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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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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요리(韓國料理) 는 한국인이 한국 문화의 전통 속에서 사용한 식재료와 조리법으로 만들어진 요리이다.[1]:6-10 흔히 한식(韓食)이라 부르며[2] 한국 음식(韓國飮食)[3]이라 하기도 한다. 남북분단이후 대한민국은 한반도, 한민족, 한복과 같이 한국을 바탕에 둔 명칭을 사용하는데 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반도, 조선민족, 조선옷과 같이 조선에 바탕을 둔 명칭을 사용하며 요리 역시 조선 요리(朝鮮料理)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4] 분단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면 현대의 한국 요리는 대한민국 요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요리로 나눌 수 있다.
이미 한국의 구석기 시대부터 불을 이용한 요리가 시작되었으므로 한국 요리의 역사 역시 선사시대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1]:9 오늘날 한식이 보이는 특징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다양한 문화의 유입과 이를 수용하고 융합한 발전이 지속된 결과이다.[5] 특히 한국의 음식은 다양한 맛과 색의 조화를 중시하며 융합을 이루어왔다.[6]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전통적인 한국 요리에 현대적 요소를 융합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고[7] 근대 이후 외국에서 도입된 요리마저 한국적인 것으로 토착화 하여 한식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양념치킨은 미국의 프라이드치킨에서 출발하여 한국식 양념과 융합되면서 이제 세계적으로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으로 인식된다.[8] 한국인 스스로는 보다 전통적 조리법을 한식의 중요 요소로 파악하지만[9] 외국의 경우엔 짜장면마저 한국의 요리로 파악할 만큼[10] 전통과 현대를 가리지 않고 한국적 특성이 담긴 음식을 한국 요리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요리는 주식과 부식의 구분이 뚜렷한 편이다. 주식은 밥으로 대표되는 곡물을 재료로 한 음식이고, 반찬, 양념, 고명, 음료 등은 주식을 먹으며 곁들이는 부식에 해당한다.[11] 밥은 간이 된 반찬 없이 먹기 힘들고 국과 함께 먹어야 넘기기 쉽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래 전부터 밥과 국, 그리고 반찬으로 구성된 상차림이 일반화 되었다. 19세기 조선 시대의 요리책인 《시의전서》에는 조선 후기의 양반집에서 손님을 맞아 대접하기 위한 상차림을 칠첩반상, 구첩반상과 같이 규모를 달리하며 기록해 두었다.[12] 이런 상차림은 일상적인 식사가 아니라 손님 맞이를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일상에서도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이 상차림의 기본이 되었다. 조선 시기 가장 지위가 높은 조선 국왕의 수라상도 다양한 반찬을 곁들였으나 기본은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이었다.[13]
한국 요리는 한 번에 모든 음식을 한 상에 내놓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용하여 먹었다. 특히 한국의 숟가락은 주변의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밥과 국을 함께 먹기 위한 용도로 특화되었다. 금속제 젓가락을 즐겨 쓰는 것도 한국만의 특징이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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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요약
관점

한국 요리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기르고 거둔 식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한국의 농업, 문화 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곡물은 조로 추정되고[15] 벼 역시 선사 시대부터 재배되었으나 일반적인 곡물로 자리잡은 것은 삼국시대인 6세기 이후이다.[16] 벼를 재배하여 쌀을 수확하게 된 이후 한국 요리의 식단은 밥이 중심이 되었다.
