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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히치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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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클라이드 히치콕(영어: William Clyde Hitchcock, 1916년 7월 31일~2006년 4월 9일)은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 감독, 스카우트이다. 선수 시절에는 3루수, 2루수, 유격수 등 내야의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으며, 185cm와 83kg의 체격을 지녔고 우투우타였다.[1]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통산 9시즌 동안 아메리칸 리그의 다섯 팀을 거치며 703경기에 출전했다. 선수로서 은퇴한 후에는 코치와 감독, 스카우트로 경력을 쌓았고, 1971년부터 1980년까지는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더블 A 서던 리그의 회장을 역임했다. 형 지미 히치콕은 1938년에 보스턴 비스에서 잠시 선수로 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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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미국 앨라배마주 인버네스 태생의 히치콕은 오번 대학교를 졸업했다. 메이저 리그에서 선수로 뛸 당시에는 3루수, 2루수, 유격수, 1루수까지 사실상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했다. 1942년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나, 1943년부터 1945년까지 3년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 육군 항공대에 복무했으며, 1946년에 복귀해 1953년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뛰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비롯해 워싱턴 세너터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보스턴 레드삭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메이저 리그 통산 성적은 703경기에 출전해 타율 .243, 547안타, 5홈런, 257타점을 기록했다.[1]
감독 경력
요약
관점
히치콕은 1954년과 1961년에 트리플 A 팀의 감독을 맡았으며, 그 사이인 1955년부터 1960년까지 6년 동안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3루 코치를 맡았다. 1960년 8월 3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이례적으로 감독을 서로 맞바꾸는 트레이드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이 지미 다이크스에서 조 고든으로 변경되었다. 고든이 클리블랜드에서 임무를 마치고 이동해 디트로이트에 도착하기 전까지 히치콕은 이날 단 한 경기 동안 디트로이트의 임시 감독을 맡았고, 디트로이트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치러진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12–2로 승리했다.[2]
1962년, 히치콕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지휘봉을 잡은 두 시즌 동안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163승 161패를 기록하며 승률 5할을 근소하게 넘긴 성적을 기록했다. 1963년 정규 시즌 최종전을 마친 9월 29일,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1위 뉴욕 양키스에 18.5경기 뒤진 4위로 시즌을 마쳤고, 구단 측은 히치콕을 경질했다.[3] 이후 히치콕은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팜팀으로 위치를 옮겨 필드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존 맥헤일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단장을 맡고 있을 때 히치콕은 해당 팀에서 스카우트로 일하기도 했다.
브레이브스 구단이 애틀랜타로 연고지를 옮긴 후 첫 시즌이었던 1966년, 히치콕은 보비 브레이건 감독 휘하에서 코치를 맡았다. 하지만 시즌 111경기까지 치른 시점에 52승에 그치자, 8월 9일에 브레이건 감독이 경질되고 히치콕이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남은 51경기에서 33승을 거두며 내셔널 리그 5위에 머물렀으며, 히치콕 감독은 다음해에도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1967년 9월 28일, 시즌 종료를 3경기 남겨둔 시점에서 순위가 7위에 그치자 히치콕 감독은 경질되었다.[4] 히치콕은 감독으로 통산 274승 261패로 .512의 승률을 기록했으며, 이후 1968년부터 1971년까지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맥헤일 단장 아래에서 스카우트로 일하다가, 서던 리그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감독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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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던 리그 회장
히치콕은 1971년 8월에 서던 리그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5] 히치콕의 재임 기간 동안에 리그에 신생팀이 합류했으며, 플레이오프 제도가 확대되었으며, 전반기와 후반기가 나뉘어 리그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구장 개보수와 가족 친화적인 환경 조성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관중 수도 1971년의 33만 3,500명에서 1980년의 170만으로 크게 증가했다. 서던 리그 우승 트로피는 히치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980년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은 히치콕에게 킹 오브 베이스볼을 수여했다. 히치콕은 1980년에 회장직에서 물러났다.[5]
대학 스포츠
히치콕은 야구 이외에도 칼리지 풋볼과 골프계에서도 활동했다. 올-사우스이스턴 콘퍼런스 테일백이었던 히치콕은 오번 대학교의 풋볼팀인 오번 타이거스를 1937년 1월 1일에 아바나에서 치러진 바카르디 볼로 이끌었고, 이 경기에서 오번 타이거스는 빌라노바 대학교와 7–7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후 히치콕은 모교에서 ‘빌리 히치콕 골프 토너먼트’라는 이름의 골프 대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오번 대학교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2003년에 개보수를 마친 학내 야구장에 ‘히치콕 필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같은 해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이 구장을 미국 최고의 대학 야구 시설로 꼽기도 했다.
개인사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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