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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카유보트
프랑스의 화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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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카유보트(프랑스어: Gustave Caillebotte, 프랑스어 발음: [ɡystav kɑjbɔt], 1848년 8월 19일~1894년 2월 21일)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인상주의의 일원이자 후원자였으나, 다른 인상파 화가들보다 더 사실주의적인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다. 카유보트는 사진을 새로운 형식의 예술로서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유명하다.[1] 그의 가문의 부유함 덕분에 그는 많은 인상주의 동료들을 후원할 수 있었다. 그의 사후, 그의 유증으로 수집된 인상파 작품들은 상당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인상파 컬렉션의 핵심이 되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미장센 연출과 같은 특징으로 유명한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이다. 시카고 미술관은 1964년에 이 작품을 인수했는데, 1970년대부터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오랫동안 인상주의의 후원자이자 홍보자로서의 역할로 높이 평가받았지만, 1994년 사망 100주년이 되기 전까지는 그의 작품에 대한 국제적인 회고전이 없었다. 2022년 프랑스는 클로즈업 액션 시점으로 유명한 뱃놀이를 프랑스 국보로 선정하고, 그 작품의 문화적 중요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아 기념 전시를 한 후, 이어 작품의 전국 순회 전시와 국제 순회 전시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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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생활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1848년 8월 19일 파리의 포부르생드니 거리에 살고 있던 상류층 파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르샬 카유보트 (1799–1874)는 가문의 군수 직물 사업을 물려받았고 센 상공재판소의 재판관이기도 했다. 카유보트의 아버지는 카유보트의 어머니 셀레스트 도프레슨(1819–1878)과 결혼하기 전에 두 번 사별하였다. 어머니 셀레스트는 귀스타브 외에 르네(1851–1876)와 마르샬(1853–1910) 등 두 명의 아들을 더 두었다.[2]
카유보트는 1868년에 법학 학위를, 1870년에는 법률 실무 자격을 취득했으며 엔지니어이기도 했다. 학업을 마친 직후, 그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징집되었고, 1870년 7월부터 1871년 3월까지 센강 국방군에서 복무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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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생활
요약
관점
발전
카유보트는 전쟁 복무 중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4] 전쟁 후 카유보트는 화가 레옹 보나의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스타일을 개발하여, 부모님의 집에 첫 번째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1873년 카유보트는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지만,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5] 그의 초기 작품 일부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모델로 그렸다. 그의 작업실은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자택에 지어졌다.[4] 1874년 아버지 사망 후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 받았고, 1878년 어머니 사망 후 생존한 아들들이 가족 재산을 분할하였다.[6] 귀스타브와 그의 형제는 이에르의 부동산을 팔고 파리의 오스만 대로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1874년경 카유보트는 아카데미 데 보자르 밖에서 활동하는 여러 예술가들과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 그중에는 에드가 드가와 주세페 데 니티스가 있었다.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석했지만 참여하지는 않았다.
