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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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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또는 황금 옷을 입은 여인(The Lady in Gold 혹은 The Woman in Gold)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1903년부터 1907년 사이에 완성한 그림이다. 이 초상화는 모델의 남편인 빈 출신의 유대인 은행가이자 설탕 생산자인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의 의뢰로 제작되었다. 이 그림은 1941년 나치에 의해 도난당하였고, 벨베데레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이 초상화는 클림트의 황금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클림트가 아델레를 묘사한 두 작품 중 첫 번째 작품이며, 두 번째 작품은 1912년에 완성되었다.
아델레는 1925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유언장에는 클림트의 작품들이 벨베데레 갤러리에 남겨지기를 바랐지만, 이 작품들은 그녀가 아닌 페르디난트의 소유였다.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안슐루스(오스트리아 강제 합병) 이후,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자 페르디난트는 방대한 미술 컬렉션을 포함한 많은 재산을 남겨둔 채, 빈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했다. 이 그림은 1941년 나치에 의해 페르디난트의 나머지 자산과 함께 도난당했으며, 그에게는 탈세 혐의가 씌워졌다. 독일 정부를 대리하는 변호사는 아델레가 유언장에 쓴 내용을 따랐다고 주장하며 초상화를 벨베데레 갤러리에 넘겼다. 페르디난트는 1945년에 사망했다. 그의 유언장에는 그의 재산이 조카와 두 조카 딸에게 가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1998년 오스트리아의 탐사보도 기자 후베르투스 체르닌은 벨베데레 갤러리에 유대인 소유주로부터 도난당한 여러 작품이 있으며, 갤러리가 그 작품들을 원래 소유주에게 반환하거나 도난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페르디난트의 조카딸 중 한 명인 마리아 알트만은 변호사 E. 랜돌 쇤베르크를 고용하여 미술관을 상대로 클림트의 다섯 작품 반환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2006년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심리를 포함한 7년간의 법적 소송 끝에 빈의 중재 위원회는 이 그림과 다른 그림들이 가족으로부터 도난당했으며 알트만에게 반환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녀는 같은 해에 1억 3,500만 달러에 이 그림을 판매했다. 당시 단일 그림으로는 최고 가격으로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로널드 로더에게 팔렸고, 그가 공동 설립한 뉴욕 기반의 공공 갤러리인 노이에 갤러리에 소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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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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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부유한 유대인 빈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일곱 번째로 큰 은행인 빈 은행연합회의 이사였고, 오리엔트 철도의 총재였다.[1] 1890년대 후반에 아델레는 클림트를 만났고, 그와 관계를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2] 아델레와 클림트가 연인 관계였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영국의 풍경화가 캐서린 딘은 아델레가 "클림트가 그린 사회 여성 중 유일하게 그의 정부였다고 확실히 알려진 인물"이라고 보았다.[3] 반면 저널리스트 멜리사 뮐러와 학자 모니카 타츠코프는 "그들의 관계가 우정 이상이었다는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썼다.[4] 작가 프랭크 휘트포드는 클림트가 키스를 위해 만든 예비 스케치 중 일부에 수염을 기른 인물이 있었는데, 이는 자화상일 가능성이 있었다고 언급한다. 휘트포드는 키스의 모델을 "아델레의 이상화된 모습"이라고 묘사한다. 휘트포드는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는 여성의 오른손 위치인데, 아델레는 어린 시절 사고로 손가락이 기형이었기 때문이다.[5]
