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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2025년 10월 일본 자유민주당에서 총재를 뽑는 투표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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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2025년 10월 4일에 자유민주당의 다음 총재를 선출하기 위해 치러진 선거이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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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자유민주당 총재이자 총리인 이시바 시게루는 자유민주당 내부 갈등과 조기 총선 압력 속에 9월 7일 당 총재와 총리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시바의 사임은 또한 자유민주당이 2024년 총선과 2025년 참의원 선거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어 양원 모두에서 과반수 의석을 잃은 가운데 이루어졌다.[4][5]
이번 선거에는 과거에 모두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다섯 명의 후보가 다시 출마했다. 이번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다음과 같다. 전 경제안보담당대신 다카이치 사나에, 농림수산대신 고이즈미 신지로, 내각관방장관 하야시 요시마사, 전 경제안보담당대신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외무대신 모테기 도시미쓰이다.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사나에는 31.07%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6] 고이즈미 신지로는 27.84%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하여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모두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6] 결선 투표에서 다카이치 사나에는 고이즈미 신지로를 상대로 54.25%의 득표율을 얻어 자유민주당의 첫 여성 총재로 선출되었다. 만약 10월 15일 국회 임시회에서 승인되면 다카이치 사나에는 일본의 첫 여성 총리가 된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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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절차
자유민주당 총재 선출 절차는 '당 총재 선거 규칙'에 명시되어 있다. 선거 후보로 공식적으로 자격을 얻으려면 후보는 자유민주당 국회의원이어야 하며, 최소 20명의 동료 자유민주당 국회의원으로부터 추천을 받아야 한다.
자유민주당은 국회의원과 전국 유료 당원 모두가 참여하는 두 차례의 투표를 통해 당 대표를 선출한다. 1차 투표에서는 295명의 자유민주당 국회의원 전원이 각 1표를 행사하며, 당원 투표(915,574표)는 총 투표의 나머지 절반(또한 295표)과 비례적으로 환산되어 총 590표가 된다. 만약 어떤 후보가 1차 투표에서 과반수(50% 이상, 약 296표)를 얻으면 그 후보가 총재로 선출된다. 어떤 후보도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즉시 결선 투표가 진행된다. 2차 투표에서는 가장 많은 득표율을 얻은 두 후보가 진출하며, 당선자는 295명의 국회의원과 47개의 현별 당 지부에서 결정되며, 각 지부에는 각 1표씩 총 342표가 배정된다. 2차 투표의 승자가 다음 당 총재가 된다.[9]
NHK 뉴스에 따르면, 당원 투표 포함 여부에 따라 총재 선거를 실시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당 규정은 국회의원 투표와 전국 당원의 당원 투표를 조합하여 선거를 치르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는 이전 총재 선거가 실시된 방식이며, 전국적으로 105만 명이 넘는 당원이 투표했다. 그러나 총재가 임기 중 사임하는 '특히 긴급한 경우'에는 국회의원과 47개 현별 당 지부에서 각 3명의 대표가 양원 합동 총회에서 투표하며, 이는 당 대회를 대체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2020년에 스가 요시히데가 아베 신조의 뒤를 이어 당 총재가 되었을 때였다.[10] TBS 뉴스는 9월 8일 총재 선거가 전자의 형식으로 치러져 지역 당원들이 투표할 수 있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11] 다음 날 이것이 확인되었다.[12][13][14] 915,574명이 투표할 수 있으며, 이들의 투표는 비례적으로 가중치를 부여받는다.