카유보트는 1876년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그의 초기 걸작인 《마루 깎는 사람들》(1875)을 포함한 8점의 그림을 선보이며 데뷔했다.[7] 노동자들이 나무 바닥(작가의 스튜디오였던 것으로 추정)을 준비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의 주제는 일부 비평가들에게 "저속하다"고 비판받았으며, 아마도 1875년 살롱에서 거부당한 이유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예술계에서는 시골 농민이나 농부만을 노동 계급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여겼다.[8] 1877년 제3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이르러, 그는 전시 공간 확보, 예술가 및 작품 선정, 작품 설치 등 행사 전반의 리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비용없이 다른 지망생 예술가들의 요구와 기대를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그의 참여는 점차 줄어들었다.[4] 결국 그는 8번의 인상주의 전시회 중 5번에 작품을 출품했다.[9]
스타일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장프랑수아 밀레와 귀스타브 쿠르베, 그리고 동시대의 드가와 마찬가지로, 회화에 내재된 연극성을 줄이고, 존재하는 그대로, 자신이 보는 대로 현실을 그리려 했다. 그의 스타일과 기법은 작품마다 상당히 다양하고, 마치 "빌려와서" 실험하는 듯하며, 어떤 한 가지 스타일에 고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스타일은 아마도 수많은 동료들과의 긴밀한 관계 때문으로 보인다. 때로는 에드가 드가의 풍부한 색채의 사실주의 진영에 매우 가까워 보였고(특히 그의 실내 장면들), 또 다른 때에는 인상파처럼 "광학적 진실"에 대한 집념을 공유하며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카미유 피사로와 가장 유사한 인상주의적인 파스텔 톤의 부드러움과 느슨한 붓놀림을 사용했다. 다만, 다른 인상파 화가들 보다는 생동감이 덜한 팔레트를 사용했다.[10]
이 그림들에서는 흔히 지면이 기울어진 모습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일본 목판화와 새로운 사진 기술에 강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가 사진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부족하다.[11] 카유보트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자르기(Crop, 그림 경계에서 피사체가 잘림)과 "줌인" 기법 또한 사진에 대한 그의 관심의 결과일 수 있지만, 원근 효과에 대한 그의 강렬한 관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카유보트의 작품 중에는 《지붕 풍경 (설경)》(1878), 《위에서 본 대로》(1880), 《교통섬》과 같이 매우 높은 시점에서 묘사된 그림도 다수 존재한다.[12]
주제

카유보트는 가정 및 가족 장면, 실내 풍경,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이러한 그림들에는 자신의 가족을 묘사하는 그림이 많다. 《창가에 있는 젊은 남자》(1876)는 미로메닐 거리에 있는 동생 르네의 집을 묘사한다.[13] 《오렌지 나무》(1878)는 마르샬 주니어와 그의 사촌 조에가 이에르에 있는 가족의 정원에 함께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시골의 초상화》(1875)에는 카유보트의 어머니와 그의 이모, 사촌, 그리고 가족 친구가 등장한다. 식사, 카드 놀이, 피아노 연주, 독서, 바느질 장면 등의 많은 그림에서, 모두 상류층 실내 생활의 조용한 의식을 친밀하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14]
이에르에서 그린 시골 장면들은 한가로운 강에서 즐기는 보트 타기와 낚시, 수영, 그리고 그의 시골 집 주변의 가정 풍경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오귀스트 르누아르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인상주의 기법을 자주 사용하여 시골의 고요한 자연을 표현했는데, 이는 도시 풍경화의 평평하고 부드러운 붓놀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뱃놀이》(1877)에서는 노 젓는 동료와 앞쪽 강을 향해 앉은 뱃놀이 승객의 시점을 효과적으로 처리하여, 에두아르 마네의 《보트 타는 사람들》(1874)보다 훨씬 사실적이고 몰입감 있게 표현하였다.[15] 《뱃놀이》는 카유보트가 1879년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보낸 작품이다.[16] 그는 1879년 전시회에 총 35점의 회화와 파스텔을 출품했다. 그중에서도 《뱃놀이》와 《지붕 풍경 (설경)》은 최고로 여겨졌다.[17] "수상 스포츠, 보트 타기 및 강변 여가"에 초점을 맞춘 이 당시 그림들은 그가 살아있는 예술가로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묘사된다.[18]