아델레의 부모님은 은행가이자 설탕 제조업자인 페르디난트 블로흐와 결혼을 주선했다. 아델레의 언니는 이전에 페르디난트의 형과 결혼했다.[6][7] 페르디난트는 약혼녀보다 나이가 많았고, 1899년 12월 결혼 당시 그녀는 18세, 그는 35세였다. 자녀가 없었던 부부는 둘 다 성을 블로흐-바우어로 변경했다.[8] 사교적이었던 아델레는 집에서 정기적으로 살롱을 열어 작가, 정치인, 지식인들을 모았다.[9][n 1]
부부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고 여러 예술가를 후원하며 주로 19세기 빈의 그림과 현대 조각을 수집했다. 페르디난트는 또한 신고전주의 도자기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1934년에는 그의 컬렉션은 400점 이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11][12]
1901년 클림트는 유디트 I을 그렸다. 미술사학자 고트프리트 플리들은 이 그림이 유디트가 아니라 "살로메로 널리 해석된다"고 언급한다.[13] 아델레는 이 작품의 모델이었고[14] 페르디난트가 그녀에게 선물한 보석이 박힌 깊은 초커를 착용했는데, 휘트포드는 이를 "클림트의 가장 에로틱한 그림"이라고 묘사한다.[9] 휘트포드는 또한 이 그림이 "명백한 간통의 증거를 보여준다"고 썼다.[9] 1903년 페르디난트는 클림트로부터 그의 첫 클림트 작품인 <부헨발트>(너도밤나무 숲)를 구입했다.[12][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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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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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와 실행
1903년 중반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는 클림트에게 아내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의뢰했다. 그는 10월 결혼기념일 선물로 아델레의 부모에게 이 작품을 선물할 생각이었다.[10] 클림트는 1903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이 초상화를 위해 100개가 넘는 스케치를 그렸다.[15][16][n 3] 블로흐-바우어 부부는 클림트의 드로잉 16점을 구입하면서, 그가 그린 아델레 스케치 일부를 구매했다.[17] 1903년 12월, 클림트는 동료 예술가 막시밀리안 렌츠와 함께 라벤나의 산비탈레 성당을 방문하여 초기 기독교 비잔틴 미술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그의 아내 테오도라 황후의 황금색 배경 모자이크를 연구했다.[18][19][17] 렌츠는 나중에 "이 모자이크가 클림트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그의 예술의 화려함, 엄격한 장식이 비롯된다"고 썼다.[19] 클림트는 나중에 "믿을 수 없이 화려한 모자이크"가 자신에게 "계시"였다고 말했다.[20] 라벤나 모자이크는 1911년 바실리 칸딘스키와 1914년 클라이브 벨을 포함한 다른 예술가들의 주목도 받았다.[19]
클림트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 이 초상화를 위해 더 광범위한 준비를 했다.[4] 초상화의 대부분은 금박과 은박을 사용하고 젯소를 사용하여 돋을새김으로 장식적인 모티프를 추가하는 정교한 기법을 동원하였다. 젯소는 백악이나 석고와 혼합된 결합제로 구성된 페인트 혼합물이다.[21] 금박으로 덮인 그림의 액자는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이 제작했다.[22] 클림트는 1907년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23]
묘사

이 그림은 138 by 138 cm (54 by 54 in) 크기이며[24][n 4] 캔버스에 유성 페인트와 은박, 금박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상화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가 황금빛 별이 빛나는 배경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녀의 목에는 클림트가 유디트 그림에 포함시켰던 것과 동일한 보석 박힌 초커를 착용하고 있다.[12][15] 그녀는 여성의 몸매에 딱맞는 황금빛 드레스를 입고 있으며, 삼각형 형태의 천이 휘감고 있다.[26][27] 일부 부분에서 드레스가 배경과 너무 많이 섞여 있어, 박물관 큐레이터 잔 톰슨은 "모델과 배경이 거의 우연히 마주쳐, 그녀가 두꺼운 기하학적 구성에 쌓인 듯하다"고 썼다.[26][27] 피터 베르고는 그로브 아트에 쓴 기사에서 이 그림이 "[클림트]의 황금 장식 방식의 정점"을 나타낸다고 본다.[28]
