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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698년부터 926년까지 존재했던 한국의 군주국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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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국(渤海國), 약칭 발해(渤海)는 698년 대조영이 건국한 국가이다.[3] 발해의 강역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어 연구마다 일치하지 않지만 전성기의 강역은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연해주에 걸쳐 있었고[4]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서경 압록부, 남경 남해부의 발해 오경을 수도로 삼았다.[5] 같은 시기 한반도 남부는 신라의 영토이었기 때문에 한국사에서는 발해와 신라가 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한다.[6]

간략 정보 진국(698년~713년)振國발해국(713년~926년) 渤海國, 수도 ...

발해는 건국 이후 동복아시아의 강자로 성장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렸으나[7]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충돌하여 926년 멸망하였다.[8] 멸망 이후 왕족을 비롯한 일부 유민이 고려로 귀순하였고[9] 일부는 발해를 계승한 후발해, 정안국 등을 세우며 발해 부흥운동을 하였으나 이후 금나라에 흡수 되었다.[10]

발해는 독특한 문화와 함께 한자를 변용한 독자적인 발해 문자를 사용하는 등 뚜렷한 자취를 남겼으나 스스로 남긴 기록은 묘비의 비문과 같은 금석문뿐이고[11] 스스로의 역사를 남기지는 못하여 주변 국가들의 기록을 통해 발해의 역사를 살펴 볼 수 밖에 없다.[12] 이 때문에 정치 경제와 사회 문화의 세부적 내용은 여러 사료에 파편적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취합하여 연구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기 이미 《발해국기》가 집필되었으나 한반도에서는 발해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는 않았다.[13] 고려는 발해 유민을 받아 들인 일로 자신들이 고구려를 이어 삼한을 일통하였다는 명분으로 삼았으나[14] 발해를 한국의 역사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유득공의 《발해고》 이후 본격화 되었다.[15] 발해의 역사는 오늘날 러시아에서 자국 영토 내 고대 문명에 대한 고대사적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으며[16] 중국 역시 동북삼성의 고대사로서 발해를 연구한다.[17]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은 모두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서 파악하고 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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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 영주 지방에서 당의 통제를 받던 대조영은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데리고 만주 지역으로 도망쳤다.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한 대조영은 698년 동모산에서 새 나라인 '진국'(震國, 振國)을 건국했다.[19] 713년 대조영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을 받은 뒤 '발해'(渤海)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20]

'진국'이라는 국호의 의미와 어원에 대해서는 한국 및 해외 여러 학계가 다양한 가설을 내놓고 있다.[21][22][23]

역사

요약
관점

건국

발해국은 건국 후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는데, 당 왕조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거주하는 지역인 목단강(牡丹江) 유역에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고 홀한도독부(忽汗都督府), 또는 "발해도독부(渤海都督府)"를 두었으며, 그 수령을 도독(都督)으로 책봉하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했다. 역사적으로 이를 "발해 왕국(渤海王國)"이라고 칭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말갈(靺鞨)", "말갈국(靺鞨國)" 또는 "발해국(渤海國)"이라고 불렀다. 중국 사서인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발해국에는 다섯 개의 수도, 즉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 그리고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가 있었습니다. 이 중 가장 큰 용천부가 오경(五京)의 으뜸이었으며,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의 형태를 모방하여 건설되었다. 그 유적은 현재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寧安市) 발해진(渤海鎭)에 위치하고 있다. 발해국 3대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시기부터 용천은 두 차례 발해국의 도읍이 되었고, 총 160여 년 동안 수도 역할을 했으며, 당시 중국 동북 지역의 최대 도시이자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및 외교의 중심지였다.

​10세기, 발해국은 거란 요나라 태조(遼太祖) 야율아보기(阿保機)에 의해 멸망했고, 그 옛 땅에는 부용국(附庸國)인 동단국(東丹國)이 세워졌다. 그러나 발해인들은 끊임없이 도망쳤고, 최종적으로는 금나라(金朝)가 흥기한 후 마찬가지로 말갈의 후예인 여진(女真) 통치 집단에 흡수되었다.

천도

서기 755년경(천보(天寶) 말년),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는 당나라의 오경(五京)과 도성 제도를 본떠 발해의 도읍을 "옛나라(舊國)"(현재 길림성 돈화시 오동성(敦化市敖東城))에서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현재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로 옮겼다. 30여 년 후, 다시 도읍을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현재 길림성 혼춘 팔련성(琿春八連城) 유적)로 차례로 옮겼으며, 그 사이에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현재 길림성 화룡 서고성(和龍西古城))를 도읍으로 삼기도 했다.