한국 요리의 상차림은 일상적으로 먹는 집밥에서 부터 손님 맞이, 의례, 제사 등의 다양한 상차림 까지 모두 밥, 국, 반찬을 중심으로 차려진다.[17] 밥은 쌀, 보리, 기장, 조와 같은 곡물을 주된 재료로 삼아 익힌 것이다.[18] 한국 요리에서 밥은 달리 간을 하지 않아 싱겁기 때문에 자연스레 반찬을 곁들이게 된다. 이렇게 밥과 반찬을 함께 내는 상차림을 반상이라 한다.[19] 반상은 반찬의 가짓수에 따라 삼첩, 오첩, 칠첩, 구첩 등으로 구분한다.[20]또한 밥은 찰기가 있어 그냥 삼키기 거북하기 때문에 국과 함께 먹는다.[21]
여러 사람들이 한국 음식의 특징으로 조화를 꼽는다.[22]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등이 골고루 들어 있어 맛의 조화를 이루고 색상역시 노란색, 붉은색, 녹색 등이 균형을 맞춘다.[23] 일부에서는 이러한 맛과 색의 조화를 건강과 연결하기도 하는데 이는 고려시기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약식동원 사상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동의보감》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였다.[24] 음식을 통해 원기를 보충하고 건강을 보살피려는 이러한 생각은 각종 보양식이나 약선의 발달을 가져왔다.[25] 요즘에도 음식점에 《동의보감》에 서술된 식재료의 효능을 알리는 글이 내걸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음식의 효능은 분명한 한계가 있고 약은 음식이 될 수 없으므로 이를 깊이 믿는 것은 위험하다.[26]
세계 어느 문화의 요리이건 굽고, 끓이고, 찌고, 절이고, 발효시키는 것과 같은 여러 조리법을 이용하여 독특한 요리를 만들기 마련이다. 한국 요리 역시 여러 구이, 국과 찌개, 조림, 장아찌, 각종 김치 등을 발달시켜왔다. 한국 요리는 특히 간장, 된장, 고추장과 같은 여러 장류와 김치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발효하여 먹는 음식이 발달하였다.[27]
한국 요리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한 식재료의 활용이다. 파래, 김, 미역, 다시마와 같은 해조류에서 부터 고사리, 고들빼기와 같은 각종 나물까지 산과 바다의 식재료를 고루 이용한다. 신선로와 같은 요리는 이러한 여러 재료를 함께 조리하는 음식이다.[28] 한국은 음식에 대한 터부가 거의 없어 다른 문화에서 들여 온 식재료를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다. 고려 시대까지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기피하였으나 원나라 간섭기에 들어 각종 고기 요리를 받아들였고 이후 조선 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고기 음식을 즐겼다.[29] 조선 후기에 들어 고구마, 감자와 같은 것은 구황식물로 받아들였고 고추 역시 새로운 향신료로 받아들였다.[30] 이렇게 새롭게 편입된 식재료는 기존의 조리법에 따라 감자전, 고구마 줄기 나물, 고추장과 같은 음식들이 되었다. 부대찌개 역시 소세지, 스팸과 같은 외래 식재료를 찌개라는 전통 조리법으로 만든 요리이다.[31]
지역별 특징

조선 시대 이레 한국의 지방은 흔히 팔도로 구분되며 각 지방마다 특색있는 요리가 발달하였다. 각 지방의 향토 음식은 문화적, 지리적 경계에 따라 기전지방(서울 경기도), 관동지방(강원도 동부), 영서지방(강원도 서부), 호서지방(충청도), 호남지방(전라도), 영남지방(경상도), 제주도, 해서지방(황해도), 관서지방(평안도), 관북지방(황해도)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32] 대체로 한반도 북부는 국, 반찬, 김치 등을 맵지도 짜지도 않게 만드는 반면[33]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은 맵고 짠편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간이 세지는 것은 온화한 기후 때문에 음식이 쉽게 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34]
서울은 궁중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양반 관료는 과거를 치르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사는 경우가 많았지만 각종 하급 관료와 상업에 종사하였던 중인 층은 대대로 서울에 눌러살던 토박이었다. 따라서 서울 음식의 전통은 중인층이 주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울 음식은 궁중 음식을 본따 같은 것이라도 고명을 올리고 색상의 조화를 중시하였다. 한편 경기 음식은 서울에 비해 소박하였으나 슴슴한 맛과 정갈한 모양을 특징으로 하였다.[35]:87-91