아델레의 머리카락, 얼굴, 목선, 손은 유화로 그려져 있는데, 작품 전체에서 1/12 미만을 차지한다. 휘트포드의 의견으로는 유화 부분으로는 모델의 성격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15] 휘트포드에게 황금 배경의 효과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를 지상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살과 피를 관능과 탐닉의 꿈에서 나온 환상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와 톰슨은 이 작품이 세속적인 초상화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이콘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21][26] 오코너는 이 그림이 "여성성을 구현하는 것 같다"고 쓰며 모나리자에 비유한다.[22] 반면 뮐러와 타츠코프는 금이 아델레를 "멜랑콜리하고 취약해 보이지만,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냉담하면서도 황홀해 보이는" 효과를 준다고 말한다.[4]
현재 이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는 노이에 갤러리와 미술사학자 엘라나 샤피라는, 배경과 가운에 삼각형, 알, 눈, 아몬드 모양을 포함한 에로티카를 암시하는 상징들이 어떻게 포함되어 있는지 설명한다.[10][27][29] 또한 삼각형의 천에모델의 이니셜인 A와 B를 주제로 한 장식 모티프도 있다.[10] 휘트포드는 비잔틴, 이집트, 미케네,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언급하며 "금은 비잔틴 모자이크의 금과 같고, 드레스의 눈은 이집트식이며, 반복되는 나선형과 소용돌이는 미케네식이고, 모델 이름의 첫 글자를 기반으로 한 다른 장식 장치들은 모호하게 그리스식이다"라고 묘사한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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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클림트는 1907년 만하임 국제 미술 전시회에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1906)과 함께 자신의 초상화를 전시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두 그림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모자이크 같은 괴기물 벽화", "기괴한", "부조리한", "저속한" 등으로 묘사했다.[23]
1908년 이 초상화는 빈의 쿤스트샤우에 전시되었으며, 비평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17] 『비너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익명 평론가는 이 그림을 "황금 성전에 있는 우상"이라고 묘사했고,[22] 비평가 에두아르트 포츨은 이 작품을 "mehr Blech als Bloch" ("블로흐보다 양철")이라고 묘사했다.[21][n 5] 미술사학자 토비아스 G. 나터에 따르면, 일부 비평가들은 모델의 개성 상실을 못마땅해했고,"클림트가 예술의 자율성을 위협한다"고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다.[23]
역사와 소유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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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1945년

전시회 이후, 이 초상화는 블로흐-바우어 부부의 빈 저택에 걸렸다. 1912년 페르디난트는 아내의 두 번째 그림을 의뢰했는데,[4] 휘트포드에 따르면 이 그림에서는 "1907년 초상화의 에로틱한 에너지가 사라졌다"고 평했다.[31] 1918년 2월,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했다. 그는 전 세계적인 인플루엔자 유행으로 인해 폐렴에 걸려 그 달에 사망했다.[32]
1923년 1월 19일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법률가 교육을 받은 페르디난트의 형 구스타프가 그녀가 문서 작성하는 것을 도왔고, 집행인으로 지명되었다.[33][34] 유언장에는 두 사람의 소유였던 클림트 작품, 즉 그녀의 두 초상화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었다.
