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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웨일스
미국의 인터넷 사업가, 위키아 설립자, 위키미디어 재단 설립자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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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도널 웨일스(영어: Jimmy Donal Wales, 1966년 8월 7일~)[2]는 미국의 인터넷 기업가이자 전 금융 트레이더이다. 특히 그는 비영리 무료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와 영리 위키 호스팅 서비스인 팬덤(구 위키아)을 공동 창립했다. 그는 또한 보미스, 누피디아, 위키트리뷴, 트러스트 카페(Trust Café, 구 WT 소셜)에서 일했다.
앨라배마주 헌츠빌에서 태어난 웨일스는 랜돌프 스쿨에 다녔고 오번 대학교와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재무학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재학 중 두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나, 박사 학위를 마치기 전에 재무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떠났고, 나중에 시카고 옵션 어소시에이츠의 최고 연구 책임자가 되었다.
1996년, 그는 무료 동료 심사 백과사전인 누피디아(2000년–2003년)의 자금을 지원한 보미스를 공동 창립했다. 2001년 1월 15일, 래리 생어 등과 함께 위키백과를 시작했으며, 이는 빠르게 성장했다. 웨일스는 위키백과의 홍보대사이자 대중적 얼굴이 되었지만, 때때로 생어의 역할을 부인하며 단독 창립자 지위를 주장하기도 했다.
웨일스는 위키미디어 재단 이사회 창립 이후 이사회에 참여했으며, 이사회에서 임명한 "커뮤니티 창립자" 자리를 맡고 있다. 그는 위키마니아에서 매년 "위키 현황" 연설을 한다.[3] 위키백과를 만든 공로로 타임은 그를 2006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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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과 교육
요약
관점
웨일스는 1966년 8월 7일 앨라배마주 헌츠빌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출생증명서에는 생년월일이 8월 8일로 기재되어 있다.[4] 그의 아버지 지미 시니어[5]는 식료품점 매니저였고, 그의 어머니 도리스 앤(본명: 더들리)과 할머니 어마는 원룸 스쿨하우스 전통의 작은 사립 학교인 하우스 오브 러닝을 운영했으며,[6][7] 웨일스와 그의 세 형제자매는 그곳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6][8]
어린 시절 웨일스는 독서를 즐겼다.[9] 세 살 때 그의 어머니는 방문 판매원에게서 월드 북 백과사전을 샀다. 월드 북은 소유자들이 백과사전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페이지에 붙일 스티커를 보냈고, 웨일스는 그의 책에 그것들을 사용하며 "저는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사주신 백과사전에 스티커를 붙여 백과사전을 수정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농담합니다."라고 말했다.[5][10]
2005년 브라이언 램과의 인터뷰에서 웨일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 사립 학교를 "몬테소리 교육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며 "수많은 시간을 브리태니커와 월드 북 백과사전을 탐독하며 보냈다"고 말했다.[11] 웨일스의 학년에는 다른 아이들이 네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학교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학생들과 5학년부터 8학년까지의 학생들을 합반했다. 성인이 된 웨일스는 학교에 대한 정부의 처우에 대해 "국가의 끊임없는 간섭과 관료주의, 그리고 매우 거만한 감독관들"이 자신의 정치 철학에 형성적인 영향을 미 미쳤다고 언급하며 날카롭게 비판했다.[11]
8학년을 마친 후 웨일스는 헌츠빌에 있는 대학 예비 학교인 랜돌프 스쿨에 다니며 16세에 졸업했다.[12][13][14][15] 그는 학교가 그의 가족에게는 비쌌지만, "교육은 항상 우리 집안의 열정이었다... 전통적인 지식과 학습 접근 방식을 통해 좋은 삶의 기초를 다지는 것 말이다"라고 말했다.[11] 그는 1986년 오번 대학교에서 재무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6세에 오번 대학교에 입학했다.[7] 그 후 앨라배마 대학교의 재무학 박사 과정에 입학했으나, 석사 학위를 받고 인디애나 대학교 블루밍턴의 재무학 박사 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떠났다.[8][11][16]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그는 인터넷 판타지 게임을 하며 웹에 대한 흥미를 키웠다.[7] 그는 대학원 재학 중 두 대학에서 강의를 했지만, 박사 학위를 위해 필요한 박사 논문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지루함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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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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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웨일스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선물 및 옵션 거래 회사인 시카고 옵션 어소시에이츠에서 일했다.[11][17][18] 웨일스는 자신을 초기부터 인터넷에 중독되어 여가 시간에 컴퓨터 코드를 작성했다고 설명했다. 앨라배마에서 학업을 하던 중 그는 가상 롤플레잉 게임의 일종인 멀티 유저 던전에 광적으로 몰입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컴퓨터 네트워크가 대규모 협업 프로젝트를 촉진할 잠재력을 경험했다.[16][19]
1995년 넷스케이프의 성공적인 IPO에 영감을 받고, "이자율 및 외환 변동에 대한 투기"를 통해 자본을 축적한 후,[6] 웨일스는 금융 거래 분야를 떠나 인터넷 기업가로 나섰다.[16] 1996년, 그와 두 명의 파트너는 보미스를 창립했다.[6][20] 보미스는 사용자 생성 웹링과 한동안 소프트코어 포르노그래피를 특징으로 하는 웹 포털이었다.[21] 웨일스는 보미스를 맥심 잡지와 유사한 시장을 가진 "남성 지향 검색 엔진"이라고 설명했다.[8][11][22] 보미스 벤처는 결국 성공적이지 못했다.[6][8][23]
위키백과 이전

보미스는 당시 돈을 버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웨일스에게 그의 더 큰 열정인 온라인 백과사전을 추구할 자금을 제공했다.[8] 1990년대 초 객관주의 철학에 전념하는 온라인 토론 그룹을 운영하던 중, 웨일스는 이 철학에 회의적이었던 래리 생어를 만났다.[9] 둘은 웨일스의 목록에서, 그리고 생어의 목록에서 이 주제에 대해 자세한 토론을 벌였고, 결국 오프라인에서 만나 토론을 이어가며 친구가 되었다.[9] 몇 년 후, 백과사전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이끌 자격 있는 학자를 찾던 중,[19] 웨일스는 당시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생어를 편집장으로 고용했고, 2000년 3월 동료 심사를 거친 오픈 콘텐츠 백과사전인 누피디아("자유 백과사전")가 출시되었다.[8][11] 누피디아의 의도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전문가 작성 항목을 제공하고, 항목과 함께 광고를 판매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었다.[9] 이 프로젝트는 기사의 품질을 전문 백과사전과 비교할 수 있도록 설계된 광범위한 동료 심사 과정이 특징이었다.[24]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모든 언어로 온라인 백과사전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하향식, 구조적, 학술적, 구식 방식으로 작업을 조직했습니다. 많은 학술 동료 심사 위원회가 기사를 비판하고 피드백을 주었기 때문에 자원봉사자 작가들에게는 즐겁지 않았습니다. 대학원에서 에세이를 제출하는 것 같았고, 참여하기에는 기본적으로 위협적이었습니다.
