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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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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롤터(영어: Gibraltar, 스페인어: Gibraltar 히브랄타르[*], 문화어: 지브랄타르)는 이베리아반도 남단에 있는 도시로 영국의 해외영토이다. 지브롤터 해협의 동쪽 경계를 이룬다.[7] 지브롤터 바위는 해협 건너 남쪽 세우타몬테 하초와 함께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8] 북쪽으로 스페인안달루시아 지방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6.8km2 인구는 2024년 기준 3만4천 명이다.[4] 지브롤터의 이름을 딴 지브롤터 해협을 두고 지중해대서양이 연결된다.[9]

간략 정보 지브롤터, 주권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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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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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롤터를 공중에서 북서쪽으로 바라본 모습

1160년 알모하드 칼리파국이 요새를 구축하였다. 이후 중세 후기에 걸쳐 나르스, 마린 등이 통치하였고 레콩키스타의 과정에서 1375년 무렵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던 1704년 영국은 지브롤터를 점령하였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의 해외 영토가 되었다. 지브롤터 해협은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유일한 수로로 전세계 해운의 절반이 이곳을 지나는 초크포인트이다. 지브롤터를 확보한 영국은 이곳에 영국 왕립 해군 기지를 두었으며 나폴레옹 전쟁에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하였다.[10][11][12]

스페인은 지브롤터의 지위를 놓고 오늘날까지도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13][14] 지브롤터의 주민들은 대부분 스페인어 방언을 쓰고 경제 역시 스페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15][16][17] 지브롤터 주민들은 1967년과 2002년 주민투표에서 두 번 모두 영국 잔류를 선택하였다.[18][19]

지브롤터의 주요 경제 기반은 금융산업, 온라인 도박, 관광, 항구 등이다.[20] 실업률이 낮으며 인접한 스페인으로부터 다수의 노동력이 유입되었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한 브렉시트 이후 지브롤터 역시 유럽연합에서 제외되었지만 스페인과 협의를 통해 국경 왕래를 위한 솅겐 협정을 유지하기로 하였다.[21] 2025년 모든 물자를 포함하는 자유 왕래를 위한 협상이 진행중이다.[22]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브롤터 바위를 중심으로 형성된 반도에 도시가 세워져 있고, 유럽에서 유일하게 바르바리마카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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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지브롤터의 이름은 "타리크의 산"을 뜻하는 아랍어 이름인 '자발 타리크'(아랍어: جبل الطارق)에 기원한다.[23] 우마이야 왕조의 히스파니아 정복 당시 우마이야의 장군 타리크 이븐 지야드는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해협을 건너 이곳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역사

요약
관점

선사 및 고대

지브롤터 바위에 5만년 전 무렵부터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인 고르함 동굴이 있다.[24] 이 동굴은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후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사용하였다. 석기들과 화덕, 동물의 뼈 등이 발굴되었다.[25] 신석기 시대의 토기 조각도 여러점 발견되어 이 동굴이 매우 오랜 시기에 걸쳐 주거지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26] 동굴은 농경 사회가 된 청동기 시대까지 주거지로 이용되었다.[27]

고대 시기 지브롤터는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문화에서 상징적인 장소였다. 페니키아는 기원전 950년 무렵부터 지브롤터에 정착지를 마련하였고 고르함 동굴을 게니우스 로키의 성지로 여겼다.[28] 이 성지는 이후 고대 카르타고고대 로마까지 이어졌다. 페니키아는 이곳을 몬스곶이라 불렀다.[19] 고대 그리스는 지브롤터 바위를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고대 로마도 받아들였다. 헤라클레스가 지브롤터 해협의 두 바위를 밀어재껴서 바닷길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오늘날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주에서 지브롤터를 둘러싼 지역은 캄포 데 지브롤터로 불리는데, 캄포(Campo)는 스페인어로 이란 뜻이다.[29] 지브롤터에서 가까운 카르테이아에도 페니키아의 유적이 있다.[30]

중세

지브롤터 해협 인근 지역은 오랫동안 페니키아와 그 뒤를 이은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06년 로마의 이베리아 정복 이후 로마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기원후 418년 게르만계의 서고트 왕국이 세워져 720년까지 통치하였다.[31]