지난 총재 선거와 마찬가지로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관리 위원회는 아이사와 이치로가 의장을 맡고 있다.[15] 당 홍보 본부는 9월 19일 선거의 공식 슬로건인 '#자민당을바꿔라'를 발표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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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요약
관점
이시바 시게루 총리 재임과 선거 패배의 영향

이시바 시게루는 2024년 9월 2024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다카이치 사나에를 꺾고 승리했다.[17] 이 승리는 이시바가 보수 민족주의자인 다카이치를 2차 결선 투표에서 꺾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중도주의자로 여겨졌던 이시바의 예상 밖의 승리였다.[18][19] 이시바는 10월에 총리가 되었고, 즉시 총선을 소집했다.[20] 조기 총선에서 자유민주당과 연립 파트너인 공명당은 2009년 이후 처음으로 과반수를 잃었고,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 같은 야당이 의석을 늘렸다.[21] 이시바 내각의 두 각료가 의석을 잃었고, 정부는 소수당 정부로 전락했다.[22] 어떤 정당도 중의원을 장악하지 못하자 이시바는 야당들이 단일 후보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데 실패한 후 국회 결선 투표에서 총리로 재선되었다. 이시바는 내각을 개편했다.[23]
일본의 상원인 참의원 선거는 2025년 7월에 예정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자유민주당-공명당 연립은 과반수를 잃었고,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 그리고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참정당이 의석을 늘렸다.[24] 두 선거 이후 이시바는 양원에서 의회 다수당의 원칙을 내세웠고, 다른 대부분의 의원내각제 국가처럼 자유민주당이 정부를 이끌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25] 이시바에게 자유민주당 총재직에서 사임하라는 압력이 계속되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총리직을 계속 수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26] 2025년 7월 23일, 이시바가 8월 말에 사임할 것이라는 오보가 있었지만, 이시바는 같은 날 자유민주당 본부에서 소문을 부인했다.[27][28][29] 자유민주당의 중견 및 젊은 의원들, 주로 모테기 파벌의 의원들과 전 의원들은 의회 양원 합동 회의의 조기 소집을 요구하는 서명을 모으기 시작했다.[30]
연속적인 선거 패배는 당 파벌의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파벌은 2024년 이후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지만, 자유민주당 내부 정치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니혼케이자이 신문은 참의원 선거 직후 아베 파벌(고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이끌었던 더 보수적인 당 파벌)의 세력이 2024년 10월 이후 거의 40% 감소했다고 보도했다.[31]
잠재적 후보자들의 등장

이시바가 사임을 발표하기 전부터 여러 자유민주당 고위 인사들이 언론에 그의 후임 총재 후보로 거론되었고, 일부는 출마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2025년 7월 18일, 참의원 선거가 치러지기도 전에 다카이치 사나에는 출마에 대해 "이미 마음을 정했다"고 말하며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32] 선거 다음 날, 그녀는 일부 지지자들과 고령의 전 총리 아소 다로를 만났다.[33] 동료 강경 보수주의자이자 지난 총재 선거 후보였던 고바야시 다카유키도 지지자들과 만났다.[34] 고바야시는 8월에 그들과 다시 만났다.[35]
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아들이자 아베 신조 내각에서 전 각료를 지낸 고이즈미 신지로는 2025년 5월 이시바에 의해 농림수산대신으로 임명되었다.[36] 8월 하순, 참의원 선거 이후 그는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를 만났다. 고이즈미는 지난 총재 선거에서 기시다 파벌 일부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 3위를 차지했다.[37] 고이즈미는 같은 달 아소 다로를 만났다.[38] 7월 초 출마 의향을 묻는 질문에 고이즈미는 질문을 회피하며 주로 쌀 정책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39]
수많은 총리 밑에서 일했던 베테랑 보수주의자인 내각관방장관 하야시 요시마사는 참의원 선거일인 7월 22일 이시바를 계속 지지할 의사를 밝혔다.[40]
정부의 소수당 지위로 인해 닛케이 아시아는 다음 당 대표가 야당과의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보도했다.[41] 산케이 신문은 다음 총재 선거가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사이에서 치러질 것으로 예상했다.[42]
압력 증가, 비상 선거 고려
8월 6일, 이시바는 기업 기부에 대한 정당 지부 조사를 지시했고, 이는 당내 비판을 불러일으켰다.[43] 8월 8일 합동 본회의에서 자유민주당은 의원들과 현 지부장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긴급 총재 선거'를 진행할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회의에서 이시바는 계속 재임할 의사를 재차 밝혔다.[44] 총재 선거를 요구하려면 의원들과 현 지부장(당시 172명)의 과반수가 필요했다.[45]
8월 8일 양원 합동 회의가 열렸고, 253명의 의원이 참석했으며 35명이 발언했다. 회의에서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관리 위원회는 자유민주당 규칙 제6조 제4항에 따라 조기 총재 선거를 실시할지 여부를 고려하기로 결정했다.[46][47]
