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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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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만(黃在萬, 1953년 1월 24일 ~ 2010년 5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며, 포지션은 왼쪽 풀백 및 미드필더였다. 선수 시절 롱스로인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으며,[1] 강력한 킥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슛으로 여러 차례 득점을 만들기도 했다.[2] 또한 강력한 대인마크를 이용한 단단한 수비력을 선보였으며, 황혼기 이후로는 클럽과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으며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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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요약
관점
클럽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오목천리(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오목천동) 출신으로[3][4] 수원북중학교, 중동중학교, 중동고등학교를 거쳤으며,[5] 197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다.[6] 이후 1974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여러 차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팀의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고,[7][8][9] 활약을 인정받아 대회 감투상을 수상하였다.[10] 그 뒤 1975년 한국신탁은행 축구단에 입단하였고,[11] 1976년 팀이 서울은행 축구단과 합병해 서울신탁은행 축구단으로 개편된 이후 팀의 원년 멤버가 되었다.[12] 또한 당초에는 1975년 육군 축구단에 입대할 예정이었으나,[13] 예정이 변경되어 1976년 공군 축구단에 입대하게 되었다.[14]
이후 1978년 세미프로 팀으로 창단 준비 중이던 현대 축구단으로의 이적설이 나왔으나 무산되었으며,[15] 1979년 군실업 올스타의 일원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16] 또한 같은 해 열린 고연 OB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17][18] 그 해 공군에서 제대해 서울신탁은행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1980년 새로 창단 준비중인 할렐루야 축구단에 입단하기로 합의했으며,[19] 1979년 9월 23일 할렐루야의 일원으로 브라질의 비토리아 FC와의 자선 경기에 출전해 팀의 3-0 승리에 일조하였다.[20] 이후 1980년 할렐루야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자선경기에 나섰고, 패널티킥 기회를 얻었으나 실축해 팀의 0-2 패배를 막지 못했다.[21]
그 뒤 북미 사커 리그로의 이적설이 제기되었으나 실제 이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22] 1980년 12월 20일 할렐루야 축구단이 정식으로 창단하자 원년 멤버로 합류하였다.[23][24] 이후 1981년 3월 28일 아메리카누 FC와 창단 첫 데뷔전에서 활약하며 팀의 2-1 승리에 기여했으며,[25] 1982년 4월 22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 뛰었으나 팀은 1-2로 패배했다.[26][27] 그 뒤 팀의 주장이던 이영무가 팀을 무단으로 이탈하자 그 뒤를 이어서 주장을 이어받았으며,[28] 6월 6일 오페라리우 FC와의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경기에서 후반 종료 직전 롱스로인으로 오석재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극적인 무승부를 이루었다.[29] 대회 4강에서 다시 한 번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 맞붙었으나 또다시 1-2로 패해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으며,[30][31] 그 해 11월 4일 팀의 트레이너로 보직을 변경하였다.[32]
이후 1983년 수퍼리그가 창설되자 할렐루야도 참가하였으나 선수 부족 문제로 인해 당시 코치였던 황재만이 후보 선수로 등록되었고,[33] 그 해 11월 열린 올스타전에서 프로팀 코치를 맡았다.[34] 1984년에도 마찬가지로 팀의 부상자가 늘어남에 따라 코치 신분임에도 후보 선수로 등록되었고,[35] 시즌 도중 1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36]
국가대표팀
1971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37]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팀의 마지막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38] 이후 1972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다시 출전했으며,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2회 연속 준우승에 기여하였다.[39][40]
그 뒤 1972년 AFC 아시안컵에도 선발되었으며,[41] 5월 7일 이라크와의 그룹 결정전에 출전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했으나, 황재만은 승부차기에서 실축하였고 팀은 승부차기 결과 2-4로 패배하였다.[42] 하지만 결승까지 주전 선수로 활약해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으며,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도 선발되어 핵심 선수로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우승에 공헌하였다.[43] 또한 같은 해 열린 제1회 한일 정기전 및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도 참가했으나,[44][45] 두 대회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국가대표팀 또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46][47]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친선경기에서 다시 기회를 얻었으며,[48] 킹스컵에도 출전해 대표팀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49][50] 이러한 활약으로 1972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51]
