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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에스테
이탈리아 북동부의 도시와 항구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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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에스테(이탈리아어: Trieste, 라틴어: Tergeste, 독일어: Triest, 슬로베니아어: Trst, 크로아티아어: Trst)는 이탈리아 북동부의 항구 도시이다.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자치주 및 트리에스테 지역분권기구의 최대 도시 및 행정 중심지이다. 2025년 기준, 인구는 198,668명이다.[1]
트리에스테는 아드리아해와 슬로베니아 사이에 있는 가느다란 이탈리아 영토에 자리 잡은 트리에스테만의 시작 점에 위치했으며, 슬로베니아는 무척 가까워, 동쪽으로 약 8 km (5 mi) 도시에서는 동남쪽 10–15 km (6–9 mi) 지점에 있으며, 크로아티아도 도시에서 남쪽으로 약 30 km (19 mi) 거리에 있다.
도시는 기다란 해안선을 끼고 있고 초원, 숲, 카르스트 지형으로 둘러 싸여 있다.
트리에스테는 트리에스트라는 이름으로 1382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에 속해 있었다. 19세기, 합스부르크는 유럽의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였고 트리에스테는 합스부르크에 있어 최대 핵심 항구였다. 지중해 지역의 번영하는 무역 중심지로서 트리에스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다음). 20세기로 넘어가던 시기, 문학과 음악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트리에스테는 1930년대에 경제적 부흥기를 겪었고,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동구권과 서방권 사이 주요 분쟁지 중 하나였다.
심수항으로 트리에스테는 북부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중부 유럽에 있어 해양 관문이다. 수에즈 운하 및 터키와 연결되고 있어 해양 실크로드의 종착지로 여겨진다. 1960년대 이래로, 트리에스테는 다수의 국제 단체 및 기관들이 위치해 있어 유럽 내 주요 연구지로서 부상했다. 이곳은 중부 유럽과 지중해가 만나는, 라틴, 슬라브, 독일어 문화권이 교차하는 장소에 위치해 있고, 다양한 민족 집단들과 종교 공동체들의 터전이다.
학술 분야에 있어서, 트리에스테는 유럽 내에서 인구당 연구자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이다.[2] Città della Barcolana ("바르콜라나의 도시), Città della bora (보라의 도시"), Città del vento ("바람의 도시"), "바다 옆 비엔나", "커피의 도시" 등은 트리에스테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별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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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
가장 가능성 높은 기원은 전형적인 베네티어의 접미사 -est-가 있는 켈트어 Tergeste이며 시장을 뜻하는 가상의 일리리아어 단어 *terg- (어원적으로 시장을 뜻하는 알바니아어 treg[3] 와 재현한 언어 슬라브조어 *tъrgъ등과에서 어원이 같음[3][4][5]) 비롯했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 시대의 저술가들은 Tergeste를 '테르게스툼'(Tergestum)으로 표기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오피둠 테르게스툼의 명칭은 로마 군대가 이 지역 부족들과 치러야만 했던 세 번의 전투("TER GESTUM [BELLUM]")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역사
요약
관점
고대사