발해 제5대 성왕(成王) 대화여(大華玙)는 서기 794년에서 795년 사이에 발해의 도읍을 동경 용원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다시 옮겼고, 이후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경 용천부를 수도로 유지했다.

확장

대조영(大祚榮) 시기에는 속말말갈(粟末靺鞨), 백산말갈(白山靺鞨)을 중심으로 하여 백돌(伯咄), 안차골(安車骨) 등 여러 부의 말갈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대무예(大武藝) 시기에는 북진 정책을 시행했으며, 특히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대한 공격이 한때 좌절되기는 했으나 발해 정권은 공고해지고 영토가 확장되었다.

대무예 시기, 발해국은 당나라, 신라, 흑수말갈의 포위를 받고 있었으므로, 당과 발해 간의 전쟁이 발생했다. 대흠무 시기에는 발해국이 마침내 불열말갈(拂涅靺鞨), 철리말갈(鐵利靺鞨), 월희말갈(越喜靺鞨), 우루말갈(虞婁靺鞨)을 내부적으로 병합했다. 직접적인 문자 기록은 없으나, 사학계는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에 기록된 불열, 철리, 월희, 우루, 흑수 등의 말갈 부족이 당 왕조에 조공을 바치는 상황의 변화를 근거로 대체적인 판단을 내렸다.

발전

발해의 2대 국왕이었던 무왕은 당나라와는 다른 독자적인 연호인 "인안"을 사용하였고,[24] 한편 726년 발해에 복종한 다른 말갈과 달리 흑수말갈이 발해에 아무런 통고 없이 당나라에 복종을 자처하면서 흑수말갈과 발해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고, 당나라는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부(黑水)를 설치하여 기미지배를 시작하였다.[25]

732년 거란, 해족, 돌궐과 연합해 당나라를 공격하는 한편, 장문휴를 파견해 산둥반도등주를 공격하였다.[26]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은 당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해당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 문왕 때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도입하고 수도 체제 5경 15부 62주를 완비했다.[20] 이 시기 수많은 발해 학자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당나라에서 관리가 되기도 하고, 당의 문물을 발해로 가져오는 통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27] 문왕은 신라와의 관계도 개선해 발해 남경 남해부, 동경 용원부와 신라 수도 금성을 잇는 무역로인 '신라도'(新羅道)를 개설하였다.[28]

쇠퇴와 중흥

3대 문왕이 사망한 이후 뒤를 이은 대원의는 793년 즉위했으나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의 기록에 따르면 포악한 정치를 펼쳐 즉위한 해에 바로 폐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9][30][31] 대원의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성왕 역시 병으로 794년 세상을 떠났다. 성왕의 뒤를 이어 강왕이 즉위했으나, 당나라는 대원의 폐위 직후부터 강왕 즉위까지의 내분을 보고 당 순종은 강왕을 발해국왕이 아닌 발해군왕으로 책봉했고 이에 따라 강왕은 국왕으로의 책봉을 위해 당나라에 매년 사절단을 파견했다.[32] 그러나 강왕 사망 이후인 805년부터 선왕 즉위 때인 818년까지 발해의 국왕들은 재위 기간이 10년을 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발해의 정치는 상당히 쇠퇴하게 되었다.[33] 학계에서는 793년부터 818년까지 약 25년 동안 발해의 국왕이 6번 바뀐 것에 대해 당시 발해 정부가 상당히 혼란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818년 즉위한 선왕은 발해의 중흥 군주로 평가받는다. 선왕은 발해 북쪽의 말갈 부족들을 정복하고[34][35] 신라와의 전쟁을 통해 대동강 지역에 영토를 확보했다. 선왕 시기 발해가 말갈 전체를 복속했다는 기록이 현존하지만, 발해가 흑수말갈을 완전히 정복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36][37] 또한 요동반도의 점령에 관한 문제도 학자들마다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38] 선왕 이후 9세기 발해의 정치, 경제, 사회적 양상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아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당대 사료인 구당서신당서에서 발해의 문화에 대한 평가 등으로 학자들은 9세기 후반까지 발해가 중흥기를 이룩했다고 보고 있다.