이후 1973년 6월 개최된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당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52] 좋지 못한 활약을 보였고 국가대표팀 또한 우승에 실패하였다.[53] 결국 그 해 7월 국가대표팀 선수단 개편으로 국가대표팀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었고,[54] 한동안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 뒤 1974년 아시안 게임 및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를 대비해 소집된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으며,[55] 자체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최종 명단에 합류해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였다.[56][57] 같은 해 열린 미들섹스 원더러스 AFC와의 평가전에서 차범근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58] 쿠웨이트와의 아시안 게임 조별 라운드 3차전에 출전해 부진한 활약으로 팀의 대패에 일부분을 담당하며 추가적인 기회를 얻지 못했다.[59] 얼마 뒤 열린 제3회 한일 정기전에는 고연전 출전으로 불참하였다.[60] 같은 해 개최된 킹스컵에 참가하였고,[61] 말레이시아와의 준결승전에서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고 태국과의 결승전에서 롱스로인으로 팀의 결승골에 관여해 팀의 2연속 우승에 기여하였다.[62][63] 국가대표팀 및 소속팀에서의 활약으로 1974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재차 선정되었다.[64]
이후 1975년에는 1976년 AFC 아시안컵 예선에 출전할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으며,[65] 베트남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66] 같은 해 열린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과의 2차 평가전에서 팀의 동점골에 관여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고,[67] 3번에 걸친 평가전 이후 좋은 평가를 받았다.[68] 그 해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연달아 참가하며 국가대표팀의 2개 대회 우승을 견인했으며,[69][70]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우승 이후 다른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여받았다.[71] 또한 킹스컵 및 1976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도 출전했으며,[72] 킹스컵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팀의 우승에 일조했다.[73] 이러한 활약으로 1975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통산 3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74]
그 뒤 1976년 호마 FC와의 평가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으며,[75] 이어 개최된 육군 축구단과의 평가전에서도 선제골을 득점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76] 하지만 이 경기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고,[77] 직후 열린 중화 타이베이와의 1976년 하계 올림픽 예선 경기에 불참하였다.[78] 같은 해 있었던 맨체스터 시티 FC와의 2차 평가전에 출전했으며,[79] 직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였다.[80] 또한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에 화랑팀 소속으로 포함되었고,[81] 인도와의 경기에서 이영무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대회 우승에 공헌하였다.[82] 그 해 열린 제5회 한일 정기전에 나와 결승골을 득점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며,[83][84] 킹스컵에도 출전해 싱가포르와의 경기에서 팀의 결승골에 관여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국가대표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85] 이러한 활약으로 1976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통산 4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86]
이후 1977년에는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포함되었으며,[87] 이스라엘과의 홈 & 원정 1라운드 경기에서 안정적인 활약을 선보였다.[88][89] 또한 일본과의 홈 & 원정 1라운드 경기 및 이란과의 최종 예선 홈 경기 등에 출전했으나,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했고 팀도 패했다.[90][91] 곧이어 열린 쿠웨이트와의 홈 경기에서도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으며,[92] 부상이 완치된 뒤 이란과의 원정 경기에 출전했으나 수비 상황에서 오심 논란에 휘말리며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93]
그 뒤 1978년에는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해 국가대표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며,[94]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에도 출전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준결승 이후부터는 출전하지 못했다.[95] 또한 스포르팅 크리스탈과의 평가전에 나와 패널티킥 선제골을 득점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며,[96] 1978년 아시안 게임 최종 명단에 포함되어 국가대표팀의 우승을 이끌었다.[97] 이러한 활약으로 1978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통산 5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98]
이후 1979년 제7회 한일 정기전에 출전했으나, 팀은 1-2로 패했다.[99] 얼마 뒤 발표된 국가대표팀 예비명단에 포함되었으나,[100] 스포르팅 크리스탈과의 평가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국가대표 B팀으로 이동하였다.[101][102] 이후에는 국가대표 B팀에서 활동하며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주장으로 참가하였고,[103][104] 대표팀의 공동 우승에 일조하였다.[105] 또한 멕시코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에 나섰고,[106][107]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김익형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팀은 결선 진출에 실패하였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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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경력
1984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할렐루야 축구단의 코치로 활동했으며, 1988년 팀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을 견인하였다.[109] 이후 팀의 감독이 되어 1991년 팀의 전국체육대회 및 군-실업 축구대회 2관왕을 달성했으며, 군-실업 축구대회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110] 그 뒤 1992년 팀의 군-실업 축구대회 2연패를 이끌었으며, 다시 한 번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111] 이후 1993년 한국실업축구연맹의 이사로 선임되었고,[112] 같은 해 팀에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대회 우승을 안겼으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113]