카유보트는 《유럽의 다리》(1876)와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1877)와 같은 파리의 도시 모습을 묘사한 그림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후자는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튀지 않는 색상과 사진과 같은 사실주의적 효과로 그의 작품 중 거의 유일무이하며, 에드워드 호퍼와 같은 미국 사실주의자들과 유사한 독특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19] 그의 도시 풍경화 중 다수는 과장된 원근법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20] 《발코니의 남자》(1880)에서 그는 특이한 원근법을 사용하여 관객이 피사체와 함께 발코니에 서서 멀리 뻗어있는 도시의 풍경을 함께 관찰하도록 유도한다.[21] 같은 시기에 제작된 다른 도시 그림들, 예를 들어 《생 오귀스탱 광장》(1877)의 경우엔 훨씬 더 인상주의적 스타일로, 카유보트 특유의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준다.[22]
카유보트의 정물화는 주로 음식을 주제로 하는데, 일부는 식탁에 준비되어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음식을, 일부는 정육점 고기와 같이 판매용 식재료를 그렸다.[23] 그는 또한 특히 1890년대에 몇몇 꽃 정물화를 제작했다. 카유보트에겐 특이한 주제로 보이지만, 그는 《목욕하는 남자》(1884)와 《소파 위의 누드》(1882)를 포함한 누드 작품도 몇몇 남겼다. 이러한 작품들은 사실주의적으로 도발적이지만, 그 시대의 많은 여성 누드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골적으로 에로틱하지도 신화를 암시하지도 않는 모호한 분위기를 띤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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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요약
관점

1881년, 카유보트는 아르장퇴유 근처 센강 변에 위치한 프티젠빌리에에 부동산을 구입했다.[25] 그의 동생 마르샬은 1887년에 결혼했고,[4] 귀스타브는 1888년에 프티젠빌리에로 영구히 이사했다.[25] 카유보트의 소유지에는 자신의 요트를 설계할 수 있는 조선소가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보트 경주인 레가타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실제로 자신의 보트 '로스트비프'로 여러 경주에서 우승했다.[4] 그는 34세에 작품 전시를 중단하고 원예와 요트 제작 및 경주에 전념했으며, 동생 마르샬과 친구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르누아르는 자주 프티젠빌리에를 자주 방문했고, 예술, 정치, 문학, 철학 등에 대해 폭넓게 토론했다. 카유보트는 르누아르의 1881년 그림 《뱃놀이 일행의 점심》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결혼한 적이 없지만, 카유보트는 자신보다 11살 어리고 하류층 출신인 샬럿 베르티에와 진지한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그녀에게 상당한 연금을 남겼다.[26]

카유보트는 도시와 가정 풍경으로 유명했지만, 사망하기 전 몇 년 동안은 집 주변 지역의 시골 풍경도 많이 그렸다.[27] 그의 작품은 특히 강 풍경을 중심으로 한 야외 사생 풍경화로 옮겨갔다.[9]
카유보트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사실주의로 파리 주변의 환경을 부드럽게 묘사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9] 그의 그림 경력은 1890년대 초 대형 캔버스 작업을 중단하면서 급격히 둔화되었다. 카유보트는 1894년 45세의 나이로 프티젠빌리에 정원에서 일하던 중 폐울혈로 사망했다. 그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28]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생계를 위해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카유보트는 화가로서의 명성보다 예술 후원자로서 명망이 더 높았다.[29] 그러나 사망 70년 후, 미술사학자들은 그의 예술적 공헌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원근법을 인상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는 다른 동료들과 차별화된다. 그의 예술은 1950년대 친척들이 가족 소장품을 팔기 시작할 때까지 대부분 잊혀졌다. 1964년 시카고 미술관이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을 인수하면서 미국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다.[30] 1970년대에는 그의 작품이 다시 전시되기 시작하면서 비판적으로 재평가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도 미술사에서 카유보트의 위치는 불확실했다.[9]