멸망

발해국 말기에는 상류층의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했고 왕권 다툼이 끊이지 않아 내부 모순이 계속되었다. 현존하는 고고학 유적에 따르면, 발해국은 대이진(大彝震) 재위 기간에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 당나라 장안성을 모방한 웅장하고 거대한 상경 용천부를 건설했으며, 군대 규모 역시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으로 증가하여 명백히 국력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대이진 후기에 정치적 동요가 심화되었다. 906년 대인선(大諲譔)이 즉위한 후에도 내부 갈등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되어, 발해의 대장 신덕(申德), 예부시랑 대화균(大和鈞), 대균로(大鈞老), 사정 대원균(大元均), 공부경 대복막(大福漠), 좌우위장군 대심리(大審理), 좌수위소장 모두간(冒豆干), 검교개국남 박어(朴漁) 등 국내 중신들이 고려(高麗)로 도망쳤다. 922년경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면서 천지(天池) 주변 500km 이내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화산재가 발해국 동부 지역을 뒤덮어 국내 농업 생태 환경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흑수(黑水), 월희(越喜), 철리(鐵利), 불열(拂捏) 등 부족들은 압제를 견디지 못하고 발해국의 국력이 쇠퇴한 것을 보고 발해국 통치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자,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던 발해국은 본국의 국방을 후량(後梁), 후당(後唐)에 의지하며 거란의 확장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심지어 수도인 상경성조차 제대로 방비하지 못했다. 9세기 말, 야율아보기(阿保機)가 이끄는 야율씨(耶律氏)가 급속히 부상하여 거란에서 칸의 지위를 확립했으며, 남하하여 중원을 차지하려는 거란족은 발해국이라는 후환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여 발해국 방향으로 끊임없이 확장했다. 908년, 거란은 이미 "진동해구(鎮東海口)에 장성(長城)을 축조"하여 세력을 요동 해안까지 확장했으며, 야율아보기는 이듬해 "요동에 행차"했다.

이로써 거란은 원래 발해국이 기미(羈縻)하던 요동반도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919년, 거란은 요양성을 복구하고 한인(漢人)과 발해인을 채워 넣어 발해국 침략의 전진 기지로 삼았으며, 921년에는 사단(徙檀)·순(順) 두 주의 한인을 현재의 요심(遼瀋)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924년, 발해국은 거란의 요주(遼州)를 선제공격하여 그 자사(刺史)를 죽이고 주민을 약탈했으며, 야율아보기는 같은 해 여름 발해를 반격했지만 성과 없이 돌아갔다. 925년 겨울, 야율아보기는 "발해와의 해묵은 원한을 갚지 않고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명분으로 발해를 다시 침공하여 부여부(扶餘府)를 포위하고 동쪽으로 용천부로 진격했다. 발해국의 마지막 군주 대인선은 포위 4일째에 자발적으로 거란에 항복했지만, 거란이 성에 진입할 때 발해 주민들이 갑자기 봉기했다. 야율아보기의 직접 지휘 아래 거란은 용천부를 함락시켰고, 발해국 안변(安邊), 정합(鄭颌), 남해(南海), 정리(定理) 등 여러 부가 차례로 항복하면서 발해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멸망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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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발해 침공

906년 발해의 마지막 군주인 대인선이 즉위했을 때, 발해의 주변 국가들의 상황은 통일 왕조에서 분열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907년 주전충의 반란으로 당나라가 멸망하고 이 건국되면서 중국 대륙은 당나라의 군벌들이 영토를 장악한 오대 십국 시대가 시작되었다.[39] 고비 사막 이북에서는 야율아보기가 권력을 강화하고 거란족을 통일한 뒤 요나라를 건국하고 한인을 수용하여 제국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40] 통일신라 역시 후백제(900)와 후고구려(901)가 건국된 이후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41] 야율아보기는 중국 대륙을 침공하려고 했으나 중국 세력의 배후 세력들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그 중에 발해도 포함되어 있었다.[42] 발해는 거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911년 신라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었다.[43] 또한 대인선은 918년 거란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도모하기도 했다.[44]