그 뒤 1993년 신현호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주었으며, 황재만 본인은 총감독이 되었다.[114] 이후 1998년 외환 위기로 인해 팀이 해체되자 축구계를 떠났으며, 2004년부터 한국 휠체어 럭비 협회의 회장을 맡았다.[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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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및 사망
1986년 멕시코에 다녀온 이후 신경계통 질환인 척수염을 앓았으며,[116] 이후에는 지도자 생활과 병행하며 서울특별시 신촌동의 세브란스병원에서 재활에 매진하였다. 2000년 고려대학교 고우체육회 주최로 열린 '2000 고대 체육인의 날'에서 황재만을 위해 모금 운동을 벌였으며,[117] 2006년 중동중학교 및 중동고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이해 총동문회에서 황재만에게 '의지의 중동인상'을 수여하였다.[118] 또한 2008년에는 조동현, 박병철 등 197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축구 선수들의 모임인 '71 동심회'에서 회비를 모아 성금을 전달하였다.[119]
2010년 7월 28일 척수신경마비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경기도 화성시 병점의 선영에 안장되었다.[120]
기타
1976년 3월 27일 일본과의 197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예선 경기에서 만 23세 65일의 나이로 A매치 50회를 달성해 역대 2위를 기록하였다.[121]
1983년 3월 30일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자와 결혼식을 올렸으며,[122] 차남인 황대균 또한 축구 선수이다.
2003년 베스트일레븐 창간 33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한국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중 '70년대 베스트11'에 포함되었다.[123]
차범근과는 고향이 인접하고 연령이 비슷하며 고려대학교,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공군 축구단,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인연을 쌓았으며, 차범근이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수행할 당시 당시 황재만을 떠올렸다고 밝히기도 했다.[124]
선수 기록
클럽
- 1971년 ~ 1974년: 고려대학교
- 1975년 ~ 1976년: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 1977년 ~ 1979년: 공군 축구단
- 1980년 ~ 1984년: 할렐루야 축구단
국가대표팀
- 1971년
-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 (U-20)
- 1972년
-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 (U-20)
- 1972년 AFC 아시안컵 국가대표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제1회 한일 정기전 국가대표
-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국가대표
- 킹스컵 국가대표
- 1973년
-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국가대표
- 1974년
-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국가대표
- 1974년 아시안 게임 축구 국가대표
- 킹스컵 국가대표
- 1975년
- 1976년 AFC 아시안컵 예선 국가대표
-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국가대표
-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국가대표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제4회 한일 정기전 국가대표
- 킹스컵 국가대표
- 1976년
- 197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예선 국가대표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제5회 한일 정기전 국가대표
- 킹스컵 국가대표
- 1977년
-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국가대표
- 제6회 한일 정기전 국가대표
- 1978년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1978년 아시안 게임 축구 국가대표
- 1980년 AFC 아시안컵 예선 국가대표
- 1979년
- 제7회 한일 정기전 국가대표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B팀)
- 유니버시아드 국가대표 (B팀)
-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98경기 2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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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 득점과 결과 리스트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득점을 먼저 기록
수상 경력
클럽
국가대표팀
-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2회: 1971년, 1972년
- AFC 아시안컵 준우승 1회: 1972년
- 아시안 게임 축구 우승 1회: 1978년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우승 4회: 1972년, 1975년, 1978년, 1979년 (B팀)
-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우승 4회: 1974년, 1975년, 1976년, 1978년
- 킹스컵 우승 2회: 1974년, 1975년
감독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 준우승 1회: 1991년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 우승 1회: 1988년 (코치)
- 전국실업축구연맹전
- 우승 2회: 1990년 추계, 1993년 춘계
- 준우승 5회: 1986년 추계 (코치), 1987년 춘계 (코치), 1991년 춘계, 1992년 춘계, 1993년 추계
- 전국체육대회
- 우승 2회: 1991년, 1993년
- 준우승 1회: 1987년 (코치)
- 군-실업 축구대회
- 우승 2회: 1991년, 1992년
개인
- 1974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감투상
- 1975년 체육훈장 기린장
- 대한축구협회 시상식 베스트 11: 5회 (1972년, 1974년, 1975년, 1976년, 1978년)
- 1991년 군-실업 축구대회 지도자 감독상
- 1992년 군-실업 축구대회 지도자 감독상
- 1993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지도자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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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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