2009년 10월 연설에서 웨일스는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로버트 C. 머턴에 대한 누피디아 기사를 쓰려고 시도했지만, 권위 있는 재무학 교수들이 동료 심사를 할 예정이었기에 초고를 제출하는 것이 너무나 위협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웨일스는 이 순간을 누피디아 모델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깨달은 순간으로 특징지었다.[26]
2001년 1월, 생어는 익스트림 프로그래밍 열광자 벤 코비츠에게 누피디아가 엄격한 제출 과정으로 인해 겪었던 느린 성장 속도를 설명한 후, 위키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27] 코비츠는 위키 모델을 채택하면 편집자들이 프로젝트 전체에서 동시에 점진적으로 기여할 수 있어 누피디아의 병목 현상을 해소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27] 생어는 이 아이디어에 흥분했고, 웨일스에게 제안한 후 2001년 1월 10일 첫 누피디아 위키를 만들었다.[27] 이 위키는 처음에 일반 대중이 기사를 작성하면 누피디아의 전문 자원봉사자들이 출판을 위해 검토하는 협업 프로젝트로 의도되었다. 그러나 누피디아의 전문가 대다수는 아마추어 콘텐츠와 전문적으로 연구되고 편집된 자료를 혼합하면 누피디아 정보의 무결성이 손상되고 백과사전의 신뢰도가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키백과"라는 이름이 붙은 위키 프로젝트는 생성 5일 후 별도의 도메인에서 시작되었다.[18][23]
위키백과
원래 보미스는 위키백과를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만들 계획이었다.[33] 생어는 처음에는 위키백과를 누피디아 개발을 돕는 도구로 주로 보았다. 웨일스는 최악의 경우 "완전한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18] 생어와 웨일스의 예상과 달리, 위키백과 출시 후 며칠 만에 위키백과의 문서 수가 누피디아의 문서 수를 넘어섰고, 소규모 편집자 집단이 형성되었다.[17][19] 일반 사람들이 기여할 수 있는 오픈 소스 협업 백과사전이라는 광범위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미 웨일스였다.[34] 처음에는 생어도 웨일스도 위키백과 이니셔티브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몰랐다.[18][19] 초기 사이트 기여자 중 많은 수가 자유 문화 운동 모델에 익숙했으며, 웨일스처럼 그들 중 많은 수가 오픈 소스 운동에 공감했다.[28]
웨일스는 초기에 누구나 백과사전을 편집할 수 있는 공개 편집 개념에 대해 너무 걱정한 나머지 밤에 잠에서 깨어나 어떤 내용이 추가되는지 모니터링하곤 했다고 말했다.[35][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편집자들의 간부들은 프로젝트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견고하고 자율적인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8] 2016년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강연에서 그는 위키백과에 처음 쓴 말이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테스트할 때 자주 사용하는 문구인 "Hello world"였다고 회상했다.[37]
래리 생어는 초기 단계에 위키백과를 개발하고 프로젝트를 이끌었다.[38][39] 그가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돌린 더 넓은 아이디어는 2005년 슬래시닷 회고록에서 "일반인들의 기여에 열려 있는 오픈 소스 협력 백과사전의 아이디어는 전적으로 지미의 것이었고 나의 것이 아니었으며, 자금은 전적으로 보미스가 제공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며, "이 백과사전의 실제 개발은 그가 나에게 맡긴 일이었다"고 덧붙였다.[40] 생어는 보미스가 2002년 2월 그의 직책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할 때까지 누피디아와 위키백과 프로젝트를 모두 진행하고 홍보했다.[41] 그 해 3월 1일에 생어는 누피디아의 편집장과 위키백과의 "최고 조직자" 자리에서 사임했다.[42][43] 초기에 보미스는 위키백과의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39][44] 생어의 이탈로 비용이 절감되고 비영리 재단 계획이 추진되기 전에 위키백과에 광고를 게재하는 방안을 검토했다.[33]
공동 설립자 지위 논쟁

웨일스는 자신이 위키백과의 유일한 설립자라고 말했으며,[46] 생어의 공동 설립자 지명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생어와 웨일스는 최소 2001년 9월부터 뉴욕 타임스에 의해 공동 설립자로, 2002년 1월 위키백과의 첫 보도 자료에서 설립자로 확인되었다.[47][48] 그 해 8월, 웨일스는 자신을 위키백과의 "공동 설립자"로 지칭했다.[49] 생어는 자신의 개인 웹페이지에 생어와 웨일스의 공동 설립자 지위를 확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링크 모음을 모아두었다.[38][50] 예를 들어, 생어와 웨일스는 초기 뉴스 인용문 및 보도 자료에서 역사적으로 공동 설립자로 언급되거나 묘사된다.[38] 웨일스는 2006년 2월 보스턴 글로브에 의해 생어의 발언을 "터무니없다"고 불렀고,[51] 2009년 4월 인터뷰에서는 "전체 논쟁"을 "어리석다"고 불렀다.[52] 2013년에 웨일스는 뉴욕 타임스에 이 논쟁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논란"이라고 말했다.[53]
2005년 말, 웨일스는 영어 위키백과에 있는 자신의 전기 항목을 편집했다. 작가 로저스 케이든헤드는 로그를 통해 웨일스가 페이지 편집에서 생어를 위키백과 공동 설립자로 언급한 내용을 삭제했음을 밝혀냈다.[54][55] 생어는 "이러한 편집을 보면 지미가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투명한 활동과 최대한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이 용감한 신세계에서는 진실이 드러날 것이므로 이는 헛된 과정이다"라고 논평했다.[22][56] 웨일스는 또한 보미스에 대한 언급을 수정하여 그의 이전 회사의 일부 제품의 성적인 성격을 경시하는 방식으로 변경한 것이 관찰되었다.[18][22] 웨일스는 자신의 수정이 전적으로 내용의 정확성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22] 위키백과에서 일반적으로 권장되지 않는 자신의 전기를 편집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22][56]