Meine 2 Porträts und die 4 Landschaften von Gustav Klimt, bitte ich meinen Ehegatten nach seinem Tode der österr. Staats-Gallerie in Wien, die mir gehörende Wiener und Jungfer.[33]
(독일어에서 번역하면: "나는 남편의 사망 후 나의 두 초상화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풍경화 네 점를 빈의 오스트리아 국립 갤러리에 남겨달라고 요청한다.")[35][36]
1925년 2월 아델레는 수막염으로 사망했다.[37] 얼마 후 구스타프는 유언검인을 신청했다. 그는 유언장의 조항이 "구속력 있는 유언이 아니라 간청(precatory)"이라는 문서를 추가했다. 그는 아델레가 아닌 남편 페르디난트가 그림의 법적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조항을 이행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38] 페르디난트가 소유했던 클림트의 작품들, 즉 두 초상화를 포함한 작품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아델레의 침실로 옮겨졌다.[37] 이 그림은 1928년 클림트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빈 분리파 전시회에 대여되었고, 1934년에는 "오스트리아 인 런던" 전시회에 전시되었다.[17] 1936년 페르디난트는 <아터제 캄머 성 III>를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갤러리에 기증했고, 나중에 클림트의 다른 그림인 <아말리에 추커칸들의 초상> (1917–1918)을 추가로 획득했다.[39] 1937년 아델레의 황금 초상화는 1937년 파리 국제 박람회 전시를 위해 대여되었다.[17]

1937년 12월, 구스타프의 딸이자 페르디난트의 조카딸인 마리아 알트만은 젊은 오페라 가수 프리츠 알트만과 결혼했다. 페르디난트는 그녀에게 그림에 묘사된 아델레의 보석 초커를 결혼 선물로 주었다.[17][40]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하자, 페르디난트는 빈을 떠나 체코슬로바키아에 자신의 성으로 향했다. 그해 가을,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는 것을 허용한 뮌헨 협정을 체결하자, 페르디난트는 안전을 위해 파리로 떠났고, 이듬해 9월, 중립국 스위스로 이주하여 호텔에 머물렀다. 페르디난트가 없는 동안 나치 정권은 그에게 140만 라이히스마르크를 탈세했다는 거짓 혐의를 씌우고, 그의 자산을 동결했다. 1938년 5월에는 국가가 그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압류 명령이 내려졌다.[41] 그의 설탕 공장은 압수되어 국유화되었고, 유대인 주주와 경영진이 교체되었다. 그의 빈 저택은 독일 철도 회사인 독일국영철도의 사무실이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그의 성은 SS 상급집단지도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개인 거주지가 되었다.[42][43]
탈세 혐의를 처리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나치 변호사 프리드리히 퓌러가 유산 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1월 그는 박물관 및 갤러리 이사들을 소집하여 작품을 검토하고 어떤 작품을 얻고 싶은지 표시하도록 했다. 컬렉션이 목록화된 후 아돌프 히틀러는 "총통 특권법"을 이용해 컬렉션 일부를 할인된 가격으로 가져갔다.[n 6] 루프트바페 헤르만 괴링 사령관을 포함한 다른 여러 나치 지도자들도 컬렉션에서 작품들을 가져갔다.[44][45] 괴링은 또한 마리아 알트만이 선물로 받은 보석 초크를 가져가, 그의 아내인 에미 괴링에게 선물로 주었다.[46]

1941년 12월, 퓌러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과 <아펠바움 I>을 벨베데레 갤러리에 양도하고, 그 대가로 <아터제 캄머 성 III>를 받아 클림트의 사생아인 구스타프 우치키에게 팔았다. 그림과 함께 첨부된 메모에는 그가 아델레의 유언에 따라 행동했음을 명시했다.[42][43] 유대인 관련 내용을 모두 삭제하기 위해 갤러리는 이 초상화의 제목을 독일어: Dame in Gold (황금 옷을 입은 여인)로 바꿨다.[47]
1945년 이후
1945년 8월, 페르디난트는 이전의 모든 유언을 취소하는 최종 유언을 작성했다. 그는 그림들이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그의 전 재산을 그의 조카와 두 조카딸, 그 중 한 명인 마리아 알트만에게 남긴다고 명시했다.[43][48] 페르디난트는 그 해 11월 스위스에서 사망했다.[42]
1946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치 차별로 인해 발생한 모든 거래를 무효화하는 취소법을 제정했다. 예술 작품을 오스트리아 밖으로 반출하려는 유대인들은 다른 작품에 대한 수출 허가를 얻기 위해 일부 작품을 오스트리아 박물관에 기증해야 했다.[42][43] 블로흐-바우어 가문은 빈 변호사 구스타프 리네슈 박사를 고용하여 도난당한 예술 작품을 대신 되찾도록 했다. 그는 퓌러가 작성한 기록을 사용하여 벨베데레 갤러리 등에 있는 대부분의 작품을 여러 작품이 블로흐-바우어 재산으로 반환되었지만, 클림트 그림은 없었다. 필요한 수출 허가를 얻기 위해 가족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하우저 인 운터아흐 암 아터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I>, <아펠바움 I>을 보유하도록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한 <부헨발트>와 <아터제 캄머 성 III>에 대한 모든 권리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 벨베데레 갤러리는 아델레의 유언에 근거해 클림트 작품의 소유권 주장을 했다.[42][49]
