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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명신록 (김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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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육(金堉)이 조선조의 인물 367명의 언행과 행적을 엮은 인물 평전이다. 전17책.
개설
요약
관점
영조 15년(1739년) 1월 9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있었던 소대(召對)에서 검토관 오수채(吳遂采)가 "《국조명신록》은 고 상신(相臣) 김육이 지은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사흘 전인 6일에 영조가 한훤당 김굉필의 문집이 혹시 남아 있는지 옥당(홍문관)에서 그것을 소장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하교하였는데,[1] 오수채는 홍문관에도 시강원에도 한훤당의 문집을 찾아볼 수 없다며 조만간 외간에서 찾아보겠다고 아뢰면서 《국조명신록》에 김굉필이 실려 있음을 언급하였고[2] 이 과정에서 《국조명신록》이라는 책 이름과 그 저자로써 김육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잠곡집》이나 김육의 연보에는 김육이 《국조명신록》을 편찬했다는 내용은 김육의 연보나 문집 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서문이나 발문이 포함된 인쇄본도 현전하지 않고, 필사본 2종만 현전하고 있다.
'국조명신록'이라는 저술을 남겼다고 전하는 인물은 김육 외에도 조선 영조 때의 문신인 이존중이 《국조명신록》을 저술한 바 있다고 알려져 있고,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해동명신록》과 《국조명신록》이라는 저술의 저자를 각각 따로 기술하면서 김육이 《해동명신록》, 송성명(宋成明)이라는 인물이 《국조명신록》의 저자로 기재되어 있다.[3]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도 송성명을 《국조명신록》의 저자로 언급[4]하고 있으며, 정조 역시 이의현이 지은 《인물고》를 교감하면서 김육의 《해동명신록》과 송성명의 《국조명신록》을 참고하였다고[5] 하여, 《국조명신록》의 저자와 김육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한편 《매산집》(梅山集)에는 순조 21년(1821년) 홍직필(洪直弼)이 심헌영(沈獻永)에게 답장한 편지에서 "존백씨장(尊伯氏丈)께서 지으신 국조명신록은 바로 회옹(晦翁, 주희)이 송나라 명신들의 언행을 모아 명신록(名臣錄)을 엮었던 뜻을 계승한 것입니다. 취사선택할 때에 절로 권도가 있어서 정밀하고 간절하여 어긋나지 않았을 것인데 책으로 만드신 것이 몇 권이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6]라고 하여 백씨장(伯氏丈), 즉 심헌영의 형인 심관영을 《국조명신록》이라는 저술의 저자로 지목하고 있기도 하다. 홍직필은 심헌영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서 "김잠곡(金潛谷, 김육)과 이척재(李惕齋, 이서구)도 모두 이를 엮었으나, 소략한 잘못이 있기도 하고 번잡함에 해당하기도 하여 만들어진 책에 흠이 있으니 사람들에게 유감"이 되므로 심관영이 《국조명신록》을 엮었다[6]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국조명신록'이라는 제목이 붙은(혹은 그렇게 통칭되던) 저술이 심관영과 김육, 이서구가 저술한 것이 각각 따로 존재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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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요약
관점
'한국고전적종합목록'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청구기호; 3692)과 전남대학교 도서관(청구기호; 2H1-국75ㄱ-v.1-16)에 각각 필사본이 소장되어 전하고 있는데, 서울대 소장본은 17책, 전남대 소장본은 16책으로 서울대쪽이 1책 더 많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에서는 본서를 김육의 저서로 확인하였고, 이성무(李成茂)도 마찬가지로 이를 김육의 저서로 파악하고 있다.[7]
우정임은 송시열이 지은 김응하(金應河)의 묘비명에는 김육의 《국조명신록》에 김응하가 실려 있다[8]고 한 점,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김육이 '명신록'을 편찬하면서 최명길(崔鳴吉)을 싣지 않고 장유(張維)를 실었더니, 조경(趙絅)이 편지로 그 부당함을 질책하였다[9]고 한 점에 비추어, 현존하는 《국조명신록》과 《해동명신록》에 김응하가 모두 실려 있는 반면 장유는 《해동명신록》, 최명길은 《국조명신록》에만 실려 있어서, '명신록'이라 명명된 김육의 저서가 2종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필사본 《국조명신록》 이 김육의 저서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10] 이담의 묘갈명에도 이담의 행적이 '김육의 국조명신록'에 올랐다고 적고 있다.[11]
《해동명신록》 이후 정도응의 《소대명신행적》, 송징은, 송성명 부자의 《국조명신언행록》, 이존중의 《국조명신록》, 여광헌의 《동국명신록》 등 일련의 '명신록'류 서적들이 편찬되었다.[12] 이미 이전에도 주세붕이 중종 36년(1541년)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을 편찬하였고, 류성룡의 문집에 실린 '제동국명신언행록'의 발문을 통해 《동국명신언행록》이라고 불리는 저술들이 주세붕과 류성룡에 의해 각각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 항목은 김육이라는 인물이 저술한 '국조명신록'이라는 제목이 붙은 서적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국조명신록'이라는 제목의 서적을 김육이 저술하였다는 기록만으로 기록에 등장하고 실물이 현존하는 모든 동명의 저술들을 김육의 저술로 돌려버리는 것과 같은 혼선이 생길 소지가 있다.