2025년, 웨일스는 독일 언론인 틸로 융과 장문의 인터뷰를 할 예정이었지만, 해당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자 1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57]
역할
2004년 슬래시닷과의 인터뷰에서 웨일스는 위키백과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설명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모든 인류 지식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다."[58] 그의 공식 직함은 위키미디어 재단 이사회 이사이자 명예 회장이지만, 위키백과 커뮤니티 내에서 웨일스의 사회 자본은 그에게 자비로운 독재자, 입헌 군주, 정신적 지도자로 특징지어지는 지위를 부여했다.[59][60][61] 2014년 가디언과의 두 번의 인터뷰에서 웨일스는 위키백과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첫 번째 인터뷰에서 그는 "자비로운 독재자"라는 용어를 "항상 거부해왔다"고 말했지만, 자신을 "입헌 군주"라고 지칭했다.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입헌 군주"라는 지칭에 대해 엘리자베스 2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는 실제 권한이 없다고 설명했다.[2][62] 그는 또한 초기 몇 년 동안 프로젝트의 대변인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9] 위키백과의 성장과 명성으로 인해 웨일스는 인터넷 유명인이 되었다.[63] 사이트 설립 전에는 북미 이외 지역으로 여행한 적이 없었지만, 위키백과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그는 대외적인 얼굴로서 거의 끊임없이 국제적으로 비행하고 있다.[9][64]
래리 생어가 위키백과를 떠났을 때, 웨일스의 접근 방식은 생어의 접근 방식과는 달랐는데,[65] 그는 상당히 느슨하게 관리했다.[65]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웨일스는 위키백과 내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축소할 의도를 부인하며 2008년 뉴욕 타임스에 "나에게는 축소하는 것이 선택지가 아니다... 너무 극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언어로 최고 품질의 무료 백과사전을 만들고 배포하는 것'이 바로 나다. 그것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것이 나의 인생 목표이다"라고 말했다.[60] 2010년 5월, 영국방송공사는 웨일스가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많은 기술적 특권을 포기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웨일스가 "오로지 음란한 관심에만 호소한다"고 판단한 성적으로 노골적인 이미지를 성급하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삭제했다는 프로젝트 자원봉사자 커뮤니티의 비판 이후였다.[66]
위키미디어 재단

2003년 중반, 웨일스는 세인트피터즈버그에 설립되어 나중에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비영리 단체인 위키미디어 재단(WMF)을 설립했다.[67][68] 모든 위키백과 지적 재산권 및 도메인 이름은 새로운 재단으로 이전되었고,[69] 이 재단의 목적은 백과사전 및 자매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이다.[19] 웨일스는 위키미디어 재단 이사회가 설립된 이래로 구성원이었으며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공식 의장이었다.[70] 2006년부터 그는 명예 의장 emeritus라는 명예 직함을 받았으며 2008년에 설치된 이사회에서 임명된 "커뮤니티 설립자 자리"를 맡고 있다.[71][72][73] 컴퓨터 및 교육 컨퍼런스에서 재단을 홍보하기 위한 그의 출연을 포함하여 재단을 위한 그의 모든 작업은 무급이었다.[21] 웨일스는 위키백과를 재단에 기부한 것이 그가 한 일 중 "가장 멍청하고 가장 똑똑한" 일이라고 농담 삼아 자주 말했다. 한편으로 그는 위키백과의 가치가 30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부가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는 자신의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25][69][74][75] 2020년에 웨일스는 "내 역할은 영국 현대 군주의 역할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권력은 없지만, 자문할 권리, 격려할 권리, 경고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76]
웨일스의 재단과의 연관성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8년 3월, 웨일스는 전 위키미디어 재단 직원 대니 울에게 재단 자금을 오락 목적으로 오용했다고 비난받았다.[77] 울은 또한 웨일스가 그의 지출 습관 때문에 위키미디어 신용카드를 압수당했다고 말했고, 웨일스는 이 주장을 부인했다.[77] 당시 재단 의장이었던 플로랑스 드부아르와 전 재단 임시 전무 이사 브래드 패트릭은 웨일스나 재단의 어떠한 위법 행위도 부인하며, 웨일스가 모든 비용을 설명했고 영수증이 없는 항목에 대해서는 사비로 지불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드부아르는 웨일스에게 "계속해서 과거를 다시 쓰려고 한다"고 질책했다.[78]
2008년 3월 말, 전 노벨 컴퓨터 과학자 제프 머키는 웨일스가 위키미디어 재단에 기부를 받는 대가로 자신의 위키백과 항목을 더 유리하게 편집했다고 주장했으며, 웨일스는 이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79][80] 2016년 초, 위키백과 편집자들은 WMF의 지식 엔진 프로젝트를 웨일스에게 이해충돌로 여겼다. 왜냐하면 웨일스의 회사 위키아(Wikia)가 검색 관련 연구에 WMF가 많은 돈을 지출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81] 위키아는 검색 엔진을 개발하려고 시도했지만 2009년에 중단되었다.[81]
위키아 및 후기 활동
