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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클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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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클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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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독일어: Der Kuss)는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유화 작품으로, 금박, 은, 백금을 더하여 제작되었다.[1] 학자들이 그의 "황금 시대"라고 부르는 절정기인 1907년과 1908년 사이에 그려졌다.[2] 1908년에는 Liebespaar (연인들)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3] 이 그림은 정교한 장식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안고 있는 한 쌍의 연인을 묘사한다. 이 작품은 당대의 아르누보 양식과 이전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의 유기적 형태에서 영향을 받았다.

간략 정보 키스, 작가 ...

이 그림은 현재 벨베데레궁에 있는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빈 분리파 (빈의 아르누보 운동)의 걸작이자 클림트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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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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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함>, 1905-09년의 <브뤼셀 스토클레>를 위한 스케치

사랑, 친밀감, 성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주제이다. 스토클레 프리즈베토벤 프리즈는 클림트가 낭만적인 친밀감에 초점을 맞춘 좋은 예이다. 두 작품 모두 키스의 전신이며, 포옹하는 연인이라는 반복되는 모티프를 특징으로 한다.

클림트와 그의 동반자 에밀리 플뢰게가 이 작품의 모델이 되었다고 생각되지만, 다른 이들은 오스트리아 작곡가 알마 말러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7] 하지만 이를 증명할 증거나 기록은 없다. 다른 이들은 여성이 '붉은 힐다'로 알려진 모델이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녀는 그의 깃털 부채를 든 여인, 금붕어, 다나에의 모델과 매우 흡사하다.[8]

묘사

요약
관점

구스타프 클림트는 입체감 없는 금빛 배경에 연인이 친밀하게 포옹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두 인물은 꽃무늬 초원 가장자리에 서 있는데, 여인의 발만 노출되어 있다. 남자는 기하학적 패턴과 미묘한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진 옷을 입고 있다. 그는 덩굴 관을 쓰고 있으며, 여인은 꽃 관을 쓰고 있다. 여인은 꽃무늬가 있는 길고 펄럭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다. 남자의 얼굴은 관객에게 보이지 않으며, 얼굴을 숙여 여인의 뺨에 키스하기 위하고 있다. 그의 손은 여인의 얼굴을 감싸고 있다. 여인은 눈을 감고, 한 팔은 남자의 목을 감고, 다른 팔은 남자의 손에 부드럽게 올려놓고 있으며, 얼굴은 남자의 키스를 받기 위해 위로 향하고 있다.

그림 속 패턴은 아르누보 양식과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의 유기적 형태를 암시한다. 동시에 배경은 드가와 다른 모더니스트들의 작품에서 내재된 2차원과 3차원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키스는 호화롭고 관능적인 이미지로 전달되는 퇴폐적인 세기말 정신의 시각적 표현이다. 금박은 중세의 금박 그림, 채식필사본, 초기 모자이크를 연상시키고, 옷의 나선형 패턴은 청동기 시대 예술과 고전 시대 이전부터 서양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덩굴무늬를 떠올리게 한다. 남자의 머리가 캔버스 상단에 매우 가깝게 위치하는 것은 전통적인 서양 회화의 규범에서 벗어난 것으로, 자포니즘의 영향을 반영하며, 그림의 단순화된 구성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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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 돔: 한 천사가 라벤나 산비탈레 성당에서 에클레시우스 주교에게 교회의 모형을 제공한다.

클림트의 아버지는 금세공을 전문으로 하는 순회 장인이었지만, 클림트의 그림가 금박을 사용한 것은 1903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라벤나를 방문했을 때 산비탈레 성당의 비잔틴 모자이크를 보았다. 클림트에게 모자이크의 원근감과 깊이가 없는 평평함으로 인해 금빛 광채가가 더욱 돋보였다. 그는 이후 자신의 작품에서 전례 없는 금박과 은박 사용을 시작했다.[9]

이 그림에서 클림트는 오비디우스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아폴론다프네에게 키스하는 순간을 표현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10]

미술사학자들은 또한 클림트가 오르페우스에우리디케 이야기를 묘사했다고 주장한다. 더 구체적으로, 클림트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어루만지기 위해 뒤돌아보았다가 영원히 사랑을 잃는 바로 그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서 안고 있는 여인이 약간 반투명한 것이 바로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사라지거나 것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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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

클림트는 빈 대학 천장화 3부작 직후 키스를 그렸다. 빈 대학 천장화는많은 스캔들을 일으켰고 "외설적"이고 "변태적인 과도함"의 증거라고 비판받았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예술에 대한 반권위적이고 반대중적인 견해를 드러냈고, 이로 인해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아이"로 재평가받게 된다. 그는 "행동과 예술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소수의 사람들을 만족시켜라"라고 썼다.[11]

키스는 1908년 요제프 호프만, 구스타프 클림트, 오토 푸르처, 콜로만 모저 등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협력으로 열린 빈 쿤스트샤우(빈 예술 공예 전시회)에 전시되었다.[12][13][3]

빈 대학 천장화으로 비판을 받은 클림트는 공식적인 축하 행사에 초대받지 못했을 정도였으나, 키스는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공개 전시되었을 때 아직 미완성인 상태임에도 오스트리아 정부가 구매하였다.[14]

2013년 2월, 시리아인 예술가 탐맘 아잠은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시리아 미확인 지역의 폭격당한 건물 위에 이 그림 이미지를 겹쳐 '자유 그래피티'라는 작품을 만들었다.[15]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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