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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지질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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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지질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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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대한지질학회(大韓地質學會, The Geological Society of Korea, GSK)는 지질과학의 기초 및 그 응용에 관한 학술과 기술의 발전 및 보급을 목적으로 1947년 4월 10일에 설립된 대한민국지질학 학술단체이다. 지질학 학술대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개최, 학술지 및 관련 분야의 서적을 발행, 국내외 단체와의 교류 등을 활동하고 있다. 1964년에 창간된 학술지 《지질학회지》를 발행하고 있다.[1][2]

간략 정보 대한지질학회, 원어 명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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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지질학회는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지질학 학회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학회로, 주로 지질학한국의 지질에 대해 연구하며 지질학회지를 비롯한 학술지를 통해 논문을 발간한다. 1963년 4월에 사단법인으로 설립 허가되었으며,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7길 22 한국과학기술회관 1관 1010-1011호 (06130)에 위치한다.[1]

주요 사업

  • 학술대회, 심포지움, 강연회, 야외답사 및 강습회 개최
  • 학술회지, 간행물 및 도서의 발간
  • 학술의 국제교류
  • 학계, 산업계 및 연구기관과의 협력 강화
  • 교육프로그램의 개발 및 보급
  • 기타 본회의 목적달성에 적합한 사업

임원

  • 회장
  • 부회장
  • 총무이사
  • 재무이사
  • 기획이사
  • 학술이사
  • 섭외·홍보이사
  • 국제협력이사
  • 감사

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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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다음은 한국의 지질과 관련된 대한지질학회의 역사와 지질학회지의 주요 논문이다.

  • (): 층서 설정 등 지질학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논문
  • (): 화석 산지, 지질유산 등의 최초 발견
  • 분류: 퇴적암(지층, 층서, 화석, 환경), 화성암(화산암, 심성암), 변성암(변성퇴적암), 특별암석, 지질시대(절대연령), 지질구조(단층, 습곡, 절리), 지질재해(지진, 화산, 산사태), 지하자원(광상), 지질유산, 기타

일제 강점기~광복

일본 제국은 한반도의 광물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1918년 조선총독부 식산국 산하에 지질조사소를 설치하고 고토 분지로, 타테이와 이와오 등 일본인 지질학자들로 하여금 한국의 지질을 조사하게 하였다. 일부 제국대학에는 지질학과가 설치되어 있어 극소수의 한국인들이 일본 제국제국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하였고, 광복 당시 지질학을 전공한 한국인 지질학자는 박동길을 포함해 불과 10명, 지질학을 전공한 학생은 7명으로, 그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2]

이들 10명의 지질학자들은 한국 지질학계의 원로이자 선구자로 해방 후 대학교 지질학과, 지질조사소와 광업 회사에서 활동하였으며, 1946년 9월에는 서울대학교 지질학과과 있던 청량리역 부근에서 한국 최초의 지질학자이자 한국 지질학계의 제1원로 교수인 박동길이 지질학자들을 소집하여 지질학회의 창립을 결정하고 박동길이 초대 지질학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준비작업 후 1947년 4월 10일 서울 교외 정릉의 숲속에서 대한지질학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대한지질학회가 정식으로 창립하였다.[2]

광복 후~1950년대

대한지질학회 창립 초기에는 광복 후의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과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학회지를 발간하지 못하였고, 1947년부터 1950년 초까지 연 2회 야외에서 총회를 개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으로 지질학계는 다시 침체되었는데, 지질학회 회원 중에는 입대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도 있었고, 지질학자 중 주수달, 노수원, 김봉균이 북한으로 납치되어 주수달은 사망하고 김봉균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1·4 후퇴 당시에는 정창희 지질과장이 16개 지질도폭을 가지고 인천에서 미군 LST에 승선하다가 모두 떨어뜨려 눈물을 흘린 일화가 전해진다.[2]

1960년대

1960년 6월 4일 제15차 총회에서 학회지의 발간이 정식으로 보고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1일 제13차 이사회에서 학회지의 이름이 지질학회지(The Journal of the Geological Society of Korea)로 결정되었다. 1961년 4월의 제18회 임원회에서 학회지의 구체적인 세부 사항이 논의되었고, 1962년 4월 제24회 임원회에서 발간 계획이 확정되었으니 재정 문제로 미뤄져 1964년 8월 대한지질학회 최초의 논문, 지질학회지 제1권 1호로 발간을 시작하였다.[2] 1960년대의 논문 저자들로는 대한민국 지질학계의 원로 교수인 서울대학교정창희(鄭昌熙), 경북대학교의 장기홍, 이대성(李大聲), 김봉균(金鳳均), 이상만 등이 있다. 판 구조론이 공식화되기 전이라 이 시기의 논문에는 지향사 등 오래된 용어들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1960년대는 지질학회지의 첫 발간과 함께 지질학 분야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발전기로, 1961년 경북대학교 지질학과 신설, 1962년 태백산지구지하자원조사단(Geological Investigation Corps of Taebaeksan Region, GICTR)에 의한 태백산분지 지역 조선 누층군평안 누층군의 층서 결정, 1965년 연세대학교 지질학과 신설, 1969년 고려대학교 지질학과 신설 및 정창희에 의한 평안 누층군의 층서 결정 등 중요한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1:5만 지질도폭 사업은 국립지질조사소(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으며 대부분의 지질도폭 제작에 대한지질학회의 주관 하에 학회 회원들이 참여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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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1970년대에는 안정기에 접어들고 회원들의 연구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매년 학회지가 발간되었으며 이때부터 외국의 저명한 지질학자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가지고 국제적인 학술대회에 참여하는 일이 많아졌다. 또한 1973년 2월 7일에 대한지질학회는 국제지질과학연합(IUGS)에 가입하여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1976년 11월 11일 한국의 지질의 주요 쟁점인 옥천 누층군에 대한 제1차 심포지엄이 개최되어 김옥준, 장기홍, 이하영, 이대성 회원이 발표하고 열띤 토론을 개최하여 학회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으며 다음 해의 같은 날짜에 제2차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이 옥천 누층군(옥천계) 심포지엄은 학술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2]