2004년, 웨일스와 당시 WMF 이사회 동료였던 안젤라 비슬리는 영리 회사인 위키아를 설립했다.[17] 위키아는 위키 호스팅 서비스—서로 다른 주제의 개별 위키들을 모두 같은 웹사이트에 호스팅하는 서비스이다. 여기에는 위키백과 외부에 있는 가장 큰 위키들 중 일부가 포함되는데, 예를 들어 스타 트렉에 전념하는 메모리 알파와 스타워즈의 우키피디아 등이 있다.[82] 위키아에서 제공하는 또 다른 서비스는 구글에 도전하고 검색 엔진 운영에 투명성과 공개적인 대화를 도입하기 위한 오픈 소스 검색 엔진인 위키아 검색이었지만,[83] 이 프로젝트는 2009년 3월에 중단되었다.[84] 웨일스는 2006년 6월 5일 이베이의 전 부사장 겸 총괄 책임자였던 엔젤 투자자 길 펜치나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며 위키아 CEO에서 물러났다.[85] 펜치나는 2009년 9월 위키아가 수익성을 달성했다고 발표했다.[86] 위키아에서의 역할 외에도 웨일스는 해리 워커 에이전시가 대표하는 대중 연설가이다.[87][88] 그는 또한 스위스 시계 제조사 모리스 라크로아의 유명인 광고 캠페인에 참여했다.[89]
2011년 11월 4일, 웨일스는 영국 더 세이지 게이츠헤드에서 영국방송공사 라디오 3의 2011년 Free Thinking Festival을 시작하기 위해 한 시간짜리 연설을 했다.[90] "인터넷의 미래"라는 제목의 그의 연설은 주로 위키백과에 관한 것이었다. 20일 후인 11월 24일, 웨일스는 영국의 시사 토론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퀘스천 타임에 출연했다.[91]
2012년 5월, 웨일스가 영국 정부에 세금으로 지원되는 학술 연구를 인터넷에 무료로 제공하는 방법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92] 그의 역할은 "크라우드소싱 및 정책 결정을 개방하는 무급 자문가"로 일하고, 기업혁신기술부와 영국 연구 위원회에 연구 배포에 대해 자문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보도되었다.[92]
2014년 1월, 웨일스가 모바일 네트워크 더 피플스 오퍼레이터의 공동 의장으로 합류했다고 발표되었다.[93] 2014년 3월 21일, 웨일스는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에서 열린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 대학 컨퍼런스 패널에 존 매케인,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인권 운동가 마날 알샤리프, 하버드 대학교 학생 슈리 보스와 함께 연설했다.[94] 토론 주제는 "참여의 시대"였으며,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의 교육을 추구하며,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것이었다. 웨일스는 젊은이들에게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여 사회 변화를 가져오도록 촉구했고, 정부의 인터넷 억압을 인권 침해에 비유했다.[95]
2014년 5월 26일, 구글은 구글 대 곤살레스 판결에 따라 검색 결과에서 웹사이트를 삭제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자, 웨일스를 7인 프라이버시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했다. 웨일스는 이 위원회가 입법자들에게 "블루리본 패널"로 여겨지고, 구글뿐만 아니라 입법자들에게도 자문 역할을 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96]
2017년, 웨일스는 전문 기자와 자원봉사 기고가들의 조합을 통해 가짜 뉴스와 싸우기 위한 온라인 출판물 위키트리뷴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웨일스는 이를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을 위한 뉴스"라고 설명하며, "전문 기자와 시민 기자가 실시간으로 스토리를 쓰고, 개발되는 대로 실시간으로 편집하며, 항상 모든 사실을 확인하고 재확인하는 커뮤니티의 지원을 받는 최초의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97] 2019년 10월, 웨일스는 광고 없는 소셜 네트워크인 WT 소셜을 출시했다.[98][99]
지미 웨일스 재단 표현의 자유(Jimmy Wales Foundation for Freedom of Expression)는 웨일스가 표현의 자유 분야의 인권 침해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설립한 영국 기반의 자선 단체이다.[100][101][102] 웨일스는 두바이 지도자로부터 상을 받은 후 엄격한 검열 법규 때문에 상을 수락할 수 없다고 느꼈지만, 돌려줄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이 자선 단체를 설립했다.[101] 2016년 현재 자선 단체의 CEO는 오릿 코펠이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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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견해
요약
관점
개인 철학

웨일스는 이전에 자신을 객관주의자라고 칭했으며,[83] 이는 이성, 개인주의, 자본주의를 강조하는 20세기 중반 작가 아인 랜드의 철학을 의미한다. 웨일스는 학부 시절 랜드의 소설 파운틴헤드를 읽으면서 처음 이 철학을 접했고[11] 1992년 "객관주의 철학에 대한 조정된 토론"을 위한 전자 메일링 리스트를 설립했다.[9][104] 그는 이 철학이 "내가 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지만,[9] "나는 스스로를 객관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보다 나의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기 위해 더 잘 노력한다"고 말했다.[105]

2005년 9월 C-SPAN의 Q&A에 출연했을 때 브라이언 램이 랜드의 영향에 대해 질문하자, 웨일스는 인티그리티와 "독립의 미덕"을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아인 랜드와의 연결 고리"를 개인적인 정치 철학으로 추적할 수 있는지 묻자, 웨일스는 자신을 자유지상주의자라고 지칭하며, 자유당을 "미치광이"라고 언급하고 "자유, 개별 권리, 즉 다른 사람에게 강제를 시작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하는 생각"을 자신의 주요 원칙으로 들었다.[11] 2014년 트윗에서 그는 열린 국경을 지지한다고 밝혔다.[106]
웨일스와의 인터뷰는 2007년 6월 자유지상주의 잡지 리즌의 표지 기사로 실렸다.[8] 이 프로필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중도 우파"라고 묘사했다.[8] 2011년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월가를 점거하라와 런던 점령 시위자들에게 동정심을 표하며 "모든 사람에게서 돈을 빼앗아 소수의 부자들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데 사회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자유 기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107]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댄 호지스는 웨일스를 "노동당 동조자"라고 묘사했다.[108] 2015년에 웨일스는 에드 밀리밴드에게 노동당의 소셜 미디어 전략을 돕겠다고 제안했지만, 밀리밴드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108]