711년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장군이었던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아프리카 북부 연안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곳에 상륙하였다.[32][33] 이렇게 시작된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으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이슬람 세계로 편입되어 알안달루스가 되었고[34][35] 타리크가 처음 교두보를 확보하였던 바위는 그의 이름을 따 "자발 타리크"(아랍어: جبل طارق, 타리크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지브롤터라는 명칭의 유래이다.[19][36]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단 두 세대의 칼리파를 끝으로 아바스 칼리파국에게 멸망된 뒤 아프리카 북부 연안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마그레브 지역은 본국과 단절된 채 독립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에는 여러 아미르들이 사실상 독립적 주권을 지닌 영주로서 아미르국을 세웠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곳은 코르도바를 거점으로 하는 코르도바 아미르국이었으며 929년 스스로 칼리파를 선언하고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되었다.[37] 이 시기 마그레브의 이슬람 국가들은 이미 이슬람 세계의 중심과는 분리되어 저마다 칼리파나 술탄을 자처하고 있었고, 서로 정복 전쟁 역시 빈번히 벌였다. 1160년 오늘날의 모로코를 중심으로 한 국가였던 알모하드 칼리파국은 지브롤터를 점령하고 이베리아반도 동안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38] 당시 지브롤터에 세운 무어인의 성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 성은 2010년까지 감옥으로 쓰였다.[39]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내전으로 붕괴하면서 이슬람 세력은 구심력을 잃었고 북부의 서고트인은 이렇게 분열된 지역을 레콩키스타를 통해 정복할 수 있었다. 13세기 초가 되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국가는 오늘날의 안달루시아주를 기반으로 하는 그라나다 아미르국만이 유일하게 된다. 지브롤터는 해협을 사이에 둔 남북 양쪽의 이슬람 국가와 레콩키스타를 통해 성장한 카스티야 왕국들 사이의 격전지가 되었다. 1274년 그라나다를 지배하던 나스르 왕조가 지브롤터에서 전투를 벌여 마린 술탄국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였지만, 1492년 그라나다 역시 카스티야 연합왕국에 항복하였다.[40]

근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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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베데커에 실린 지브롤터 지도

1462년 지브롤터 공방전의 결과 카스티야의 후안 알론소 데 구스만 공작이 지브롤터를 점령하였다.[41]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후 엔리케 4세는 스스로 지브롤터의 군주를 자처하고 국왕 직할령으로 삼았지만[42] 6년 뒤 공작령으로 환원하였다. 1474년 유대교나 이슬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코르도바와 세비야의 콘베르소 4,350명이 지브롤터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43]

1540년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이자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이었던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가 지브롤터를 습격하였다.[44][45] 하이레딘은 거의 모든 주민을 납치하여 노예 시장에 팔았다.[4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던 1704년 잉글랜드네덜란드 공화국대동맹을 맺고 지브롤터를 합동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후 지브롤터는 잉글랜드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1713년 진행된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지브롤터는 영국의 해외 영토가 되었다. 당시 유럽의 국가들은 상대를 견제하고 자국의 패권을 키우기 위해 이합집산 하였으며 영국과 스페인은 전통적인 경쟁국이었다. 스페인은 지브롤터 상실을 만회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하였고 미국 독립 전쟁으로 유럽이 양분되어 있던 1782년에서 1783년 사이 프랑스와 손잡고 지브롤터 대포위를 진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46]

스페인의 대포위 와중에 지브롤터는 크게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건물이 전쟁 이후 재건되었다.[47] 1784년 지브롤터에 들어온 밀란 출신의 석공 지오바니 마리아 보세티가 많은 건물의 축조를 담당하였다.[47]

나폴레옹 전쟁 기간 지브롤터는 영국 왕립 해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전하였다.[48] 지브롤터 해협대서양지중해를 잇는 유일한 수로이기 때문에 18세기 이후 최소 1천 명 많게는 5천 명의 군인이 상시 주둔하고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로 인구가 급증하여 1860년에 이르면 1만7천 명이 되었다. 주민은 영국뿐만 아니라 지중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49]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지브롤터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커졌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운의 대다수가 수에즈 운하와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50]

