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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뇰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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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뇰 그룹(Le groupe des Batignolles)은 19세기 말 에두아르 마네를 중심으로 모였던 젊은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그룹이다. 이 그룹은 1869년에서 1875년 사이에 회원들이 만났던 바티뇰 지구를 참조하여 그 이름이 지어졌다. 바티뇰 그룹의 많은 예술가들은 나중에 인상주의 운동으로 유명해졌다.[1]

배경
에두아르 마네 (1832–1883)는 바티뇰 대로에 살았고 기요 거리(현재 메데리크 거리로 재명명됨)에 자신의 작업실이 있었다. 그는 1861년 살롱에서 《스페인 가수》 (1860)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작가 샤를 보들레르 (1821–1867)와 저널리스트이자 문학 평론가 테오필 고티에 (1811–1872)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이 마네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마네는 자연스럽게 바티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아방가르드 운동의 리더가 되었다.
바티뇰 그룹의 화가중에는 아카데미 예술가 샤를 글레르 (1806–1874)의 작업실 출신이 많았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9), 알프레드 시슬레 (1839–1899), 프레데리크 바지유 (1841–1870)가 1862년에 글레르에게서 미술을 배웠으며, 클로드 모네는 1863년에 수업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친구가 되었지만, 모네는 이 작업실이 자신의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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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르부아
마네를 중심으로한 바티뇰 그룹이 형성되면서, 이웃 카페, 특히 카페 게르부아에서 정기적으로 만났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클리시 가 11번지에 기념 명판이 있다).[2]

이 모임에 가장 자주 참석한 사람들은 마네 자신과 르누아르, 시슬레, 바지유였다. 때때로 카미유 피사로와 에드가 드가와 같은 다른 화가들, 후원자이자 비평가인 에드몽 매트르, 작가 에밀 졸라 그리고 사진작가 나다르도 합류했다. 그들의 대화와 토론은 살롱 드 파리의 연례 전시회를 통제했던 보수적인 예술 아카데미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와 풍부한 이론 교환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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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나폴레옹 3세가 1870년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한 후, 바티뇰 그룹의 많은 회원들이 입대했다. 폴 세잔은 마르세유 서쪽 프랑스 남부 마을인 레스타크로 도피하여 징집을 피했다. 그곳에서 세잔은 바티뇰 그룹에서 배운 새로운 기술을 연습하기 시작했으며, 작은 붓 터치와 더 밝은 팔레트를 사용했다.
한편, 모네, 시슬레, 피사로는 각자 프랑스를 떠나 영국 런던으로 갔다. 피사로에 따르면, 그는 런던에서 우연히 모네를 만나, 함께 런던 풍경을 작업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모네는 공원에서 작업했고, 나는 안개, 눈, 봄의 효과를 연구했다."[1] 또한 런던에서 모네와 피사로는 프랑스 미술상 폴 뒤랑뤼엘을 처음 만나 관계를 맺었는데, 그는 나중에 1872년 그들의 작품을 대량 구매하면서 인상주의자들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드가는 국가방위군에 복무하느라 거의 작업을 하지 못했다.[3]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11월 본라롤랑드 전투에서 28세의 나이로 전사했다.[1]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의 익명 협회
이 협회는 1873년 12월 27일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피사로, 드가, 피에르 프린스가 서명한 정관을 통해 공식 설립되었다. 모네는 1874년 1월 27일 라 크로니크 데 아르 3호에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의 익명 협회"(Société anonyme des artistes peintres, sculpteurs et graveurs)의 설립을 발표하고 독립적으로 작품을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첫 전시회
그룹의 첫 전시회는 1874년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카퓌신 대로 35번지에 있는 나다르의 옛 작업실에서 열렸다.[4] 모네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인상, 해돋이》는 인상주의자들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모네의 또 다른 그림인 《카퓌신 대로 (모네)》는 이 시기에 그려졌다.
전시회는 잘 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비웃고 조롱했다.[5]
두 번째 전시회
1875년에 열린 두 번째 전시회는 군중의 폭력에 부딪혔고 경찰이 출동해야 했다. 팔린 그림들은 낮은 가격에 팔렸고, 많은 예술가들은 생존을 위해 대출을 구걸해야 했다.[5]
유산
바티뇰 그룹의 예술가들 중 많은 이들이 나중에 인상주의 운동의 위대한 거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그룹은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앙리 팡탱라투르의 1870년 작품 《바티뇰의 스튜디오》에 의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6]
멤버
- 핵심 9명[1]
- 클로드 모네, 핵심
- 오귀스트 르누아르, 핵심
- 알프레드 시슬레, 핵심
- 프레데리크 바지유, 핵심
- 카미유 피사로
- 폴 세잔
- 베르트 모리조, 핵심 그룹 내 유일한 여성
- 에두아르 마네, 지적 리더
- 에드가 드가
- 보조 역할[1]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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