2015년에 웨일스는 민주당 로런스 레시그의 2016년 대통령 선거 운동의 위원회 의장으로 서명했다.[109] 2016년에 웨일스와 11명의 다른 기업 리더들은 미국 유권자들에게 그 해의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했다.[110] 2017년 5월, 웨일스는 쿼라에서 자신은 중도주의자이자 점진주의자이며 "느린 단계별 변화가 더 좋고 지속 가능하며 사회에 최소한의 어려운 혼란을 주면서 새로운 것을 시험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111] 2022년 5월, 웨일스는 어떤 특정 정치적 명칭에도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12] 2024년 5월, 2024년 영국 총선을 앞두고 그는 영국 노동당에 대한 공개 지지 서한에 공동 서명했다.[113][114]
위키백과의 개발 및 관리
웨일스는 학부 시절 읽었던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에세이 "사회에서의 지식의 사용"을 위키백과 프로젝트 관리 방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의 "중심"으로 언급했다.[18][8] 하이에크는 정보는 분산되어 있다—각 개인은 집단적으로 알려진 것의 작은 부분만을 안다—따라서 의사 결정은 중앙 권위가 아니라 지역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잘 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8] 웨일스는 1990년대에 오픈 소스 운동에 대해 읽으면서 하이에크의 에세이를 재고했으며, 이 운동은 소프트웨어의 공동 개발 및 무료 배포를 옹호했다. 그는 특히 이 운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에릭 레이먼드의 에세이 "성당과 시장"에 감동받았는데, 이 에세이는 나중에 같은 이름의 책으로 각색되었고, 이는 "대규모 협업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했다.[18]
금융 배경과 선물 및 옵션 거래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웨일스는 게임 이론과 인센티브가 인간 협력 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매혹이 위키백과 프로젝트 개발 작업의 중요한 기반이라고 밝힌다.[115] 그는 위키백과를 홍보하는 자신의 역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가치를 희생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이타적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며, "정보 공유를 위한 자비로운 노력에 참여하는 것이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파괴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64]
유럽 사법재판소 판결
2014년 5월 14일, 웨일스는 유럽 사법재판소 (ECJ)의 개인의 구글 검색 결과에서 정보 삭제를 요청할 권리에 대한 판결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BBC에 이 판결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광범위한 인터넷 검열 판결 중 하나"라고 말했다.[116] 2014년 6월 초, TechCrunch 미디어는 웨일스와 이 문제에 대해 인터뷰했는데, 그는 구글이 ECJ가 그러한 요청을 관리하기 위해 공식 절차에 추가로 구성한 자문 위원회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았기 때문이다.[117]
2014년 5월 ECJ 판결은 구글에게 사람들이 구식 또는 관련 없는 정보 삭제에 대해 회사에 직접 연락할 수 있는 절차를 신속하게 구현하도록 요구했다. 구글의 래리 페이지는 판결 이후 구글이 받은 요청 중 30%가 "기타"로 분류되었다고 밝혔다. 웨일스는 이메일 답변에서 2014년 5월 28일에 구글로부터 연락을 받았으며, "위원회는 공개 청문회를 개최하고 구글뿐만 아니라 입법자와 대중에게도 권고를 발행하는 권한을 가진다"고 설명했다.[117] ECJ의 "잊혀질 권리" 판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묻자, 웨일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 결정은 사람들의 사생활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법원 명령에 따라 신문에 게시된 법원 기록의 진실한 정보를 사적인 정보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결정은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생활 문제에 대한 진정한 진전을 이루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합법적으로 얻은 진실하고 명예 훼손이 아닌 정보의 경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검열할 수 있는 어떠한 정당한 "권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데이터"와 같은 용어는 우리가 "데이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117]
웨일스는 이어서 위키백과와의 비교를 통해 추가 설명을 제공했다. "당신은 위키백과 편집자들이 진실한 정보를 쓰는 것을 막기 위해 법을 사용할 권리가 없으며, 구글이 진실한 정보를 게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을 사용할 권리도 없다." 웨일스는 자신의 이상적인 결과에 대한 암시로 결론을 내렸다. "결과의 일부는 유럽에서 언론의 자유에 대한 매우 강력한 이행, 즉 본질적으로 미국 헌법 수정 제1조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117]
이스라엘