충청도는 서해안의 풍부한 어패류를 이용한 젓갈을 발달시켰고[36] 전라도는 풍부한 곡식과 해산물, 산채 등으로 다른 지방에 비해 재료가 많고 가지수도 많아 유별나게 사치스러운 편이다.[34] 강원도에서 대관령의 서쪽을 흔히 영서지방이라하고[37] 동쪽을 관동지방이라 한다.[38] 해안지방인 관동지역에서는 예로부터 각종 해산물과 건어물을 즐겨 먹은 반면 산악이 많은 영서지방에서는 메밀로 만든 막국수, 만두, 옹심이와 같이 밭작물을 재로로 하는 음식을 즐겼다.[39] 제주도는 겨울이 따듯해 따로 김장을 담그지 않거나 담그더라도 그 양이 적다. 김치는 맵고 짜게 담근다. 사방이 섬이어서 풍부한 해산물을 식재료로 사용한다.[34]
평안도와 함경도는 간이 세지 않고 슴슴한 요리를 즐긴다. 일찍부터 밀가루 등을 이용한 가루음식이 발달하여 평양온반, 냉면, 만두 등이 유명하다. 한국전쟁 이후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낸 음식점들이 대를 이어 장사를 하고 있기도 하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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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요약
관점
반상

한국 요리에서 일상적으로 매일 먹는 것은 밥과 국, 반찬으로 구성된 반상이었다.[19] 근대 이전에는 아침과 저녁 두끼를 먹는 것이 기본이었고 농사를 짓거나 일하는 사람들은 낮에 새참을 먹었다.[41] 점심이란 말은 조선 태종때에도 보이지만 오늘날과 달리 간단한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먹는 일은 근대 이후 공장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늘어나며 일상화되었고 "하루 세끼"라는 인식이 일반화 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다.[42]
반상은 반찬의 가지 수에 따라 삼첩반상, 오첩반상, 칠첩반상, 구첩반상과 같이 부른다.[20] 일상적으로 먹는 식사는 국과 밥, 그리고 세 가지의 반찬이 오르는 삼첩반상이 일반적이었고 그 보다 반찬이 많은 것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용도였다.[43] 19세기 만들어진 조선 시대 요리서인 《시의전서》에는 밥과 국, 반찬을 놓는 위치를 표시한 상차림 도식이 실려있다.[43] 이러한 상차림은 먹는 사람의 편의와 음식의 조화를 고려하였다. 국물이 있는 것은 앞에 놓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겸상을 차릴 때에는 손윗사람 편에 고기와 찌개 등을 놓았다.[44] "첩"이란 말은 뚜껑이 달린 반찬 그릇인 쟁첩에서 온 것이다. 오첩반상은 이러한 쟁첩이 다섯 개 오른 상차림이란 뜻이 된다. 밥과 국, 간장이나 고추장 등의 장류는 쟁첩에 담기지 않으므로 오첩반상의 경우 밥, 국, 찌개, 김치, 장류를 빼고 쟁첩에 오른 반찬이 다섯 개이다. 쟁첩에 올리는 반찬으로는 생채, 숙채, 구이, 전, 마른 반찬이나 젓갈 등이었다.[44]
오늘날 한정식은 전통적인 반상의 상차림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반찬의 가짓수를 훨씬 더 많이 놓아 호화스럽게 차리는 경우가 많다.[45] 한편 간단한 상차림을 파는 경우엔 "백반집"이라 부르는데 코로나19이후 점포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46]
밥

밥은 쌀, 보리, 콩, 수수, 조 등의 곡물을 익혀 만든 요리이다. 특히 쌀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주식으로 쓰인다.[47] 한국의 밥은 가마솥과 같이 무거운 뚜껑을 가진 솥에 쌀과 물을 넣고 익혀 만들었다. 무거운 뚜껑은 끓어오른 수증기를 솥 내부에 가두어 압력을 높이는 효과를 보이고 밥이 더욱 찰지게 한다. 요즘에는 이러한 원리를 활용한 압력밥솥을 사용하고 있다.[48]
쌀은 식감이 부드러워 다른 곡류보다 밥의 재료로 선호되었다. 이때문에 한국 농업의 역사는 벼농사 확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의 면적은 전근대 시기부터 계속하여 증가하여 왔다. 강화도의 경우 이미 고려 시대부터 간척을 통해 논을 늘렸다.[49] 한국의 밥이 주로 쌀로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모내기가 도입되면서 쌀의 생산량이 늘었고 밭을 논으로 전환하면서 전체 경지 면적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커졌다.[50] 흰쌀밥이 대중화 된 이후에도 논농사가 힘든 지역에서 쌀은 귀한 식재료였다. 산지가 더 많고 평야가 적어 벼농사에 불리한 환경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흰 쌀밥에 고깃국"은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선전 구호로 쓰였다.[51] 대한민국의 경우도 강원도와 같은 산간 지역에서는 감자와 같은 작물이 주식을 대신하기도 하였다.[52]