한편 야율아보기는 복산부와 속산군을 만들어 군 체제를 개편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대륙의 혼란을 틈타 924년 고비사막에서 친정을 했다. 이 친정을 통해 요나라는 서쪽으로 알타이산맥에서 동쪽으로 랴오허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획득했다.[45] 뒤이어 해족 등 주변 부족들을 토벌한 야율아보기는 925년 발해를 침공했고, 926년 1월 3일 거란은 발해의 요충지였던 부여부를 함락시킨 뒤 9일에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를 포위하였다. 대인선은 1월 12일 항복을 요청했고, 1월 14일 야율아보기가 항복을 받아들이면서 발해는 멸망하였다.[46] 발해가 요나라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빠르게 무너진 것에 대해 학자들은 정치 내분설, 백두산 폭발설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발해 멸망 이후 야율아보기가 거란 수도인 임황부로 돌아가던 중 병사하면서 야율덕광이 황제로 즉위했다. 야율덕광은 옛 발해 땅에 동란국을 세우고 발해인들을 관리로 등용했다.[47] 그러나 많은 발해 유민들은 927년부터 1116년까지 5차례에 걸쳐 고려로 들어갔으며, 이 유민들 중에는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왕실과 지배층부터 박승과 같은 평민 및 피지배 계층까지 그 분포가 다양했다.[41] 특히 발해 멸망 이후인 934년과 938년에도 발해에서 고려로 넘어간 유민들의 수는 10,000명 이상이었다.[41] 고려 태조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우며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한편, 훈요 10조를 통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금수의 나라라고 규정하였다.

동란국이 세워진 이후에도 발해 유민들은 적극적으로 나라를 건국하고자 노력하였다. 발해 멸망 직후 야율배가 동란국왕으로서 발해 옛 영토를 다스렸지만, 이에 맞서 대인선의 동생이 926년 후발해를 건국하였다. 930년 야율배가 동란국왕에서 물러나 후당에 귀의하였고 야율배의 뒤를 이어 그 아들이 동란국왕이 되었으나 936년 요나라는 동란국을 병합했다.[47] 발해 유민의 완전한 병합을 막기 위해 발해 유민들은 동란국 멸망 직후 열만화를 왕으로 추대하고 정안국을 세웠다.[48] 정안국이 980년 멸망한 이후 대연림의 반란으로 수립된 흥료국,[49] 대발해 등 발해 유민들이 세운 나라들이 만주에서 지속적으로 발흥했으나, 1115년 대발해가 금나라에 멸망한 뒤 발해 유민들이 세운 국가들은 등장하지 않는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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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요약
관점

발해는 건국 초기 주변을 정복하며 확장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내부의 제도 정비는 뒤로 밀릴 수 밖에 없었고 문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제도를 정비할 수 있었다.[51] 발해는 중국의 제도를 수용하여 중앙 정치 조직을 구성하였다. 당나라 시기 완성된 삼성육부제는 이후 동아시아 여러 국가 정부 구성의 표준이었고[52] 발해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53] 발해는 행정구역을 15부로 나누었고 이는 다시 62주로 세분되었다.[54]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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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국왕의 계보도

발해는 건국 초기 당나라와 충돌하였기 때문에 이후 교류가 활발해진 뒤로도 여전히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당은 발해의 군주에게 명목상 작위를 주며 당나라의 번국으로 책봉하였으나 발해의 군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내부적으로 황제와 견주는 제도를 유지하였다.[55]

발해는 흑수말갈을 비롯한 주변의 말갈인 집단을 복속시키며 팽창하였고[56]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비롯한 여러 집단을 기반으로 하는 중앙 귀족들과 지방의 실권자인 수령들은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57] 군주의 정치적 목표는 대외적 안정과 왕권의 강화이었다.[58] 발해는 수도를 다섯 번 천도하였고 이 가운데 네 번의 천도는 737년 즉위하여 793년까지 56년간을 재위한 문왕 시기에 이루어졌다. 안사의 난을 비롯한 국제 정세의 변화와 귀족의 견재 등을 고려한 문왕의 천도 정치는 그리 효과를 보지 못하여 강력한 왕권이 마련되지는 않았다.[58] 문왕 사후 즉위한 대원의는 몇 개월만에 폐위되었고 이후 발해는 내분을 겪에 된다. 수 대에 걸친 내분은 발해 국왕의 권위를 크게 손상시켰을 것이다.[59]

내분을 거치는 사이 발해의 국왕은 단명하였거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하였다. 짧게는 1년에서 길어도 4-5년에 불과한 재위 기간을 보이며 국왕이 여러 차례 바뀌는 사이 직계의 혈통은 끊어지고 걸걸중상의 두 아들 중 대조영의 동생이었던 대야발의 증손 대인수가 선왕으로 즉위한다. 선왕은 영토를 확장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발해의 전성기를 열게 된다.[60] 이후 발해는 13대의 대현석 시기까지 융성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된다.[61]

발해의 건국과 융성이 주변 국가간의 갈등에 의한 힘의 공백을 활용한 것이었던 것처럼 발해의 멸망 역시 새롭게 부상하는 거란과의 충돌 때문이었다.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수십년간 거란의 동진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수도인 상경이 함락된 뒤 포로가 되었다.[62]

발해 국왕의 목록은 다음의 표와 같다.[60]

자세한 정보 제위 순서, 이름 ...

