파성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전 작품과 달리 《바티뇰의 작업실》의 주요 인물은 에두아르 마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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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바티뇰 그룹


바티뇰 지구는 여러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차리고 예술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파리의 한 지역이었다.[2] 비평가 에드몽 뒤랑티가 1869년 살롱 평론에서 "에콜 데 바티뇰"이라고도 불렀던 바티뇰 그룹은 이 지역의 클리시 광장 북쪽에 있는 유명한 카페 게르부아에서 마네와 함께 모였던 예술가들 모임이다.[3] 이들의 우정은 상호 물질적 지원과 공동 작업을 기반으로 했다.[3]
팡탱라투르의 이 작품은 바티뇰 그룹의 예술가적 동지애와 공동체를 잘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팡탱라투르는 이들이 단일한 "화파"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느슨한 예술적 유대와 연합의 네트워크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같은 해 바지유가 그린 또 다른 그림인 《바지유의 작업실》도 바지유의 작업실에 모인 인상주의 화가들을 묘사하며, 두 그림 모두 이 그룹의 시각적 선언문 역할을 한다.[3]
팡탱라투르

팡탱라투르는 평생 동안 바티뇰 그룹의 여러 구성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중 일부는 1857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난 마네와 같이 학창 시절에 만났고,[4] 친구를 통해 소개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1861년 귀스타브 쿠르베의 제자가 되었고,[5] 1862년에는 샤를 글레르의 작업실에서 르누아르, 모네, 바지유를 알게 되었다.[4] 인상주의 화가들과의 관계는 친밀했으며, 1863년 낙선전에서 그들과 함께 전시하기도 했다.[5] 그러나 이것이 그가 이들과 함께 전시한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는 1874년 나다르의 작업실에서 열린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를 비롯한 다른 전시회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예술가들과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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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
요약
관점
이 그림은 에두아르 마네가 올랭피아 스캔들 당시 그를 변호했던, 유명한 예술가, 비평가이자 마네의 절친한 친구인 자카리 아스트뤼크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2] 두 남자 뒤에는 왼쪽부터 독일 화가 오토 숄더러, 오귀스트 르누아르, 작가 에밀 졸라 (안경을 손에 든 수염 난 인물), 에드몽 메트르 (예술가들의 후원자), 제일 키가 큰 프레데리크 바지유, 그리고 다른 인물들 뒤에 다소 가려져 있는 클로드 모네가 서 있다.[2] 팡탱라투르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마네 주변의 주요 인물들을 신중하게 선택했는데, 특히 프랑스 미술에 특히 영향력 있다고 생각한 인물들을 선택했다.[2] 이 그림은 그들이 예술적 문제에 대한 의견과 신념을 교환하고 있음을 시사하며, 예술가들 간의 유대감을 더욱 강조한다.[4]
이 작품의 구성은 팡탱라투르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 마네가 방의 중앙에 위치하고 다른 인물들의 공손한 자세는, 마네가 바티뇰 그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도는 빈 액자 앞에 있는 르누아르가 마네를 강렬하게 응시하고, 마네의 얼굴이 강렬한 조명을 받는 모습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나머지 방문객들은 그림의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졸라는 마네와 등을 돌린 채 그의 통역자이자 중재자 역할을 맡고 있다.[3] 메트르, 르누아르, 숄더러는 예술가들 간의 상호 연결성을 나타낸다. 모네가 맨 오른쪽에 위치한 것은 참석한 화가들이 공유한 예술 화파의 응집력이 취약함을 드러내 강조한다.[4]
그림의 왼쪽에는 팡탱라투르가 아테나 여신상, 일본풍 도자기 화분, 그리고 화려한 빨간색 천 위에 다채로운 옻칠 쟁반가 정돈된 모습을 묘사했다.[6] 그 위로는 초상화의 일부가 보인다. 이 물건들은 팡탱라투르와 그 주변 인물들의 미적 취향을 보여준다. 조각상은 고대 전통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나타내며, 항아리 디자인은 일본풍이지만 사실은 프랑스 예술가 로랑 부비에가 제작한 것으로, 부비에는 카페 게르부아 그룹의 전 멤버이자 팡탱라투르와 마네 모두의 친구였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옻칠 쟁반은 자포니즘적인 물건으로 보이며, 인상주의 화가들이 일본 미술에 매료되었음을 시사한다.[6]
팡탱라투르가 선택한 구성, 붓놀림 양식, 그리고 어두운 색조는 전통적인 플랑드르에서 유행했던 단체 초상화와 17세기 프랑스 사실주의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룹이 나중에 구현할 인상주의와는 차이를 보인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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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및 제작
팡탱라투르는 이 작품으로 첫 번째 주요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정 인물이나 행동이 아닌 묘사된 공간을 강조하는 제목을 가진 그의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6] 또한, 이 작품은 그가 자신을 그리지 않은 첫 번째 단체 초상화이다.
작품 제작에 앞서 팡탱라투르는 목탄, 종이 위 흑연, 유화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5년 이상 수많은 예비 스케치와 습작을 제작하였다. 이 스케치들에서 팡탱라투르는 여러 각도, 주제, 액세서리, 제스처, 의도, 분위기를 탐구했다. 1865년 10월 29일 스케치와 같은 일부 스케치들은, "열광적인 상태"에 포착된 활기차고 소란스러운 시나리오를 보여준다. 후기 드로잉에서는 보다 편안하고 비공식적이며 개인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개념이 개발되었다.[6] 그러나 최종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그룹 초상화를 연상시키는 엄숙하고 진지한 그룹을 보여주는데,[3] 이는 그가 쿠르베 밑에서 견습생 생활을 하면서 물려받은 특성일 가능성이 높다. 네덜란드 거장들에 대한 그의 헌신의 영향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조용하고 평온한 구성, 소박한 단순한 실내 장면에 대한 사랑, 그리고 특히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명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에서 나타난다.[7]

최종 작품은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구상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1869-70년 파리 미술계의 변화에도 일치한다.[2] 스케치와 최종 작품 사이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부분은 마네의 이젤 바로 왼쪽부분이다. 목탄 예비 스케치에는 중절모를 쓴 인물이 왼쪽에서 들어오고 있는데, 아마도 늦게 온 사람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인물이 에드가르 드가라고 추정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2] 이후의 유화 스케치에서는 익명의 인물과 함께 수수께끼의 여인이 수첩에 스케치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은 결국 최종 작품에서 삭제되고 아테나 여신상, 일본풍 석기 화병, 장식 쟁반으로 대체되었다.[2]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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