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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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朴齊家, 1750년 11월 5일 ~ 1805년 7월 6일)는 전설서 별제, 오위도총부 오위장, 경기도 양평 현감 등을 지낸 조선 시대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
박제가 朴齊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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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 박제가 선생 | |
조선국의 전설서 별제 | |
임기 | 1785년 ~ 1791년 |
군주 | 정조 이산 |
조선국의 오위도총부 오위장 | |
임기 | 1794년 ~ 1795년 |
군주 | 정조 이산 |
조선국의 경기도 영평현감 | |
임기 | 1796년 ~ 1798년 |
군주 | 정조 이산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50년 11월 5일(1750-11-05)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805년 7월 6일(1805-07-06)(54세) |
국적 | 조선 |
경력 | 옛 소북인 이탈파 세력 출신의 통역관이자 무관 겸 저술가 및 실학자 |
정당 | 노론계 낙론 성향 북학파 잔존 중심 세력 |
부모 | 박평(부), 전주 이씨 첩실(모) |
형제자매 | 박제도(이복 적형) |
배우자 | 덕수 이씨 부인 |
자녀 | 박장림(장남) 박장름(차남) 박장암(3남) 박효석(4남) |
친인척 | 이관상(장인) 박태동(조부) 박형(백부) 박성(숙부) 박효선(손자) |
그의 자는 재선(在先), 차수(次修),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이다 정유(貞否),정유(貞蕤),위항도인(葦杭道人) 등 다른 호도 사용한적이 있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과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1778년 청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는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9년 3월 정조에 의해 규장각검서관으로 특채되어 이후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사신의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그 뒤 전설서 별제와 1791년 임시 군기시정, 1792년 군기시정 등을 거쳐 1794년(정조 27년) 2월 춘당대 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으로 급제, 오위장, 양평현감, 영평현령, 부여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밀무역에 대한 제재를 줄이며, 화폐를 유통할 것, 서양인들을 조선으로 초빙하여 화포 제작, 성곽 축조, 선박 건조, 양잠 등의 신기술을 적극 도입, 유치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맹목적인 근검절약은 병폐이며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이라는 현실을 인정한 기반을 쌓고 상업·수공업·농업 전반의 생산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가경제를 일으킬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상업과 무역을 천시 여기던 당대의 사대부들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박제가는 네 차례에 걸친 청나라 사행(使行)을 통해 100명이 넘는 중국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 안목을 갖춘 글로벌 지식인이었다.[1] 박지원과 이관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정조와 윤행임 등의 배려로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여러번 다녀왔다. 정조의 서얼 중용 정책에 의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조 사후 1801년(순조 1년) 그와 친분이 있던 윤행임이 노론벽파의 공격을 받고 몰락하면서 유배되었다. 원래 당색은 소북(小北)이었으나 노론북학파로 전향하였다. 연암 박지원, 이관상의 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