중앙통치제도

발해의 중앙통치제도는 당나라에서 비롯된 삼성육부제를 따랐지만[53] 발해의 정치적 현실에 고려하여 당나라의 것과는 다르게 운영되었다.[63] 정당성[64], 중대성[65], 선조성[66]으로 구성된 발해의 삼성은 왕명의 출납과 실행을 담당하는 정당성이 최고 기관으로서 구성되었고 대내상이 관리하였다. 중대성과 선조성은 각각 우사성좌사정이 맡았는데 휘하에 다시 좌6사와 우6사를 두었다.[63]

자세한 정보 구분, 본사 ...

6부의 이름은 유교의 덕목에서 따온 것으로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서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63] 당나라와 달리 과거제를 운영하지는 않았으며 대신 주자감[67] 독서출신과를 두어 인재를 육성하고 등용하였다.[68]

오경

자세한 정보 명칭, 기간 ...

발해는 다섯 곳의 서울인 오경이 있었지만, 모두 동시에 수도로서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차레 천도한 결과이다. 특히 문왕은 56년의 긴 통치기간 동안 네 차례의 천도를 하였다.[58] 발해의 수도들 가운데 상경용천부[69] 중경현덕부[70] 오늘날 위치가 비정되어 있으나 나머지 세 곳은 그저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다.

대조영이 처음 수도로 삼은 곳은 천도가 이루어지면서 옛터전이란 의미의 구국(舊國)으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 위치는 오늘날 여러 곳이 후보지로 추정될 분 정확하지 않다. 후보로 거론되는 곳은 돈화현의 오동성, 모란강 상류의 영승 유적, 돈화시의 성산자촌 등이다.[71]

첫 수도는 당나라를 비롯한 주변의 거란, 말갈 등과 대립하며 나라의 기틀을 잡던 군사적 거점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보다 교통의 요지로 수도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742년 문왕은 중경현덕부로 천도하였다.[70] 이후 문왕은 세번의 천도를 더하여 755년 상경용천부[69] 785년 무렵 동경용원부[72]로 천도하였가 794년 상경용천부로 다시 환도하였다.[58] 서경압록부[73]는 당나라와의 교통로로서 별도의 관리를 위한 지방 거점이다.

각 수도는 지방행정구역이었던 15부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상경용천부는 가장 오랫동안 발해의 수도로서 자리를 잡은 곳이면서 동시에 용천부의 중심지였다.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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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행정구역

발해는 지방행정구역을 15부로 나누었고[54] 이는 다시 62주로 세분되었다.[74]

자세한 정보 부, 주 ...

군사

발해의 군사 제도에 대해서는 《신당서》 발해전에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위, 남우위, 북좌위, 북우위의 10위가 있었다고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75] 대장군 1인, 장군 1인이 있었다고 한다. 각 위의 구체적 역할은 알 수 없지만 궁성의 경비, 수도의 방어 등을 담당하였을 것이고 지방에는 아마도 별도의 군사조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5] 주변의 정복과 전쟁에 동원된 정예병은 승병(勝兵)으로 불렸으며 그 수는 수 만명이었다고 한다. 군사의 최종 관리는 우6사의 지부인 융부와 수부가 담당하였다.[76]

발해의 군사 제도는 9세기 전반 무렵 한 차례 변화가 있었다. 832년 발해를 방문한 당나라 사신 왕종우는 발해에 좌우신책군과 좌우삼군, 120사(司)가 있다고 보고한다.[76]

발해는 건국 초기 당나라와 대립하며 전투를 치렀고,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에 주변을 정복하며 영토를 넓혔다. 732년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하여 벌어진 전쟁은 당나라와 발해뿐만 아니라, 거란, 돌궐, 신라까지 개입하는 국제 전쟁이었다.[77] 733년 있었던 마도산 전투는 당, 신라, 흑수말갈, 실위가 방어하는 가운데 돌궐, 거란과 연합한 발해가 공격하여 크게 승리한 전투이다.[78]

