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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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開化派)는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를 지지한 정치 세력이다.[1] 개화당(開化黨)[2]이라고도 한다.
개화파의 본격적인 활동은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 이후이지만 그 사상적 뿌리는 18세기의 북학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3] 그러나 위정척사파가 전국의 다양한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과 달리 개화파는 소수의 선각자들로부터 확산되는 모양새였다.[4]
개화파의 선구자로는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가 손꼽힌다.[5] 이들로부터 개화 사상을 배우거나 이들의 의견에 공감한 김옥균, 박영교, 김윤식, 유길준, 박영효, 서광범 등이 초기 개화파를 형성하였다.[3]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 정국이 되자 고종은 수신사와 조사 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면서 개화파를 중용하기 시작하였고,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 온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들고 오자 이를 간행하여 전국에 회람시키는 등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화 추진은 위정척사파의 극심한 반대를 가져왔다.[6]
개화파는 정치 참여 이후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화된다.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는 1880년 무렵 충의계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어 별도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였다.[7] 개화파는 흥선대원군의 하야 이후 외척인 여흥 민씨와 손잡고 위정척사파와 대립하는 구도를 보였으나, 1882년 임오군란의 처리 과정에서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자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에 이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8] 임오군란 이후 제물포 조약이 채결되는 한편 민영익이 개화파와 관계를 끊자 급진개화파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9] 쿠데타를 준비하였고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켰다.[7]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실패하였고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망명하면서 급진개화파는 몰락하였다.[10] 한편 임오군란 이후 급진개화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온건개화파는 정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갑신정변 실패의 여파로 개화 정책의 추진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온건개화파는 직접적인 정책 변화 보다는 교육 사업과 《한성주보》 등의 언론 사업으로 개화 여론 조성을 시도하였다.[11]
1894년 갑오년은 여러모로 조선에 숙명적인 한 해였다. 2월 시작된 갑오농민전쟁은 봉건적 악습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외세에 대한 반대도 분명히 하여 개화파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12]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조선이 다시 청의 세력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일본도 군대를 파견하여 청일전쟁이 벌어진다.[13] 내우외환 속에 고종은 개화파와 손잡고 갑오개혁을 시작하여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한 편 흥선대원군 복권을 시도하는 청나라의 입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14] 새로 설치된 군국기무처는 김홍집을 비롯한 어윤중, 김윤식 등의 온건 개화파 주도하였으나[15] 흥선대원군을 둘러싼 내분으로 약화되었고[16] 일본은 10월 이후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는 준식민지 정책을 추진하면서 군국기무처를 방해물로 여겼기 때문에 갑오개혁은 별 다른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14]
갑오년이 지나고 1895년 을미년에 들어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벌어진다. 이 일은 전국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의병의 중심이었던 위정척사파는 개화파를 친일파로 여겼다.[17] 을미의병 뒤로도 김홍집을 대표로 하는 온건개화파는 정부의 핵심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고종의 신뢰를 상실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개화파를 일괄 해임하였고 그 와중에 김홍집은 성난 군중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다.[18]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개화파의 정책 개혁 중 일부를 과거로 되돌렸지만 이완용, 이범진, 윤치호 등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들 역시 넓게 보아 개화파와 같은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훗날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이 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근대 문물의 도입을 위한 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19]:490-493
대한제국 수립 이후 갑신정변으로 망명하였던 서재필 등이 돌아와 독립협회를 세웠다. 이들은 만민공동회 등의 집회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20] 고종은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조병식이 독립협회가 공화국 수립을 추진한다고 무고하자 이를 계기로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19]:494-495
독립협회 해산 이후 자생적 근대화를 추진하던 개화파는 여러 정치 세력으로 분산되어 와해되었다. 친러파였던 이완용은 러일전쟁 이후 친일파로 돌아섰고[21] 서재필은 다시 망명지였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22] 박영효와 같은 개화파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도 친일파가 되었다.[23] 한편 김가진과 같이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독립운동을 벌인 사람도 있었고[24] 자강과 독립을 주장한 애국계몽운동 역시 개화파의 사상을 계승하였다.[25]
개화파 와해 이후로도 근대 문화의 수용은 시대적 과제였다. 안창호 등이 참여한 신민회는 독립과 함께 상공업 진흥과 근대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고[26], 최시형은 동학을 천도교로 바꾼 갑진혁신운동을 통해 그 동안 반외세적 입장이었던 동학의 사상을 근대 개혁적 사상으로 바꾸어 놓았다.[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