웨일스는 이스라엘을 10번 이상 방문했다. 2015년 유대인 전신국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웨일스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아파르트헤이트를 행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저는 이스라엘의 강력한 지지자이므로 그러한 비판자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라고 언급했다.[118] 그 해 그는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매년 수여되는 국제 상인 댄 데이비드 상 중 하나를 수상했으며, 상금 100만 달러의 10%는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돌아갔다. 웨일스는 상 위원회가 "정보 혁명"이라고 부른 것을 선도한 공로로 선정되었다.[119]
2018년, 몬도바이스는 필립 바이스의 기사를 게재하며 지미 웨일스가 하마스의 이스라엘 로켓 공격에 대해 침묵하여 반유대주의 혐의에 대한 면역력을 얻을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하는 소셜 미디어 게시물 때문에 이스라엘 편에 선 것처럼 보인다고 묘사했다. 지미 웨일스는 몬도바이스에 해당 기사가 "저에게는 거짓이며 깊이 불쾌하다"고 말하며 기사 철회를 요구했고, 이스라엘의 공격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하마스를 "테러 조직"이라고 불렀다.[120]틀:Undue weight inline
2025년 11월, 웨일스는 가자 학살에 대한 위키백과 페이지를 토론 페이지에서 비판했다. 그는 해당 페이지의 이스라엘이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있다는 주장이 위키백과의 중립적인 관점 유지 정책을 위반한다고 주장하며, 해당 문서가 중립성을 유지하지 못한 "특히 심각한 사례"라고 말했다.[121][122][123] 그의 가자 학살 페이지 개입은 다른 위키백과 편집자들에 의해 공정한 조직의 의견을 묵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24]
2025년 문화 전쟁
2025년 10월, 웨일스는 "문화 전쟁" 또는 "언론 전쟁"에 대해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를 가졌다.[125] 이는 공화당 의원들과 트럼프 백악관이[126] 위키백과의 활동과 의심되는 "조직적 편향"을 조사하고 면밀히 검토하려는 일련의 시도였다.[127]
그는 인터뷰에서 위키백과와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해 논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키백과는 제가 원하는 만큼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들이 우리를 어느 정도 신뢰하는 이유 중 일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말 투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것을 장기적으로 설계하고 있으며, 그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의 격렬한 군중에게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를 유지하고 신뢰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일을 할 것이고, 가능한 한 잘 해낼 것입니다."[127]
기타 문제

2006년 1월/2월호 <트레이딩 멕시멈 PC>는 웨일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으로 민감한" 위키백과 문서를 검열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구글, 야후! 및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다른 기업 인터넷 회사들은 이미 중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바 있다. 웨일스는 구글과 같은 회사들이 위키백과의 정보 자유 정책을 준수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128] 2010년에 웨일스는 내부 고발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와 그 편집장 줄리언 어산지를 비판하며, 그들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문서 출판이 "누군가를 죽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들이 "위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짜증을 표했다.[129] "그들이 하는 일은 진정한 위키가 아니다. 위키의 본질은 공동 편집 과정이다."[130]
2007년 12월 11일, 웨일스는 미국 상원 국토안보정부위원회 앞에서 증언했다.[131] 그는 또한 상원 위원회에 "전자 정부 2.0: 혁신, 협력 및 접근 개선"이라는 제목의 서면 증언을 제출했다.[131]
2012년, 웨일스는 리처드 오드와이어를 미국으로 송환하는 것에 반대하는 청원을 영국의 영국의 내무장관에게 제출했다.[132] 송환을 피하기 위한 합의가 이루어진 후, 웨일스는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며, 기쁘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이러한 터무니없는 일이 처음부터 가능하게 만든 영국 송환 조약에 대한 진지한 재고이다"라고 언급했다.[133]
2013년 8월, 웨일스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의 인터넷 포르노 필터 계획을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134] 2013년 11월, 웨일스는 스노든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에드워드 스노든을 역사가 "매우 호의적으로" 판단할 "영웅"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웨일스는 미국 대중이 스노든이 폭로한 "대규모 감시 프로그램"에 대해 미리 알았거나 질문을 받았다면 "절대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135]
2014년 게이머게이트 논란 중, 위키백과가 "게이머게이트에 대한 중립성 시도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컴퓨터 과학 학생의 이메일에 대한 응답으로, 웨일스는 "개인적으로 겪었던 모든 경험이 친GG 사람들이 모욕하고, 위협하고, 신상을 털고 하는 것과 관련되었을 때, 게이머게이트가 '진정으로 저널리즘 윤리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기 매우 어렵다"고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운동은 "당신이 바라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영구적으로 더럽혀지고 납치되었다"고 덧붙였다.[136] 웨일스는 게이머게이트 지지자들의 반발에 대해 "내가 믿는 바에 관한 것이 아니다. GG는 괴롭힘으로 유명하다. 멈춰서 왜 그런지 생각해 보라"고 말하며 자신의 발언을 옹호했다.[137]