이후 8월 13일, 이시바는 계속 재임할 의사를 재차 밝혔고, 자유민주당은 이시바에게 또 다른 총재 투표에 직면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긴급 총재 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48]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관리 위원회는 8월 19일에 특별 총재 선거 실시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49] 위원회는 다음 날 참의원 선거에 대한 당 내부 검토가 완료되면 절차를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50] 교도 통신은 위원회가 특별 선거 실시를 요구하는 의원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보도했다.[51] 이는 8월 27일 확인되었고, 의원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마감일은 9월 8일로 발표되었다.[52] NHK는 8월 28일 당이 9월에 결정을 확정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자유민주당의 총괄 검토 위원회가 선거 결과 검토를 완료하면서 당내 논의는 계속되었다.[53]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관리 위원회는 8월 19일에 회의를 열어 조기 총재 선거를 원하는 국회의원이 서면으로 요청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확인 절차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54][55] 총재 선거 전진과 관련하여, 이시바를 옹호하는 세력이 있는 반면, 구 아베, 모테기, 니카이 파벌과 같은 비주류 파벌, 젊은 중견 국회의원, 일부 현 연합회에서는 이시바에게 책임을 묻고 긴급 총재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커지고 있다.[56] 이시바 내각의 3명의 정치 관료(차관급 및 국회 부대신) 중에서도 고바야시 후미아키, 사이토 히로아키, 간다 준이치 등은 긴급 총재 선거를 요구하고 있으며, 일부는 필요하다면 직책에서 사임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57][58][59]
8월 31일, 총리 관저 앞에서 이시바 행정부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고, 주최측 추산 4,000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지난 달 25일에 열린 '이시바 사임 시위'와 달리, 이시바 행정부 지속을 지지하는 1,200명(주최측 추산)이 참석한 시위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니시다 마사시 참의원 의원은 언론의 보도 태도에 의문을 제기했다.[60]

이시바 내각 내 이시바에 대한 지지는 엇갈렸다. 디지털대신 다이라 마사아키는 가상의 긴급 선거에서 이시바가 재선에 출마한다면 그를 '당연히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61]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세 협상을 주도했던 경제재생담당대신 아카자와 료세이도 이시바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바의 고향인 돗토리현 출신인 아카자와는 이시바의 보좌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62] 이시바의 방위대신 나카타니 겐은 8월 26일 "자유민주당은 특별 총재 선거를 실시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63] 외무대신 이와야 다케시는 긴급 선거가 연속성을 방해하여 일본 외교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64] 8월 하순부터 젊은 각료들이 긴급 선거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법무성 국회 부대신 간다 준이치는 8월 27일 특별 선거를 옹호하기 위해 내각에서 사임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65] 다음 날 페이스북에 올린 성명에서 환경성 차관 고바야시 후미아키는 필요하다면 차관직에서 사임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가능한 한 빨리 특별 총재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66] 그 다음 날, 농림수산성 부대신 사사가와 히로요시를 포함한 모테기 파벌의 여러 의원들은 조기 총재 선거를 지지하기로 동의했다.[67] 같은 날, 지난 총재 선거 후보였던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대신은 긴급 선거를 요구하는 서류에 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68] 8월 31일, 재무성 부대신 사이토 히로아키는 특별 선거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69] 이어서 국토교통성 국회 부대신 타카미 야스히로, 시바야마 마사히코 전 문부과학대신, 야마다 히로시 참의원 의원도 비슷한 요구를 했다.[70] 더 많은 당 의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현별 당 지부로 초점이 옮겨졌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지역 사회의 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9월 4일까지 홋카이도, 효고, 가가와, 에히메, 미야자키 현의 당 지부들은 모두 특별 선거를 요구했다. 후쿠시마, 오카야마, 오이타 현은 선거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바라키, 야마가타, 이바라키, 사이타마, 니가타, 야마나시, 나가노 현의 당 지부들은 선거를 지지하는 "의견을 통합"했고, 33개 현별 연합회는 각자의 대응을 계속 논의했다.[71] 전날, 자유민주당 특별고문이자 전 총리, 그리고 권력 중개자인 아소 다로는 조기 총재 선거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아소는 7월 참의원 선거 이후 이시바에게 사임할 것을 요구해왔으며, 2024년 9월 당 대표로 당선된 이후 이시바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72] 농림수산대신 고이즈미 신지로는 한편 긴급 선거를 요구하는 젊은 각료들을 옹호하며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과반수를 잃은 후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당의 단결을 촉구하며 결과 검토가 완료된 후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73] 8월 하순, 이나다 도모미 전 방위대신은 뒷돈 스캔들에 연루된 의원들이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고 이시바에게 사임 압력을 가하는 이유에 대해 국민들의 의문을 이해한다고 밝혔다.[74] 8월이 저물면서 자유민주당의 지지율은 하락했지만, 이시바 내각의 지지율은 상승한 것이 분명해졌다.[75][76]