한국의 쌀 생산은 현대에 들어 농지 정리와 비료 사용으로 크게 늘어 1988년 680만톤으로 정점을 찍었다.[53] 이후 인구의 감소, 식재료의 다양화 등으로 쌀 소비량은 계속 줄어드는 추세이다.[54] 한편 도시 개발 등으로 인한 농지의 전용, 소비량 감소에 따른 작물 전환 등으로 생산량 역시 줄어들어 2024년 358만 5천톤을 기록하였다.[55] 그러나 집에서 직접 밥을 짓기보다는 즉석밥을 소비하는 경우는 크게 늘어 즉석밥 시장은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56]
일반적으로 밥이라고 하면 백미만을 이용한 흰쌀밥을 말한다. 보리로 만든 밥은 보리밥, 콩을 섞은 것은 콩밥이라 하고, 쌀이라도 현미를 사용하면 현미밥이라고 따고 구분하고 있다. 정월대보름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오곡밥을 지어 먹는다.[57]
죽은 쌀을 묽게 끓여 익힌 요리이다. 소화가 힘든 환자나 아이, 노인 등을 위해 지어지지만 여행 중에 별다른 반찬 없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도 쓰였다.[58]
한국 문화에서 밥은 곧 식사를 대표하는 말이자 그 보다 넓은 의미가 되기도 한다. 때때로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은 그저 인사로 쓰이고[59]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형사가 피의자에게 건넨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은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60]
국

국은 채소, 생선, 고기 등을 넣고 물을 많이 부어 끓인 음식이다. 식재료를 삶아 끓이는 조리법은 구석기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고 신석기 시대에 토기를 사용하면서 일반화되었으니 국은 밥보다 오히려 오래된 조리법이다.[61] 그러나 밥이 주식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국은 밥과 함께 먹는 부식이 되었다. 갈비탕, 설렁탕, 삼계탕, 감자탕과 같이 특별한 재료를 사용한 국은 탕(湯)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62]
반찬
밥은 별다른 간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반찬과 함께 먹는다. 신선한 채소를 사용한 생채, 각종 나물부터 조림, 구이, 식해에 이르기 까지 밥과 함께 먹는 음식을 모두 반찬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의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에는 찜, 채, 누르미, 침채, 지히, 회, 편, 젓갈, 적, 선, 전, 볶음, 구이 등의 요리가 등장한다.[63]
밑반찬은 건어물이나 견과류 등을 이용하여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반찬이다. 밑반찬이라는 말은 1960년대 이후에 쓰이기 시작하였다.[64] 반찬 역시 집에서 직접 만들기 보다 반찬가게, 마트 등에서 사먹는 추세이다. 물가가 오르면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기 보다 반찬만 구매하여 집에서 먹는 경우가 는다.[65]
찌개
찌개는 두부, 고기, 채소, 어패류 등을 넣고 국물을 자작하게 끓여 만드는 요리이다.[66] 찌개가 국과는 다른 요리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19세기 요리책 《시의전서》에서는 조치라고 불렀다.[67] 찌개는 국보다 다양한 재료를 넣고 자작하게 끓여 보다 짜게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62]
의례 음식

흔히 관혼상제로 불리던 한국의 전통적인 의례로는 조상을 기리는 제사, 차례와 함께 일생을 살아가며 맞이하는 돐, 결혼, 회갑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68] 한국의 전통 의례는 조촐히 가족들끼리 기념하는 것도 있었지만 이웃을 불러 모아 성대하게 치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례에는 평소 요리와는 다른 여러 의례용 음식들이 놓였다.[69]:6-20 특히 떡은 이러한 의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요리이다.[70] 이 외에도 한과, 각종 구이와 같이 평소 맛보기 힘든 음식들이 올랐다.