외교

신라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79] 건국 초기에서 무왕에 이르는 시기까지 발해는 당나라와 전쟁을 치렀고 마도산 전투의 사례와 같이 신라는 당을 위해 발해의 배후를 공격하였다.[78] 그러나 신라의 이러한 행동은 당의 요청에 응한 것일 뿐 실제 목적은 당나라로 부터 자신들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 확인이었다. 신라는 발해와의 전쟁 참전을 명분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패수 이남의 땅에 대한 영토 인정을 요구하였다. 실제 전투에서 신라는 날씨 등을 이유로 퇴각을 반복하였다.[80] 발해와 신라는 교류보다는 대립이 더 많았다. 신라 헌덕왕 시기 정변 등으로 교섭을 할 때도 있었으나 오래 가지 않았고 발해가 영토를 크게 확장한 뒤 옛 고구려 땅 회복을 명분으로 남진하자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79]

당나라

발해는 당나라와 싸운 698년의 천문령 전투를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이다.[81] 발해 건국 초기 당나라의 정책은 무력 진압이었으나 쉽지 않자 교섭을 시도하였고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다. 이는 발해를 명목상 당나라의 번국으로 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것이었다.[82]

발해는 당나라에 조공하며 평화를 유지하였으나 인근의 말갈 부족들을 복속시키는 팽창 정책 역시 동시에 추진하였고 흑수말갈에 대한 종주권 경쟁은 결국 발해-당 전쟁으로 이어졌다.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왕은 732년 황해 넘어 오늘날 산동성 지역인 등주를 선제 공격하였다.[83] 이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져 공격측인 발해와 거란, 돌궐 등이 연합하고 방어측인 당이 신라와 실위에게 발해의 배후 공격을 요청하며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77] 733년 발해는 마도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자신의 패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84]

전쟁까지 치르며 충돌하였던 두 나라는 문왕 시기에 이르러 화친 관계로 바뀌었다. 당은 문왕의 격을 높여 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고, 755년 안사의 난으로 위기에 처하자 발해를 주변 안정을 위한 주요 협력 국가로 이용하고자 하였다.[85] 이후 발해와 당나라는 서로 교류를 지속하였고 발해인 가운데 일부는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기도 하였다. 당나라는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61]

말갈

말갈이 정확히 어떤 성격의 집단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후의 사건부터 말갈을 언급하고 있으나 중국의 사료에서 말갈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당나라 시기 역사서인 《북제서》이다.[86] 이때문에 조선시대의 정약용 등은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른 부족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위말갈설(僞靺鞨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87] 말갈의 성격에 대해 한편에서는 이웃한 다른 고대 종족들과 같이 별도의 부족적 성격을 부여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의 입장에서 동북부의 여러 부족 집단을 범칭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한국의 역사 학계는 말갈을 한민족의 계통과는 별개의 부족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최근 오늘날의 민족 계념에서 과거의 집단을 제단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다.[86]

대조영을 비롯한 발해의 건국 집단은 말갈과 깊숙히 관련되어 있으나[71] 동북아시아 북부의 넓은 지역에 거주하며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집단들은 통일된 정치 조직이 없었고[88] 주변의 정세에 따라 돌궐, 당나라, 고구려 등의 국가에 복속하였다.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국가임을 자처하며[89] 말갈에 복속을 요구하였다.

송화강과 목단강, 흑룡강이 만나는 곳을 중심으로 동해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하였던 흑수말갈[90] 당나라와 발해 사이에서 어느 곳을 종주국으로 인정할 것인지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흑수말갈은 722년 처음 당으로 사신을 보낸 이후 여러 차례 조공을 바치며 당나라에 입조하였고, 발해는 이를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726년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흑수말갈의 공격을 명령하였으나, 대문예는 이에 불복하고 당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는 732년 발해가 당의 등주를 선제 공격하여 일어난 발해-당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91]

발해가 당과의 전쟁에서 화친으로 돌아선 이후 말갈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다. 발해 멸망 후 거란은 발해 유민을 발해인과 여진인으로 구분하였고[92] 이를 근거로 여진족이 말갈의 후예라고 보기도 한다.[93]

거란

거란은 5세기 무렵 오늘날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부족이다.[94] 6세기 무렵에는 주변의 국가에 비해 세력이 약하여 고구려, 돌궐, 수나라 등의 침략을 받았다.[95] 발해 건국 이후로도 주변 세력에 대한 외교를 계속하였던 거란은 발해의 우방으로 발해-당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마도산 전투는 발해가 거란의 가돌우를 지원하여 당과 싸운 전투이다.[84]