이는 '국조명신록'이라는 제목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국조명신록'이나 '해동명신록'은 제목으로 봤을 때 모두 한국사를 배경으로 학문적 성취 또는 행정적 업적을 기준으로 '명신'(名臣)으로 꼽히는 문무 관료들의 사적을 모아 엮은 저술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는데, 《국조보감》나 《해동신감》, 《동국통감》의 사례처럼 '국조'(國朝)나 '해동'(海東), 또는 '동국'(東國)은 대부분 한국사(주로 조선 왕조)와 관련한 주제를 다룬 저술들에 붙는 관용어이기도 하다.
김육이나 이존중 외에도 국조명신록이라는 제목, 또는 그러한 제목으로도 지칭되는 저술을 남긴 이들은 많았다. '국조명신록'이라는 제목으로 기록에 언급되는 경우 그것이 《국조명신록》이라는 특정한 책의 제목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단순하게 '국조' 즉 우리 나라의 명신들에 대해 다룬 ('명신록'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련의 기록물군(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또는 단순한 약칭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 점은 '국조명신록'이라는 저술에 대한 기록들을 분석, 해석함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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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요약
관점
인물 개개인의 앞부분에는 글자를 한 칸씩 내려써서 본문과 표가 나도록 하고 각 인물의 자(字), 호(號), 본관(本貫), 간략한 가계, 과제(科第), 관력(官歷), 졸년(卒年) 및 향년(享年), 배향(配享), 증시(贈諡), 사후의 추존(追尊) 사실 등을 기본적으로 싣고 있다. 뒤이어 인물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일화나 학문의 정도, 업적 등을 수록하였다. 인물이 이룬 업적을 기술할 때는 시기별로 서술하고 전거를 통해 인용하였는데, 그 인용서명을 매 항목 끝에 소자(小字) 쌍행(雙行)으로 밝히고 있다.
해동명신록과의 비교
김육의 또 다른 인물 평전인 《해동명신록》에서 인용서명을 밝히지 않고 여러 내용을 나열한 반면, 《국조명신록》에는 전거를 통해 인용할 때는 인용한 책의 이름을 매 항목 끝에 작은 글씨로 쌍행(雙行)으로 밝히고 있다. 즉 《국조명신록》 쪽이 조금 더 체계를 갖추고 객관성과 신뢰성을 고려하여 저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해동명신록》에서 권만 나눴던 것과 달리 《국조명신록》은 책마다 도학(道學, 권1), 사업(事業, 권2~12), 충절(忠節, 권1~권5)로 '항목'을 명명하여 분류하고 있어서 체계가 잡히고 저자의 저술 의도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김육은 도학, 사업, 충절이라는 대항목마다 각기 제1, 제2, 제3… 하는 식으로 구분하여 서술하였으며, 전체 책 수의 표기는 17책까지 이른다. 《국조명신록》에서도 《해동명신록》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어떤 관직을 역임하고 어떤 고위 관직까지 올랐느냐의 문제보다 학문적으로 어떤 업적을 이루었느냐를 우선으로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13]
내용상으로도 《해동명신록》에는 맨 마지막(권9)에 종실(宗室)과 무신(武臣)을 별도로 기술한 반면, 《국조명신록》에는 김육이 '충절'로 분류하여 수록한 인물 외에 국가에 현저하게 공이 있는 인물을 시대순으로 종실, 의병장(義兵將), 무신을 혼합하여 기술하였으며, 《해동명신록》에 수록되었던 25명의 무신들은 《국조명신록》에서 사업, 충절로 나뉘어 수록되고, 《해동명신록》에 실린 12명의 종실도 《국조명신록》에서는 네 명으로 줄어들어(여기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금산군 성윤이 추가되어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도학, 사업, 충절에 각각 나뉘어 기록되는 등. 종실이라고 해서 특별히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실질적인 업적과 실천적인 면모를 중요하게 여겼던, 김육 자신의 인물 평가 기준이 이 부분에서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14]
다만 《해동명신록》에서 맨 첫머리에 언급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던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성수침, 성혼, 서경덕 등 11명이 《국조명신록》에서는 모두 빠졌는데, 우정임은 김육이 《해동명신록》과 중복되는 것을 피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현전하는 필사본이 해당 부분이 후대에 필사자에 의해 누락되어 전해진 것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15] 실제로 현존하는 《국조명신록》의 경우 '사업'은 제1이 없이 제2로 시작하여 제12까지로 구성되어 있어 제1이 누락된 것임을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는가 하면[16] 충절 제5에 수록한 정뇌경(鄭雷卿)에 대한 기술에도 정뇌경의 이름만 수록되었을 뿐 내용이 전혀 없어, 후대에 필사자에 의한 원문의 변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7]
이존중의 국조명신록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이존중도 동명의 저술을 남겼다. 다만 이존중의 저술로 알려진 《국조명신록》에 대하여 김영건은 2024년 '국조명신언행록의 일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송징은, 이존중, 이익진이 편찬하였다고 알려진 현존 명신록의 목차 순서와 수록된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들 저술이 공통되는 특정 모본을 참조하여 필사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고 지적하였다.[18]
각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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