9월 2일 열린 '양원 의원 합동 당 회의'에서 자유민주당은 참의원 선거 결과 요약을 발표하며, 물가 상승 대책이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고 정치와 돈 문제로 신뢰를 잃었다고 밝혔다. 이시바는 다시 한번 과반수 상실에 대해 사과하며 "저는 결코 제 자리에 집착하지 않으며,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제 책임"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는 이어서 기자들에게 계속 재임할 의사를 밝혔다. 같은 날, 3명의 고위 당 간부가 거의 동시에 사임했다. 자유민주당 정책조사회장 오노데라 이쓰노리,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스즈키 슌이치, 자유민주당 간사장 모리야마 히로시가 모두 이시바에게 사임 의사를 전달했다.[77] 이후 이시바는 다시 한번 총리로 남을 의사를 재차 밝혔다.[78] 이런 상황에서 이시바 내각의 일부 의원들은 계속해서 지지를 재확인했다. 외무대신 이와야 다케시는 긴급 총재 선거는 "필요 없고" "시간도 없다"며 "이시바 총리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만은 계속 커졌고,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대신이자 지난 총재 선거 후보는 특별 선거를 요구했다.[79] 고이즈미는 "당이 혼란스러운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계속 보여주는 것은 전혀 좋지 않다"고 말하며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설 것'이라고만 답하며 불분명한 답변을 계속했다.[80] NHK 조사에 따르면, 약 100명의 의원이 선거를 지지했고, 50명은 반대했으며, 약 100명은 미정, 약 30명은 답변을 거부했고, 약 10명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81] 압력은 계속 커졌고, 고무라 마사히로 법무성 부대신은 9월 3일 페이스북에서 조기 총재 선거를 지지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이어서 다케베 아라타 문부과학성 부대신과 호사카 야스시 디지털청 부대신도 비슷한 입장을 밝혔다.[82] 9월 4일, 고이즈미는 "우리는 정치적 싸움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고 강조하며 다시 한번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했다.[83] 같은 날, 오이타와 오카야마 현의 당 지부들은 조기 선거를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84] 이시바는 계속해서 총리로 남을 계획이라고 재차 밝혔다.[85] 9월 초, 내각관방장관 하야시 요시마사는 자신과 가까운 자유민주당 의원 약 10명과 만났다.[86] 자유민주당 특별고문 아소 다로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같은 달 만났다.[87]
9월 5일 저녁, 이시바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이와야 다케시 외무대신과 무라카미 세이이치로 총무대신을 포함한 내각 내 측근들과 만났다.[88] 같은 날 일찍, 스즈키 게이스케 법무대신은 "당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당이 단결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쓰면서 조기 총재 선거를 지지하는 첫 각료가 되었다.[89] 같은 날, 교도 통신이 자유민주당 의원 2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20명이 넘는 의원이 긴급 총재 선거를 지지했고, 50명 미만이 반대했다.[90] 이때쯤 이시바는 헌법 제7조를 발동하여 천황에게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것을 요청하겠다고 위협한 것으로 알려졌다.[91] 다음 날 밤, 9월 6일, 고이즈미와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이시바 밑에서 자유민주당 부총재를 지냄)는 총리 관저에서 이시바에게 사임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92][93][94]
이시바 사임
9월 7일, 이시바 시게루는 자유민주당 총재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4][95][96] 재팬 타임스는 스가와 특히 고이즈미의 압력이 이시바의 결정에 결정적이었다고 보도했다. 고이즈미는 총리 관저에 약 2시간 동안 머문 후(스가 요시히데는 30분만 머물렀다) 그에게 사임을 촉구했다.[97][98]
총리 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시바는 최근 선거 패배에 대한 당 대표로서 책임을 지고 당 분열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5] 이시바의 발표는 사실상 긴급 선거 절차 전체를 취소했다. 그는 대신 사임이 수락되지 않은 모리야마에게 임시 총재 선거를 실시하는 절차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99] 이시바는 일본-미국 관세 협정이 서면으로 확정된 후 지금이 물러날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100] 퇴임 연설에서 이시바는 여러 성과를 강조했다. 정부가 제출한 68개 법안 중 67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부분적으로는 야당 덕분이었다).[101] 이시바는 자위대 요원의 근무 환경 개선에 진전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재명 대한민국 대통령,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의 성공적인 회담을 언급하며 자신의 외교 정책에 자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102] 이시바는 일본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103] 이시바는 특히 뒷돈 스캔들의 지속적인 영향을 언급하며 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해소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후회라고 밝혔다. 이시바는 자유민주당이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으며, 이는 일본이 포퓰리즘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당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대중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을 촉구했다.[104]