907년 거란을 통합한 야율아보기요나라를 건국한 뒤 세력 확장을 꾀하면서 발해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후 수십년에 걸친 발해-요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거대한 영역을 자랑하던 발해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패배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만 분분한 채 정확한 원인을 알기 어렵다.[62] 한편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후 당나라마저 무너지자 중앙아시아까지 영토를 크게 넓히며 대제국으로 발전한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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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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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려정비

동북아시아 북부는 고대부터 많은 민족들이 혼재하였던 곳이다. 선비족, 맥족, 말갈족, 여진족 등의 고대 동북아시아인은 복잡한 교류와 국가의 흥망성쇠로 이합집산 하였다.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에는 주변 여러 민족들의 혼합과 함께 중국 고대 국가의 흥망 과정에서 유입된 한족의 영향도 확인할 수 있다.[97] 고구려 멸망 이후 30년 쯤 지나 세워진 발해 역시 여러 민족 집단이 혼재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 이렇게 여러 집단이 모여 구성된 발해는 왕족과 고위 귀족인 국인(國人)과 피지배층을 구분하였다.[51] 건국의 중심이었던 대조영 집단이 요서에서 요동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대조영 집단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건국 집단의 중심에 고구려인말갈인이 있다는 점은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98]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된 발해는 국가 운영을 위해 중앙통치체제와 지방행정을 정비하였다. 중앙통치체제는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여 삼성육부제로 운영하였고[53] 지방 행정구역은 15부제로 구성되었다.[5][99] 기초적인 행정구역은 촌(村)으로 크고 작음에 따라 도독이나 자사를 두었다. 지방의 촌 역시 말갈인과 고구려인이 섞여 살았고 촌장 중에 고구려인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들 가운데 어느 민족이 확고한 우위에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100]

경제와 대외무역

발해의 영토인 만주연해주 일대는 아극 기후[101]냉대 습윤 기후에 속해 있고,[102] 연간 강수량이 500mm에서 1,000mm 사이로 매우 적으며, 여름이 짧고 길고 매우 추운 겨울이 지속된다.[103] 쑹화강무단강, 토문강 유역 사이에 둥베이 평원이 있지만, 이 평원은 주로 흑토가 주성분이다.[104] 이에 따라 발해에서는 벼농사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콩, 조, 보리 등 밭작물이 농업의 근간이었고, 평야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논으로 벼를 재배했다. 구릉 지역에서는 자두와 배 같은 과일 재배가 이루어졌고 가축업도 해 축산물로 돼지, 양, 말 등을 길렀다.[105]

발해의 대외무역은 5개의 교통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05] 5개의 교통로 외에도 담비길이라 하여 발해가 북방 말갈 및 서역, 중앙아시아와 교역하는 무역로가 있었다. 발해 영토가 북방의 추운 지역에 있었기에 실질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대외교역이 필요했다.[105] 주변 국가에 수출한 교역품에는 붕어, 말, 토끼, 자두, 사슴, 돼지, 다시마, 면포, 담비가죽 등이 있었고, 이 중 담비가죽과 다시마, 면포, 명주, 마포 등은 발해의 특산품으로 인기가 높았다.[105] 발해와 신라의 교역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주요 교역로에는 청해진에서 당성포를 거쳐 발해 영토인 서안평으로 들어가는 서해 해로[106]와 금성을 출발해 천정군을 거쳐 발해의 남경 남해부와 동경 용원부로 들어가는 육로가 있었다.[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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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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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용머리 조각

발해의 문화는 지배 계층인 고구려식 문화와 피지배층의 말갈 문화로 구별할 수 있다. 지배 계층의 문화가 고구려 문화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발해 유적의 절터에서 추로토되는 막새기와의 연꽃 무늬, 상경 용천부에서 출토된 발해 석등의 표현 기법과 조각 방식, 그리고 발해의 주요 무덤 양식인 돌방무덤 등을 통해 알 수 있다.[108] 발해의 주요 종교는 불교로, 발해 유적 중 절터가 40곳으로 나타난다. 발해 불교가 융성한 시기는 문왕 때로, 그는 딸 정효공주가 죽은 이후 묘를 만들고 그 앞에 절을 지었다.[108] 불교 외에 기독교 경교가 들어왔다는 흔적이 있지만 이를 보충할 자료는 부족하다.[108]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수용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한 것은 사실이다.[109]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며 중국 대륙은 중앙집권적 성격의 율령제가 국가의 행정 체계로 자리잡게 되었고,[110]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의 확장과 개방적인 문화를 통해 당조 예술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111] 또한 당나라의 정방형 도시인 장안 역시 동아시아 각국 수도의 모델이 되었다. 발해는 문왕 때부터 당나라와 교역하면서 적극적으로 당나라의 문물을 수용했으며, 동시에 이 문화를 자국 체계에 맞게 개편했다. 발해의 수도 중 하나인 상경 용천부는 당 장안성을 모방해 격자식 구획형 도시로 건설했고, 행정 제도 역시 당의 문화를 수용했다.[41]

