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조규제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Remove ads

조규제(曺圭帝, 1967년 10월 7일 ~ )는 전 KBO 리그 KIA 타이거즈투수이자, 현 제주고등학교 야구부의 투수코치이다. 원래 오른손잡이였으나 야구를 시작할 무렵 왼손잡이 글러브를 사용해서 좌투우타가 됐다. 1991년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쌍방울 레이더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입단 첫 해인 1991년에는 49경기에 등판해 9승 7패, 27세이브,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후 마무리 투수로서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며, 팬들로부터 '완산 특급(完山特急)'이라고 불렸다.[1] 현역 후반기에는 주로 좌완 원포인트 스페셜리스트 중간 계투로 등판했다. 현대 유니콘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던 2003년 시즌 직후 13년 만에 3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그 해 11월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간략 정보 기본 정보, 선수 정보 ...
Remove ads
Remove ads

선수 시절

요약
관점

아마추어 시절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동했다.[2] 1986년 전기 고교 야구에서 군산상고의 우승을 이끌며 주목받기 시작해[3], 같은 해에 우수 투수 타이틀을 따냈다.[4] 같은 해 해태 타이거즈연세대학교가 그를 데려가기 위해 경쟁을 벌였는데[5][6][7], 그는 조계현과 함께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1987학번)로 진학했다.[8] 1989년에는 아마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됐으며[9], 같은 해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중국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뒀다.[10]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1991년 드래프트에서 1990년에 새로 창단한 팀에 1차로 지명됐다.[11] 입단 후 바로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빙그레 이글스와의 개막전에서 6이닝 동안 1피안타만 허용하며 선발 승을 거두며 주목받기 시작했다.[12] 6월까지 14경기 연속 세이브를 기록하며[13], 같은 신인이던 김기태와의 경쟁 끝에 신인왕과 세이브왕을 수상했다.[14][15] 1992년에는 100% 인상된 연봉으로 재계약했다.[16] 당시 마무리 투수로 활동하던 빙그레 이글스송진우와 구원 경쟁을 펼쳤으나[17], 시즌 초반에 부상을 당해 한동안 마운드에 올라오지 못했다.[18] 이후 마무리로 돌아선 해태선동열, LG김용수, 태평양정명원과 세이브 경쟁을 펼쳤다. 1994년 4월 22일에 같은 팀의 선발 투수 성영재의 12연패 기록을 끊었다.[19] 1995년에는 부상으로 거의 등판하지 못했지만, 1996년에 당시 감독이었던 김성근의 지도 하에 김현욱, 김원형, 김기덕과 함께 팀을 플레이오프까지 이끌었다.[20] 1997년에 팀이 준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21]

현대 유니콘스 시절

1998년에 자금난에 허덕이던 쌍방울 레이더스[22] 그를 트레이드하면서 투수 박정현, 가내영과 현금 3억원을 받았다.[23]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 측은 현금 트레이드를 부인했으나 기자들의 추궁에 현금을 받았음을 시인했다.[24] 8월 21일에 선발 등판한 그는 7년 만에 선발승을 기록했으며[25] 그 해 3경기에 선발 등판해 3승을 거뒀다. LG와의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26] 1998년 주전 마무리였던 조 스트롱이 다음 해인 1999년에 미국으로 돌아가자 선발에서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변경했으나[27] 부상으로 박경완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했다[28] 팀의 주전 마무리는 선발로 활동하다가 3연패를 기록했던 정명원으로[29] 낙점됐고 그는 선발로 재전향해 5선발승을 기록했다. 2000년위재영이 39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새로운 마무리로 떠오르면서 입지가 좁아졌고[30][31], 마일영의 입단과 9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시즌 후 조웅천과 함께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됐다.[32]

SK 와이번스 시절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33][34] 이적 첫 해인 2001년에는 시즌 초반부터 마무리로 활동했지만[35] 시즌 중반 이후 몇 차례 블론세이브를 기록하자 6월 28일 LG 트윈스전부터 선발로 활동했는데 이 경기에서 선발 승을 기록했다.[36] 같은 해 10경기에 선발 등판해 5승을 기록했다. 팀에서의 마지막 해인 2002년에는 시즌 전에 선발로 내정됐으나[37] 마무리를 맡았고, 블론세이브를 몇 차례 기록하자 6월 초부터 선발로 복귀했지만 같은 달 19일 LG 트윈스전에 선발 등판한 후[38] 허벅지 근육통을 호소해 2군으로 내려갔다. 7월 7일 두산 베어스와의 더블 헤더 때 복귀했으나 5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강판됐다. 2002년에 8경기에 선발 등판해 1승을 기록했다.

현대 유니콘스 복귀

2003년 시즌 전 박경완이 FA를 선언해 SK 와이번스로 이적하며 박경완의 보상 선수로 지명돼 복귀했다.[39], 2003년에 팀의 3번째 우승 멤버가 됐으며,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다.[40] 12월에 2년간 4억 5,000만원의 조건으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41]

KIA 타이거즈 시절

불펜으로 활동하다가 2005년 11월 4일홍현우와 함께 방출돼 은퇴했다.[42]

Remove ads

야구선수 은퇴 후

2006년 1월 현대 유니콘스의 2군 투수코치로 선임됐다.[43] 그 후, 2008년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로 넘어가 우리 히어로즈가 인계된 뒤에도 투수코치로 활동했다.[44] 2009년 10월에는 재활군 코치로 보직을 옮겼다.[45] 2010년 10월 23일 히어로즈와의 코칭스태프 계약을 끝내고 KIA 타이거즈와 코칭스태프 계약을 맺었으며[46], 불펜코치로 활동했다. 그러나 2013년 KIA 타이거즈가 극도의 부진에 빠지며 2군 코치로 보직이 변경됐고, 시즌 말에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KIA 타이거즈를 떠난 후 LG 트윈스의 2군 코치로 합류했으나[47] 아시안 게임 브레이크 중 해임됐다. 2016년삼성 라이온즈의 잔류군 투수코치로 임명되었고, 2017년에 삼성 라이온즈의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됐다.

2021 시즌 후 삼성과 결별한 그는 삼성 2군에서 코치로 함께한 적이 있는 박재현의 부름을 받아 제주고등학교의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Remove ads

출신 학교

통산 기록

자세한 정보 년도, 팀 ...
Remove ads

주요 기록

자세한 정보 기록, 연도 ...

각주

외부 링크

Loading content...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