이시바는 새로운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 총리직을 계속 수행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이후 선거에서 어떤 후보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의 재임 기간은 약 1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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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운동
요약
관점
경선 시작
이시바 시게루의 사임 후, 닛케이 아시아는 다카이치 사나에, 고이즈미 신지로, 하야시 요시마사를 잠재적 후보로 보았고, 다카이치와 고이즈미를 초기 선두 주자로 지목했다.[105] 세 명 모두 지난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며, 다카이치는 기시다 후미오 밑에서 경제안보담당대신을 지냈고, 고이즈미와 하야시는 내각에서 각각 농림수산대신과 내각관방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107]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와 다카이치가 각각 19.3%로 동률을 이루었다.[106] 프레지던트 잡지는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외에 당을 처음부터 재건하기 위한 경선에서 다크호스 후보가 등장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108]
9월 8일, 경선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109] 이시바는 각료들이 총재직에 출마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 없다고 명확히 했고, 누구도 막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110] 이시바는 나중에 자신과 비슷한 정책 신념을 가진 고이즈미가 적합한 후임자라고 암시했다.[111] 사임 발표 다음 날, 고바야시 다카유키는 동료들과 출마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 후 결정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말했지만, 잠재적인 선거 운동의 주제가 당의 단결이 될 것임을 암시했다.[112][113] 같은 날, 모테기 도시미쓰는 기자들에게 총재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전 당 간사장은 처음으로 출마 의사를 밝혔다.[114] 그는 공식적으로 출마하는 데 필요한 20명의 서명을 모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날 아침 늦게, 하야시가 선거 운동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보도되었다. 그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동료들과 상의하고 싶다고 말했다.[115] 당의 야마구치현 지부는 하야시에게 출마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116] 지난 총재 선거에서 하야시를 지지했던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 후, 하야시는 출마 의사를 확고히 했다.[117][118][119] 산케이 신문은 같은 날 다카이치가 자체 선거 운동을 준비 중이며 당원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120]
첫 선거 운동 발표
하원 소수 정부를 이끌고 있는 자유민주당은 잠재적 연립 파트너를 포함한 야당과의 관계가 선거의 중요한 요소였다.[121][122] 아베 신조가 2012년 두 번째 총리직을 시작한 이래 자유민주당의 연립 파트너였던 공명당은 자유민주당이 '보수 중도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123] 요미우리 신문에 따르면, 하야시와 고이즈미는 참의원 선거 이후 자유민주당과의 연립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던 일본유신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24][125] 고이즈미는 8월에 요시무라 히로후미 유신회 대표를 만났고, 하야시는 9월 8일 바바 노부유키 전 유신회 대표를 만났다.[126][127] 모테기는 국민민주당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해졌고, 다카이치는 참정당과 이념적으로 유사성이 있었다.[125] 산케이는 공명당 지도부 고위 인사들이 다카이치가 이시바의 후임이 되면 자유민주당과의 연립을 떠나겠다고 위협했다고 주장했다.[128] 지난 선거와 마찬가지로 당의 실세들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 9월 초,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는 당이 총재 선거를 온건한 중도 우파 보수당으로 자리매김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촉구했다.[129] 그달 말, 아소 다로 전 총리가 고이즈미를 최우선 후보로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130]