기원전 2천년대 이래로, 트리에스테 지역에는 사람들이 거주해왔다. 본래 일리리아인들의 취락이었던 이곳에 베네티족이 기원전 10-9세기에 진입하였고 '테르게스테'(Tergeste)라는 도시 이름을 부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테르그'(terg*)가 베네티어로 시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시로 오데르초의 고대 이름은 오피테르기움(Opitergium)이었다). 이후에, 테르게스테는 동알프스의 부족 중 하나이던 카르니족이 차지하게 되었고, 제2차 이스트리아 전쟁 기간인 기원전 177년에 로마 공화정의 일부가 되었다.[6]
기원전 52년 내륙 지역의 야만족들의 침입을 받은 이후,[7] 기원전 46년까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의 식민시 지위를 부여받았는데,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시기의 사건들을 기록한 '갈리아 전기'에 이곳의 이름을 '테르게스테'라 기록하였다 (기원전 51년).[8]
제정 기간 로마 이탈리아의 경계는 티마보강에서 포르미오네강 (오늘날 리자나강)으로 옮겨졌다. 로마령 테르게스테는 이 지역 주요 로마 도시였던 아퀼레이아에서 이스트리아로 향하는 위치에 있어 항구로 번영하였으며, 이때의 흔적을 아직까지 찾아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기원전 33–32년에 도시 주변으로 성벽을 쌓았고, 트라야누스는 2세기에 극장을 세웠다. 같은 시기에, 이곳의 시민들은 푸피니아 (Pupinia) 트리부스를 부여받았다. 기원전 27년, 트리에스테는 아우구스투스의 이탈리아 행정 구역 11개 중 10번째 행정 구역 (Regio X)으로 통합되었다.[9]
초기 기독교 시대 때 트리에스테는 번영을 이어나갔다. 서기 138년과 161년 사이, 구역 확장이 이뤄졌고 인접한 카르니족 및 카탈리족 등은 테르게스테의 주요 인물이자 재무관 (quaestor urbanus)이던 파비우스 세베루스의 청원으로 '로마 원로원과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다.[10]
로마 제국 당시에 이미 바르콜라 지역에는 발리쿨라 (Vallicula , 작은 협곡)라는 어촌 마을이 존재했다. 건강 시설, 교각, 거대한 정원 등을 포함하여 화려하게 장식된 로마 시대의 빌라 잔해는 바르콜라가 바다와 바로 접해 있고 보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적절한 미기후에 있었기에 로마인들 사이에서 휴양을 위한 장소로 이미 이용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당시에, 대 플리니우스는 비탈에서 경작하던 풀치노의 포도밭 (Vinum Pucinum, 아마 오늘날 '프로세코')을 언급하기도 했다.[11]
중세 시대
788년, 트리에스테는 샤를마뉴의 지배권에 들어갔고, 샤를마뉴는 트리에스테를 주교후 관할 하에 두었다가 다시 프리울리 공작들의 소유가 되었다.
13-14세기 기간, 트리에스테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무역 경쟁자가 되었으며, 1283–87년 일시적으로 베네치아에 점령되었다가, 아퀼레이아 대주교령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베네치아에 대한 적대적 행위를 벌이자, 베네치아 측은 1368년 7월경 트리에스테에 전쟁을 선포하였고 11월경 도시를 점령하였다. 베네치아는 도시를 유지하고자 방어 시설 재건에 나섰으나, 1372년 철수해야만 했다. 1381년 토리노 화약에 따라, 베네치아는 트리에스테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트리에스테의 지도층 시민들은 오스트리아 공작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3세에게 트리에스테를 그의 영지로 합병해달라고 청원했다. 자발적 복종 (dedizione)의 협정은 1382년 9월 30일 그라츠의 한 성에서 체결됐다.[12]
트리에스테는 합스부르크의 치하에서 높은 수준의 자치를 유지했으나, 베네치아와 라구사에 비해서 무역 중심지로서 기반을 서서히 하락 중이었다. 1463년, 다수의 이스트리아 공동체가 베네치아에 트리에스테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트리에스테는 과거 트리에스테의 주교였던 교황 비오 2세의 개입으로 완전한 파괴를 당하는 데에서는 면해졌다. 허나, 베네치아는 트리에스테의 영토를 도시 밖으로 3km 지점까지 제한하였다. 베네치아는 다시 한번 1468–1469년에 걸쳐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의 트리에스테 약탈을 '트리에스테의 파괴'로 기억되고 있다.[13] 그러고 나서 그는 도시 성벽을 네 차례 복원하였다.[7] 트리에스테는 1470년 겨우 도시에 10k 거리에 떨어진 프로세코를 불태우고 진격하던 오스만 군대가 프리울리로 방향을 향하면서 또다른 약탈을 면했다.[14]

근세
1508–16년에 걸친 캉브레 동맹 전쟁 전반기 당시 합스부르크의 베네치아 침공이 실패로 끝나자, 베네치아 측은 1508년 트리에스테를 다시 점령하였고, 강화 조건 하에서 도시를 점거하고 있었다.[15]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은 분쟁이 재개된 1년이 얼마 안 되어 트리에스테를 회복하였다. 18세기 트리에스테는 오스트리아 측의 중요 항구이자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16] 1719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 시기 합스부르크 내에서 자유 항구 지위를 부여받았고 1791년 7월 1일까지 이 지위를 유지했다. 그의 후임자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트리에스테의 최전성기의 시작을 알렸다. 세르비아인들은 18, 19세기에 트리에스테에 대거 정착하였고, 이들은 얼마 안 되어 도시 내 영향력과 부를 갖춘 공동체를 갖추었으며, 다수의 세르비아 무역상들은 트리에스테 곳곳에 여러 핵심 사업체를 소유하고 궁전을 건설하기도 했다.[17]
19세기

이후 수 십년 동안, 트리에스테는 1797년, 1805년, 1809년 등 나폴레옹 전쟁 기간 몇 차례 프랑스 제국 군대에 일시적으로 점령되었다. 1809년부터 1813년까지, 트리에스테는 일리리아 프로뱅스로 합병되며, 자유항 지위가 중단되고 자치권을 상실했다. 자치권은 1813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도시로 반환된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트리에스테는 경제적 자유가 부여된 지위인 트리에스테 제국 자유 도시(독일어: Reichsunmittelbare Stadt Triest)로서 번영을 유지하였으며, 정치적 자유는 제한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중심 항구이자 선박 중심지로서 도시의 역할은 후대 1836년에 상선사인 오스트리아 해운사의 설립으로 더욱 강조되었으며, 상선사의 본사가 그란데 사니타 광장 (오늘날 우니타 디탈리아 광장)의 모퉁이에 위치했었다. 1913년경, 오스트리아 해운사는 총합 236,000 톤에 이르는 62척의 배들을 보유했었다.[18] 1860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입헌주의 도입으로, 자치권이 회복되었고, 트리에스테는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독일어: Österreichisches Küstenland)의 수도가 되었다.

