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조선 말기의 정치가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 사상가, 급진개화파이다. 1872년 문과 장원급제 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 사상 확산에 힘썼으며,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다.[2]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 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다 못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얼마 안되는 병력 부족으로 청나라의 개입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했으며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일 전쟁의 발발 직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됐다(김옥균 암살 사건). 조선으로 송환된 시신은 부관참시 후 8도에 효수됐다. 청일 전쟁 때까지 중일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존재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동양 3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후일 개화파가 집권한 뒤 복권됐고 일제 강점기 순종에 의해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됐다.[3]
같은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에 대해서는 김옥균 (주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간략 정보 김옥균金玉均, 출생일 ...
김옥균 金玉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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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851년 2월 23일(1851-02-23)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공주군 |
사망일 | 1894년 3월 28일(1894-03-28)(43세) |
사망지 | 청나라 장쑤성 상하이 |
국적 | 조선 |
학력 |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
가문 | 신 안동 |
부모 | 김병기(양부) 전주 이씨 부인(양모) 풍양 조씨 부인(양계모) 김병태(생부) 은진 송씨 부인(생모) |
배우자 | 기계 유씨 부인 |
자녀 | 슬하 1남 2녀 아들 김영진[1] |
종교 | 유교(성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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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장동(신 안동), 호는 고균(古筠), 별호는 고우(古愚), 망명 중에는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4])란 가명을 썼는데 갑신정변 실패 직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千歲丸)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4] 이와타 산와(岩田三和)란 가명도 사용했다.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