문자

발해의 언어와 문자에 대한 연구가 부진한 상황인데, 이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온전한 발해 역사의 복원을 위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관심은 진작부터 있었는데, 기와에 새겨진 특이한 문자 때문이다. 최근에는 《발해문자연구(渤海文字硏究)》라는 연구서까지 나왔다.[112]

흑룡강성 닝안시의 상경용천부유지(上京龍泉府遺址), 혼춘시 팔달성(八達城)의 동경용원부유지(東京龍原府遺址) 및 화룡시 서쪽 고성(古城)인 중경현덕부유지(中京顯德府遺址)에서 모두 계속하여 발해의 문자를 적은 있는 기와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기와 상의 문자는 대분이 한자이고 일부 한자와 비슷하면도 한자와 같지 않은 부호(符號)가 있었으니, 이러한 부호가 문자(文字)인지 또는 어떤 문자인지 여부는 사가들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인데, 대량의 고적자료와 문헌자료를 분석한 바에 의하면, 발해인들이 사용했던 문자는 대부분이 정규의 한자이며, 또 적지 않은 옛스럽게 쓰여진 문자와 간화한자(簡化漢字)도 있으며, 또 일부 문자를 독창하였으나 이러한 독창적 문자는 한자(漢字)를 보충한 문자들이었다.

E. V. 샤프꾸노프는 발해인은 적어도 세 종류의 문자를 사용하였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문자는 중국의 한자로, 이에 대해서는 정혜공주의 묘지와 연해주 빠르띠잔스크 구역 니콜라예프카 성터에서 출토된 한자가 새겨진 물고기 모양의 청동부절을 예로 들고 있다. 발해에 보급된 두 번째 문자는 8~9세기에 이웃의 위구르 한국에서 사용되었던 돌궐의 룬 문자로 파악하며, 19세기에 남우수리스크 성터에서 발견된 돌궐의 룬 문자가 새겨져 있는 돌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그 룬 문자에서 수이우빙, 즉 솔빈부라는 발해시대의 부의 명칭을 판독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10~12세기 중국의 〈이백(李白), 신선(神仙)〉이라는 구전문학에 현종이 발해왕으로부터 동물과 새의 발자국을 연상시키는 편지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편지에 열거된 사건과 인물은 문헌 자료의 내용과 전적으로 일 치하고, 따라서 이 작품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돌궐 문자가 실제로 새의 발자국을 연상시킨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발해국서가 바로 돌궐 문자로 쓰였음이 틀림없다는 주장이다. 다음은 제3의 발해 문자라는 것이다. 발해 상경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에 찍혀 있는 한자나 거란 대자(大字)를 연상시키는 기호들이 사실은 신라이두 문자에서 힌트를 얻어 발명된 제3의 발해 문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거란과 여진이 대자라고 불린 문자를 창조했는데, 틀림없이 발해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 V. 샤프꾸노프는 한자는 궁중의 귀족과 관료들이, 어법과 발음이 발해인의 언어에 더 적합하였던 룬 문자와 제3의 발해 문자는 발해 도시 주민들 사이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113]

연변대학 조선어문학연구소의 최의수도 이것을 거란 문자여진 문자와 같은 한자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 문자로 보고 있다.[114]

반면에, 금 희종의 조칙 중, "모든 관원들을 임명하는 고명(誥命)은 여진인에게는 여진자(女眞字)를 사용하고, 거란(契丹)·한인(漢人)들은 각기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를 사용토록 하되, 발해인에게는 한인(漢人)과 똑같이 하라[115]라고 한 것을 근거로 만약 발해가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 종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다고 한다면, 금나라 초기에 여진·거란·한인 등 여러 종족에게는 각기 자기 종족의 문자를 사용토록 할 때에는 발해족에게도 똑같이 사용을 허가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발해는 그 말기까지 문자를 창제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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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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