1994년 그의 사망 100주년을 맞아 그랑 팔레 국립미술관 (1994년 9월 16일 – 1995년 1월 9일), 시카고 미술관 (1995년 2월 18일 – 5월 28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1995년 6월 22일 – 9월 10일)을 순회하며 그의 작품에 대한 주요 회고전이 열렸다.[31][32] 이 전시회들은 그의 작품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회화 89점 포함 총 117점) 국제 회고전이었다.[9]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워싱턴 D.C.)와 킴벨 미술관(텍사스 포트워스)은 2015-2016년 카유보트 회화의 주요 회고전인 "귀스타브 카유보트: 화가의 눈"을 기획했다.[33][34]
후원자 및 수집가

카유보트는 상당한 수입과 부모의 유산으로, 작품을 팔아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인상주의 전시회를 후원하고 동료 예술가 및 친구들(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등)의 작품을 구매하는 방법으로 지원했으며,[4] 적어도 모네의 경우에는 스튜디오 임대료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9]
카유보트는 1875년에 그의 첫 번째 모네 작품을 구입했으며, 특히 그 예술가의 경력과 재정적 생존에 큰 도움을 주었다.[35] 그는 후원 기준이 명확했다. 특히 조르주 쇠라와 폴 고갱의 작품, 또는 상징주의자들의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10] 1890년, 그는 클로드 모네가 대중 모금을 조직하여 프랑스 정부가 에두아르 마네의 1863년 《올랭피아》를 구매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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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오르세 미술관 전시회
요약
관점
2022년 프랑스는 《뱃놀이]》를 인수하여 2023년에 공개했다. 프랑스 문화부는 2024년 인상주의 150주년과 카유보트 사망 130주년을 기념하여 작품 인수를 전국적인 행사를 조직했다. 이 행사는 오르세 미술관의 인상주의 전시실에 이 작품을 특별 전시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며, 전국 순회 전시를 거친 후, 오르세 미술관에서 열린 카유보트의 특별 전시회에 이 작품이 함께 전시되었다.[37] 《뱃놀이》는 리마 압둘 말라크가 리옹 미술관 (2023년 9월 9일 ~ 2023년 12월 11일)에서 선보이며 전국 순회를 시작했고,[16][17] 마르세유 미술관 (2023년 12월 15일 ~ 2024년 3월 17일)에 전시되었으며,[38] 이후 낭트 미술관 (2024년 3월 23일 ~ 2024년 6월 23일)에 전시되었다. 낭트 전시는 2024년 3월 26일 ~ 2024년 7월 14일에 시행된 오르세 미술관의 인상주의 150주년 전시와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이와 함께 프랑스 전역의 30개 박물관에 180점의 작품을 대여하였다.[39][40][41][42] 이것은 프랑스 국보가 이렇게 전국 순회 전시된 첫 사례였다.[16]
2024년에 오르세 미술관은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남성을 어떻게 파격적인 방식으로 묘사했는지를 살펴보는 전시를 개최했다. 이는 그의 동성애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43] 전시회의 서문에 따르면 19세기 여성들만 가정적이고 친밀한 환경에서 묘사했음에도 카유보트는 이러한 환경에서 남성을 묘사했다고 강조한다. 그의 남성 피사체들은 목욕, 노 젓기, 휴식, 심지어 배변과 같은 일상 활동에서 놀라운 사실주의로 묘사되었다.[44] 한 큐레이터는 그의 작품의 급진적인 성격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의 주제는 그 시대에 매우 급진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성들은 남성들을 응시해서는 안 되었는데, 그는 남성들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5][46] 그는 생전에 100점의 그림에 남성만을 묘사했고, 여성만을 묘사한 그림은 32점에 불과했다. 이는 그의 프랑스 동시대 화가들 사이에서 독특했다. 그의 남성 피사체는 대부분 상류 사회 출신이었다.[47] 그러나 오르세 전시회의 이러한 편향성은 르 몽드의 하리 벨레와 같은 프랑스 신문 미술 비평가들에 의해 논란이 되었다.[48]