지브롤터에는 2018년 3만여명의 영국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정책을 자치정부가 결정한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2016년 브렉시트 투표 당시 지브롤터 거주민 96%는 유럽연합 잔류에 표를 던졌다.[51]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독일이 지중해로 파병한 U보트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큰 피해를 보았던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지브롤터와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를 통제하며 지중해를 봉쇄하고자 하였지만, 독일의 U보트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엔진을 끄고 잠수하여 해류만으로 이동하는 방법으로 영국의 감시를 피했다.[52] 영국은 지브롤터 북쪽에 비행장을 건설하였고 독일은 지브롤터를 여러 차례 폭격하였다. 영국은 민간인 보호를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지브롤터 민간인 소개를 실시하였다. 피난한 주민들은 대개 영국으로 갔지만 멀리는 자메이카까지 피난하였다. 당시 피난에 올랐던 사람들은 1만6천5백 명에 달하며 전쟁이 끝난 뒤에야 돌아갈 수 있었다.[53]

1950년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지브롤터가 스페인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영국과 스페인의 해묵은 외교 문제로 남아있다. 지브롤터는 1967년과 2002년 주민 투표 모두에서 영국 잔류를 선택하였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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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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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계단에서 본 지브롤터 바위

지브롤터의 면적은 6.2 km2이다.[4] 북쪽으로 스페인 도시 라리네아데라콘셉시온과 1.2 km의 국경이 맞닿아 있다. 중심 지역은 인구 3만4쳔명의 웨스트사이드이다. 별도의 행정구역이 나쥐어져 있지는 않다.

강수가 부족하고 별달리 수자원도 없어서 예로부터 빗물을 받아 상수도로 이용해 왔으며 오늘날에는 역삼투 기술을 이용한 해수담수화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54]

가장 높은 곳은 해발 426 m의 지브롤터 바위 정상이고[55] 쥐라기 시기 형성된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브롤터 바위 주변으로 가파른 경사를 따라 좁은 해안이 이어져 있다. 군사 목적과 시민 생활을 위해 동서를 잇는 많은 터널을 뚫었다.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 Csa로 구분되는 지중해성 기후[56][57]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엔 서늘한 날씨에 비가 내라자먼 강수량이 매우 적다. 여릅이 덥기는 하지만 대서양에서 유입되는 차가운 바닷물의 영향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도시보다 온도가 낮다.

자세한 정보 Gibraltar의 기후,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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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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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롤터를 방문한 관광객과 바르바리마카크

지브롤터 바위에는 약 5백종의 속씨식물이 자리잡고 있다. 지브롤터는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자생하는 지브롤터 캔디터프트(Iberis gibraltarica)는 유럽의 경우 지브롤터에서만 자생하고 있다. 해협 건너의 북아프리카 연안에 서식하는 바르바리마카크도 유럽에서는 지브롤터에서만 살고 있다.[60] 바르바리마카크는 절멸 위기를 맞고 있어 IUCN 적색 목록에 올라있다. 다른 포유료는 토끼, 여우, 박쥐 등이 있다. 지브롤터만에서는 돌고래와 고래가 종종 목격된다.

1991년 지브롤터의 유럽 의회 의원 그레엄 왓슨은 지브롤터 야생 동물의 보전운동을 위해 관광과 도시화 제한을 촉구하였다.[61]

미세먼지의 농도가 높아 공기질이 나쁜편이다. 2016년 5월 세계보건기구는 지브롤터의 공기질이 영국 영토 가운데 가장 나쁘다고 발표하였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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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지브롤터의 경제는 크게 역외 금융 센터를 중심으로 한 금융 산업, 지브롤터 해협을 이용하는 해운, 관광, 그리고 온라인 도박이 주축을 이룬다.[63] 지브롤터는 역사적인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영국 국방부의 후원에 의존하여 왔다. 특히 영국 왕립 해군의 해군 기지는 지브롤터 경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냉전이 한창이어서 국비 증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1984년 당시 지브롤터 경제의 60%는 영국 국방부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군비 지출이 줄어들게 되면서 지브롤터에서 비용도 줄게 되어 최근 20년 사이에는 지역 경제의 7%까지 감소하였다.

