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
조선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의 인물 (1861–1939)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박영효(朴泳孝(Park Young-hyo), 1861년 6월 12일 ~ 1939년[2] 9월 21일)는 조선 경기도 광주유수 겸 수어사 직책을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 작가로 급진개화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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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朴泳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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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한성부판윤 | |
임기 | 1882년 음력 12월 29일 ~ 1883년 음력 3월 16일 |
전임 | 이돈응 |
후임 | 조경호 |
군주 | 고종 이형 |
조선의 경기도 광주유수 겸 수어사 | |
임기 | 1883년 음력 3월 17일 ~ 1883년 12월 10일 |
군주 | 고종 이형 |
이름 | |
별명 | 아명(兒名)은 박무량(朴無量) 작위(爵位)는 금릉위(錦陵尉) 자(字)는 자순(子純) 호(號)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61년 6월 12일(1861-06-12)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수원 |
사망일 | 1939년 9월 21일(1939-09-21)(78세)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종로방에서 병사 |
경력 | 한성부 판윤 |
정당 | 급진개화파 후예 |
부모 | 박원양(부) 전의 이씨(모) |
형제자매 | 박영교(형) 박영호(형) |
배우자 | 본부인 영혜옹주 그 외 측실 3명 |
자녀 | 박묘옥(서녀) 박진서(서자) 박일서(서자)[1] |
친인척 | 숙의 범씨(장모) |
종교 | 유교(성리학) |
그는 철종의 부마(사위)로 고종의 친척 매제가 되며 금릉위 상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며 모두 실패해 도합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882년 도일(渡日) 중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꿔 재도안했고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됐다.[3]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동문수학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해 다시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장정 13만 8천 자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놀랬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개화파들과 함께 일본으로 다시 쫓겨갔다. 일본 망명 기간 고종의 폐위를 기도했다고 모함을 받았지만 외려 1907년 고종 황제 양위를 막으려다 친일파들의 손으로 투옥, 유배되기도 했다.
경술 국치 사건 후 일본 정부에게 받은 은채 공사금 28만원으로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기업과 은행 활동에 전념했으며, 이후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 고문도 지냈다. 이 때문에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수록됐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어릴적 이름은 무량(無量), 자(字)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은 반남이며, 일본식 이름은 야마자키 에이하루(언어 오류(aj): 山崎永春[4])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할 때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