이 순회전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귀스타브 카유보트: 남성을 그리다" (2024년 10월 8일 ~ 2025년 1월 19일)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고, 이어 J. 폴 게티 미술관 (2025년 2월 25일 ~ 2025년 5월 25일)에 전시되었다.[47][32][49] 이 전시는 시카고 미술관으로 이동하여 "귀스타브 카유보트: 그의 세계를 그리다"라는 제목으로 (2025년 6월 29일 ~ 2025년 10월 5일) 전시되었다.[50] 전시회에서 유일하게 변경된 점은 카유보트의 파스텔화 작품이 취약성 때문에 파리에서만 전시되었다는 것이다. 전시회의 후속 전시장에서는 도쿄의 아티존 미술관에서 대여한 《피아노 치는 젊은 남자》(1876)가 포함되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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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관심사
또한 카유보트는 우표 수집, 난초 재배, 요트 건조, 심지어 직물 디자인과 같은 자신이 열정적으로 즐겼던 취미에 자신의 재산을 투자했다. 그의 그림 《뜨개질하는 부아시에르 부인》(1877)과 《카유보트 부인의 초상》(1877)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카유보트가 만든 패턴으로 작업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사망한 후, 그는 저명한 우표 수집가 명부에 등재되었고, 그가 그의 형제 마르샬과 함께 모은 컬렉션은 현재 대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52]
카유보트의 컬렉션
요약
관점


카유보트는 1876년 남동생 르네가 죽자, 자신의 삶이 짧을 것이라고 확신하여 20대 때 유언장을 작성했다.[35] 유언장에서 카유보트는 프랑스 정부에 대규모 컬렉션을 유증했다. 이 68점의 회화 컬렉션에는 카미유 피사로 (19점), 클로드 모네 (14점), 오귀스트 르누아르 (10점), 알프레드 시슬레 (9점), 에드가 드가 (7점), 폴 세잔 (5점), 에두아르 마네 (4점)의 작품이 포함되었다.[28] 유증 당시 마르샬은 《마루 깎는 사람들》도 기증했는데, 이는 유언장에 귀스타브 자신의 작품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37]
카유보트가 사망할 당시, 인상주의자들은 여전히 아카데믹 미술, 특히 예술 아카데미가 지배하던 프랑스 예술계로부터 크게 비난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카유보트는 자신의 컬렉션에 있는 문화적 보물들이 "다락방"이나 "지방 박물관"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그는 이 작품들이 뤽상부르궁 (생존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곳)에, 그리고 이어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53] 프랑스 정부는 이 조건에 동의하지 않았다. 1896년 2월, 그들은 유언 집행인인 르누아르와 협상 끝에 38점의 그림을 뤽상부르궁으로 가져가는 데 합의했다. 이 전시는 프랑스에서 인상주의 작품이 공공 장소에 전시된 치초의 사례가 되었다.[54]
포함된 작품 중에는 인상, 해돋이, 《아르장퇴유 근처의 양귀비밭》, 그리고 생라자르역 연작중 하나, 발레 수업(드가), 기찻길(마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와 그네(르누아르), 그리고 에바 곤잘레스의 《이탈리아 극장의 객석》 등이 있었다.[55] 이 작품들은 1897년 2월 뤽상부르 박물관의 카유보트 전시실에서 공개되어, 인상주의의 위상을 높였다.[54] 유증은 작품들이 루브르 박물관 컬렉션으로 이어지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루브르 박물관의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초반 프랑스 예술 컬렉션은 오르세 미술관으로 이전되었다.[37] 2024년 인상주의 150주년과 카유보트 사망 130주년을 기념하여, 평소에는 오르세 미술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이 컬렉션이 2024년 10월 8일부터 2025년 1월 19일까지 한자리에 모여 전시되었다.[56] 이 전시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진행된 카유보트 전시회와 동시에 이루어졌다.[32]
남은 29점의 그림(드가의 작품 중 1점은 르누아르가 유언 집행 서비스 대가로 가져갔다)은 1904년과 1908년에 다시 프랑스 정부에 제안되었으나 두 번 모두 거절당했다. 1928년이 되자, 프랑스 정부에서 이 작품들을 인수하려고 시도했지만, 카유보트의 형제 마르샬 카유보트의 미망인이 유증을 거부하였다. 남은 작품 중 하나인 《휴식하는 목욕하는 사람들》은 앨버트 C. 반스가 구입했으며 현재 반스 재단에 소장되어 있다.[57] 2019년, 다우렐레가 유증한 3점의 회화와 2점의 파스텔화가 오르세 미술관에 수락되었다. 박물관은 최근, 카유보트의 《태양, 프티젠빌리에의 정원》이 오르세 미술관의 인상주의 전시실에 예술적, 역사적 가치를 높여준다는 이유로 인수했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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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
