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대한민국의 정치가, 건달 (1918–1972)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두한( 한국 한자: 金斗漢, 1918년 6월 23일[3]~1972년 11월 21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의 서자[4][5] 출신이며, 일제강점기 말기의 건달 무리를 거느렸던 조직폭력배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재선 국회의원(제3·6대 의원)을 지낸, 해방 및 광복 이후의 전직 정치인이었다.
김두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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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8년 6월 23일(1918-06-23) 일본 제국령 조선 경성부 종로 |
사망 | 1972년 11월 21일(1972-11-21)(54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
성별 | 남성 |
국적 | 대한민국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
학력 | 경성교동공립보통학교 2학년 1학기 중퇴[1] 대한민국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 |
경력 | 6.25 전쟁 중 영천 전투 참전 무소속 재선 국회의원 자유당 당무위원 겸 상임위원 노농당 당무위원 겸 대표최고상무위원 한국독립당 상임고문 겸 당무위원 신민당 당무위원 겸 전임행정위원 |
부모 | 김좌진(부) 김계월(생모) 오숙근(적모) 나혜국(계모) |
형제 | 김석출(이복 누이동생) 김철한(이복 남동생) 김강석(이복 누이동생)[2] |
배우자 | 초배: 이재희(李載熙, 1924년 출생~1987년 사망, 1971년 재결합) 계배: 김부미(金富美, 1917년 출생~1999년 사망, 1962년 이혼) 삼취: 박정인(朴貞仁, 1933년 출생~, 1966년 이혼) 사취: 김순옥(金順玉, 1945년 출생~, 1971년 이혼) |
자녀 | 4남 2녀 (장녀 김을동, 차녀 김영채, 장남 김경민, 차남 김현성, 3남 김주택, 4남 김범상) |
군복무 | 6.25 전쟁 당시 경남 부산 민간 종군원 |
종교 | 불교 |
의원 선수 | 2 |
정당 | 무소속 |
웹사이트 | 김두한 - 대한민국헌정회 |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의송(義松)·가송(嘉松). 별칭은 일본(一本)이다.
일제강점기 말 18세 약관(1935년)으로 서울에서 유력한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였으며, 1945년 해방 후, 미군정기에서는 잠시 지인들의 유린(유혹)으로 인하여 조선공산당 산하의 조선청년전위대 대장으로 있었으나, 이내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여 반탁운동 등을 비롯한 광란의 좌우 대립에서 반공 투쟁과 정치 테러를 저질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사실상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가 건달 활동을 계속하였다.
3대 국회 · 6대 국회 등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 6대 국회의원에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한국 비료 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하자 국회에서 삼성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국무위원 및 정일권 국무총리 등에게 오물을 투척하였다.
경기도 수원 신민당 후보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했다. 1972년 11월 18일에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었고 진단받았으며 11월 21일에 오랜 지병으로 인해 향년 54세로 사망하였다.
아무리 독재에 저항하며 투쟁하는 정치 활동을 하여 많은 고초를 겪은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나, 인간 김두한보다는 '장군의 아들'이라는 부친의 후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다.[6] 재차 아울러 또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초배 본부인 오숙근 여사의 소생의 아들이 아닌 이유가 주된 주요 빌미로써,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친자 논란》이 있으며,[7] 자서전 등을 통한 일방적인 주장으로 일부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며 왜곡, 미화, 과장된 부분이 다수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로써, 《그토록 과장된 내용의 역사적인 김두한의 왜곡된 이미지가 도드라진다》는 촌평의 범위가 더 광범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