미역은 출산과 생일 등에 주로 오른 식재료이다. 아이를 점지한다고 여겨진 삼신을 모시는 상에는 흰쌀밥과 미역국이 올랐고[71] 출산을 마친 산모에게도 미역국에 흰쌀밥을 말아 국밥을 먹게 하였다.[72] 미역을 살 형편이 못되면 아욱을 대신하기도 하였다.[72] 출산후 첫국밥에는 산모와 아이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73] 미역이 출산과 연결되면서 생일상에도 미역국이 오르게 되었다.[74] 미역은 백일과 돌잔치에도 오른다.[69]:9-10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에 금줄을 치고 사람들의 출입을 삼가게 하였다. 면역이 취약한 신생아의 감염을 막기 위한 경험적인 조치였다. 대개 삼칠일(21일) 동안 금줄을 걸었다가 거둔다.[75] 금줄을 거두는 삼칠일에 비로소 집안 어르신을 모시고 아이를 보게 하며 잔치를 열었다. 삼칠일 잔치상인 삼칠상에는 흰밥과 미역국, 백설기, 볶은 나물 등을 올렸다.[76]
백일에도 흰쌀과 미역국, 백설기 등으로 상을 차려 축하하였고, 돐에는 수수와 팥으로 붉은 떡을 만들어 액운을 쫓고자 하였다.[69]:9 돌잔치 상은 흰밥, 미역국과 함께 백설기, 푸른색 나물, 붉은 팥떡, 오색 송편 등으로 차리고 실타래, 천자문, 화살 등을 올려 돌잡이를 한다. 아이가 실을 잡으면 오래 살고, 천자문을 잡으면 학문을 잘할 것이라고 여겼다. 돌잔치에 온 손님에게는 흰밥과 미역국, 나물, 구이, 자반, 김치, 찌개 등을 차려 대접하였다.[77]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이 되자 양반이 아닌 중인이나 평민 집안에서도 아이를 서당에 보내는 것이 흔하게 되었다.[78] 서당을 다니는 아이가 책 한권을 다 배우면 책례를 하였다. 책례상에는 국수장국, 송편, 경단 등을 내었는데, 특히 송편처럼 속이 꽉찬 사람이 되라는 뜻이 담겨있었다.[69]:59
15세가 되면 남자는 관례를 여자는 계례를 하였다. 관례는 상투를 틀고 갓을 써 어른임을 나타내는 것이고[79] 계례에서는 비녀를 꽂았다.[80] 양반 집안에서는 관례와 계례를 치르면 부모도 이전에 "해라"고 하던 말투를 "하게"로 바꾸어 어른으로서 존중하였다.[69]:63-64 어른으로 인정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이었다. 관례상에는 술과 안주를 놓았다.[77]
결혼은 양가 친척과 이웃의 경사였다. 조선 시기 혼례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혼례식을 치르고 얼마간 머무르다 신부를 시댁으로 대려가 다시 잔치를 열었다.[81] 신랑이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는 납폐 때에는 봉채떡을 함께 보냈고[82] 신부집에서 치르는 혼례 의식인 대례에는 콩, 팥, 대추와 같이 다산을 상징하는 것들과 함께 용 모양을 빚은 용떡과 달 모양을 본뜬 달떡이 올랐다.[69]:74-75 결혼식의 절정은 마당에 초례상을 차리고 부부가 술을 나누어 마신뒤 서로에게 절을 하는 초례였다. 초례상에는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놓아 금슬좋은 결혼을 기원하였고 대추와 밤, 산자(饊子), 떡과 국수를 각각 한 그릇씩 올렸다.[83]
만으로 60세가되는 회갑을 맞으면 회갑연을 열고 크게 잔치를 벌였다. 회갑연 상차림엔 갖은 떡과 과자 등을 크게 쌓아 올렸다. 이렇게 여럿을 괴어 쌓아 올리는 음식에는 기름에 튀긴 다과인 유밀과, 깨와 같은 것을 재료로 한 강정, 송화가루 등을 입힌 다식, 설탕을 졸여 사탕과 같이 만든 당속, 사과와 배 같은 과일, 연근 도라지 등을 지져 만든 전류 등이 있다.[69]:84-92