9월 10일, 모테기는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안정성을 달성하기 위해 현 정부 연립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고이즈미와 마찬가지로 모테기는 기업의 기부를 금지하는 것에 반대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내 외국인 노동자 수를 줄이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131] 같은 날, 고바야시가 출마 계획을 확정했다고 보도되었다.[132] 고바야시는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열고 두 번째 총재 출마를 발표했다.[133] 심바 가즈야 국민민주당 의원과의 회의 후, 고이즈미는 전자가 그에게 출마할지 물었을 때 웃었다고 전해진다.[134] 다음 날, 키카와다 히토시 의원은 NHK에 다카이치가 출마할 것이라고 말했다.[135] 모테기의 선거 운동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감세에 대한 지지를 발표했다.[136] 가나가와현을 중심으로 고이즈미의 출마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그는 지역 지지자들과 만난 후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137] 9월 12일까지 하야시의 지지율은 상승하기 시작했고, 다카이치와 고이즈미는 여론조사에서 1위를 놓고 계속 경쟁했다.[138] 다음 날, 고이즈미는 지지자들과 만나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고 알렸다.[139]
빅 3: 하야시, 다카이치, 고이즈미

9월 16일, 하야시는 총재 선거 출마를 확정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며칠 후 열리는 선거 운동 출범식에서 전체 공약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140][141] 하야시는 기시다와 이시바 행정부가 시작한 작업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하며, 일부 자체 정책을 수용하면서 연속적인 후보로 출마했다.[142] 그의 초기 정책 중 일부는 헌법 개정과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상쇄하기 위한 임금 인상을 포함했다.[143] 경선에 참가했을 때 30년간의 경력을 가진 하야시는 이시바의 사임에 유감을 표했지만, 더 많은 정당을 포함하도록 정부 연립을 확대하는 것에 개방적이라고 말했다.[144] 하야시는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나카타니 겐 방위대신의 지지를 받았다.[145] 하야시의 짧은 기자회견 직후, 고바야시는 공식 선거 운동 발표회 역할을 하는 자신만의 기자회견을 열었다.[146] 고바야시는 고 아베 신조의 측근인 하기우다 고이치로부터 자체 선거 운동 대신 다카이치를 지지하라는 권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147] 세대교체의 이미지를 내세운 고바야시는 강한 위기감을 느낀다며 연이은 선거 패배 후 당을 재건하고 야당과의 협력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모테기는 연립 확대를 계속 옹호했다.[148] 일본을 기술 강국으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하며, 고바야시는 감세를 도입하고 국방비를 GDP의 2%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말했다.[149] 그는 또한 소셜 미디어에서 확산되는 허위 정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중국과 같은 외국 세력이 일본 사회와 민주주의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150] 보수 정책과 젊은 세대 간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며, 고바야시는 하마다 야스카즈 전 방위대신을 자신의 선거 운동 본부장으로 발표했다.[151] 같은 날 늦게, 고이즈미 신지로는 농림수산대신 자격으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도 선거에 출마할 의사가 있다고 확인했다.[152] 공식 선거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고이즈미는 당내 보수 세력에게 호소하여 자신의 개혁주의적 이미지를 완화하려고 했다.[153] 9월 15일, 재무대신이자 강경 보수주의자인 가토 가쓰노부는 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고이즈미를 지지했다.[154] 지난 총재 선거에 출마했던 가토는 고이즈미의 선거운동 본부장으로 발표되었다. 가토는 다카이치 진영으로부터 접근을 받았지만 결국 그녀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했다.[155] 고이즈미는 당의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전에 옹호했던 부부 별성 제도와 같은 여러 정책을 보류할 것이라고 말했다.[156] 닛케이는 이것이 선거에서 흔한 주제가 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후보자들이 당을 더 분열시킬 수 있는 주요 정책 제안을 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157]
9월 18일, 하야시는 선거 운동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하야시 플랜' 정책을 공개했다. 이 계획은 '모든 사람이 꿈, 희망,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일본의 미래를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58] 하야시는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겠다고 다짐하며, 자유민주당의 이미지를 재건하기 위한 내부 개혁을 추진하고, 1% 임금 인상과 2040년대까지 사회 보장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는 법안을 제정하여 더 탄력적인 경제를 만들겠다고 말했다.[159]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보이지만, 하야시 플랜은 1996년 총선 이후 사용되어 온 소선거구에서의 경쟁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선거구제를 재도입하는 제안을 포함했다.[160][161] 하야시는 당이 보수적 강령 아래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재팬 타임스에 따르면 더 우경화된 비전보다 온건한 보수적 비전을 선호하는 당원들에게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야시는 모테기와 고바야시에 이어 공식적으로 경선에 참여한 세 번째 후보가 되었다.[162] 하야시의 발표와 같은 날, 다카이치 사나에는 자신의 선거 운동을 확인했다.