1998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치에 의해 도난당한 예술품 문제에 대해 다시 검토하는 예술품 반환법을 도입했다.[n 7][n 8] 정부는 어떤 작품을 반환해야 하는지에 대해 보고할 반환 위원회를 구성했다. 정부 소장 작품의 출처 조사를 위해 정부 기록 보관소가 공개되었다.[43][51] 오스트리아의 탐사 기자 후베르투스 체르닌은 새로 공개된 기록 보관소에서 광범위한 조사를 수행하여 나치에 의한 미술품 절도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가 미술품 반환을 거부하거나 절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을 "이중 범죄"라고 묘사했다.[52]

당시 미국에 살던 알트만은 자신을 대리하여 E. 랜돌 쇤베르크를 고용했다. 쇤베르크는 그녀가 빈에 살던 시절부터 친구였던 여성의 아들이었다.[n 9] 그들은 반환 위원회에 여섯 점의 그림—<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I>, <아펠바움 I>, <부헨발트>, <하우저 인 운터아흐 암 아터제>, <아말리에 추커칸들의 초상>—의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위원회는 다시 아델레의 유언을 이유로 작품 소유권 유지를 주장하며 요청을 거부했다. 하지만 위원회에서는 페르디난트와 아델레가 소유했고, 현재 벨베데레 갤러리에 있던 16점의 클림트 드로잉과 19점의 도자기를 유언 요청 범위 밖에 있다는 이유로 반환할 것을 권고했다.[42][54]
2000년 3월, 알트만은 그림 반환을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그녀는 소송 비용(문제 금액의 1.2%와 소송 수수료)이 175만 유로에 달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55][56] 너무 높은 비용을 피하기 위해 알트만과 쇤베르크는 벨베데레 갤러리와 그 소유주인 오스트리아 정부를 미국 법원에 고소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외국주권면제법 (1976)에 근거하여 기각을 신청했다(이 법은 특정 조건 하에 주권 국가에 면책 특권을 부여했다). 주권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4년 이상의 소송이 진행되었고, 결국 미국 연방 대법원의 오스트리아 공화국 대 알트만 사건 사건으로 이어졌다.[55][57][n 10] 2004년 6월, 대법원은 그림이 도난당했으며 오스트리아가 알트만의 청구로부터 자유롭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법원은 그림의 현재 소유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58][59]

장기간의 소송이 될 수 있는 법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양측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중재에 동의했지만, 오스트리아는 1999년에 그러한 움직임을 거부했다. 세 명의 중재인이 패널을 구성했는데, 안드레아스 뇌들, 발터 레히베르거, 페터 룸멜이었다.[n 11] 쇤베르크는 2005년 9월에 그들 앞에서 증언했고, 2006년 1월에 그들은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문제가 된 여섯 점의 그림 중 다섯 점이 페르디난트의 유언에 명시된 대로 블로흐-바우어 재산으로 반환되어야 한다고 명시했으며, <아말리에 추커칸들의 초상화>만 갤러리가 보유해야 한다고 했다.[61][62][n 12]
패널의 결정이 발표된 후, 벨베데레 갤러리는 버스 정류장과 빈 지하철 플랫폼에 일련의 광고를 게재했다. 포스터에는 "안녕 아델레"라고 쓰여 있었고, "그림이 오스트리아를 떠나기 전 마지막 기회"라고 광고하였고, 이제 박물관은 연일 긴 줄이 늘어섰다. 일부 오스트리아인들은 국가가 다섯 점의 그림을 구입하라고 요구했지만, 정부는 가격이 너무 높아 불가능하다고 밝혔다.[63] 이 그림들은 2006년 3월 오스트리아에서 반출되어 그 해 4월부터 6월까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64][65]
알트만이 그림들을 어떻게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어떤 개인도 이 그림들을 사지 않기를 바란다... 내 이모의 소원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그림들이 보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 나에게 매우 의미 있다"고 말했다.[66] 2006년 6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은 로널드 로더에게 1억 3,500만 달러에 팔려 그의 공공 미술관으로 갔으며, 당시 그림으로는 기록적인 가격이었다. ARTnews의 편집장인 아일린 킨셀라는 높은 가격이 여러 요인, 특히 그림의 출처,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에 대한 증가하는 수요, 미술계의 가격 상승, 그리고 "로더의 이 특정 작품에 대한 열정과 추구" 때문이라고 보았다.[67] 로더는 이 작품을 그가 공동 설립한 뉴욕 기반 갤러리인 노이에 갤러리에 소장했다. 이 그림은 그 이후로 그곳에 전시되어 왔다.[25][68][69]
