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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치 사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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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치 사나에(일본어:
고베 대학을 졸업한 후,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작가, 입법 보좌관,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무소속이었으나, 1993년 총선거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고, 1996년 자유민주당에 입당했다. 아베 전 총리의 측근으로서, 아베 내각에서 총무대신으로 활동하는 등 여러 직책을 맡았다. 202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결선 투표 전에 탈락하여 3위를 차지했다.[2] 기시다 후미오 내각에서는 2022년부터 2024년까지 경제안보 담당 대신을 역임했다. 2024년에 당 대표에 두 번째로 출마하여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이시바 시게루에게 적은 차로 패했다. 2025년에 다시 출마하여 두 차례 투표에서 고이즈미 신지로를 꺾고 모두 1위를 차지해 총재로 당선, 10월 21일 총리직에 취임했다.
'확고한 보수주의자', '초보수주의자'로 평가되며, 일본 국수주의 단체인 일본회의의 일원이다.[3][4] 일본의 전쟁 범죄가 과장되었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역할은 자위(自衛)적인 전쟁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논란이 많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외교 정책에서 군사력 사용을 포기하는 일본국 헌법 제9조의 개정을 지지하며,[5][6] 확고한 대중 강경파로 간주된다. 국내 정책에서는 아베노믹스의 지속을 지지하며, 동성결혼과 성평등을 위한 법률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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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다카이치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아버지 다카이치 다이큐(일본어:
1987년, 마쓰시타 정경숙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민주당 소속 여성 하원의원 팻 슈뢰더의 의회 특별 연구원으로 일했다.[9][8] 1989년 일본으로 돌아온 미국 정치 경험이 있는 입법 분석가로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집필했다.
1989년 3월, TV 아사히 앵커가 되어 렌호와 함께 "코다와리 TV 프리★스테이지"를 공동 진행했다.[10]
초기 정치 경력 (1993~2025)
요약
관점
다카이치는 1993년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11] 다음 해, 가키자와 고지가 이끄는 소수 정당인 자유당에 합류했는데, 이 정당은 곧 신진당으로 합병되었다.[12]
1996년, 신진당 후보로 출마하여 중의원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신진당은 전국적으로 패배했다. 11월 5일, 자유민주당 간사장 가토 고이치의 영입되어 자민당에 입당했다. 자민당에 반대하는 표로 선거에서 승리한 지 두 달 만에 당을 바꾸는 그녀의 행동은 신진당 의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자민당에서 모리파 (공식적으로는 세이와 정책연구회)에 속했으며,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통상산업성의 국회 부대신을 역임했다.[11] 또한 교육과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비례대표 명부 1위에 올라 쉽게 3선에 성공했다. 2002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일본 경제산업성의 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2003년 총선거에서 나라현 제1구에서 민주당 의원 마부치 스미오에게 패배했다. 근처 도시인 이코마시로 이주하여 2005년 총선거에서 나라현 제2구 의석을 얻었다.[13] 2004년, 의원직을 맡지 않던 동안 긴키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다.[11]
부부가 결혼 후에도 다른 성씨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부부별성)에 반대하는 자민당 당내 그룹을 이끌었는데, 이것이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를 훼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통신부 장관으로서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고 판단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경우 정부가 방송사의 면허를 취소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언론의 자유 억압이라는 논란을 일으켰다.[14]
1차 아베 내각
아베 신조 총리의 일본 내각에서 오키나와 및 북방 영토 담당 대신, 과학기술 정책 담당 대신, 혁신 담당 대신, 청소년 활동 및 남녀공동참여 담당 대신[16] 및 식품 안전 담당 대신을 역임했다.[11] 2007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기념일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유일한 아베 내각 각료였다.[17]
2차 아베 내각
2012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한 후, 당의 정무조사회장으로 임명되었다. 2013년 1월, 아베에게 일본 제국이 식민 통치를 통해 병합된 국가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사과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대신할 '아베 담화'를 발표할 것을 제안했다.[18]