2019년 11월, 웨일스는 트위터가 트럼프나 일론 머스크와 같은 저명한 인물들에게 논란이 되는 발언으로 인해 계정을 정지하거나 차단하지 않는 특혜를 준다고 비난했다.[138] 2020년 5월, 웨일스는 트럼프가 소셜 미디어 회사들을 규제하겠다고 위협한 것을 비판했다.[139]
2021년 9월, 웨일스는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논란이 되는 게시물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자원봉사 중재자를 배치하여 플랫폼의 오보와 학대에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140] 2021년 10월, 웨일스는 "강력한 암호화를 보호하는 것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141]
2022년 5월,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제안에 대해 웨일스는 "그의 공개 발언에 따르면 좋은 아이디어와 나쁜 아이디어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반면 트위터는 5년 안에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수도 있고, 그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5년 안에 사라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142] 코로나19 범유행 동안, 웨일스는 위키백과에서 실험실 유출설에 대한 주류 언론의 합의가 "매우 가능성이 낮고, 음모론자들만이 이 주장을 밀어붙이고 있다"에서 "이것이 그럴듯한 가설 중 하나이다"로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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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생활

웨일스는 세 번 결혼했다. 20세에 그는 앨라배마의 식료품점에서 동료였던 파멜라 그린과 결혼했다.[144][64] 그들은 1993년에 이혼했다.[7] 그는 두 번째 아내 크리스틴 로한을 시카고의 친구를 통해 만났는데, 당시 그녀는 미쓰비시 그룹에서 철강 거래자로 일하고 있었다.[11][16] 그들은 1997년 3월 먼로군 (플로리다주)에서 결혼했으며,[145] 2008년에 헤어지기 전에 딸을 낳았다.[144][11][64] 웨일스는 1998년에 샌디에고로 이사했고, 그곳의 주택 시장에 실망한 후 2002년 세인트피터즈버그로 이사했다.[16][44][146]
그는 2008년 캐나다 보수주의 칼럼니스트 레이첼 마스덴과 짧은 관계를 가졌다. 이 관계는 마스덴이 자신의 위키백과 전기 문제로 웨일스에게 연락하면서 시작되었다.[147] 웨일스의 관계가 이해충돌을 구성한다는 비난이 제기된 후, 그는 관계가 있었지만 이미 끝났으며 위키백과의 어떠한 문제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진술했고,[148][149] 마스덴은 이 진술에 이의를 제기했다.[150]
웨일스는 2012년 10월 6일 런던의 웨슬리 채플에서 케이트 가비와 결혼했다.[151] 가비는 토니 블레어 전 일기 비서였으며, 두 사람은 스위스 다보스에서 만났다.[152][153] 웨일스는 로한과의 딸 외에 가비와 두 명의 딸을 두고 있다.[2][154] 웨일스는 무신론자이다. Big Think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철학이 확고하게 이성에 뿌리박고 있으며, 완전한 불신자라고 말했다.[155] 그는 열정적인 요리사이다.[76][156]
웨일스는 2012년부터 런던에 거주했으며,[157] 2019년에 영국 시민이 되었다.[158] 2021년 팀 페리스 쇼 팟캐스트에서 그는 페리스의 책 4시간 업무를 읽은 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한 달 동안 비밀리에 살았다고 밝혔다.[159]
웨일스의 책 신뢰의 7가지 규칙은 2025년 10월 펭귄 랜덤 하우스에서 출판되었다. 출판사는 이 책을 "신뢰성과 지식의 세계적 위기에 대한 폭넓은 성찰"로 묘사했으며, 위키백과의 성장과 성공을 가능하게 한 "신뢰의 규칙"을 탐구한다고 밝혔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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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물
- Brooks, Robert (1994). 《The Pricing of Index Options When the Underlying Assets All Follow a Lognormal Diffusion》. 《Advances in Futures and Options Research》 7. SSRN 5735.
- Mons, B.; Ashburner, M.; Chichester, C.; Van Mulligen, E.; Weeber, M.; Den Dunnen, J.; Van Ommen, G. J.; Musen, M.; Cockerill, M.; Hermjakob, H.; Mons, A.; Packer, A.; Pacheco, R.; Lewis, S.; Berkeley, A.; Melton, W.; Barris, N.; Wales, J.; Meijssen, G.; Moeller, E.; Roes, P.; Borner, K.; Bairoch, A. (2008). 《Calling on a million minds for community annotation in WikiProteins》. 《유전체 생물학》 9. R89쪽. doi:10.1186/gb-2008-9-5-r89. ISSN 1465-6906. PMC 2441475. PMID 18507872.
- Wales, Jimmy (2008년 12월 31일). 〈Foreword〉 1판. Fraser, Matthew; Dutta, Soumitra (편집). 《Throwing Sheep in the Boardroom: How Online Social Networking Will Transform Your Life, Work and World》. Wiley. ISBN 978-0-470-74014-9. OCLC 233939846.
- Wales, Jimmy (2009년 1월 8일). “Commentary: Create a tech-friendly U.S. government”. CNN. 2011년 8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2월 29일에 확인함.
- Wales, Jimmy (2009년 2월 10일). 〈Foreword〉 1판. Powell, Juliette (편집). 《33 Million People in the Room: How to Create, Influence, and Run a Successful Business with Social Networking》. 파이낸셜 타임스 프레스. ISBN 978-0-13-715435-7. OCLC 244066502.