한국의 원로 지질학자인 정창희는 1974년 4월부터 1976년 4월까지 대한지질학회의 회장으로 재임했다. 1970년대의 중요한 연구로, 경북대학교의 장기홍은 1975년을 기점으로 그때까지 사용되던 타테이와 이와오(1924)의 경상계 지층(낙동통, 신라통, 불국사통)를 폐지하고, 경상 분지 경상 누층군의 층서를 화산 쇄설물의 포함 정도에 근거하여 신동층군, 하양층군, 유천층군으로 재설정하였고 하양층군에서 대구층을 분리해 함안층반야월층을 처음으로 설정하였으며 경상 누층군으로 명명된 이 층서는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김형식, 김진섭, 김항묵은 1979년 12월 부산광역시에서 부산 전포동 구상반려암을 발견하였으며, 이 노두는 오늘날 부산국가지질공원의 지질명소로 지정되어 있다. 윤선(1975, 1976, 1979)는 포항 분지연일층군과 울산 분지의 화봉리층에서 신생대 마이오세의 화석을 기재하였으며, 이하영(1971, 1975, 1976, 1979)은 조선 누층군의 여러 지층에서 코노돈트 화석을 기재하였다.

1970년대 대한지질학회의 주요 논문 저자는 아래와 같다. 1970년대에는 한국의 지진을 연구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지진 이야기》(2015)를 저술한 서울대학교의 이기화 교수, 경상 누층군에서 여러 화석을 발견한 경북대학교의 양승영 교수, 1971년 서울대학교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한반도 형성사》(2015)를 저술한 최덕근 교수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손치무는 1976년 6월 한국의 지질학 발전 역사를 서술한 지질학회지 12권 2호 논문에서 지질학회지가 창간된 1964년과 연세대학교에 지질학과가 설치된 1965년을 한국 지질학계의 전환기라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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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1980년대는 지질학회의 성숙기로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1:5만 지질도폭 조사에 여러 지질학자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1980년대를 시작으로 대한지질학회를 모체로 하는 학회들이 지질학의 각 분야들로 독립해 나갔는데, 한국고생물학회(1984년 6월), 한국제4기학회(1985년 3월)가 있다. 1987년에는 대한지질학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영문판 《Geology of Korea》(한국의 지질)을 발간하였다. 국제지질과학연합(IUGS)의 학술총회 IGC에도 꾸준히 참석했는데, 1980년 7월 프랑스 파리(제26차), 1984년 월 소련 모스크바(제27차), 1988년 7월 미국 워싱턴 D.C.(제28차)에 이상만, 김봉균, 이대성, 김종수, 김수진 등 여러 회원이 참여했다.[2] 한국의 원로 지질학자이자 대한지질학회 초대 회장인 박동길이 1983년 2월 작고하여, 이정환(李正煥) 당시 대한지질학회장은 1983년 6월 지질학회지 19권 2호에서 박동길을 한국 지질학계의 선구자이자 지질학자들과 광산기술자의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논평하였다.

1980년대의 중요한 연구로, 1982년 1월 경북대학교의 양승영은 경상남도 고성군 덕명리 해안의 경상 누층군 진동층에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이자 세계 최대의 새발자국 화석 산지인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를 발견하여 공룡 발자국 화석을 기재하였다. 이기화(1983, 1985, 1986)는 한국의 지진을 연구했으며, 한국의 역사 지진을 분석하고, 1978년 홍성 지진이 발생한 홍성읍 지역에서 단층을 발견하였으며, 양산 단층의 미소 지진 활동을 처음으로 보고하였다. 박병권과 한상준(1986, 1987)은 조선 누층군 풍촌 석회암층의 암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김인수와 강희철(1989)은 제3기 분지에서 고지자기 연구를 실시하여, 포항 이남 제3기 분지의 지층들이 1600만 년 전 중기 마이오세 이후 시계방향으로 평균 약 55°회전하였고 이러한 회전 운동은 양산 단층의 우수향 주향이동을 일으켰으며 이는 동해의 확장에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1980년대 대한지질학회의 주요 논문 저자는 아래와 같다.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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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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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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