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인 (1887–1958)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조소앙(趙素昻, 1887년 음력 4월 10일[1]~1958년 9월 10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겸 교육자이다.
조소앙 趙素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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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 |
임기 | 1922년 9월 8일 ~ 1924년 12월 17일 |
대통령 |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
총리 | 신규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임시 권한대행 노백린 대한 임정 총리 김구 대한 임정 총리 임시서리 이동녕 대한 임정 총리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87년 4월 10일(1887-04-10)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 |
사망일 | 1958년 9월 10일(1958-09-10)(71세)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학력 |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학사 |
경력 | 한국독립당 상임고문 겸 당무위원 사회당 총재 겸 상임고문 한국독립당 국회의원 무소속 국회의원 |
정당 | 무소속 |
부모 | 조정규(부), 박필양(모) |
형제자매 | 조용하(형) 조용주(아우) 조시원(아우) |
배우자 | 오영선(본부인), 최경록(첩실) |
자녀 | 3남 1녀 |
친인척 | 조성룡(친조부) |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이다.[2]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며, 자는 경중(敬仲)이다. 필명으로 사용하던 조소앙(趙素昻)이 후에 1918년을 기하여 개명한 이름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소앙 조용은'으로도 부른다.
1919년 2월 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작성하도록 지도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인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삼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작성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한국독립당 당수 등으로 활동했고 김구·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이론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 귀국하여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에 김구,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 실패 후에는 노선을 바꾸어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찬성하고 지지하였다. 1948년 사회당을 만들어 1950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시 성북구에 출마해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1950년 6.25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피랍되었다. 납북 후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불렸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에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교 학맥으로는 할아버지 조성룡의 문인이며, 종교 사상적 활동으로는 삼균주의 사상가이자 육성교를 창시한 바있다. 정치, 교육, 경제 평등을 말하는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는 중국 기독교 정치가 쑨원의 삼민주의와 일본 유학시절에 번역한 "천부인권론"의 기독교적 '만민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아 1918년부터 정립한 정치노선이다.[3] 조소앙은 1911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에 의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였지만 여섯개의 종교를 두루 아울러야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의 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915년 육성교를 창시하였다. 하지만 1918년 삼균주의를 정립한 이후에는 기독교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종교통합에 대한 주장은 더이상 하지 않았다.[4]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이듬해인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