한국의 장례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길고 복잡한 예식을 갖추게 되었다.[84] 망자가 사망한 뒤 초상을 치르고 묘지에 안장될 때까지 진행되는 의례에서 음식은 중요한 상징이었다.[69]:102-103 설전(設奠)은 망자에게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내는 상차림이다. 밥, 국, 포와 함께 과일 등을 올렸다.[85] 예전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대문 앞에 저승사자를 위한 사잣밥을 차리기도 하였다. 사잣밥에는 밥 세그릇과 반찬, 그리고 짚신 세 켤레를 놓았다.[69]:102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조문객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도 의례의 하나였다. 주로 육개장이나 생태장국을 내었다.[69]:105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기일을 맞으면 제사를 지낸다. 제사상 역시 밥과 국, 반찬을 기본으로 하는 반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떡, 탕, 전, 과일 등을 함께 차린다. 제사상차림은 일반적인 상차림과 달리 밥을 오른편에 국을 왼편에 둔다.[86]
다과와 음료

다식은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먹는 과자류이다. 여러 의례에서도 빠질 수 없는 음식이었다. 이색의 《목은집》에 팔관회에 먹은 다식이 언급되고 있어 고려 시대에 이미 의례 음식으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87] 다식은 송화가루, 녹말, 깨 등을 조청에 함께 버무린 뒤 다식판으로 찍어내어 만든다.[88] 다식 외에도 약과, 약밥, 정과 등이 후식으로 쓰였고[89] 차나 수정과 등의 음료를 곁들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차 문화는 삼국시대부터 자리잡았고 불교의 융성과 함께 발달하였다.[90] 한국의 녹차는 설록차와 같이 덖거나 작설차처럼 볶는 등 여러 방법으로 만들어진다.[91] 대추차나 오미자차와 같이 녹차가 아닌 다른 재료를 쓴 차들도 애용하였다.
《시의전서》나 《음식디미방》과 같은 옛 요리책은 술도 음료의 하나로 취급하여 만드는 법을 수록하였다. 한국의 전통주에는 막걸리, 청주, 소주와 같은 것이 있다.[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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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이 조사한 《2024년 한식실태조사보고서》는 한식진흥법이 정의한 한식 산업의 규모를 사업장 50만 4,657개소, 총매출액 152조 9,848억원으로 집계하였다. 여기에는 한식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을 비롯하여 식료품 제조업, 음료업, 음료 제조업 등이 포함된다. 대부분의 음식점은 개인사업자로 조리인원 역시 1-2명으로 영세하다. 요리 레시피 역시 개별적으로 습득하는 경우가 75%에 달하고 업소용 요리법을 구매하는 경우는 19.5% 였다. [93]
한국산업인력공단은 한식조리기능사와 한식조리산업기사를 국가기술자격으로 인증하고 있다. 조리기능사는 별다른 응시 조건 없이 필기와 실기로 평가하며[94] 한식조리산업기사는 관련학과를 졸업하거나 조리기능사 자격 취득 후 1년 이상의 실무 경력이 있으면 응시할 수 있다.[95]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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