2014년 9월 3일 신도 요시타카를 대신하여 총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녀가 각료로 임명된 후, 일본의 소규모 신나치주의 정당인 국가사회주의 일본 노동자당의 대표 야마다 가즈나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었다. 야마다와의 어떠한 연관성도 부인했으며, 야마다의 배경을 알았더라면 사진을 찍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19] 또한 1994년에 아돌프 히틀러의 선거 재능을 칭찬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책을 홍보하는 모습도 보여졌다.[20]
2014년 논란이 많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내각 각료 3명 중 한 명이었으며,[21] 2016년에는 재직 중인 각료로서 신사의 가을 축제에 참석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22] 2020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75주년에는 야스쿠니를 방문한 4명의 각료 중 한 명이었다.[23]
2014년 12월 총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에서 96,000표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2위 후보를 58,000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24]
2016년 2월, 정부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방영하는 방송사의 운영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발언했다.[25] 미국 국무부는 나중에 이를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언론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킨다"고 밝혔다.[26]
다카이치가 총무대신으로서 감독했던 2017년 선거구 개편은 나라현의 한 선거구를 폐지하여 다카이치가 다시 옛 라이벌인 마부치와 대결할 가능성이 생겼다.[13]
2017년 8월 3일 노다 세이코로 교체되었으나, 2019년 9월 11일 이시다 마사토시를 대신하여 총무대신으로 복귀했다. 다른 구상들 중에서 NHK에 시청료 인하와 거버넌스 개혁을 압박했으며,[27]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현금 지급을 감독했다.[28]
2021년 자민당 총재 선거
2021년 8월, 9월 29일에 예정된 선거에서 현 총리 스가 요시히데에게 도전하여 자민당 총재직에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29] 9월 3일, 스가는 재선에 불출마하겠다고 발표했고, 다음 날 언론 매체들은 아베 전 총리가 다카이치에게 지지를 옮겼다고 보도했다.[30] 스가 자신은 경쟁 후보인 고노 다로를 지지했다.[31] "국방과 외교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진 보수파의 지지를 받는 인물"로 묘사되었다.[14]
총무성 문서 유출 사건
2023년 3월 2일, 야당 참의원 의원 고니시 히로유키는 아베 신조 전 내각 시절의 문서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문서는 아베 정부와 자유민주당에 비판적인 방송사에 정치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방송의 자유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시사했다.[32] 해당 문서에서 언급된 시기에 총무대신이었다. 다음 날 위원회 회의에서 압박을 받자, 그 문서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며 문서가 진짜로 입증되면 국회의원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맹세했다.[32] 며칠 후인 2023년 3월 7일, 총무성은 해당 문서의 진위 여부를 확인했으며, 야당 의원들은 다카이치에게 사임을 촉구했다.[33] 이 발표 후 사임 의사를 번복하며, 문서 중 자신을 언급한 부분이 정확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고니시가 문서의 진위 여부를 입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33]
2024년 자민당 총재 선거
2024년 9월 기시다의 후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 9명의 후보 중 이시바 시게루와 고이즈미 신지로와 함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결국,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이시바에게 패했다.[34]
이시바는 다카이치에게 핵심 당직 중 하나인 자민당 총무회장직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35] 11월에는 자민당의 새로 조직된 공공 안전 및 테러와 사이버 범죄 대책 연구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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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대표 (2025~현재)
2025년 9월 18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사임에 따라 2025년 선거에 자민당 총재 후보로 출마한다고 발표했다.[37] 초기 여론 조사에서 다카이치와 농림수산 대신 고이즈미 신지로는 선거의 초기 선두 주자로 간주되었다.[38]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모두 여론 조사에서 거의 동률을 이루었다.[39]
10월 4일 선거일, 1차 투표에서 183표 (31.07%)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40] 고이즈미는 164표 (27.84%)로 2위를 차지하여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모두 당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40] 결선 투표에서 54% 대 46%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자민당의 확정된 대표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10월 중순에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41]
정치적 견해
요약
관점
국내 정책
다카이치는 강경한 보수주의자이자 국수주의자로 평가되어 왔다.[8][42][43][44][45] 또 다른 자민당 각료이자 중의원 의원인 고노 다로는 다카이치가 자민당 내에서 정치 스펙트럼의 극우에 속한다고 말했고,[46] 다카이치 본인은 도이체 벨레와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에 의해 극우로 묘사되었다.[47][48] 2021년 타임지는 그녀를 초보수주의자로 묘사했다.[49]