- Wales, Jimmy (2009년 3월 3일). 〈Foreword〉 2판. Weber, Larry (편집). 《Marketing to the Social Web: How Digital Customer Communities Build Your Business》. Wiley. ISBN 978-0-470-41097-4. OCLC 244060887.
- Wales, Jimmy (2009년 3월 17일). 〈Foreword〉 1판. Lih, Andrew (편집). 《The Wikipedia Revolution: How a Bunch of Nobodies Created the World's Greatest Encyclopedia》. 하이페리온. ISBN 978-1-4013-0371-6. OCLC 232977686.
- Wales, Jimmy (2009년 3월 30일). 《Most Define User-Generated Content Too Narrowly》. 《애드버타이징 에이지》 80. 2012년 7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5월 4일에 확인함.
- Wales, Jimmy (2009년 12월 28일). “Keep a Civil Cybertongue”. 《월스트리트 저널》. 2017년 5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8월 8일에 확인함.
- Wales, Jimmy (2025년 10월 28일). 《The Seven Rules of Trust: A Blueprint for Building Things That Last》 1판. 펭귄 랜덤 하우스. ISBN 978-0-593-727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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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 웨일스는 2008년 세계 경제 포럼 중동 지역 공동 의장을 역임했으며,[161] 소셜텍스트의 이사를 역임했다.[162]
- 그는 하버드 로스쿨의 버크만 인터넷 사회 센터 회원이며,[11] MIT 집단 지능 센터 자문 위원회,[163]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이사회[164] 및 Hunch.com의 이사회 멤버이다.[165]
- 2006년, 웨일스는 타임 100의 "과학자 및 사상가" 섹션에 이름을 올렸고[166] 포브스 "웹 셀럽 25"에서 12위를 차지했다.[167]
- 웨일스는 또한 "예술과 문화에 주요 기여를 하고 더 나은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특별한 개인"을 기리는 뉴 뮤지엄의 스튜어트 리젠 비전 시리즈에서 강연했으며,[168] 세계 경제 포럼에 의해 2007년 젊은 글로벌 리더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169]
- 2008년 글로벌 브랜드 아이콘 상,[170] 그리고 위키미디어 프로젝트를 대표하여 계몽 사명으로 Werkstatt Deutschland의 콰드리가 상을 수상했다.[171]
- 2009년 노키아 재단 연례상,[172] 디 이코노미스트의 제7회 연례 혁신상 및 서밋에서 비즈니스 프로세스 상을 수상했다.[173]
- 2011년 4월, 웨일스는 트라이베카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174] 웨일스는 파이오니어 상,[175] 고틀리프 두트바일러 상 및 레오나르도 유럽 기업 학습 상을 수상했다.[176] 2011년에는[177][178] 모나코 미디어 상을 수상했다.[179] 웨일스는 또한 녹스 칼리지,[180] 애머스트 칼리지,[181] 스티븐슨 대학교,[181][182] 아르헨티나의 Universidad Empresarial Siglo 21,[183] 러시아의 MIREA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184]
- 2013년 12월 5일, 웨일스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열린 세상" 컨퍼런스에서 닐스 보어의 원자 이론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네스코 닐스 보어 메달을 수상했다. 그의 "위키백과, 민주주의, 인터넷" 발표는 위키백과를 거의 전 세계 모든 언어로 확장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위키백과 제로" 이니셔티브는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에게 교육 목적으로 위키백과에 무료로 접근할 수 있도록 통신 회사들을 장려하는 데 성공하기 시작했다.[185][186] 웨일스는 2013년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87]
- 2014년 2월, 웨일스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의해 "25명의 웹 슈퍼스타"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188] 2014년 5월 17일, 웨일스는 이탈리아 스위스 대학(USI Lugano, Switzerland) 통신 과학부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189] 2014년 6월 25일, 웨일스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칼레도니안 대학교에서 노벨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0] 2014년 7월 10일, 웨일스는 위키백과 설립 공로로 영국 Tech4Good Awards "특별상"을 수상했다. 그는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조직 및 개인에게 수여되는 다양한 부문의 8명 수상자 중 한 명이었다.[191][192] 2014년 12월, 웨일스는 월드 와이드 웹 발명가 팀 버너스리 경과 함께 제1회 모하메드 빈 라시드 지식 상 100만 달러를 공동 수상했다.[193]
- 2015년 1월, 마스트리흐트 대학교는 웨일스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194] 2015년 4월 25일, 웨일스는 존 본 조비와 에드워드 노턴과 함께 Common Wealth Award of Distinguished Service를 수상했다.[195] 2015년 5월 17일, 웨일스는 "현재" 부문(다른 사람들은 "과거" 및 "미래" 사회 공헌으로 해당 금액을 수상)에서 100만 달러의 댄 데이비드 상을 수상했다.[196] 그는 "세계 최대 온라인 백과사전 출범" 공로로 상을 받았다.[197]
- 2016년 1월, 웨일스는 레벅 남작 부인과 함께 가디언 미디어 그룹의 비상임 이사가 되었다.[198][199] 2017년, 그가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200] 2016년 2월 2일, 그는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201][202]
- 2016년 6월, 위키마니아 2016 개막식에서 웨일스는 에시노라리오의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203]
- 2017년 9월, 그는 영국 학사원으로부터 "세계 최대의 무료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백과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작업을 통해 정보 확산을 촉진한 공로"로 회장 메달을 수상했다.[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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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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