요약
관점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발코니의 남자, 오스만 대로》(1880)는 2000년에 1,430만 달러 이상(2000년 기준으로 $26.1 백만 달러)에 팔렸다.[59]
2011년, 보스턴 미술관은 1,700만 달러(2011년 기준으로 $23.8 백만 달러)에 《목욕하는 남자》를 인수하여 박물관이 보유한 두 번째 카유보트 작품이 되었다.[60] 2011년 2월, 그의 작품 최고가 기록은 1,800만 달러(2011년 기준으로 $25.2 백만 달러)로 올라갔다.[61] 2018년, 카유보트의 집사장 다우렐(Jean Daurelle)의 증손녀인 마리-잔 다우렐(Marie-Jeanne Daurelle)은 3점의 회화(다우렐의 초상 2점)[62][63]과 2점의 파스텔화(어린 시절 그녀의 할아버지 카미유를 묘사)[64][65]를 오르세 미술관에 유증했다. 그녀는 1994년 카유보트 회고전이 열리기 전까지 그림들이 가치 있는 줄 몰랐다.[66] 2019년 《오르는 길》(1881)이 판매되면서 카유보트 작품의 최고 가격 기록이 2,200만 달러(2019년 기준으로 $27.1 백만 달러)[67] 또는 1,990만 유로(2019년 기준으로 €23.4 백만 유로)로 올라갔다.[66] 같은 해, 또 다른 카유보트 작품 《프티젠빌리에의 리샤르 갈로와 그의 개 딕》(1884)은 출처에 따라 1,970만 달러(2019년 기준으로 $24.2 백만 달러)[68] 또는 2,080만 달러(2019년 기준으로 $25.6 백만 달러)에 팔렸다.[69]
2021년, 《창가에 있는 젊은 남자》(프랑스 국보)는 에드윈 L. 콕스의 유산에서 크리스티스 뉴욕 경매를 통해 로스앤젤레스의 J. 폴 게티 미술관 컬렉션으로 5,300만 달러(2021년 기준으로 $61.5 백만 달러)[70] 또는 4,890만 유로(2021년 기준으로 €55.9 백만 유로)에 팔려,[71] 게티 박물관의 첫 카유보트 작품이 되었다.[72]
《뱃놀이》(역시 프랑스 국보)[37]는 카유보트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다가 LVMH의 기부를 통해 오르세 미술관이 2022년에 4,700만 달러(2022년 기준으로 $50.5 백만 달러)[73] 또는 4,300만 유로(2022년 기준으로 €45.3 백만 유로)에 인수할 수 있었다.[74] 오르세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상주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41] 그러나 이전에 소장하고 있던 카유보트의 13점의 작품에는 그가 물과 관련된 주제로 작업했던 시기의 작품이 포함되지 않았다.[17] 《뱃놀이》는 국보 프로그램 역사상 국가가 인수한 가장 중요한 보물로 묘사되었다.[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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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 정원사들 (Les jardiniers) (1875)
개인 소장 - 시골의 초상화 (Portraits à la campagne) (1876)
바롱 제라르 박물관, 바이외 - 이에르 강에서의 뱃놀이 (Boating on the Yerres) (1877)
밀워키 미술관 - 수영 준비 중인 목욕하는 남자 (Baigneurs) (1878)
개인 소장 - 페리수아르 (Les Périssoires) (1878)
렌 미술관 - 알레비 거리, 6층에서 본 풍경 (Rue Halévy, From the 6th Floor) (1878), 바르베리니 박물관, 포츠담
- 이탈리앙 대로 (Boulevard des Italiens) (1880)
개인 소장 - 발코니의 남자, 오스만 대로 (L'homme au balcon, boulevard Haussmann) (1880)
- 발코니 (Un balcon) (1880)
개인 소장 - 카페에서 (Dans un café) (1880)
루앙 미술관 - 실내 (Intérieur) (1880)
개인 소장 - 진열된 과일 (Fruits sur un étalage) (1882)
보스턴 미술관 - 블라우스를 입은 남자 (Homme portant une blouse) (1884)
개인 소장 - 트루빌의 빌라 (Villas à Trouville) (1884)
클리블랜드 미술관 - 젠빌리에 평원, 노란 들판 (The plain of Gennevilliers, yellow fields) (1884)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멜버른 - 젠빌리에 평원 (La Plaine de Gennevilliers) (1888)
개인 소장 - 나스타티움 (Nasturces) (1892)
개인 소장
각주 및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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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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