『뉴욕 타임스』의 수석 미술 비평가 마이클 키멜만은 이 판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홀로코스트 이후의 정의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또 다른 광기 어린 미술 시장 이야기로 변질되었다"고 썼다.[70] 알트만은 그림 판매에 대해 자신이나 친척들이 어떤 그림도 소유하는 것은 실용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69] 2006년 11월, 나머지 네 점의 클림트 그림은 크리스티스 경매장에서 판매되었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I>는 8,790만 달러, <아펠바움 I>은 3,300만 달러, <부헨발트>는 4,030만 달러, <하우저 인 운터아흐 암 아터제>는 3,100만 달러에 팔렸다. 모두 개인 소장품이 되었다.[6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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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블로흐-바우어 가족으로부터 압수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과 다른 그림들의 역사는 세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인 클림트 훔치기 (2007), 유럽의 강탈 (2007), 그리고 아델레의 소원 (2008)에서 다루어졌다.[72]
이 그림의 역사는 저널리스트 앤-마리 오코너가 2012년에 쓴 책 『황금 옷을 입은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의 특별한 이야기』에 기술되어 있다.[73]
이 역사와 다른 도난 미술품 이야기는 멜리사 뮐러와 모니카 타츠코프가 2010년에 출판한 『잃어버린 삶, 잃어버린 예술: 유대인 수집가, 나치의 미술품 절도, 그리고 정의를 향한 탐구』에 실려 있다.[74]
2015년 알트만의 이야기는 영화 우먼 인 골드로 각색되어 헬렌 미렌이 마리아 역을, 라이언 레이놀즈가 쇤베르크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이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다.[75]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와 마리아 알트만의 이야기는 로리 리코 알바네세의 2017년 소설 『도난당한 아름다움』의 기초가 되었다.[76]
알트만은 2011년 2월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7] 성공보수금으로 40%를 받았던 쇤베르크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판매로 5,400만 달러, 나머지 네 점의 그림 판매로 5,500만 달러를 받았다.[78] 그는 로스앤젤레스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새 건물을 짓는 데 7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한 후,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79][80] 이후 그는 나치에 의해 약탈당한 예술품 반환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81]
미술 비평가들은 이 초상화의 요소들이 에이미 셰럴드가 2018년에 그린 미셸 오바마 영부인의 초상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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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내용주
- 아말리 추커칸들의 초상화는 1938년에서 1942년 사이에 페르디난트 소유에서 추커칸들 가족 소유로 바뀌었지만, 거래의 세부 사항은 불분명하다. 그런 다음 빈 노이에 갤러리의 관장인 빅토리아 퀸스트러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그녀가 사망하자 그녀는 이 그림을 벨베데레 갤러리에 유증했다. 알트만은 이 양도가 퓌러의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고, 추커칸들 상속인들은 이 그림이 페르디난트에 의해 자유롭게 기증되었다고 주장했다. 페르디난트로부터의 양도가 강압적이거나 불법적이었음을 보여줄 명확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패널은 반환법이 적용되지 않으며 그림은 벨베데레 갤러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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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출처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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