피에몬테 사르데냐 왕국의 교회와 교회 재산에 대한 호전적 정책으로 인해 이탈리아반도의 나머지에서도 반교회주의 기류가 조성됨에 따라, 당시 교황 레오 13세는 거처를 트리에스테 및 잘츠부르크로 옮기는 것을 고려했었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이 발상을 거부했다.[19] 리예카(피우메)와 함께, 트리에스테는 주요 현대화 계획이 착수되 20세기 초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주요 기지 역할을 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주요 철도인 오스트리아 남부 철도의 건설로, 트리에스테는 석탄 교역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얻었다.

트리에스테는 카페 톰마세오의 활동에서 확인되듯 오랜 기간 이탈리아 민족 통일 정서의 근거지이었다.[20] 1882년에 이 감정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트리에스테를 방문했을 때 굴리엘모 오베르단 이 그의 암살을 시도하면서 절정에 다다랐다. 오베르단은 체포되어 재판에 보내졌고, 유죄를 선고 받아 결국에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행위는 동료 민족 통일주의자들에게 순교의 가치로 여겨졌고, 왕정주의자들에게는 수치로 여겨졌다. 34년 이상을 재위했던 황제는 다시는 트리에스테를 찾지 않았다.[21]
20세기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트리에스테는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자주 방문하는 북적거리는 국제 도시이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1904년과 1915년 사이 장기간 머문 관광객이었다. 조이스는 트리에스테에 기간 'Dubliners'와 'Ulysses'에서 일했다. 그의 제자들에는 이탈로 스베보가 있었고 움베르토 사바가 운영한 서점이 조이스의 아파트 근처에 있었다. 트리에스테에 기반을 둔 다른 작가들에는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얀 모리스, 풀비오 토미차, 엔초 베티차, 수산나 타마로, 에르네스토 네이선 로저스 등 있었다.[22] 지그문트 프로이트, 조프카 크베데르, 드라고틴 케테, 이반 찬카르, 스키피오 슬라타페르 등 역시도 트리에스테와 관련성을 갖고 있다. 트리에스테는 관광 업계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오스트리아 리비에라'의 주요 항구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합병, 파시스트 시대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 측에 가담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와 서부 노트란스카를 포함해 상당한 영토를 얻기로 약속받았다.[23]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1915년 런던 조약 및 이탈리아-유고슬라비아 간 1920년 라팔로 조약 조항에 따라 전쟁 종전 때 트리에스테를 합병하였다.[24]
1920년 7월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슬로베니아의 문화 중심지들을 불태워버리고 나서 1920년대 후반, 슬로베니아의 반파시즘 군사 단체 TIGR은 트리에스테 중심부에서 몇 차례 폭탄 공격을 가했다. 1930년과 1941년, 파시스트 정권의 국가 안보 특별재판소에 의해 슬로베니아의 활동가들에 대한 두 차례 재판이 트리에스테에서 열렸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기간, 파시즘 건축 양식으로 일부 기념 건축물들이 세워졌으며, 여기에는 트리에스테 대학교, 거 높이가 70m에 달하는 비토리아 등대 등이 있다. 경제는 1930년대 후반에 향상되었고, 여러 대규모 사회기반시설 사업이 시행되었다.[25]
제2차 세계 대전과 종전 이후

슬로베니아의 3분할이 이뤄지고 나서, 1941년 겨울을 시작으로, 최초의 슬로베니아 파르티잔들이 트리에스테 지역에서 등장하였으며, 그럼에도 1943년 말까지는 도시 자체 내에서 저항 운동이 이뤄지지는 못했다.[26]
1943년 9월 이탈리아 휴전 협정이 체결된 뒤, 트리에스테는 독일 국방군에 점령되었다. 트리에스테는 명목상 새롭게 건국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일부였으나, 사실상 독일에 의해 지배되었고, 독일은 옛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들을 아드리아 연해지 작전 구역으로 설정했는데, 트리에스테는 이곳 행정의 중심지이었다. 이 새롭게 만들어진 행정 구역은 최고 위원장으로 임명된 케르텐의 대관구지휘자 프리드리히 라이너가 이끌었다. 외관 상의 이탈리아 통치는 트리에스테의 시장이던 체사레 파니니가 계속 이어나갔으나, 모든 민간 행정관은 독일인 고문(Deutsche Berater) 형태의 최고 위원장이 배정되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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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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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 도시
사진
- 미라 마레 성
- 채널
- 산 주스토 대성당
- 시청
- 파노라마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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