[163] 정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다카이치는 '재정적 비둘기'로 묘사된 정부 경기 부양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164] 한편, 고이즈미가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에게 자문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고, 또 다른 보수주의자인 기하라 세이지가 그의 선거 운동에 합류했다.[165] 이때쯤 고이즈미는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고, 다카이치가 뒤를 이었으며, 하야시와 모테기는 대부분 3위를 놓고 동률을 이루었다.[166] 그날 일찍, 하야시는 심바 가즈야 국민민주당 의원을 만났고, 고이즈미는 자유민주당 원로 아소 다로를 만났다.[167] 몇 시간 후, 전 디지털대신 고노 다로와 전 저출산대신 노다 세이코는 모두 지난 총재 선거 후보였지만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고이즈미를 총재로 지지했다.[168][169]

당의 선거 패배 이후 극우 세력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다카이치는 더 넓은 유권자층에 호소하기 위해 자신의 이미지를 완화하려고 했다. 명확한 국방비 지출 목표 설정이나 논란이 많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다카이치는 명확한 답변을 피하고 야당과의 협력 의사도 밝혔다.[170] 실질 임금을 인상하기 위해 다카이치는 '현금 지급 + 세금 공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으며, 여러 야당이 지지하는 소득세 면세 한도 인상과 휘발유세 철폐도 지지한다고 밝혔다.[171] 9월 19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다카이치는 "우리는 다시 한번 '일본이 돌아왔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저는 높은 야망과 '일본을 다시 한번 세계 최고로 만들겠다'는 불타는 열망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국력을 강화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172] 다카이치는 선거 운동 출범식의 진행자였던 키카와다 히토시 자유민주당 의원이 피부색으로 기자들을 지목한 후 두 번이나 사과해야 했다.[173] 기자회견의 사회를 맡았던 키카와다는 기자들을 '피부색이 진한 분'과 '피부색이 하얀 분'이라고 지칭했다.[174] 경선에 참가한 네 번째 후보인 다카이치는 이번이 세 번째 총재 선거 출마였다.[175]
9월 20일, 고이즈미는 공식적으로 선거 운동을 발표했다.[176][177] 기자회견에서 고이즈미는 "저는 국민이 바라는 평화와 안전을 실현하는 당으로 자유민주당을 재건하는 데 앞장설 것을 결심했습니다"라고 밝혔다.[178] 휘발유세 폐지와 가을까지 예산 준비를 약속하며,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고이즈미는 연립 정부 확대에 개방적이라고 말했다.[179] 고이즈미는 '국민의 우려를 해결하지 못하고 물가 상승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원할 상상력이 부족했던' 자유민주당을 '재건'하겠다고 말했다.[180] 고이즈미의 정책 강령은 외국인 투자 증대, 5년간 임금 100만 엔 인상, 소득세 개혁, 근무 환경 개선, GDP 대비 국방비 2% 목표 달성, 지역 활성화, 당 내부 개혁 등을 포함했다.[181][182] 선택적 부부 별성 문제에 대해 고이즈미는 개인적인 의견은 변함이 없지만 당의 단결이 우선이라고 명확히 밝혔다.[183] 산케이는 이러한 정책들을 보류하는 것이 고이즈미의 개혁주의적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보도했다.[184] 같은 날, 지난 선거 후보였던 가미카와 요코 전 외무대신은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185] 고이즈미의 경선 참여로 그는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후보가 되었고, 9월 22일에 시작되는 12일간의 공식 선거 운동 기간의 막이 올랐다.[186]
선거 운동 시작

공식 선거 운동 기간이 시작되면서 고이즈미와 다카이치는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렸다. 선거 운동 기간이 시작되기 직전, 다카이치는 당원들 사이에서 여론조사 1위를 차지했고, 고이즈미는 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여론조사 1위를 차지했다.[187] 다카이치는 세이와 정책연구회, 지공회, 지수회 파벌의 많은 지지자들로부터 혜택을 받았다.[189] 고이즈미는 헤이세이 연구회 파벌과 파벌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189] 하야시는 굉지회 파벌과 파벌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189] 고바야시는 파벌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민주당 의원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고, 모테기는 헤이세이 연구회 파벌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189]
9월 23일과 24일, 각각 자유민주당과 일본 기자 클럽이 주최하는 토론회가 열렸다.[190] 토론회 후, 다카이치는 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선두를 차지했고 고이즈미의 지지는 하락했다.[188] 같은 여론조사는 하야시 요시마사가 3위에서 지지를 얻고 있음을 보여주었다.[188] 9월 26일, 아이치현에서 5명의 후보가 길거리 연설을 조직했다.[190] 같은 날, 고이즈미는 자신의 선거 캠프 팀원이 지지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호의적인 댓글과 다른 후보들을 공격하는 댓글을 온라인에 게시하도록 요청했다고 인정하며 사과했다.[191][192] 그는 또한 생산자들의 공식적인 항의를 불러일으킨 '귀중한 포도 품종'에 대한 라이선스 계약을 농림수산성이 처리한 방식에 대해서도 사과했다.[193] 9월 28일, 한 여론조사에서 고이즈미가 자유민주당 당원들 사이에서 다카이치에게 근소한 우위를 보였고, 자유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그녀에게 상당한 우위를 보였다.[194] 블룸버그 뉴스는 자유민주당이 당을 이끌기에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해 고이즈미와 다카이치로 분열되어 있다고 지적했다.[195]