동성결혼 반대와 부부동성(夫婦同姓) 의무화의 유지 등 사회보수주의적인 견해들을 밝혀 왔다.[8] 2020년 12월 정부의 성 평등 계획이 "가족 단위를 기반으로 한 사회 구조를 파괴할 수 있다"고 말했다.[50] 또한 여성이 일본 천황이 될 수 있도록 법을 변경하는 데 반대한다.[8] 국수주의 단체인 일본회의의 일원이다.[51]
마거릿 대처를 자신의 모델로 자주 언급했다.[8][52] 다카이치 또한 대처처럼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52][53][54]
경제와 관련하여 아베노믹스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55]
일본의 국기 훼손을 처벌할 것을 주장한다.[51] 2014년에는 극우 단체의 사무실 방문을 주최했으며,[51] 2014년 히틀러의 선거 전략이라는 1994년 책을 지지하는 광고에 실린 사진이 공개되었다.[56]
신토 종교 의식과 도덕 교육의 복원을 옹호하는 신토 정치연맹 국회 간담회의 부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9][57]
외교 정책
외교 정책과 관련하여 일본의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일본국 헌법 제9조 개정을 지지한다.[8] 대중 강경파로 지적 재산권 침해와 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 관행에 비판적이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줄이는 것을 지지했다. 미국이 일본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58] 센카쿠 열도 분쟁의 일환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배치한 해양 부표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9] 2025년 4월, 타이완을 방문하여 라이칭더 총통을 만났다. "타이완 비상사태는 일본 비상사태"라는 아베 신조의 발언을 반복했다.[60] 그녀가 3위를 차지했던 202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그녀의 대중 정책은 4명의 후보 중 가장 강경한 것으로 평가되었다.[58]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본의 전쟁 범죄가 과장되었다고 말했다.[8] 위안부를 포함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인정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2002년 8월 18일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전쟁이 자위 전쟁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안보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61] 2024년 4월과 8월에 제2차 세계 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8]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는데, 두 번 모두 국무대신 자격으로 서명했다.[62][63] 총리로 선출된다면 신사 방문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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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

다카이치는 2004년에 중의원 동료 의원인 야마모토 다쿠와 결혼했고 야마모토가 전부인에서 얻은 세 자녀를 입양했다.[64] 그녀는 남편의 성을 따라 호적에 아마모토 사나에(일본어: 山本早苗)를 사용했지만 대중적으로는 자신의 본명 '다카이치 사나에'를 계속 사용했다.[65] 사나에는 결혼 이후 부인과 질환 수술로 임신과 분만이 어려워져 자녀를 갖는 것을 포기했고 2007년에 "나는 사회가 불임 여성에게 환영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66]
사나에와 다쿠 부부는 2017년 7월에 이혼했고 그녀는 언론에 다쿠와 다른 정치적 견해와 열망이 이혼 사유였다고 설명했다.[67][68] 4년 뒤 다쿠와 사나에는 2021년 12월에 재혼했고 다쿠는 아내의 성을 따라 '다카이치 다쿠'로 개명했다. 다카이치 부부는 의붓자녀를 통해 네 명의 손주를 두고 있으며 다쿠가 2025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었을 당시에 사나에는 그를 간호했다.[69][70][71]
사나에는 2024년부터 입헌민주당 대표를 맡고 있는 노다 요시히코와 친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다는 사나에와 소속 정당은 다르지만 다카이치가 마쓰시타 정경숙에 있을 때 그녀의 선배였다.[72][73]
사나에는 젊은 시절 드럼과 피아노를 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헤비 메탈과 일본의 록 음악의 애청자로 데몬 각하, B'z, X JAPAN의 팬이다. 흡연자인 그녀는 감바 오사카와 한신 타이거스를 응원하며, 일본중앙경마회 경마와《바리바리 전설》, 《가지 류스케의 기》와 같은 일본 만화를 좋아해 일본의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을 위한 의원 연맹의 회원 중 한 명으로 활동하고 있다.[74][75][76][77]
사나에는 와인에 관한 지식으로 소믈리에 도뇌르(프랑스어: Sommelier d'honneur) 칭호를 가지고 있고 유도, 공수도,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있다. 자동차, 오토바이에 관심이 많아 가와사키 Z400을 소유했었고, 토요타 수프라 셀리카 XX를 타다 의원 경력 초기에 1991년식 토요타 수프라 A70 2.5GT 트윈 터보 리미티드로 차량을 바꾸고 20년 이상 이 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그녀가 탄 수프라 A70은 현재 나라현의 한 토요타 딜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7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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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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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도호쿠신샤 필름과 일본 총무성 스캔들
각주
외부 링크
Wikiwand -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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