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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유의 작업실

프레데리크 바지유의 그림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바지유의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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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유의 작업실 (Bazille's Studio, 프랑스어: L'atelier de Bazille)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 프레데리크 바지유가 1870년에 제작한 캔버스 유화 작품으로, 일부 에두아르 마네의 기여가 있었다. 이 그림은 콩다민 거리의 작업실(L'Atelier de la rue Condamine)[1]로도 알려져 있으며,[2] 1986년부터 파리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여러가지 그림이 걸려 있는 작업실에 화가 자신과 친구들이 있는 장면으로, 1870년 파리의 예술적, 사회적 상황을 묘사한다.[3]

간략 정보 바지유의 작업실, 영어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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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

바지유는 1868년 1월부터 1870년 5월까지 파리 북부 바티뇰 지역의 콩다민 거리 작업실을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함께 사용했다. 바지유는 이 그림 한 가운데 있는 이젤에 올려진 그림 옆에서 팔레트를 들고 있다. 이젤 그림 바로 앞의 붉은 수염과 모자를 쓴 인물은 마네로서, 바지유는 편지에서 마네가 이 작품에 자신의 얼굴을 직접 그려넣었다고 언급했다. 오른쪽에 모네의 정물화 아래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인물은 바지유의 친구인 에드몽 메트르이다. 미술사학자들은 남아 있는 세 인물에 대한 식별에 의견이 분분하다.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에밀 졸라, 자카리 아스트뤽 등이 모두 가능성 있는 인물로 지목되었다. 다이앤 핏먼의 의견에 따르면, 계단 근처에 있는 인물은 르누아르와 모네이고, 마네 뒤에 있는 인물은 아스트뤽이라고 한다.[4](p. 165) 마네 뒤에 있는 인물은 모네이고, 계단 위에 있는 인물은 에밀 졸라, 계단 아래에 있는 인물은 르누아르라는 주장도 있다.[2]

이젤 위에 놓인 그림은 바지유의 마을 풍경으로 확인되었다. 소파 위에 있는 그림은 미완성 버전의 라 토일레트 (몽펠리에, 파브르 박물관)이며, 왼쪽 위는 <그물 든 어부> (취리히, 라우 재단), 창문 아래(이젤 뒤)에 있는 작품은 <점쟁이>이다. 오른쪽 벽 위쪽의 <메리크의 테라스> (오하이오, 신시내티 미술관)와 창문 옆의 작은 <에그모르트 서쪽 성벽>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도 확인되었다.[5] 창문 오른쪽 상단에 있는 큰 그림은 르누아르의 <두 인물이 있는 풍경>인데, 현재는 왼쪽 아래 절반만 남아 있다 (새를 든 여인 참조).[6] 메르트 머리 위에 있는 그림은 모네의 작은 정물화 <과일>이다.[5][4](p. 165)

벽에 걸린 그림들은 모두 한때 살롱에서 거부당한 작품들이었다. 바지유는 이 작품들을 여기에 전시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7] 바지유는 또한 진행 중인 작업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작업의 진행도 드러내었다.[4](p.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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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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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유의 작업실 또는 콩다민 거리의 작업실 X-선 사진. © C2RMF/Bruno Mottin

프랑스 박물관 연구 및 복원 센터 (C2RMF), 워싱턴 국립 미술관 및 기타 미국 박물관들은 X-선 사진을 통해 바지유의 그림들을 조사했다.[8] 그 결과 바지유의 그림들 아래에 숨겨진 구성이 발견되었다. 바지유의 작업실에서는 표면 아래에 르누아르의 <사냥꾼 다이아나>와 유사한 스케치가 드러났다. 바지유가 르누아르와 작업실을 공유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바지유가 르누아르의 작품을 모델로 삼아 연습하고 연구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4](pp. 158–159)

해석

바지유는 20세기 후반 이전, 자신이 후원하고 친구였던 인상파 화가들에 비해 중요성이 낮은 예술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87년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면서 바지유는 "화가들 사이에서 겸손하지만 확실한 위치"를 얻게 되었다.[3]

바지유와 그의 동료 예술가들

이 작품은 팡탱라투르바티뇰의 작업실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두 그림 모두 바티뇰 그룹의 예술가들이 작업실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4](p. 165)

바지유의 작업실은 바지유 자신의 자화상이자 동료 예술가들의 단체 초상화이다. 그들은 모두 작업실에 흩어져 있으며, 평소의 태도나 좋아하는 직업을 보여주고 있다.[9]

바지유와 그의 작업실

자신의 독립 작업실을 갖는 것은 예술가로서 바지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근본적이었다. 바지유는 1862년에 자신의 작업실에서 예술을 제작하는 것에 대한 열정에 대해 부모님께 여러번 편지를 썼다. 바지유는 예술적 동료들이 변하고 성장함에 따라 작업실을 여러 번 옮겼다.[2](p. 33)

바지유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한 바지유의 그림으로는 퓌르스텐베르크 거리의 작업실 (1865년)과 <비스콩티 거리의 작업실> (1867년) 등 여러 작품이 있다. 바지유의 작업실은 이 그림들과는 달리, 예술가들과 자신의 그림들로 가득 찬 작업실을 묘사한다. 작업실 안의 그림들은 대부분 바지유 자신이 그린 것이다. 많은 인물들이 바지유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모습이다.[10]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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