오늘날 지브롤터의 고용 시장에서 공공부분이 차지하는 부분은 20% 가량으로 나머지 80%는 민간 분야이다. 민간 부분에서는 인근 스페인 국민이나 지브롤터 밖의 주민들도 많이 고용하여 과반 이상의 노동자가 역외 시민권자이지만, 공공분야에서는 여전히 90% 이상이 영국 국적자이다.[64] 영국이 브렉시트유럽 연합을 탈퇴하자 역외 주민의 고용에 어려움이 생기고 있다.[65][66]

2000년대 초부터 마권업자를 비롯한 많은 온라인 도박 사업자들이 지브롤터의 낮은 법인세를 이용한 조세 회피를 목적으로 몰려들었다.[67]

지브롤터의 관광 역시 지브롤터 경제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지브롤터 바위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이고 모리슨스마크스 & 스펜서와 같은 영국의 유통업체가 지브롤터에 지점을 운용하고 있다.

영국의 은행들도 지브롤터에 지점을 내고 있는데 이 역시 낮은 세금을 통한 세금 절감을 위한 것이다. 2014년에는 지브롤터 증권거래소가 개장하였다.[68] 한편 제조업은 2% 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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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요약
관점

이 곳은 영국의 군주가 임명하는 총독이 통치한다.

영토 분쟁

이곳은 스페인이 계속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스페인으로 귀속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1967년2002년 주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스페인 양도 및 공동주권 행사를 반대했다. 스페인 측에서는 지브롤터에 대한 작은 보복의 하나로 매일 국경선을 빈번히 드나드는 차량들을 상대로 검문 검색 강화나 통과 시간 지체를 통해 운전자들에게 최대한의 번거로움을 주고 있어 자주 문제가 되고 있다.[69]

세금 무과세 혹은 저과세 국가 정책

회사 소유주들에게 더 없이 큰 세금 혜택 정책으로 인해 유입된 각 국의 회사들이 지역 경제에 큰 기반이 된다. 최근 세법이 조정되어 일부 회사들이 떠나긴 했으나 현재까지는 건재하다고 볼 수 있다. 온라인 게이밍이나 유명한 대형 스포츠 베팅 회사들이 정착해있다. 덕분에 생기는 늘 들고 나는 유동 인구는 당연한 결과. 또한 부가가치세가 없는 곳이어서 관광객들이나 이웃 스페인에 인기가 있는데 주로 화장품과 향수, 주류, 담배, 전자제품, 심지어 금은 보석 세공품 등이 주된 품목들이다. 지브롤터에서 스페인으로 출국 시에 연간 법으로 지정된 양 이상의 담배를 불법 반입할 수 없다.

국민 후생 복리 정책

본토 영국을 모델로 세금을 통한 무상 의료(미성년과 노인에만 적용되는 치과 치료 포함)와 무상 교육을 기본으로 하며 지역 전체에 주택 복지가 잘 되어 있어 본토 태생을 위주로 저가의 주택을 공급함으로써 고급 주택의 위협과 상관 없이 국민들을 꾸준히 돌보고 있다. 방 세 개 기준의 아파트 한 채에 적게는 2-3 만원에서 많게는 10-12 만원의 월세를 받고 집을 정부가 제공하는 것도 이색적인 자국민 챙기기의 하나. 만 18세 이상 되는 자국민 혹은 시민권자가 신청 대기자 명단에 오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교육 관련 정책으로 대학 졸업 성취 여부에 따른 조건부 대학 과정 지원 장학금 제도가 있다. 그 밖에 편부나 편모 가장을 위한 가족 복리, 노후 관련, 저임금 가족 관련, 실직 관련 등 다양한 복리를 실행하고 있다.