자유민주당이 주최하는 정책 토론회가 9월 30일 5명의 후보 모두 참여하여 열렸다.[190] 같은 날, 다카이치는 일본보수당과 참정당과 같은 극우 정당들과의 정책 회담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196] 재팬 타임스는 자유민주당 토론회 후 고이즈미가 이전에 자유민주당 내 개혁주의 후보로 선거 운동을 벌였던 것과 달리 개혁주의 의제를 '완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197] 10월 2일, 오사카부에서 길거리 연설이 조직되었다.[190]
선거 결과
10월 3일, 자유민주당 당원들의 투표 마감일이 도래했다.[190] 다음 날, 당 본부에서 국회의원과 당원들의 투표 개표가 시작되었다.[190] 다카이치 사나에는 1차 투표에서 183표(31.07%)로 1위를 차지했다.[6] 고이즈미 신지로는 164표(27.84%)로 2위를 차지하여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모두 당 대표 선출을 위한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6] 이는 일본이 다카이치라는 첫 여성 총리나 고이즈미라는 현대 일본 역사상 최연소 총리를 선출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했다.[198] 하야시 요시마사는 134표(22.75%)로 3위를 차지하여 고이즈미와 2위를 놓고 경쟁할 뻔했지만, 결국 선거에서 탈락했다.[6] 고바야시 다카유키와 모테기 도시미쓰는 각각 59표(10.02%)와 49표(8.32%)를 얻어 4위와 5위를 차지했다.[6]
결선 투표에서 다카이치는 고이즈미의 156표(45.75%)에 맞서 185표(54.25%)를 얻어 자유민주당의 첫 여성 총재이자 거의 확실한 일본의 첫 여성 총리로 선출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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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요약
관점
2025년 9월 4일, 10월 4일이 총재 선거 가능 날짜로 보도되었다.[199] TBS 뉴스는 선거 운동이 9월 22일에 시작될 것이라고 추측했다.[11] 두 날짜는 9월 9일 자유민주당 총무회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같은 발표에서 당원들은 10월 3일까지 투표하도록 요청받았으며, 결과는 10월 4일에 확정되었다.[200] 9월 17일, 공식 선거 일정이 자유민주당에 의해 발표되었다.[201][190]
일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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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
출마 선언
출마 거부
- 이시바 시게루, 현직 총리 (2024년–현재); 중의원 의원 (1986년–현재)[210]
- 가미카와 요코, 외무대신 (2023년–2024년); 법무대신 (2020년–2021년, 2017년–2018년, 2014년–2015년); 중의원 의원 (2000년–2009년, 2012년–현재)[185]
- 가토 가쓰노부, 재무대신 (2024년–현재); 내각관방장관 (2020년–2021년); 중의원 의원 (2003년–현재) (고이즈미 지지)[211][154]
- 기시다 후미오, 총리 (2021년–2024년); 중의원 의원 (1993년–현재)[212]
- 고노 다로, 디지털대신 (2022년–2024년); 외무대신 (2017년–2019년); 중의원 의원 (1996년–현재) (고이즈미 지지)[168]
- 노다 세이코, 저출산대책 담당대신 (2021년–2022년); 총무대신 (2017년–2018년); 우정대신 (1998년–1999년); 중의원 의원 (1993년–현재) (고이즈미 지지)[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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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자
추천인
당 규정에 따르면 후보자는 출마하기 위해 최소 20명의 국회의원(추천인으로 알려짐)의 서면 지지를 받아야 한다.
- 옛 파벌별 지지자 수[189]
토론
공식
비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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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
요약
관점
여론조사

(괄호 안의 수치는 자유민주당 지지자들의 지지율)
가상 여론조사
다음 여론조사는 이시바 시게루, 가토 가쓰노부, 고노 다로, 가미카와 요코가 선거 출마를 포기하기 전에 가상으로 실시된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여론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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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현별 당원 투표 결과 (1차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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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 자민당 지지자
- 자민당 당원
- 없음: 25%; 모름: 5%
- 없음: 11%; 모름: 3%
- 없음: 14%; 모름: 8%
- 없음: 14%; 모름: 9%
- 없음: 21.2%; 모름: 5.7%
- 모름: 31%; 무응답: 6%
-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3%; 스즈키 슌이치 (1953년) (자민당): 1%; 사이토 겐 (정치인) (자민당): 1%; 노다 요시히코 (CDP): 5%; 마에하라 세이지 (일본유신회 (2012년)): 1%; 다마키 유이치로 (DPFP): 9%
- 없음: 14%; 모름: 11%
- 없음: 25%; 모름: 8.4%
- 없음: 27.6%; 모름: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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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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