교육 정책

국민 세금을 통한 국가 무상 지원이며 영국과 동일한 교육 과정을 가지고 있다. 만 3세를 시작으로 유치원 과정 1년, 예비학교 과정 1년이 포함된 초급(first school) 총 4년, 중급(middle school) 4년, 중등(secondary school) 4년. 졸업 이전 마지막 학년에 치러야 하는 시험 GCSE는 졸업 후 취업시 가장 기본이 되는 학업 증명이다. 이후부터는 개인별 선택에 의한 칼리지 2년의 무상 교육과정이며, 이 시험 성적으로 대학에 지원하게 된다. 학생의 희망에 따라 국가에서 졸업 혹은 학위 취득을 필수로 하는 조건부 무상 대학교 과정을 지원한다. 졸업에 실패할 경우 학비 전액을 국가에 변제해야 한다. 2016년 유로파 포인트 지역에 지브롤터 대학교가 개교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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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와 주민

전체 주민 중 지브롤터인이 83%, 기타 영국인이 10%, 모로코인이 3.5%, 스페인인이 1.2%, 그 밖의 유럽인이 1%이다.

지브롤터인 가운데에는 영국계가 27%, 스페인계가 24%, 이탈리아계가 19%, 포르투갈계가 11%, 몰타계가 8%, 유대계가 3%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

영어공용어이다. 스페인어아랍어 사용자도 일부 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영어와 스페인어, 지역 특유의 변형된 스페인어가 혼합되어 함께 쓰이는 소위 야니또가 많이 쓰인다.

종교

기독교인이 다수로, 주민의 78%가 천주교 교인이고, 7%는 성공회 교인이다. 그 밖에 이슬람교가 4%, 유대교가 2.1%를 차지하고, 인도계 영국인들이 대다수인 힌두교 교인도 1.8% 존재한다.

관광

  • 지브롤터 공항 자체의 활주로를 시작으로 관광이 시작된다. 동서로 놓인 활주로 한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와 동시에 걸어서 횡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비행기의 이착륙을 위해 매번 도로를 차단하면 대기하는 동안 바로 눈 앞에서 이착륙을 지켜보는 것이 이색적인 즐거움.
  • 유로파 포인트(Europa Point) - 지브롤터 반도의 남쪽 끝에 있으며, 모스크와 지브롤터를 소개하는 안내소, 등대가 있다.
  • 지브롤터 바위산(일명, 타리크의 산) - 지브롤터의 중심을 이루는 바위산으로, 바바리원숭이-마카크를 볼 수 있다. 케이블 카와 차로 오를 수 있는 정상에서는 지중해와 아프리카가 보인다. 콘서트 장소로도 이용되는 석회 세인트 마이클 동굴과 그레이트 시지 터널 등이 모여 있다.
  • 카탈란 만(Catalan Bay) - 지브롤터 반도 동쪽에 있는 휴양지로, 지중해를 바라보며 물놀이를 할 수 있는 해변과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다. 뒷편(서쪽)으로는 지브롤터 바위산의 웅장한 경관을 볼 수 있다.
  • 지역이 작은 관계로 시내 버스 혹은 걸어서 하루면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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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지브롤터 공항은 지브롤터와 스페인을 잇는 지협(isthmus)에 위치하고 있다. 영국은 지브롤터 공항이 영국 영토에 지어진 영국자산이라는 입장을, 스페인은 영국이 자국 영토에 불법적으로 건립했다는 주장을 유지하고 있다.[70]

활주로와도로가 '+'모양으로 서로 가로지르고 있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활주로로 안쓰일 때에는 도로로 사용한다. 평소에는 차들이 도로를 달리며, 비행기가 이착률 할때면, 멈춰선 채로 비행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71]

문화

역시 다민족이 모여 사는 곳인 만큼 생활 곳곳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으며 천주교와 관련한 국가 지정 공휴일 등의 생활 문화가 전반에 깔려 있다. 음식 문화 또한 스페인, 영국, 이태리, 모로코, 인도 등의 음식이 주를 이룬다.

축제

9월 10일은 지브롤터의 국가 기념일로 주민들은 일제히 지브롤터 기의 상징색인 흰색과 빨간색의 옷을 입고 모여 하루 종일 축제를 한다.

같이 보기


참고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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